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61)
가짜 용사 이야기-261화(261/310)
시즌 3 : 69화
– 이놈은 이미 빛을 버렸다.
어차피.
어차피 내가 죽이지 않아도 이놈들이 죽일 것이었으니.
그렇게 스스로의 행동을 몇 번이고 합리화하며.
– 그래, 나는 너희들의 형제다.
놈들을 관찰하며 <화염만리> 이남 마족들의 세력도와 우루크의 전투 풍습과 전술을 머릿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마족들의 언어를 익히고 놈들의 부락을 현대화시키며 능률적으로 바꿔 주었습니다.
바그쿠르가 언젠가부터 나를 자신의 형제처럼 여기게 만들었지요.
우루크는 혈족과 다릅니다.
신분이나 종족이 달라도 능력만 출중하다면 인정해 줍니다. 약육강식을 기반으로 한 실력지상주의가 뼛속 깊이 내재돼 있죠.
우루크는 옛 왕을 섬깁니다.
놈들은 싸우기 위해 살고, 죽기 위해서 싸웁니다.
오직 싸우다 죽은 전사만이 심연의 낙원인 ‘발라돈’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놈들은 딱히 인류를 침략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일상처럼 치고받고 싸웠고 다른 마족들을 죽이고 땅과 물산을 빼앗았습니다.
전사로서의 위상을 위해서요.
그 과정에서 바그카르를 두 번인가 구했습니다. 놈의 아내도 다 죽어가던 걸 살려냈죠.
카디페르…….
즉 예언자(預言者)를 만난 건, 우루크 내전에서 바그카르를 보좌하던 시기, 정확히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처음에는 용사가, 저를 구하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극위성검 플라디마르테와 베룸페이라 같은…… 사복검 형태의 성검을 쥐고 있었으니까요.
거기에다 평생 본 그 어떤 신성력보다, 사제 안수를 해주던 황룡 추기경보다 더 거대한 신성력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습니다.
그 신성력과 동일한,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악독하고 강대한 심연을 놈은 품고 있었습니다. 머리색도 백발이 아니라 심연의 암청색이었습니다.
또 키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바그카르도 우루크 중에서 체격이 월등한 편인데, 그 바그카르와 눈높이가 비슷했던 겁니다.
– 이제 너희들끼리의 싸움은 끝났다. 곧 ‘르흘브라’가 시작된다.
르흘브라.
마족이 믿는 최후의 심판.
르흘브라의 때에, 심연의 절대자가 이 땅으로 돌아와 어둠을 배반하고 빛에게로 돌아선 역도(逆徒)들에게 어둠의 심판이 내릴 거라 마족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 ‘르흘브라’에는 쓸 만한 놈들만 참전할 수 있는 건 알겠지? 근데 네가 쓸 만한 놈들을 죽이고 있는 게 아주 괘씸하다.
예언자는 하이 쿤 타르크를 하나씩 복속시켜 가고 있었습니다. 하이 쿤 타르크들이 약탈에 동참하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이었죠.
다만 인류 침탈로 재산과 명예를 크게 확장시켜 부족 부흥의 절호조를 달리고 있던 바그카르는 이 명령에 불복합니다.
예언자는 한순간에, 아니, 한순간도 안 되는 찰나에 바그카르를 쓰러뜨렸습니다.
– Bak Shi──!
전 아직도…….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모릅니다…….
– ──제법이군. 하지만 어설퍼.
예언자가 칼자루에 손을 대기만 했던 것 같았는데, 문득 바그카르 발치의 대지가 난도질되면서 붕괴했고 바그카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으니까요.
– 근데 이놈은 뭐지?
– 내 형제 같은 놈이다.
내가 한 일을 바그카르의 입을 통해 전달받은 예언자는 경멸적인 미소를 지었습니다.
– 바그카르, 네 무대는 바다 너머에 있다. 또다시 네 동족들의 세력을 깎아내는 짓을 했다간 용서 안 한다. 너희 모두 버러지만도 못한 잡종들이지만, 다 쓸 곳이 있고, 써야 할 때가 가깝다.
그게 제가 예언자를 본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왜냐면 예언자 때문에 동족상잔으로 세력을 불릴 수 없게 된 바그카르는 이듬해 4차 대원정을 준비했으니까요.
– 다음 대원정에는 따라와라, 아이딘. 너도 발라돈으로 갈 기회를 얻어야 마땅하다. 하이 타르크의 절반이 참가하는 대원정이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마침내 기회가 온 겁니다. 바그카르가 저를 침략 원정에 동참시켜 줬어요.
그렇게 대장선에 승선했고…….
우루크 무당들이 부른 화산재에 숨어서 다시 <화염만리> 이북, 인류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복수를 해야 했습니다.
<화염만리> 이남에 있었을 때, 바그카르가 약탈해서 가져온 군용 서적을 필사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신호 체계를 섭렵했지요.
인류가 사용하는 신호 체계를 교묘하게 섞어서, 바그카르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바그카르는 그걸 좋다고 썼고, 이미 내전에서도 많은 승리를 얻은 바 있었죠.
하지만 인류와 싸울 때는 달랐습니다.
놈의 전략과 전술을 인류 사령관이 전부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놈들의 전략과 전술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짓으로 만들어둔 겁니다.
그 이후의 역사는 아는 대로…….
청성 미른가디아께서 지난 5년간 새로이 육성하고 훈련시킨 통합군 군대와의 격전, <시라프> 회전에서 바그카르는 죽었고, 원정군은 궤멸되었으며, 저는 생포되었습니다.
– 우루크가, 이놈이 자신들의 군사(軍師)라 했습니다.
– 인간이 우루크의? 쓰레기 같은 놈이군. 바로 죽여버리자.
– 아니, 이놈은 쓸모가 있어. 마족 밑에서 생활했다면 놈들에 대해서 꿰고 있을 것이다.
그때 비네사 알터 르노드께서는 그렇게 말했으나, 최종 결정권은 청성 각하께 있었습니다.
– 넨이 올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겠다. 가둬두어라.
그때, 나는 죽고 싶었습니다…….
페이쿼리어들은 저마다 눈에 빛을 품고 있더군요. 제 눈에는 암흑밖에 없는데.
청성 각하의 눈에는 더 순결한 빛이 깃들어 있어서, 그 앞에 꿇어앉아 있자니 벌거벗겨져 모든 치부가 드러난 느낌이었습니다.
복수는 그토록 허무하게 끝났고, 복수가 끝나니 삶의 목표가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몸이 미친 듯이 떨렸습니다…….
복수에 성공한 감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이렇게 살아남아서, 이렇게 복수하고자, 그 많은 이들을 죽이고 그 피를 마셨는가…….
내가 아니었어도, 청성 각하와 페이쿼리어들은 능히 바그카르를 물리쳤을 텐데…….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저 살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서, 스스로에게 그런 변명을 해왔던 것이 아닐까…….
– 내, 너를 기억한다. 요슈하르 어르신께 세례를 받고 남부로 간 아이가 아니냐.
그때 뇌향 각하를 만났습니다.
그게 제 삶의 전환점이었습니다.
– 네 상한 심령이 보이는구나. 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웠느냐, 그 어린 나이부터 지금까지…….
– 예……?
– 고맙다, 삶을 포기하지 않아서.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 돌아와 주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문득 그 낡은 삿갓을 벗으신 뇌향 각하는 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분은 울어 주셨습니다.
울지 못하게 된 나를 위해.
그 순간, 햇살 속에서 깨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마을, 그 오두막에서 잠에서 깨어나…… 평소와 같은 일상이 시작되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습니다.
나는 그 품에서 울었습니다…….
5년 동안 억눌렀던 울음을…….
뇌향 각하께서는 제 영혼에 빛을 비춰주셨고, 완전히 상실됐다고 생각한 인간성을 다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 나는 비네사 알터 르노드다. 난 너 같은 놈들이 필요하다. 세계가 미쳐가고 있으니, 미친놈들이 필요하지.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속죄해야 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죽여야 했던 이들을 위한 속죄의 삶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 네가 저지른 만행 때문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건,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아무런 속죄도 되지 않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적들로 하여금 똑같은 피를 흘리게 하는 것만이 진정한 속죄가 되리니.
지금까지 배웠던 마족들의 정보와 놈들의 습관과 전통과 전투 방식 모두를 정리했고, 일선 부대에 전파했습니다.
– 날 따라와라, 아이딘.
비네사 단장님의 배려로 혈마 병단에 입단하게 되었고, 그 곁에서 마족과 싸울 수 있게 된 건 당신도 아는 바입니다.
– 내 곁에 있으면, 마족의 피를 강처럼 흐르게 만들 수 있을 거다. 선택은 네 몫이다.
내 과거와 정체를 아는 페이쿼리어들에게는 뇌향 각하께서 친히 절 변호하시고 또 함구령까지 내려주셔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싸웠습니다.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그 싸움 속에서 사제복은 이미 피로 물들었지만, 이걸 씻을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이 피는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자 속죄의 굴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게 나의 과거입니다.
하나도 숨김없는, 내 본모습입니다. 저는 이렇게 살아남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이런 걸 다 듣고도 나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의 사랑조차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아, 아이딘.”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잖아? 당신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어. 나는 거기에 분명 창세의 계획이 있으실 거라 생각해.”
“…….”
“그러니까 항상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돌아다니지 마. 웃는 거야. 빙그레, 하고. 그래야 나중에 그 마을 사람들과 다시 만났을 때 잘 웃을 수 있지 않겠어?”
아이딘은 병실을 도망치듯 떠났다. 방으로 돌아왔는데, 문 위로 미끄러지듯 기대앉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 선생님, 괜찮아요.
– 선생님, 울지 마세요.
– 꼬마 사제님, 왜 또 울고 그러신대. 이리 와서 이 고등어 좀 먹어봐.
그 눈물 위로 포개어지는 건, 이제는 들을 수 없게 된 고향의 목소리…….
괜찮아, 괜찮아요…….
평생을 돌아가길 꿈꾸지만,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간 곳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 마음의 고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과거의 메아리, 영혼에 묻은 피는 씻어낼 수 없다 (2)
에쉬르와 다시 만난 것은,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그 장소였다.
용사의 전당.
피비린내가 없어진 전당은, 고고한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죽은 자의 한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경내를 지배하고 있던 죽음의 흔적은 뇌향이 모두 거두어 수습해 두었기 때문이다.
“언니.”
에쉬르는 알카이오스와 카듀엘의 동상 앞에서 검무(劍舞)를 펼치고 있었다.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으면서 벌써 그렇게 움직여도 돼?”
평이한 검무가 아니었다.
카밀라의 상상력으로, 지금 에쉬르가 누굴 상대로 검무를 펼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헛되지 않았어!”
그 가상의 상대는 바로 뤼카엘이었다.
“의미 없지도 않았다고!”
그때 진용사가 필멸의 한계 너머로 펼쳐낸 극한의 무(武)를 상대로, 육신과 성검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 올려 맞서고 있던 것이다.
“스승님의 싸움은!”
식은땀이 끝없이 쏟아졌다.
거친 호흡이 무수히 뱉어졌다.
상상 속의 전투였건만 에쉬르는 밀리고 짓눌리고 있었다.
“스승님의 검은!”
검무를 이루는 마지막 초식을, 휘몰아치는 풍압 속에서 마친 에쉬르가 문득 마구 웃어댔다.
“하, 하하핫, 아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언니……?”
“나는 괜찮아. 그냥, 내 꼴이 웃겨서 그래. 이것 봐, 스승님께서는 내가 쓰던 그 평범한 검으로도 뤼카엘의 힘을 몇 번이나 막아냈는데, 나는 르노드를 쥐고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잖아…….”
에쉬르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그래서 나도 더 강해지려고! 진짜배기조차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상식이 안 통하게!”
언제나, 에쉬르는 슬픈 일이 있어도 이튿날이면 그렇게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었는데, 평생 동안.
“그래서 부정해 주겠어. 스승님의 죽음이 개죽음이라 했던 그 말…… 르노드와 함께 몇 번이고 부정해주고 말 거야.”
“!”
“후후, 언니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겠어? 카밀라도 앞으로 더 바빠지겠는걸?”
그러고 나서 에쉬르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지만, 스스로의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유익한 대화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승님을 찾아갔다.
달빛이 아늑하게 비쳐드는 병실, 창문 너머로, 비네사가 말한 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 스승님께 그날의 이야기를 전부 전해드렸다.
“……그래서 알카이오스와 카듀엘이 개죽음의 계보의 시작이라고 했어요. 우리들은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거고요.”
스승님이 아이딘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카밀라가 오기 전부터 아이딘이 스승님을 간호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승님이 웃었다, 처연하게.
꼭 울음 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더니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새 모이용 곡식을 창문 너머 마당 위로 흩뿌리셨다.
“카미, 씨를 뿌린다고 모든 씨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내는 게 아니란다. 또 열매를 맺는다고 전부 훌륭한 과실을 내는 건 아니야.”
“……?”
“모든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해서 씨를 뿌리는 걸 관두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스승님, 스승님께서 해주셨던 말씀들은…… 어떻게 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걸까요.
말에서도 향기가 났었어요.
그 향기가 너무 향긋해서…… 자신을 잃게 되기도 했었어요. 저는 스승님 같은 스승은 결코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힘을 추구한 옛 인류는 우루크가 되었고, 영생의 미를 추구한 옛 인류는 외형만 아름다울 뿐 인간성이라고는 한 점 없는 혈족이 되었습니다.”
홍의 사제, 아이딘이 말했다.
“또 나태를 숭배한 옛 인류는 태양빛만 받으면 바위가 되는 트롤이 되어버렸죠. 이처럼 6대 마족의 형상이 곧 인류의 거울입니다. 창세의 섭리를 벗어나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류의 말로이지요. 그렇기에 마족에게는 선행이 없습니다. 자선도 없고 사랑도 없지요.”
아이딘의 말은 항상 이랬다.
창세의 진리를, 난롯가에서 동화책을 읽어주시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다독이며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든 창세의 가치들은, 다 용기의 선진들이 먼저 그 가치를 지키는 싸움을 해오셨기에, 즉 순교(殉敎)의 삶으로 그 가치를 다음 세대로 전해 주었기에, 이 땅 위에 간직되어올 수 있던 겁니다.”
성격과 외모는 모두 다를지라도, 마음이 닮은 이들끼리 만나 혼인한다는데…….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스승님께서 아이딘과 만나게 된 건, 서로 마음이 이렇게나 닮아서 그런 거였던 걸지도 모른다.
“카미, 우리는 말이야, 우리가 받은 빛을 다음 시대로 이어주는 일을 해나가야 해. <온 것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그 빛을.”
“우리가 받은 빛이요?”
“그래, 빛. 알카이오스와 카듀엘, 그리고 비네사 선배님 같은 분들이 먼저 그런 싸움을 해주셨기에, 카미와 내가 그날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고, 만나서 행복하게 웃고 떠들 수 있던 거야. 이게 우리가 받은 빛이 아니면 뭐겠니?”
“빛…….”
“나 말이야, 그때, 카미가 날 구하려 몸을 던졌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알아? 근데 또…… 한편으로 너무 기쁘더라고. 아, 카미가 날 이렇게나 소중히 생각하고 있구나 하고.”
“아니, 그건요, 뭐지, 어, 제가 그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대신 죽으려 한 게 아니고!”
“그래, 아무렴 그랬겠지. 카미의 의도가 어쨌든 나는 그런 일들 하나하나가 다 빛이라고 생각해. 창세의 시대부터 우리의 시대까지 전해져온…… 빛이라고.”
▶ ▶ ▶
“야, 느그 아부지 이름 뭐냐고.”
제자를 향한 필두 페이쿼리어의 교육은 혹독했다.
‘검은 여름’ 초기의 필두 페이쿼리어와 마찬가지로 실전 본위의 교육을 추구했는데, 일단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고 보던 선대 필두보다는 상냥한(?) 방식이었다.
그것은 일말의 자비도 없는 일대일 대련. 백골 병단이 평하길 ‘훈련이라 적고 마음껏 줘 패는 시간이라 읽는’ 시간이었다.
“느그 아부지 뭐 하던 놈이었냐니까?”
훈련의 방식은 간단하다.
비무장 상태의 필두 페이쿼리어를 상대로 한 번이라도 공격을 성공시키면 훈련이 종료된다.
공격이 막히거나 빗나갈 경우, 나무의 줄기를 으스러뜨리는 딱밤이 이마에 꽂힌다.
그 타격음은 ‘딱’이 아니다.
빠악, 뻐억, 빠각…….
흡사 두개골이 부러지고 뇌까지 진탕이 일어나는 딱밤이 울려 퍼질 때마다 백골 병단 단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점마 지금 몇 방째 맞았냐?”
“열세 방.”
“야 인마! 이제 그만 쓰러져, 카이센! 지금 쓰러져야 내가 건 돈이 10배로 불어난다고!”
이 훈련의 목적은 제자로 하여금 강자를 상대로 ‘상상력’을 단련시키는 데 있었다.
무식하게 달려들면 안 된다.
상대의 반응을 상상하고 상정하고 최적의 수를 찾아내야만 한다. 칼의 세계에서는 두 번째의 기회가 없지만, 이 훈련에서는 몇 번이고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워어어우우우우!”
“호우우우우, 스무 방째!”
“저놈 대가리는 돌이냐! 앞으로 돌멩이 보고 ‘카이센 대가리’라고 부르든가 해야지, 이런 썅!”
물론 어디까지나.
뇌진탕으로 혼절하지 않는 한 말이지만.
‘카이센이 온 후로 항상 즐거워 보이네, 카밀라.’
모두가 웃고 떠드는 그 순간 속에서, 오직 필두 페이쿼리어는 무표정했다.
모두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오랜 맹우인 눈꽃의 대마법사만이, 그 표정의 암막 뒤로 숨겨진 미소를 엿볼 수 있었다.
‘네가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게 얼마 만인지…….’
이유는 모른다. 까닭도 모른다.
왜 지금까지의 모든 제자 지망생들은 단칼에 거절해놓고, 카이센에게는 저런 편애(偏愛)에 가까운 애정을 보이는 건지.
하지만 대마법사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 인연을 예비해두신 창세의 섭리와, 그 섭리가 이름을 입은 카이센이라는 존재에게.
“이 돌대가리도 느그 아부지한테 물려받은 거 맞지? 맞잖아, 응?”
아버지가 모욕당한 데에서 온 분노였을까, 아니면 뇌진탕 때문에 의식이 또렷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거든……!”
카이센이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고함쳤다.
“아빠는, 내 아버지는…… 뇌명의 아이딘이라고……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엄마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풀밭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오직 가까이 있던 필두 페이쿼리어만 들을 수 있는 음량이었다.
“스물일곱 방이다!”
“이야, 미친! 저 돌대가리 새끼!”
“아이고! 그렇게 버틸 거면 세 방만 더 버티지! 아무도 돈 못 따게! 억울해서 돌아가시겠네!”
함성 속에서, 오직 필두 페이쿼리어만 들을 수 있는 내면의 떨림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입을 가렸다.
따스하게 치받치는 기쁨 속에서 입매가 위쪽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요컨대 미소를 이루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선 안 된다.
‘아.’
그래, 그랬구나…….
그렇게 된 거였구나…….
‘아이딘, 역시 당신이었군요.’
스승님과 홍의 사제의 이목구비가 미형으로 조화된 외형적 특질로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그게 정말이었다니.
‘이제 확실히 알겠어요…….’
카이센, 저 녀석이…….
두 분께서 사랑으로 낳고 키우고 지켜온 저 녀석이 바로…….
제게 보내주신 ‘빛’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