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70)
가짜 용사 이야기-270화(270/310)
시즌 3 : 78화
요한은 <슈리가나큐스>로 향하는 열차의 일등 객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카밀라의 기억 속에서, 요한은 늘 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이 모두가 잠든 시간 속이라 해도.
언젠가 그 이유를 물으니 “스승님이 그러셨는데, 지식이란 칼과 같아서, 항상 연마하지 않으면 무뎌진대……”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야.”
그 맞은편 좌석에 짐짓 불량스럽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먼저 그 정강이를 군홧발로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응?”
늘, 책에 집중하느라 기척을 알아보지 못했다며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미소를 짓는 너.
그 눈동자가, 맑고 푸르렀다.
그때까지 지나온 모든 시간과, 또 훗날 사명의 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시간 속에, 늘 그 미소가 함께 있었다.
– 카밀라, 너 요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젠장…….
언니가 그딴 질문만 안 했어도.
– 맺어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이 훈장을 받기까지의 모든 활약의 뒤편에는 항상 요한이 있었다. 그 녀석이 곁에 없었더라면 성립되지 않았을 무훈들뿐이었다.
– 뭐…… 음침한 것만 빼면 좋은 녀석이지. 마법사란 족속은 대부분 험한 일을 싫어하면서도 자기과시만 심한데 걔는 누구보다 출중하면서도 겸손하잖아.
멜레브 학파의 페닐이나 델프레드 울프 블라도같이 일선에 서는 마법사들은 극소수다. 마녀도 마찬가지고.
– 잘 아네. 요한은 능력도 좋은데 외모도 좋으니 여자들이 줄을 설 거야. 이번에 무훈도 엄청나게 세웠고. 용사가 되면 빼앗겨 버릴지도 모르는데?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어쩌면 그때…….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그날, 바람에 그 연푸른빛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웃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반한 걸지도 몰라…….
– 나도 서자거든.
하지만 이미 뜻은 정해졌다. 페이쿼리어는 금혼 서약 위에 성립된다.
모든 것을…….
가족조차도 버리고…….
인류의 칼날이자 인류의 등불로서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서약 위에서.
– 그래?
에쉬르는 카밀라의 단호한 눈빛에 쓴웃음을 지었다.
– 그러면 요한에게도 확실하게 말해두는 게 좋겠다. 카밀라는 눈치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요한이 널 좋아하는 게 남들 눈에는 딱 보이거든.
풋풋한 소년이었던 요한은 어느덧 미성의 청년으로 수려하게 자라나 있었다.
“나, 페이쿼리어가 되기로 결정했어.”
“?”
“여기에는 어떤 변수도 없어. 변경될 일도 없고.”
“???”
“그러니까 꿈 깨라고, 이 멍청한 녀석아.”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동자를 보니…… 순간적인 당혹감이 일었다.
아니 뭐야, 나 좋아한다며.
아무 반응도 없는데?
언니한테 속았나? 또 속았어?
에쉬르가 킥킥거리는 환영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반드시 응징해 주겠어…….’
주먹이 울었지만, 이미 말을 꺼냈으니 이야기는 마무리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니깐! 뭐! 요컨대! 대학에 가서 예쁘고? 출신 좋은? 여자 만나서 혼인도 하고 그러라고! 이 카밀라 님께서 네가 오만하게 날뛰는 동안 세상을 지켜줄 테니까.”
보통 이렇게 호통을 치면 특유의 ‘소심 모드’를 발동시키더니만, 이번에는 달랐다. 책의 글귀로 시선을 내리며 이렇게 묻는 것이다.
“페이쿼리어로 서임된 후에 병단에 받을 마법사라도 구한 거야?”
맞다, 미친…… 지금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으며 이마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 가서 이런 마법사를 구해?
델프레드 아저씨한테 늙어서도 인류를 위해 헌신하라고 협박해야 하나?
“아니, 그건 아닌데.”
책의 글귀를 들여다보던 요한의 크고 맑은 눈이, 청년의 홍조 속에서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럼 그때까지 내가 네 곁에 있을게.”
한겨울의 어느 날, 얼어붙은 호수에 첫 여명이 비칠 때의 아련한 눈부심으로…….
그러한 가슴 떨림으로…….
평생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그렇기에 더 아름답게 새겨진 그날의 떨림…….
“저길 봐, 카밀라. 은하수야. 밖에 나가서 볼까?”
별들, 밤하늘의 별들.
비네사가 말한, 달이 없는 밤을 눈부시게 밝히는 별들의 파도가 차창 너머에서 망막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요한에게 이끌려, 객차 밖으로 나가 그 밤하늘의 분위기와 공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야.”
“?”
“덥잖아, 십.”
건조하면서도 무더운 대기.
일률적 박자로 흔들리는 열차.
마음에도 없는 투정.
“얼음 마법 써드림.”
“진작 했어야지. 폐급 녀석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막말.
그래도 되는 상대.
평소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 사이.
“너 근데 그때 어떻게 한 거야?”
“뭘.”
“이바요른을 잡을 때, 네가 달려들기도 전에 예지안(豫知眼)이 터져 버렸다고.”
아무런 가식 없이 웃고.
아무런 가식 없이 떠들고.
“그래?”
“몰랐다고?”
“나도 뭔가 늦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놈이 맞다 죽데.”
그래도 되고.
그럴 수 있던.
내 삶의 유일한 남자.
“아!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검기라도 발현시킨 거 아닐까? 크크,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지. 이 천재 카밀라 님인데.”
“흠, 에쉬르 님이 뭔가 했나…….”
“내가, 내가 했다니까 그 반응은 뭔데! 이게 진짜 죽고 싶나! 이 안경이 본체인 음침한 새캬!”
“자, 잠깐만! 진정해! 이러다 열차 밖으로 떨어져! 으악!”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는 남자와 함께 올려다보는 하늘이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워지는 것인지…….
용사는 이 모든 걸…….
이렇게나 눈부신 것을…….
속세의 기쁨이기에 전부 내려놓아야만 하는구나…….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어, 요한.’
카밀라는 사명을 마치고 죽게 되던 그날까지, 그 순간 느꼈던 모든 오감의 떨림을 기억했다.
물론, 두 사람이 그 떨림을 솔직하게 주고받는 일은 평생 오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그날 그 은하수 아래에서 했던 약속을 평생 동안 지켰다.
오직.
그 기나긴 삶에서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함으로써.
모든 악몽이 끝나고, 영원한 봄이 피어나고…… 늙어 죽게 되던 그날까지.
악몽전야(惡夢前夜), 춘몽의 끝과 늦여름의 시작 (2)
청성 미른가디아는 <라프타스>로 향하는 행렬을 선도했다.
이처럼, 예언자(預言者)의 출현에 대비해 대행렬에는 언제나 삼영룡 중 하나가 붙었다.
뇌향의 세츠넨은 <슈리가나큐스>에 남았다. 모든 이들의 마음의 평안이 깃든 걸 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던 뇌향은 순간 몸을 비틀었다.
‘결계가……?’
홍염의 장작, 아키레아 언니가 남기고 간 불꽃이 위치한 곳에 펼쳐둔 결계가 깨졌다…….
‘……<화염만리(火焰萬里)>가 위험해.’
* * *
<화염만리(火焰萬里)>는 문명 세계의 끝단에 위치한다.
세계의 끝이라 불리지만, 그 아래로도 세계는 펼쳐져 있었다. 마계(魔界)라는 이름으로.
<화염만리>는 12세기 동란기의 마지막에 세워져서 처절했던 동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리스타 용사 파티가 활약한 그 동란의 시대다.
대륙을 완전히 분할한 불…….
그 신묘한 불꽃은 서쪽 해안 끝에서부터 동쪽 해안 끝까지 솟구쳐 인계와 마계를 구별시켰는데, 그것이 황금시대의 시작이다.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 불이 희생의 불이라는 건.
삼신룡 중 하나, 화룡 벨’다키둔이 자신의 혼과 육을 폭주시켜 벽의 형태로 고정시킨 것이 바로 <화염만리>였다.
남겨진 적룡 군단은 이 불길의 장작으로서, ‘불의 아버지’가 그랬듯 스스로의 혼과 육신을 태워 그 벽을 유지해 왔었다.
적룡이 단 하나, 홍염의 아키레아만 남은 이 시대에는 그 장작의 역할을 홍염의 불꽃이 행하고 있었다.
말이 불꽃이지.
그 또한 혼의 파편이다.
예언자(預言者)는, 이 오랜 시간 동안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지켜져온 불꽃을 오랫동안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염보다도 더 고고한 용린을 뽐내던 네 위용은 어디로 가고,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벨.」
벨이라는 애칭은 <온 것들>의 수장이었던 테르시아가 벨’다키둔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즉, 기원전 시대의 유산이었다.
그 시대의 이들만이 아는 별명.
현 인류가 화룡을 벨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참형에 처해져야 마땅하겠으나, 기원전의 상급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엘디아 기사들, 즉 진용사들은 삼신룡 모두를 아꼈으나 엘디아 뮤(04) 뤼카엘은 그중에서도 특히 벨을 크게 아꼈다고 한다.
「…….」
불꽃의 벽에서는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혼이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가버린 것일까.
‘벨…….’
예언자는 서글프게 웃었다.
‘순박하고 활기차게 웃던 아이였는데.’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돌려 저 삶을 계속 비참하게 유지하게 만드는 것…… 홍염의 장작을 노려보았다.
「이제 그 말도 안 되는 노역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마. 그만 편히 쉬어라.」
예언자가, 뤼카엘이 등에 찬 전용 진성검을 발검했다.
요니울란의 빛이 포효한다.
시공간의 연결조차도 끊어내는 초월적 권위가 칼날 위로 소용돌이친다.
순간.
그 순간.
요니울란을 휘두르려던 순간.
하늘 문이 황금의 잔상 속에서 열리고, 낙뢰(落雷)가 창공에 균열을 일으키며 쇄도했다.
채애애애애애앵────!
칼자루 쥔 손에서 아찔하게 명동하는 손맛을 느끼며 뤼카엘은 오랜만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 감각, 오랜만인데.
내 참격을 이렇게나 깨끗하게 맞받아치다니, 이 미친 세계에 아직 이 정도로 검을 휘두를 줄 아는 존재가 남아 있었나?
「멈춰 주십시오, 뤼카엘 님.」
빛이 형상을 입었다.
낡은 삿갓 아래로, 뇌광처럼 찰랑이는 금발은 자연적인 위엄을 거느렸다.
칠흑의 수녀복은 황금의 용린과 조화를 이루며 복장이 엮였는데, 그 손에 쥔 병장기의 형태가 실로 흥미로웠다.
‘참마검(斬馬劍)이라…….’
참마검이란 군마를 베거나 그 위의 기수를 베기 위한 용도로 개발된 병장기였다.
자루의 규격은 창과 같고.
쇳덩이의 크기는 칼과 같다.
즉 창과 칼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는 셈인데, 뇌향의 참마검은 서슬 부분의 크기가 대검의 형태로 거대했다.
「그래, 바로 알아보겠어. 너의 그 기운…… 재미있군. 아서에게 삼켜졌을 때 창을 다루는 기억을 받기라도 한 거냐?」
아서, 라는 인명에 뇌향의 눈동자가 섬뜩 흔들렸다.
아서 브리우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불경한 별호를 얻은 인류 역사상 최강이자 최악의 검사. 놈의 칼날은 용의 심장까지 닿았다.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떻게 한낱 인간이 그런 비현실적인 힘을 얻었을까? 그 시대적인 의문이 단번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서의 스승이 바로 엘디아 뮤(04) 뤼카엘이었다니.’
아서는 십여 마리의 황룡을 베고 그 여의주를 강제로 취해 페이쿼리어 같은, 아니, 그보다 더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것이, 세츠넨의 기원(起源).
용현 레인 루드윅이 드래곤 슬레이어를 쓰러뜨리기 전까지, 뇌향은 십여 개의 여의주가 인간의 영혼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인 고통의 집합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떨고 있군. 착각하지 마라. 네 떨림은 더 원초적인 거니. 창조될 때부터 너와 나는 격 자체가 달랐다. 엘디아는 카렌덴이 만든 전투 생명체 중에 최강, 네 근본인 삼신룡조차도 우리들의 아래였지.」
「그렇기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엘디아이시여,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시는 겁니까?」
「그 이유가 지금 바로 네 앞에, 저 수평선 전체에 펼쳐져 있건만! 그딴 질문이 잘도 나오는군.」
비정상적인 다혈질…….
역시 상태가 기이하다…….
「그 머리의 색채…… 엘디아는 잿빛 머리를 가진다고 했는데 심연의 색채를 갖고 계신 건 어째서입니까?」
「잠시 그 힘을 이용했을 뿐이다. 요토스는 내가 죽인다. 세상을 응당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린 후에.」
「부디, 이러지 마십시오.」
「넌 나한테 명령은커녕 말조차도 못 붙일 계위(階位)인데. 삼신룡도 발언권을 얻은 후에야 우리 앞에서 말할 수 있었지.」
「정녕 타협의 여지는 없습니까?」
「없다.」
극지의 지열(地熱) 속에서, 땅이 죽음의 악취와도 같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아니…….
태양열도 지열도 아니고, 온전히 지금 눈앞의 존재가 토해내는 살인적이고 초월적인 살기(殺氣) 때문에 전신이 고통스레 떨린다.
– 넨,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 그 힘없고 여린 이들의 마음을 네가 지켜주렴.
한순간, 뇌향의 주위를 눈부시게 맴돌던 전광이 폭주하더니 그 육신을 굳건히 휘감았다.
빛이 새로운 형상을 일궈낸다.
그건 바로 용린갑(龍鱗甲), 드래곤 슬레이어가 용린 중 가장 견고한 부위만을 조합해 만든 갑주.
「아버지, 오늘도 제가 가야 할 길 위에서 동행해 주세요.」
일순간 시야에서 빛이 소멸했다. 필멸의 시각으로는 그것밖에 좇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엘디아는 보았다.
사라진 게 아니라, 뇌향이 육신을 광원(光源)으로 뒤바꿔서 광속(光束)을 취했다는 것을.
쩌어어어어엉……!
뇌명의 창날을 옛 진성검이 쳐내는 충격은 눈이 아릿할 정도로 요란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요니울란의 칼날이 뱀처럼 굽이치며 창날을 휘감았는데, 그대로 분자 단위로 찢어발겨 소멸시킬 심산이었다.
「!」
그러나, 그렇게 되기 직전 창날이 빛의 입자로 흩어졌다.
무기가 변한다?
아니, 창날만 사라졌어.
또 뇌향은 간격을 벌리기는커녕 창날이 사라진 봉을 극도로 현란하게 휘두르며 뤼카엘을 압박했다.
‘빠른데?’
진성검 요니울란의 반격은 빛으로 변하며 피해낸다.
‘끄트머리에 달린 건 단순 장식이 아니었군. 봉이 아니라 석장이었단 말이지?’
오사리우스 학파의 제자가 이곳에 있었더라면, 지금 저 봉술을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으리라.
저건 오사리우스식 봉술.
대마법사 린이 리스타 알터 쉬르팽에게 배운 실용적인 봉술로, 린 사후에 학파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또한 저 석장은 금영장(錦營杖).
추기경 요슈하르가 린에게 선물로 주었던 빛의 병장기였다. 요컨대, 옛 린의 무예가 지금 저기서 몇십 배는 강대해져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기이한 움직임이군.’
직격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했던 석장의 밑동에서 순간 빛의 창날이 다시금 엮어졌다.
창날이 아니야, 칼날이다.
순간적으로 자루를 다루는 손의 움직임이 변한다. 저 긴 자루를 이용해 펼치는 건 명백한 검술, 그것도 대검술(大劍術)이었다.
───채애애애애앵!
두 번째의 직격타…… 오랜만에 제대로 느껴보는 울혈의 맛에 뤼카엘은 적잖이 놀라워해야 했다.
내 육신이 둔해졌나?
아니, 인정해 줘야겠군. 실로 걸출한 실력이다.
‘최고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핵(核)이 순식간에 노출되겠어.’
무엇보다, 난생처음 보는 검술이야. 성검을 완전 해방해야만 하는 상대는 대체 얼마 만인지?
‘대검술과 창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술을 조합해서 쓰는군.’
누구한테 배운 거지?
스승이 둘이었던 건가?
뤼카엘의 애제자였던 아서는 결국 인간 남자였기에, 남자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창술을 근본으로 두는 창검술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 녀석은 달라.’
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대검술과 봉술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구현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뇌향의 세츠넨은 홍염과 청성과 달리 용현 레인 루드윅과 그 배우자 미리아 루드윅의 슬하에서 친딸처럼 자라났으니까.
세상은, 역사는 두 인물의 정확한 정체를 모른다.
용현은 린이며.
미리아는 리스타라는 걸.
옛 삶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뒤늦게 이룬, 행복이 넘치는 그곳에서 뇌향은 두 영웅에게 그들의 장기를 배울 수 있었다.
용현에게는 마법과 봉술을.
리스타에게는 대검술을.
용현의 봉술의 원류가 리스타였으므로, 리스타에게 세계가 오사리우스식 봉술이라 명명한 봉술의 극치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술이다.
첫 동란의 때에 그 마(魔)의 물결을 분쇄했던 영웅 리스타의 검을 처음부터 끝에 도달할 때까지, 눈물겹도록 지극히 풍성한 사랑 속에서 모두 배울 수 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삶의 자랑.’
홍염 아키레아는 붉은 진룡의 힘을 극한으로 다루며, 청성 미른가디아는 하얀 진룡의 힘을 옛 수룡에 가깝게 다루지만.
뇌향은 비룡 11기의 집합체.
선천적으로 격이 낮아서, 아니, 선천적인 격이 낮았기에, 그 두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배움의 과정 속에서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고 그 사랑마저도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이 어찌 평생의 자랑이 아닐 수 있으랴.’
리스타의 극의, 정점에 도달한 검의 기억을 쉬르팽에 각인까지 시켰던 시공섬(時空殲).
그것을 모방한 기술.
광속으로 날려 중첩시키는 십여 번의 뇌명(雷鳴)이 음속의 세계를 찢고, 용현에게 배운 공간계 마법으로 시공을 분열시켜 그 위력을 섭리에 닿도록 증강시킨다.
그 이름, 뇌벽섬(雷霹閃).
시공조차 전율하는 뇌전의 기운이 뤼카엘을, 뤼카엘이 위치한 공간 전체를 분열시킨다.
그리고.
다시 빛으로의 위상 전환, 옛 필두 엘디아 알카이오스의 전투 방식을 본뜬 이 광속 이동으로 옛 엘디아의 배후를 잡는다.
「찢어발겨라, 요니울란.」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찬란한 광염으로 이 극지의 모든 것을 새하얗게 밝히던, 그 모든 승리의 전조들이.
일순간(一瞬間).
파열된다, 찢어발겨진다, 구조라는 것 사이에서 성립하는 연결의 힘을 잃고 완전히 끊어진다. 진성검 요니울란의 포효 앞에서.
「지금 누구 앞에서 그걸 흉내 내는 거냐. 알카이오스보다 열 배는 느린 것이.」
알카이오스의 참격은, <잊혀진 왕들>조차 쉬이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같은 엘디아로서도 참격이 이루어졌다는 걸 그 잔상이 남은 뒤에야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위력은 백배 약하고.」
옛 왕의 권위조차 잡아 뒤틀었던 요니울란의 포효는 그쯤에서 끝나지 않는다.
뇌향의 육신을 휘감는다.
용린갑의 장갑을 파괴하고 그 육신을 찢어발겨, 원류로, 곧 빛으로 되돌린다. 그렇게 되기 직전에, 뇌향이 빛으로 변했다.
「읍, 하아, 으읍, 하아아…….」
저만치 멀리, 꿇어앉다시피 겨우 착지한 뇌향의 꼴은 처참했다.
육신의 피인 용혈과 영혼의 피인 광입자가 사지의 접합부 전체에서 터져 나왔는데, 어떠한 재생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요니울란이 육신이 가진 재생 세포와 영혼이 가진 재생의 힘조차도 모두 찢어발겨 냈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사지가 끊어졌을 것이다.
「아서의 갑주를 입은 것이 괘씸해 죽일까 했지만, 알카이오스를 따라 한 정성이 갸륵하니 살려주마. 가라, 가서 알려라.」
요니울란의 빛은, 그 강대한 힘은 아직도 칼날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있었다.
「지금, 오늘에야!」
뤼카엘도 그걸 거두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세상이 가야 할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노라고!」
거두기는커녕, 저 뒤쪽, 오랜 세월 세계를 심연(深淵)으로부터 격리하고 수호해온 화룡의 유산, <화염만리>를 향해 전력으로 휘둘렀다.
「오직, 선택받은 자들과!」
먼저, 아키레아의 혼의 일부인 홍염의 장작이 그 힘에 파열되면서 덧없이 소멸했다.
「선택받을 수 있도록 피 흘리며 노력한 자만이 살아남는!」
그리고.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세계가!」
장렬한 화염의 벽이, 평화의 장막이, 구슬픈 비명처럼 들리는 파열음과 함께…… 찢어진다, 분열한다, 소멸한다.
「아, 아아, 아, 아아아…….」
뇌향은 내뱉어야 하는데 내뱉을 수 없고, 토해내야 하는데 토해낼 수 없는 비명에 짓눌려 신음만을 흘렸다.
‘아버지, 절 용서해 주세요…….’
저 너머…….
‘제가 부족해서, 제가 너무 부족해서, 지키지 못했어요…….’
화염의 장벽이 사라져 가면서 보이는 화산재와 용암의 세계, 그 마(魔)의 지평선으로부터, 눈에 담을 수도 없이 거대하게 밀려드는 멸망의 물결을 목도하면서.
‘이 세상도,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지켜주라는 아버지와의 약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