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83)
가짜 용사 이야기-283화(283/310)
시즌 3 : 91화
「눈을 떠라, 카밀라.」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흑연(黑煙)에 휩싸여 있었다.
이건 무슨 종류의 안개지?
폭연에 맞먹을 정도로 짙고 농밀했으나, 사특한 느낌이나 답답한 느낌 하나 없었다.
‘오히려 이건…….’
새벽안개에 가까운, 아니, 새벽안개보다도 더 따스하고, 상쾌하고, 거룩한…… 창세의 신비.
“여긴 어디죠? 누구세요?”
그 안개의 영역 너머에, 어떠한 빛이 인영(人影)을 이루고 서 있었다.
「네 소명은, 네가 운반해야만 할 빛은 아직 푯대에 도달하지 않았다.」
어느 세상에 이렇게나 따스한 빛이 있을까? 뇌향의 세츠넨조차도 이 정도의 온기는 전해주지 못했는데.
“제가 운반해야 할 빛……?”
그때까지 머릿속이 몽롱했는데, 순간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의 기억이 뇌리로 흘러들었다.
맞아…….
나는 오우칸과…….
지금 전황이 어떻게 됐을까. 아니, 그보다 지금 여긴 어디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된 거지? 순간 기억이 각성했다.
분명…….
죽음을 직감한 순간 분명…….
따악…….
손가락을 튕긴 소리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을 때린 소리 같기도 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 소리에.
세상의 소음이 끊어졌다.
목전까지 시뻘겋게 들이닥쳤던 용암의 격류가 어처구니없이 멈춰 있었다.
‘꿈을 꾸는 건가?’
멍하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이곳에 와 있던 것이다. 그럼 사후세계로 온 건가?
「너는 죽지 않았다. 여기는 사후세계도 아니며, 내가 순간적으로 빚어낸 영역에 불과하지.」
불현듯 빛이 손가락을 튕기자, 흑연이 걷히며 이 세계의 수평선이 말끔하게 걷혔다.
그것은 빛의 지평선.
지평선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서 있었는데, 맨 앞에는 잿빛 머리를 가진 다섯 용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엘디아……?’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백발의 머리카락을 나부끼고 있었는데, 각자 등에 찬 극위성검으로 보아 역대 페이쿼리어들로 보였다.
아니, 확실했다.
그 끄트머리에 스승님을 비롯한 현대의 페이쿼리어들이 도열해 있고…… 그 뒤에는 또 자신이 서 있었으므로.
「너희의 소명은 창세의 빛을 잇는 것이다. 그 빛이 꺼지지 않게, 그 불꽃이 풍랑 속에서 사그라지지 않게 지키고, 또 후대에 넘겨주는 싸움이다.」
“……?”
「너희는 용령에 기대 미약한 불꽃을 휘두를 뿐이나, 너희 소명의 끝에 올 자가 있으니, 그자는 창세의 빛을 휘둘러 이 전쟁을, 심연(深淵)을 끝장낼 것이다.」
순간, 눈부신 광휘가 뒤쪽으로부터 비쳐왔다. 등 돌리고 서 있었는데도 눈이 부실 정도라니…….
어떻게 이런 빛이…….
이렇게나 밝고, 이렇게나 창대하고, 또 이렇게나 강대한 빛이 있을 수 있구나. 눈이 멀까 봐 돌아볼 수조차 없어…….
‘이 빛 앞에서 어떤 암흑이 버틸 수 있을까…….’
왜인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눈물이 흘러 사위가 뿌옇게 부서졌다.
이것은, 소녀는 아직 알지 못하는 먼 미래로부터 오는 슬픔과 그리움과 반가움의 떨림이었다.
그걸 알 수 없기에, 소녀는 단지 지금까지의 그 끝없고 끝없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깨달음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 알카이오스와 카듀엘, 그 개죽음의 계보가 너희들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너희는 <온 것들>에게 세뇌된 것뿐이야. 희생은 고상하다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자야말로 위대하다고.
개죽음이 아니야.
헛되이 죽은 게 아니었어.
다, 모두 다, 이 마지막 빛이 올 시간을 지켜내기 위해, 이 마지막 빛이 올 길을 예비하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거야…….
「알마(01)는 시작이요, 오메크(06)는 끝이니. 시작과 끝이 있으려면 그 양쪽 점(點)을 잇는 선(線)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창세의 뜻이 너희들에게 내리신 소명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두 샤릴리온(Syalilion;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그 빛의 지평선이 신기루처럼 가물거리면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아아, 싫다.
아아, 더 보고 싶다.
이걸 그림으로 담아낼 실력이 있다면, 사진으로 찍어낼 수만 있다면, 모두에게 이 눈물겨운 정경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내가 부족해서, 내가 대의보다 사익(私益)을 우선해서, 너희들에게 이토록 크고 무겁고 슬픈 짐을 넘기게 된 것을 진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런데, 목소리에 눈물이 스며든 것은 카밀라가 아니라 저 흑연의 빛이었다.
「너희는 결코 나를 용서하지 마라.」
반격전야, 화산 지대 고공 침투 (4)
압도적인 광량이 벼락의 형상으로 응결되어 화산의 축복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
“!”
“!”
그 천공의 힘, 그 광력을 이기지 못하고 오우칸의 무릎이 꺾이며 쓰러졌다.
저 기원전의 시대.
테르벨의 뇌창이 마침내 도마뱀 군주, 네이갈라스의 핵(核)을 꿰뚫었을 때와 똑같이.
이어, 빛의 낙뢰가 폭발한다.
그 빛이 잔물결처럼, 균열처럼, 오우칸의 육신 전체로 퍼진다. 그 균열 속에서 빛이 넘쳐나다 못해 포화 상태에 이르고, 마침내 그 육신을 소각(燒却)시킨다.
“크흡…….”
아이딘이 입으로 각혈을 쏟으며 무릎을 꿇다 못해 모로 쓰러졌다.
창세와의 소통, 그중에서도 징벌에 속하는 성언들은 본래 창세신들의 주관이었으므로 필멸의 육신에 거대한 부담을 주었다.
지금, 내장이 몇 개는 터지거나 짓물러졌을 것이다.
심지어 여명뢰는 성언의 구절이 가장 긴 축에 속했다.
이는 위력이 제일 크단 뜻인데, 방금 이것도 다섯 배는 족히 축약시킨 것이었다.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기도 시간이 너무 길어서 허점이 노출되고, 또 표적의 좌표가 어지간해서는 고정되지도 아니다.
특수 전력으로부터 호위를 받아야 하고, 어떻게 시전에 성공했다 한들 명중을 장담하긴 어려웠다.
지금은 라미네아와 에쉬르의 압박이 표적의 움직임을 단순하다 못해 아예 일직선으로 만들어 주었기에 쉽게 성공시킨 것이지…….
‘그래도, 그래도…….’
무리를 해서라도 써서 다행이야.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동료들을 잃은 무력감 속에서 죽어 갔을지도 몰라.
나도, 라미네아와 에쉬르도…….
“사제님!”
“사제님!”
궤멸에 가까운 피해 속에서 살아남은 혈마 병단 단원들이 아이딘에게로 다급히 달려왔다.
‘아이딘…….’
아직도 작열하는 빛의 포화 속에서 덧없이 흩어져가는 오우칸의 잔해 위로 내려앉은 라미네아는 그쪽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럴 힘이, 여력이 없었다.
이제, 아니, 여전히 이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하나. 제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 다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그 미소도 볼 수 없는 길 위에서.
‘또 다른 제자를 받아야 하나?’
카미라는 존재가 남긴 슬픔이 이렇게나 큰데, 이 공간 속에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는 땅이 아닌 마음에 그 자식을 묻는다는데…….
첫 제자의 죽음만으로 그녀의 마음속은 포화 상태에 가까웠다.
– 스승님.
– 스승님?
– 스승님!
아직도 그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남은 것일까.
가슴을, 영혼을 찌르르 에는 고통 속에서 눈물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았다.
울어지지 않는 울음을 아라다만텔이 대신 울어주었다. 높고, 가냘프고, 또 슬프게…… 아니, 이건 슬픔이 아니라, 어라?
스르르륵…….
아라다만텔의 울음이 슬픔이 아니라 재회의 기쁨에서 우러난 것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 검은 안개가 풀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일까, 한순간 스스로의 오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우칸의 육신이 완전히 바스러진 그 한복판에서, 화산의 폭연과 색은 비슷하되 그 결은 어딘가 다른 듯한…… 안개가 있었다.
안개는 누에고치 같았다.
안개는 무언가를 휘감고 있었는데, 실이 풀리듯 흩어지는 안개의 틈새로, ‘그것’이 보였다.
“어……?”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이제는 오직 꿈에서만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존재의 모습이.
카미……?
그 모습이 시신경 너머에 상으로 맺히고, 그 해석 정보가 뇌로 전달되기 전에 이미 라미네아의 몸은 뛰고 있었다.
뛰고…….
또 뛰어서…….
무릎으로 몸을 미끄러뜨려…….
안개가 완전히 소멸하면서, 어른의 키조차도 못 되는 고도에서 떨어지는 그 존재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이건, 꿈인가?
이건, 환상인가?
시각, 촉각, 후각, 그 모든 것이 분명한 현실을 증명해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확신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렸다.
영원 같은 찰나를 망설였다.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건틀렛을 부술 듯이 뜯어내고, 맨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제자의 호흡기 위에 올려놓기까지의 한순간이.
공기의 떨림이 느껴진다.
숨이, 호흡이 붙어 있었다.
라미네아는 아까 에쉬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봤던 순간…… 이미 마음속에서 구슬피 치솟던 울음이…… 끝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제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는 자신의 곁에서 위험한 곳으로 떨어뜨려 놓지 않겠단 듯이, 제자의 몸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카밀라, 너 맞아……?”
그 옆으로 멍하니 다가간 에쉬르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카밀라의 머리에 손을 얹어보았다.
똑같은 감촉, 똑같은 감각…….
함께 웃고 떠들 때, 웃고 떠들어온 몇 년 동안 느껴온 것과 완전히 똑같은…… 에쉬르의 시야도 희뿌옇게 젖었다.
‘아니, 아니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은 혈마 병단의 부단장이었고, 아직 병단은 임무 수행 중이었다.
[에쉬르 : 상황 종료. 철도역 확보 완료. 반복합니다, 철도역 확보 완료.] [델프레드 : 본부, 시가지 전체를 제압했습니다만 적정을 살피니…… 봉우리 밑에서 놈들이 더 몰려옵니다. <바네시스> 요새화 작전을 위해 증원이 절실합니다.] [크라우잔 : 두 병단 모두 활약이 실로 컸다. 태산과 흑장미 병단도 작전 성공 직전이란 소식이 들어왔다. 교신 끝.] [타르스 : 본부, 여기는 태산. 현수교 및 철도 확보 완료. 전투공병대, 이동해도 좋다.] [모슬랑 : 확인했다, 태산. 제독님, 전투공병대 이동하겠습니다.] [할바론 : 알겠다.] [플로렛 : 혈마, 여기는 흑장미. 현재 수비대가 성문을 열고 있어. <슈리가나큐스> 내부 진입까지 3분, 합류가 가능한 상황인지 보고 바란다, 이상.]에쉬르가 휘파람을 불어 군마를, 그리고 병단 대원들을 소집했다. 철도역 방위를 인계받기 위해 홍련 병단이 오고 있다.
[에쉬르 : 흑장미, 여기는 혈마. 지금 바로 가겠어요. 샤론은 의식이 없어서 못 가겠지만, 걱정 마세요. 생명에는 지장 없어요.] [플로렛 : 에쉬르, 알았어. 좋은 소식 고맙고. 먼저 진입하고, 네가 <슈리가나큐스>로 도착하면 필요한 곳으로 교신을 보내줄게.] [타르스 : 현수교에 적 위험은 없다. 전투공병대는 8-8-2 방향으로 뇌향 각하를 이송해도 좋다. 뇌향심공명진을 <슈리가나큐스> 내부에 전개시키는 작전을 이행하라, 이상.]에쉬르도 도시 진입 부대에 합류하려던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서 말의 고삐를 잡았다.
“저도, 저도 데려가 주세요.”
“안 돼, 로로. 넌 지금…… 넌 부상자야. 그것도 중상! 여기 있다가 가장 첫 번째 열차를 타고 후방으로 가야 해.”
로베리스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 짧고도 다급한 시간에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페이지 가문은 예지몽을 꾸는데, 자신이 근래 이상한 꿈을 꾼다고. 피바다 위에 주검들이 징검돌처럼 떠 있고, 그 징검돌 끝에 스승님이 서 계시는 꿈을.
그리고…….
스승님은 횃불 하나를 들고 계시는데, 그 횃불을 자기에게 넘겨주시며 웃는 꿈을 꾼다고…….
“스승님 곁으로만 보내주세요. 도시로는 들어가지 않을게요.”
에쉬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똑같은 상황이었더라면, 자신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만약 따라가지 못했는데, 그 함께하지 못한 곳에서 스승님을 잃게 되는 슬픔을, 그 끝을 함께하지 못한 아픔을…… 이 아이에게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에쉬르 : 타르스 선배님, 로로가 왼팔을 잃었는데도 선배님 곁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데 선배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타르스 : 오지 마, 로로. 이렇게 말해도 올 거지?] [로베리스 : 가고 싶어요.] [타르스 : 에쉬르, 내 제자가 민폐를 끼쳐 미안해. 저 녀석 항상 순종적이지만 어쩔 때는 말을 더럽게 안 듣거든. 지금도 널 안 놓아주려 하지? 그냥 보내줘.]에쉬르는 바로 로베리스를 안장 뒤로 끌어 올려주었다.
붕대를 감아서 지혈한 팔의 모습은 에쉬르에게 있어 무력감의 상징이었으므로 시선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저 앞만 본 채,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질렀다. 아이딘을 홍련 병단에게 인계한 병단 단원들이 따라왔다.
[크라우잔 : 여기는 사령부, 연락 부대에게 알린다. <바네시스> 및 현수교 제압 완료. 반복한다, 모든 목표 제압 완료. 봉화를 올려서 <바라>에서 대기 중인 열차들에게 발차 명령을 내리도록. 철수 작전이 2단계로 들어섰다. 태산 병단과 홍련 병단은 위치를 반드시 사수하라.]혈마 병단 기수들이 <바네시스>의 부서진 철도 옆을 내달리는데, 멀리서 지축을 흔드는 거신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할바론 : 인류 사령부, 여기는 제3특전단 지휘관. 현재 <바네시스> 요지에 이동포 부대를 전개하는 중이다. <슈리가나큐스> 내부까지 닿을 수 있도록 곡사포 궤도를 설정 중.]에쉬르는 고개를 들었다.
화산재에 뒤덮이다 못해, 화산재가 시커멓게 소용돌이치는 붉은 도시 <슈리가나큐스>의 정경은 섬뜩하게 보였다.
[플로렛 : 여기는 흑장미, 본부에 알립니다. 지금 뇌향 각하가 탑승하신 궤도차가 도착했으므로 흑장미는 <슈리가나큐스> 내부로 진입해 성문과 인근 철도를 확보할게요. 반복합니다, <슈리가나큐스> 내부로 진입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