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7)
가짜 용사 이야기-27화(27/310)
제27화
“들어라.”
샤론 알터 타스알포가 남문 누각 위에서 소리쳤다.
“지금 해안가에는 피난이 끝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 철수 작전이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가 시간을 벌어줘야 해.”
분명히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황은 역사에 기록된 만큼 절망적이지 않았다.
도시를 3면에서 포위한 적세는 수평선을 새까맣게 집어삼킨 건 사실이었으나, 인류에게도 ‘방패’는 있었다.
청록장미회의 마녀들이 도시 위로 전개해준 방어 결계가 바로 그 방패였다.
“결계가 사라지기 전까지 발포 금지야. 알겠어? 적들이 달려와도 쏘지 마. 절대 못 뚫으니까.”
우루크 육군 부대의 공성 병기들은 이 결계의 외층조차 뚫지 못하고 있었다.
– 광역 결계인 만큼 지속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지만, 애초에 시간 끌기가 목적이에요.
청록장미회 부회장 그렌델은 그렇게 말했고 아주 적확한 판단이었다.
그러자 우루크들은 이 결계를 깨트릴 다른 계획을 세워냈다.
먼저, 한 우루크가 두개골이 무수히 달랑거리는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 나왔다.
인간의 살가죽을 몇 겹이고 기워 크고 두껍게 지은 법복이 누더기처럼 문드러진 꼽추였다.
‘인간의 가죽으로 옷을? 저런 야만적인 방식을 쓴다고?’
목구멍이 타들어갈 듯한, 사악한 존재감부터가 한낱 무당이 아니란 걸 짐작게 했다.
짐작한 대로, 놈은 무당 따위가 아니라 하이 타르크의 수장 중 한 명이었다.
수십 명의 포로들이 그 앞에 일렬로 꿇어앉혀지자, 꼽추가 지팡이를 흔들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아, 안타까운 자들이여.
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거짓된 속삭임에 넘어가 저주를 받은 배신자들이여.
너희들이 속죄 가운데 저주를 씻어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겠노라.
배반의 피는 오로지 피로만 씻길 수 있나니.
너희의 피에서 부정한 빛의 속삭임이 사라지고 다시 왕의 품으로 돌아와 ‘사람’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노라.
우리의 축복이 너희들의 피와 뼈를 정화할 것인즉, 너희들은 마땅히 기뻐하라.
정화된 몸으로 다시 태어나 왕의 구원을 얻게 되리니.
그 노래가 끝난 순간, 고통스레 찢어지는 비명의 끝에서 포로들이 폭발했다.
폭발, 폭발이었다.
체내에서 무언가가 울룩불룩 솟아오르더니, 사방으로 핏물과 뼛조각을 흩뿌린 것이다.
‘아니…….’
꼽추가 성곽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짓자,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뭘까.
무언가, 가늠할 수 없는 공포가 등허리를 가로지른다.
“Kafukas! 속죄, 속죄할지니라!”
꼽추가 지팡이를 쳐들자, 웬 거렁뱅이 우루크들이 투석기 발사대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속죄.”
절뚝거리며, 비틀거리며, 우루크 전사라고 하기에는 모자라기 짝이 없는 쓰레기들.
“속죄. 속죄.”
놈들은 더듬거리며 꼽추의 말을 따라 했는데, 그 순간에서야 거대한 공포가 뇌리를 가로질렀다.
“저것들이…….”
낙인이었다.
몸이 터져 죽은 포로들의 이마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낙인이, 저 거렁뱅이들의 이마에서 빛을 뿜고 있던 것이다.
“리아!”
그리고 그것이.
우루크들에게조차 악명 높은 타후프 광인 부대와의 최초의 조우였다.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그 순간.
트롤 기갑병들이 큰 도끼를 휘둘러 투석기의 육중한 사슬을 끊어낸 순간, 악몽이 시작되었다.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속죄!”
삼천 명 베기,
케르크누드 철수 작전 (2)
결계 상단으로 수없이 날아와 격돌한 광인들의 육신이 암흑(暗黑)을 발하며 폭발했다.
폭발력도 만만찮았으나 진짜 위력은 바로 피의 부식성에 있었다.
결계의 표면을 새빨갛게 뒤덮고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핏물의 향연.
파츠츠츠츳……!
그 핏물들이 결계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더니 마침내 균열을 일으켜 허물어뜨리기 시작했다.
“미, 미친.”
“뭐, 뭐야, 저게!”
성벽 위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공황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계가 돌파된다면 그다음은 성벽이었다. 광인들은 지금도 투석기 위로 올라타고 있었다.
다급히 리아를 찾았다.
리아는 성벽을 양손으로 짚은 채, 몸을 길게 빼고 멍하니 결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리아, 괜찮아?”
“나, 나는 괜찮지만 도시 방어 전술은 괜찮지 않아. 케르크누드 성벽에는 저 자폭 특공을 막을 방도가 없어. 청록장미회의 결계도 버티지 못할 정도잖아.”
“……!”
“남문의 성벽을 사수하지 못하는 순간 인류는 9할에 가까운 전술을 사용할 수 없게 돼. 다른 성문의 수비 병력도 속절없이 전멸당하게 될 거야.”
홀린 듯이 전술적 이론을 내놓는 리아는 누가 보아도 공황 상태였건만 그 방식이 범인과는 달랐다.
그래, 나와도 달랐다.
그렇기에 바로 리아를 찾았다.
지금 리아에게 필요한 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켜줄 말과 행동뿐이다.
“이대로 성벽 위에 있으면 말이지?”
“……!”
“무언가 방법이 있는 거지? 따로 생각해둔?”
리아의 손에서 떨림이 멎었다.
여전히 창백했으나 떨림이 진정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고개를 끄덕이자 리아가 문득 성벽을 뛰어 내려갔다.
대답은 저것으로 완벽했다. 즉시 등허리에서 차갑게 울던 아라다만텔을 뽑았다.
“모두 주목!”
아라다만텔이 토해내는 홍련의 광휘가, 혼란에 잠겨 있던 병사들의 이목을 단숨에 잡아끌었다.
이거면 충분해.
선임인 샤론에게 눈짓을 보내 발언 허락을 구한 뒤, 이어 말했다.
“지금부터 흑장미 병단의 지휘에 따라 전 병력은 일사불란하게 성벽에서 철수한다.”
“성벽을…….”
“버린다고……?”
“지금 진심이십니까?”
“보다시피 지금 이대로 성벽을 사수해봤자 별 의미가 없어. 성벽을 고집하면 저 폭발에 휘말려 죽게 될걸.”
이제는 결계가 녹아내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직접적으로 들렸다. 결계의 겉면이 뚫린 것이다.
“하지만 페이쿼리어! 어떻게 후퇴한단 말입니까?”
“성문을 포기했다간 순식간에 밀어닥칠 거고, 진영도 갖추지 못한 채 돼지 밥이 될 겁니다.”
나에게는 변칙적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전략적 지성은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카밀라에게 배운 건 오직 하나, 이것뿐이다.
“나 혼자 성문을 지키겠다. 진영이 갖춰질 때까지.”
베고 베고 또 베는 것. 무언가를 생각할 시간에 또 베는 것.
그 살(殺)의 극한.
살(殺)로 빚어내는 기적.
내가 카밀라의 등을 보면서 느끼던 전율과 똑같은 떨림을 느꼈을까, 병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관리병!”
그리고 그 결의에서 카밀라와 같은 무언가를 보았을까, 지휘권을 양도했던 샤론이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 저 멍청이들이 사다리 걸 생각 않고 다 성문으로 뛰어 들어오게.”
병사들은 여전히 판단을 믿을 수 없단 눈치였으나, 곧 사슬이 얽히는 쇳소리와 함께 성문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증기포와 포대가 우선적으로 성벽을 내려갔으며, 이어 다른 병사들이 연대별로 철수했다.
샤론이 떠나기 전에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전술 따위는 무력으로 짓밟아 버리겠다는 막무가내 성격은 카밀라를 완전히 빼닮았구나.”
“아직 따라가려면 멀었습니다.”
“후훗, 튕기는 말투까지 따라 할 셈이야? 무운을 빌게. 죽지 마.”
전투 직전의 고요가 찾아온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나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불가침의 고요.
눈을 감고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며, 아라다만텔의 칼자루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
“………!”
“…………!”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함성과 깃발을 앞세우고, 놈들이 온다.
알지 못하는 날짐승이 그려진 문장이 수없이 펄럭였다. 신생 하이 타르크인 제크라 클랜이었다.
늑대 기병을 중심으로 내세우는 놈들이라 했던가.
– 제군들의 선임 페이쿼리어들이 전란 동안 하이 타르크를 많이도 죽여서, 하이 타르크 구성원은 어느덧 네 번이나 물갈이되었다.
몸의 힘줄이, 뼈의 골수가.
아릿해질 정도로.
격렬한 집단적 살기를 무지개로 토해내며 점점 다가온다.
반년.
반년 만이다.
나 지금 여기, 이렇게 너희 앞으로 돌아왔다.
– 제군들은 모든 클랜의 특징을 알아두어야 한다.
순혈의 검신을 순백의 칼집으로부터 빼내며 ‘그것’을 읊조렸다.
나직이.
조용히.
경건히.
그리고 간절히.
“나는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다.”
그것은 검의 기원(祈願).
성검이 대리자의 부름에 응해 삐걱거리면서 붉게 깨어나게 하는 부름.
뽑혀 나오는 칼날 위로 핏빛 인광이 춤추게 하는 명령.
그리고, 죽은 스승이 평생의 삶 속에서 애달프게 부르짖던 것과 똑같은 기도.
“너희들을 죽여 버리겠다.”
앞다투어 성문을 돌파하는 블라쉬우르프의 주둥이에서 떨어지는 침방울조차 선명하게 보인다.
좋아.
오늘, 상태가 아주 좋아.
그 위에서 철퇴며 도끼를 매섭게 휘두르는 늑대 기병들의 기합은 아주 느리게 들린다.
그 숫자 30.
50.
70.
아니, 100 이상.
적의 전위를 맡은 늑대 기병대. 늑대 기병은 백 단위부터 대단위로 평가된다.
“Batus! 혼자서 우리 제크라를 막겠다고? 크하핫! 좋다. 짓밟아주마!”
칼집 내부에 응결된 마력이 폭발적으로 집약된 흐름을 이기지 못하여, 칼을 칼집 밖으로 내보내려는 반발력을 갖게 된다.
─ 십문자도 제4식, 발(發).
그 반발력을 억누르기 위해 칼자루를 강제적으로 칼집에 고정, 칼 전체가 미친 듯이 덜거덕거리기 시작한다.
기다려.
더.
조금만 더.
예전보다 수십, 수백 배에 가까운 마력을 칼집에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신체 개조를 받지 않았더라면, 칼이 아라다만텔이 아니었더라면.
이 폭발적 내압을 견디지 못한 팔이 부러졌거나 칼이 부러졌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드드드드드드득…….
외압과 내압이 극한에 다다르자 이제 몸까지 떨리기 시작한다.
적과의 거리, 열 보.
종국의 종국에까지 응축된 마력의 흐름이 칼집 주위에서 붉게 소용돌이친다.
적과의 거리, 다섯 보.
손끝에서 마나체인을 발현, 마나하트가 폭주하며 토해낸 마력의 소용돌이가 질서정연하게 칼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적과의 거리, 단 일 보.
그 한순간, 거합태도(居合太刀).
성검의 칼날이 음속의 폭음을 터뜨리며 칼집 밖으로 튀어나왔다.
붓으로 물감을 뿌리듯.
칼날이 쓸고 지나간 궤적을 따라 그어지는 붉은 선.
─ 십문자도 제6식, 섬무참(閃舞斬).
그 선 위에 들어온 늑대의 주둥이가, 우루크의 하반신이 육신으로부터 절단되었다.
종이가 찢겨지듯, 말끔하게.
그 선과 똑같은 색의 선혈을 흩뿌리며, 무수한 늑대 기병들이 지면으로 곤두박질치며 도륙됐다.
“네놈, 무슨…….”
죽어가는, 그리고 아직 덜 죽은 마물들의 비명이 휘몰아쳤다.
“볼에 발크루쉬 낙인을 찍은 외날검의 검사, 네놈은 설마…….”
무어라 뇌까리는 우루크의 머리통을 군홧발로 밟아 터뜨렸다.
그 소리를 함성으로 대체하며 적은 계속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칼날을 휘둘러 피 고랑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털어내는데 아라다만텔이 차갑게 울었다.
머리가 터지기 직전에 우루크가 지껄인 말이 전장의 메아리로 귓가에 잠시 머물렀다.
“카이센, 카이센 키슌칼리하츠(키슌을 벤 카이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