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6)
가짜 용사 이야기-26화(26/310)
제26화
“기원력 1697년 8월.”
마족의 총공격으로 인페르노 라인은 붕괴, 구공화국의 해상 요충이었던 <아리스타포>와 수도 <테르베노플>도 무너진다.
“인페르노 라인을 사수하여 마족의 진격을 저지하겠다는 동부 전선 사령부의 계획 또한 으깨졌다.”
연합군의 패잔병들은 참패 속에서 쫓기다가 섬멸적인 토벌을 당하는 형국이었다.
소왕국 연합 군대를 전멸시킨 우루크 육군 부대는 퇴로를 우회.
이제 날개를 펼쳐 패잔병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인페르노 라인을 지키기 위해 각국에서 파견되었던 인류의 주력부대는 포위 섬멸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몇몇 요새에서 패잔병을 재편성 후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무의미하고도 잔혹한 결과로 끝났다.
결국 23만 명의 동부 전선 생존자 및 246만 명의 피난민들은 케르크누드 해안에서 우루크 육군 부대에게 포위 공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제, 퇴로가 차단된 연합군을 완전히 깨트리기 위해 타후프 클랜이 나섰다.
“타후프, 속죄라는 뜻으로 하이 타르크의 일원이었다. 우루크 클랜 중에서 가장 야만스럽기로 악명을 떨치는 클랜이기도 했지.”
“교수님,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뼈와 가죽으로 각종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 뼈를 바르고 살가죽을 벗기는 과정을 산 채로 집도했다고 한다.”
“……!”
“모든 의식을 다른 인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했기에, 타후프 클랜에 대한 공포심이 병사들에게 순식간에 퍼져 나갔지. 모든 걸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병사도 많았다.”
‘붉은 여름’의 서장의 끝머리를 장식하는 두 대전 중 하나인 케르크누드 철수 작전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동부 전선 사령부는 서임식을 마친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을 이 전장으로 파견한다. 오늘 다룰 내용은 바로 이 대륙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이다.”
그랬다.
케르크누드 철수 작전.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삼천 명 베기’라는 전설적인 출사표를 던지게 되는 작전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된 것이다.
삼천 명 베기,
케르크누드 철수 작전 (1)
케르크누드 해안.
그곳에 도착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바다의 짠내에 스민 시체 썩는 고린내가.
찢기고 우그러진 사체로 뒤덮인 해안의 풍경도.
부교에 상륙했을 때 꽂히던 수천수만 쌍의 시선, 그 눈에 서린 절망감까지도.
“페이쿼리어다…….”
“페이쿼리어야…….”
“페이쿼리어네…….”
해안 저편, 도시 너머에서는 화산재가 눈보라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심연이 오고 있었다.
해륙(海陸) 전선이 괴멸적인 대패를 입고 수비군이 흩어지자 모든 육로가 차단되었다.
각지에서 도생하던 난민들은 철수 작전을 풍문으로나마 전해 듣고 케르크누드로 몰려들었다.
– 두노스 왕립 해군과 시국 연맹의 연합 해군이 해상 철수를 위해 수많은 배를 증파하고 있네. 시간을 벌어주게.
–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까닭이 뭡니까?
– 바닷길이 나가 놈들에게 극렬한 압박을 받고 있다네.
마법사나 마녀들의 해저 결계 밖으로 벗어난 선박들은 난파선으로 으깨져 해안으로 밀려왔다.
굶주린 난민들은 뻘밭에 처박힌 잔해들을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희망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거나, 아니면 이 세계에서는 이미 죽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저 수많은 이들을 과연 다 태울 배가 있을지, 있다 하여도 그럴 시간이 있을는지…….’
바로 이것이, 케르크누드 해안에 상륙했을 때 목격한 세계의 풍경이었다.
여기서 인류의 병력은 한 줌뿐.
알콘데 왕국의 왕립기병연대와 7개 소왕국의 연합 부대와 구공화국 패잔병들, 그리고 두노스 왕국의 파견병들. 그게 이 도시를 지킬 전부였다.
그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미쳐서,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10만도 채 안 되었다.
“도원수 크라우잔께서 투렌항(港) 부두를 중심으로 3면 방어선을 형성, 청록장미회 마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철수 작전을 진행 중입니다.”
해안가까지 마중을 나온 장교가 우울한 어조로 고했다. 그러자 이슬라가 캬캬 웃었다.
“이제 걱정하지 마라! 슈퍼 페이쿼리어 이슬라가 온 것이다! 크앙크앙크아앙이다!”
“예, 예?”
“별것 아냐. 이슬라는 용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버릇이 있어.”
“저게 용……?”
“그 괘씸한 눈은 뭐냐! 용에게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아닙니다.”
마차를 타고 황폐해진 시가지를 지나 임시 사령부로 쓰이는 시청 청사 건물로 이동했다.
바로 거기에서, 눈꽃처럼 청아한 백발의 여걸이 병사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카이센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입니다.”
어색한 정적을 깨트리고 먼저 인사를 올리자, 죽은 스승의 맹우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샤론.
샤론 알터 타스알포.
반년 전 남부 전선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윤기와 생기를 잃은 머릿결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죽기 전, 카밀라와 마찬가지로. 그 변화는 서글펐다.
샤론이 팔을 뻗어 카이센의 백발을 가볍게 훑어 내리며 회한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듣기는 했지만 정말 페이쿼리어가 됐구나. 카밀라의 아라다만텔까지 계승해서.”
아라다만텔이 붉은 숨결을 토해내자, 성검 타스알포가 푸른 숨결을 뿜어 공명했다.
“울프에게 들었어. 키슌과의 칼타케로 카밀라를 구해냈다며?”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너무 늦고 말았죠.”
“이 세상에 늦는다는 건 없어. 카밀라는 널 자랑스러워했을 거야. 울프만 해도 널 어찌나 자랑스럽게 말하던지.”
“그런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널 자기 입으로 제자로 인정했다며? 그게 그 증거가 아니면 뭐겠니? 카밀라가 솔직하지 못하다는 거 서로 잘 알잖니.”
웃으며 죽은 스승의 최후.
그 미소를 떠올리면 돌아오는 건 오직 해소되지 않고 또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슬픔뿐이었다.
그 슬픔을 견디며 이 화제를 더 이어갈 힘은 없었다.
“오랜만이다. 리아.”
이쪽을 조심스럽게 흘끔거리던 리아 라일리에게 시선을 주자, 딸꾹질 섞인 헛기침이 돌아왔다.
리아는 반년 전보다도 더 아름답게 성숙해 있었다.
전장에서 피어나는 꽃이란 본래 피를 먹으며 더 아름답게 성숙해 나가는 것일까.
핏물과 살점과 땀이 고풍스러운 금발 곱슬머리에 질척하게 엉겨 붙어 있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오랜만? 그, 그래! 오랜만인 것이다!”
“말투가 이상한데. 이슬라처럼.”
“이슬라?”
“크아앙! 바로 이 몸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몸의 이름은 이슬라 알터 가우므리스. 성검 가우므리스의 주인으로 슈퍼 페이쿼리어다!”
이슬라가 가우므리스를 뽐내듯 이리저리 휘둘러 보였다.
황혼이 그 위에서 아롱지며 튕겨 나갔고 풍압이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을 마구 나부끼게 만들었다.
샤론이 그 뿔을 움켜잡으면서 상냥한 듯하면서도 섬뜩한 미소를 짓기 전까지.
“그러면 안 되지, 이슬라. 성검을 그렇게 마구 휘두르면 사람들이 무서워하잖니? 페이쿼리어가 그러면 못 쓴단다. 류넬이 안 가르쳐줬니?”
그 위압감…….
이슬라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카, 카이센이 이렇게 인사하라고 가르쳤다. 이슬라는 사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다.”
“?”
“카이센이 그럴 아이가 아닌데.”
“이슬라는 용! 용은 진실만을 말한다! 하지만 카이센은 인간이다. 인간은 용처럼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샤론의 시선에 한숨 섞인 어깻짓으로 답했다. 원래 이런 녀석이란 뜻으로.
“그렇구나. 사실 이슬라가 뭘 어떻게 하든 난 별로 신경 안 써. 하지만 카이센은 절대 건들면 안 돼. 카이센은 우리 리아가 예전에 이미 잔뜩 침 발라놨거든.”
“스, 스승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때 저편에서는 이슬라의 용추 병단과 샤론의 흑장미 병단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흑장미 병단은 기병, 용추 병단은 기갑 병과로 이번 방어전의 핵심 전력들이었다.
본래 류넬이 이끌던 용추 병단의 생존자들은 <하랄도니키>에서 이슬라가 임관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다시 전선으로 나왔다.
그걸 지켜보는 일은 괴로웠다.
떠올리게 되고 마니까.
불가능한 꿈을 꾸게 되니까.
나 또한 백골 병단과 다시 저렇게 만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카이센, 스승님이 하신 말씀은 장난이야! 알지? 말장난! 아이고 재밌어라, 하하하.”
리아가 양팔을 파닥거리건 말건, 그러한 눈으로 두 병단의 병사들을 지켜보는데 샤론이 한숨과 함께 본론을 꺼냈다.
“현 차석인 로로를 보내주길 원했는데…… 역시 중부 전선이 훨씬 더 화급하긴 한가 보구나.”
“제가 미덥지 못하십니까?”
“이슬라가 미덥지 못한 것인가!”
샤론이 다시 이슬라의 뿔을 붙잡고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이슬라는 다 좋은데 말이 좀 짧네? 예전에 카이센은 남자라 봐준 거지, 난 같은 여자에게는 얄짤 없는 여자란다.”
“이슬라가 미덥지 못한 것인가…… 용(龍)?”
“풋, 그래. 너희들이 미덥지 않다는 말이 아니란다. 너무 가혹한 곳이라서. 후우…….”
샤론이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들것에 실린 부상자들이 처절하게 신음하고 있었는데, 최전선에서 중앙 의무대로 호송되어 오는 자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제국에서 원군이 왔으면 했는데. 쉽지 않구나.”
인류 최대ㆍ최강의 국가인 신성인류제국은 ‘종교 혁신’이라는 미명하에 혼돈에 잠겼다.
종교를 혁신한다니…….
마(魔)의 손길이 목전까지 들이닥친 와중에 어찌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여유가 있단 말인가.
“제국은 지금…… 진교(眞敎)와 이교(異敎)로 갈라져 싸우고 있으니까요. 근데 아무래도 이상해요. 흑교회의 소행이 아닐까요?”
리아의 발언에 샤론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쩌면 전쟁에 질려서 핑계를 대는 걸지도 모르지. 제국도 참 온갖 전쟁에 휘말려 왔으니.”
“그건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죠. 스승님의 모국인 두노스 왕조는 계속 전쟁에 힘쓰는데…… 그, 정말 죄송합니다.”
“리아가 죄송해할 게 뭐 있어? 보나 마나 제국의 높으신 어른들의 장난질일 텐데.”
“그렇다! 인간들은 우매하다! 거짓말만 반복한다! 이슬라처럼 착한 용이랑은 다른 것이닷!”
리아는 자신이 제국 삼대검가의 자제인 게 부끄럽단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카이센은 어머니와 스승의 고향인 신성인류제국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국이 개혁 따위에 눈길을 주지 않고 원군을 보냈더라면 스승님께서도 어쩌면…….
“카이센, 하이 타르크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하이 타르크.
공포와 악몽의 대명사.
우루크 연합의 상위 21개 클랜을 지칭하는 말로, 그 필두는 당연히 발크루쉬였다. 2위는 <아리스타포>에서 백골 병단을 궤멸시킨 키랄이고.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클랜은 하이 타르크를 넘어 하이 쿤 타르크에 속하는 타후프 클랜이야.”
하이 쿤 타르크는 하이 타르크의 21개 클랜 중에서도 오직 최고위 7개 클랜이 얻는 영예였다.
시대와 형세에 따라 순위가 변동하고, 위상을 빼앗기기도 하는 하이 타르크와 달리 하이 쿤 타르크는 ‘검은 여름’ 이전까지의 긴 세월 동안 불변이었다고 한다.
발크루쉬 클랜은 ‘검은 여름’에서 발생한 하이 쿤 타르크의 공석으로 치고 들어와 1위까지 차지한 것이고.
“타후프는 속죄란 뜻을 갖고 있죠. 그리고 ‘검은 여름’ 때 침공에 가담하지 않은 걸로 배웠습니다. 위용검전에서요.”
“그래, 어떤 힘을 쓰는지 아무도 몰라. 그게 문제야. 정보가 없단 게 너무나도 불길해.”
“정보가 꼭 없는 것만은 아니에요, 스승님. 타후프 클랜과 조우해서 생존한 부대가 있죠.”
“모두 미쳐버려서 한마디 말도 못 하지만 말이야. 항상 클랜 순위가 4위였던 적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니.”
마주한 이들을 광인으로 전락시켜온 타후프의 야만적 풍습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인간을 산 채로 살을 발라내 먹고 뼈를 뽑아내며 살가죽으로는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걸.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열어서 그 뇌와 척수를 뽑아 제사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걸.
그 모든 제사의 과정을, 살아남은 이들로 하여금 지켜보게 만든다는 걸.
그때는 그것을 논할 지식이 없었고, 있었더라도 논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댕, 댕, 댕, 댕, 댕.
육신이 타들어가는 인간의 비명처럼, 다급하고도 화급한 종소리가 그 순간 울려 퍼졌으므로.
종소리는 낮게 깔리며.
그리고 드높이 울며.
어딘가에 있을 음식이며 물을 찾아서 시내를 뒤적거리던 난민들을 해안 쪽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숨 돌릴 시간도 안 주네. 총사령관 그 변태 늙은이와는 다음에 이야기하렴.”
연락병들이 시청 청사를 분주히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케르크누드에 온 걸 환영해, 카이센.”
샤론이 투구를 옆구리에 낀 채 복도를 걸어 나갔다.
즉각 그 뒤를 따라나섰다.
나란히 걸으며 전투 장구를 착용하던 리아가 말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 지금 가게 될 곳은 지옥이니까.”
지옥이라.
새삼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볼에 찍힌 운명의 낙인을 어루만질 때마다, 절벽처럼 솟구치는 건 먼 과거의 울분과 슬픔과 비탄.
“그거라면 걱정 마.”
이 비탄의 지옥에서 빠져나갈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은 멀어서 보이지 않지만.
다만 또렷하게 보이는 적들의 핏물을 뿌리고 또 뿌리다 보면, 영혼을 고통스럽게 불태우고 좀먹는 이 지옥의 불길도 꺼지지 않을까.
“이 낙인이 찍힌 순간부터 내 삶은 이미 지옥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