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68)
가짜 용사 이야기-268화(268/310)
시즌 3 : 76화
이제야 승부에 결착이 났다고 판단한 라미네아는 전신의 긴장을 풀었다.
아니, 유지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심장이 타들어가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아…… 근육이,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은…….
‘이게, 절원(切願) 사용의 반동.’
입과 코로 피를 쏟으며 쓰러지자, 플로렛과 에쉬르가 다급히 달려왔다.
플로렛이 얼굴을 때리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는 입술 모양이 보이고, 에쉬르가 용혈 주사기를 꺼내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심장부가 어딘가로 뜯겨나간 채, 분명 절명했었어야 할 라그바우그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게 보인다.
‘왜, 왜 쓰러지지 않는 거야?’
놈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 때마다, 사방에 깔려 있던 바다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몸을 뒤틀며 심해를 흡수하던 라그바우그는 다음 순간,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무수한 핏덩이로 폭발했다.
그리고 그곳…….
방금까지 라그바우그가 있었던 위치에는…… 슈’율큘라…… 수런거리는 광기…… 역겨운 우주의 빛으로 해저에 검푸른 왕궁을 세운 별의 존재…….
‘안 돼.’
심해의 풍악 소리가 들려오면서, 놈이 라미네아에게로 도약했다. 새로운 숙주로 삼으려는 것이다. 새로운 별의 그릇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어떻게…….
어떻게든…….
라미네아가 친구와 후배, 플로렛과 에쉬르를 밀쳐서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던 그 순간.
“!”
“!”
“!”
홍의 사제, 아이딘이 황급히 빛의 장막을 펼치나 어처구니없도록 쉽게 빛이 어둠에 잠식된 순간.
델프레드의 얼음이나 멜레느의 주술도 매한가지던 순간.
카밀라가 소리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그쪽으로 발을 내뻗다 몸에 기력이 없어서 쓰러지고 말았던 순간.
어둠이.
소리가 따라잡지 못하는 세계에서, 소리 없는 비명만이 메아리치는 세계에서.
그렇게, 어둠이.
모든 저항을 짓누르고 어둠이 세상을 범하게 되기 직전이었던 그 한순간.
“아…….”
빛이…….
따스한, 빛이…….
“아아…….”
세 백발의 용사를 일순간 휘감더니, 그 공간에서 온전히 벗어나게 만들었다.
「다들 고생했구나.」
어느새, 어느 틈엔가, 라미네아는 세츠넨의 품에 안겨 있었고 플로렛과 에쉬르도 그 발치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그만 쉬어라.」
바다의 군주의 마우나 로아, 크라켄이라 불리는 화신급 데몬들과의 결전으로 몇 배는 지치고 피폐해져 있었건만 뇌향은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그 공간…… 심해의 풍악 속에서 새로운 그릇을 찾는…… 그 타락의 공간 자체가 빛에 휘감기더니 소멸했다.
정확히는, 전이되었다.
저기 저편, 어떤 존재에게도 감히 해를 가할 수 없는 먼 해수면 위로.
「방금, 전쟁이 끝났으니.」
중장의 종반전, <라프타스> 탈환전 (7)
[타르스 : 여기는 태산, 오우칸 토벌 후 해안을 완벽히 제압했다. 강철함대 기갑 특수전대와 함께 서문으로 진입하겠다.] [자카드린 : 여기는 맹진! 북쪽 시가지 90% 제압 완료! 마음속의 불로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이겁니다!] [발브레이 : 여기는 황은의 발브레이, 동쪽 시가지를 완벽하게 제압하였으며 청성 각하의 다음 명령을 대기 중입니다.] [할바론 : 강철함대, 닻을 올려서 함포 사격 대형에서 이동 대열로 바꾼다. 함대는 내항으로 이동하면서 상륙함을 3군 6진으로 보내도록.] [메이트 : 여기는 비격, 남쪽 전장에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요정병들이 완벽하게 제압한 걸 확인하고 복귀 중.]옛 바다의 지배자의 힘이 빠져나간 도시는 골조만이 남은 채 황폐하게 몰락해 있었다.
마치, 썰물 속에서 바다가 심해로 끌려간 빈자리에 뻘밭이 드러나듯이.
사방에서 서로 경쟁하듯이 밀려드는 승전보 속에서, 에쉬르는 이제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뭐 하고 있어, 에쉬르.”
“네?”
“혈마 병단의 깃발을 사령부 잔해에 걸어야지! 승리를 모두에게 알리는 게 선봉의 역할이자 권리잖아.”
플로렛의 말에 에쉬르는 비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르노드의 칼날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단 걸 아시잖아요. 이번 작전에서 제 기여도는 정말 비참했고…… 어쩌면 제 욕심 때문에 너무 많은 사상자가…….”
이 작전에서 최고참 중 하나였던 무녀 실라미네도 죽었다.
한 명, 한 명, 병단이라는 나무를 이루던 지체들이 사라져간다.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마음에서도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닌데.
뿌리째 잡아 뜯기듯이, 그 고통이 남고 또 흔적은 결코 메워지지 않게 남는데…….
“그게 왜 네 욕심이겠어? 혈마 병단이 무슨 병단인데? 비네사 선배님 닮아서 죄다 한 성깔 하는 연놈들만 있잖아. 다들 이렇게 되길 바랐을 텐데?”
“…….”
“그리고 깃발을 거는 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걸. 원래 비네사 선배님께서 그 깃발을 거셨어야 했단 걸 모두 아니까. 그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도. 그러니 어서 걸어, 인마! 요정이나 아인이 와서 시비 걸기 전에!”
비네사의 필두 페이쿼리어로서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 대재앙을 막아냈고, 인류로 하여금 이곳에 오기까지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아쉬운 것은…….
정말 아쉬운 것은…….
이 승리를, 이 전쟁의 종막을, 누구보다도 당신이 살아서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스승님…….’
그날, 사룡(死龍)들에 의해 처참히 무너졌었고, 방금까지는 심해에 잠겨 퇴락되어 버린 시청 청사의 잔해.
그 잔해의 깃대를 찾았다.
에쉬르는 자신의 망토를 찢어서, 그 깃대에 기폭으로 내걸었다. 새하얀 바탕 위를 내달리는 붉은 말…… 혈마 병단의 깃발을.
‘이제 정말 다 끝났어요.’
쌓이고, 응어리지고, 끝내 썩어가던 설움이 복받쳤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는데도 울음이 흘러나오자 혈마 병단 생존자들도 주저앉아 통곡했다.
그때…….
당신을 여기 두고 가서는 안 됐었는데, 어떻게든, 당신과 끝까지 함께했었어야 했는데.
“정말, 시작과 끝의 도시구나.”
샤론에게 매달리다시피 부축된 카밀라는 에쉬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응?”
생각해보면…… 자신의 여정도 그때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그때, 비네사 님의 절원으로 시작된 여정이 스승님의 절원으로 끝마쳐진 것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그때, 정말 그때 처음으로 용사란 무엇인지에 대한 신념을 정립했고…… 그리고 지금, 어떤 용사가 될지 그 방향을 정하게 됐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카밀라가 오직 자신만이 아는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의 여정을 끝마칠 때, 뇌향은 저편에서 돌조각 하나를 주워들고 있었다.
「…….」
그것은, 옛 기억의 흔적…… 즉, 옛 동상의 파편.
250년 전, 이곳에서 흑교회의 두 번째 기둥 제르닉스가 일으킨 사변…… 그 사변을 끝장낸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동상.
용현 레인 루드윅 일행의 동상이었는데, 어린 날의 세츠넨은 그 동상 속에서 용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제 그 풍경은 내 기억 속에서밖에 못 보게 되었구나…….’
이곳에 올 때마다, 그 동상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는 사색이 그토록 즐거웠었건만…….
돌아가고 싶은데…….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날에 대한 그리움은 어찌 성룡이 된 후로 깊어져만 가는지…….
‘만약 여기 계셨더라면, 아버지께선 이런 저를 꾸짖으셨을까요?’
기억 속에, 젊으셨던 용현이 피식 웃은 기분이 들었다. 그 옆에서 홍염의 아키레아도 환하게 웃은 것만 같았다.
– 흐음, 넨이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까, 아키.
– 아키는 겨우 이런 걸로 동생을 혼내지 않는 것입니다!
– 좋아, 땅땅땅, 아키 판관님의 독단과 편견에 따라 무죄가 되어버렸네? 이런, 어떡하지? 넨을 혼낼 수가 없게 되어 버렸잖아.
과거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 없는 환각이었으나, 분명, 두 분께서는 그렇게 말했으리라. 환히 웃으며…….
뇌향은 미소로 눈물을 감췄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듯, 다시 예전과 똑같이 만들 수는 없겠으나 새로이 일으켜 세우면 되리니…….
‘이번에는 여기에 모두의 동상을 세우자.’
여기 있던 모든 이들의…….
그 피와 눈물과 기쁨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런 동상을…….
우선, 먼저 떠나간 이들을 애도할 무덤을 세우고 나서…….
[청성 : 청성의 미른가디아다. 전투 상황은 종료되었고 이제 정화 및 복구 절차에 들어가겠다. 각 공병대는 내 명에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30일 동안 계엄 상태를 유지하며 철로를 잇고 3군 6진 복구를 완수한다. 이상.]그렇게, 곤혹스러울 정도로 한순간에 무너졌던 일상(日常)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청성은 전국에서 기술공들을 징집하였으며, 물자를 징발하여 <라프타스>를 재건하고 3군 6진의 방어를 재정비했다.
아인 최고의 장인, 할바론의 지휘를 받을 수 있단 소문에 징집령이 아니었어도 자원자만으로 <라프타스>는 가득했을 것이다.
뇌향은 묘지를 세웠다.
옛 시청 청사, 사령부가 있던 시가지 중심지로…… 4년 동안의 악몽 속에서 피와 눈물로 이 세상을 지탱해준 이들의 넋을 기렸다.
동상은 이제 필요 없었다.
충혼비가 곧 동상이었으므로.
충혼비가 완공되고 뇌향의 기도문이 읊어질 때, 남겨진 이들의 통곡이 도시를 덮었다.
* * *
“저기, 저기 온다!”
그렇게 반기가 넘어가고.
마침내 기원력 1675년 9월.
“개선식이다!”
30일 동안의 비상 계엄령이 끝나면서, 인류 통합군은 아드리온 대륙의 중심지 <슈리가나큐스>로 입성한다.
붉은 도시, <슈리가나큐스>.
핏빛 태양, 슈리간이 눈물로 세워낸 도시로 그들의 자긍심은 푸른 도시 <테르베노플>의 주민들만큼이나 높았다.
“필두 페이쿼리어와 태산 병단이다!”
“이번에 십석두(十石頭) 오우칸을 쓰러뜨렸대!”
많은 피난민들은 <슈리가나큐스>로 몰렸는데, 이날 개선식을 보기 위해 밀려든 이들로 도시는 미어터질 듯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날,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환호와 눈물과 꽃잎을 뿌리는 가운데, 길 한가운데를 걸어가던 그날의 기억을…….
“저기, 저기다! 저게 홍련의 라미네아야!”
“이번 원정의 최고 수훈자!”
“옆에 있는 제자도 엄청나다는데? 이번에 엄청 활약했대.”
“최강의 배틀메이지 델프레드와 요한도 있어!”
“요한? 차기 대마법사로 무조건 손꼽힌다던데, 저런 미소년이었어?”
“병단의 돌격대장 그리프베런이야! 풍채만 봐도 든든한데!”
그때 한 아이들이 헌병대의 다리 사이를 기어서 빠져나와 스승님께로 달려왔다.
품에 한 아름 꽃다발이 들려 있었는데, 늦여름에 개화해 여름의 끝을 알리는 도라지꽃이었다.
스승님께서는 벅찬 웃음을 흘리시며 그 꽃을 받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어쩌면, 용사(勇士)는.’
이 순간을……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걸지도 몰라.
그날,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슬픔과 고통, 그 모든 것이 보답받게 되는 이 순간을 위해.
“스승님.”
“응?”
“리스타 파티도 이 광경을 봤었겠죠?”
정말, 꿈만 같은 풍경.
어린 날, 어머니가 읽어주시던 용사의 이야기…… 법황청 영웅 광장에서 선망의 눈빛으로 보았던 용사 파티의 업적.
그 이야기와 업적의 주인공인 리스타 파티와 똑같은 곳에서 여정을 마치고, 이런 개선식에 오게 되다니.
‘엄마, 보고 있어요?’
보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보여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희랑 똑같은 기분이었을까요? 뭔가, 후련하고…… 먹먹하고.”
“음…… 아마 그러지는 못했을 거야.”
스승님께서는, 스승을 잃은 슬픔 속에서 개선의 행렬을 멍하니 따라오는 멜레느 쪽에 애달픈 시선을 주었다.
“리스타 파티에서 대마법사 린은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누구보다 슬펐을 거야…… 멜레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