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86)
가짜 용사 이야기-286화(286/310)
시즌 3 : 94화
위기는 기회의 뒷면, <슈리가나큐스> 철수 작전 (3)
– 내, 좋은 사실을 하나 가르쳐주지.
청성의 기억 속 심연(深淵)과의 첫 조우는, 거미 군주의 제후 오본위(五本位) 중 필두…… 공안공(公黫公)을 용현이 토벌할 때 이뤄졌다.
– 우리의 왕, 지고하신 절대자 요티아토스 님께서 돌아오고 계신다.
그때, 어린 청성은 용현의 슬하에 있었다.
용현뿐만 아니라, 두 명의 누이 홍염의 아키레아와 뇌향의 세츠넨과 함께 세상을 거닐며 그 아름다움을 배워가던 유년기였다.
베샨시두그와의 전투는 그 유년기에 드리워진 첫 번째 그림자와도 같았다.
– 네놈들이 뒤바꾼 세계의 모습을 눈에 담아둬라. 이제 모두 무너지고, 다시 진정한 왕의 통치 아래로 돌아가게 되리니!
– ……?
–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게 되어 유감이구나! 공포와 절망으로 일그러진 네놈의 얼굴을! 아하하하하하!
용현은 그 그림자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다.
그날부터, <온 것들>의 문헌을 읽어 타르혜 론델의 봉화를 찾아다녔고 심연에 대항할 방법들을 연구하셨다.
심연의 공포는 책에도 상세히 적혀 있었으나, 용현이 이야기해 주는 내용이 더 현실감이 넘쳐서 듣기에 좋았다.
– 12세기 동란기, 네이갈라스의 육신을 깨운 마족들이 그 힘으로 단결해 북상하면서 참사ㆍ참해ㆍ참화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어.
– 참사, 사람들이 많이 죽음.
– 그래, 그런 뜻이지. 하지만 그런 언어로는 설명이 안 돼. 미르, 좋아하던 책이 찢어지면 기분이 어떠니?
– 감정을 다스리기 쉽지 않음.
– 사람의 죽음은 더하단다. 책은 똑같은 책을 새로 사면 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아. 죽으면 말이지?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돼.
그 이별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던 걸까.
– 그러니까 다시는.
평생을…….
한평생을…….
–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돼.
이 세상을 심연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방도를 찾아내고 또 연구하며 살아가셨다.
– 미르, 넌 정말 대단해. 책을 한 번만 봐도 그 내용을 다 외워 버리잖아.
– 의문스러움. 이건 아무나 못 하는 일임?
– 말할 것도 없지. 나조차도 안 돼. 미르에게는 창세의 섭리가 아주 큰 소명을 맡긴 게 분명해. 그러니까 그런 힘을 받은 거야. 그게 대체 뭘까, 너무 기대되는데?
돕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다.
그래서 심연의 수수께끼와 그에 대한 방책을 함께 연구해가기 시작했다.
– <온 것들>의 문헌을 연구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음. 사실 <온 것들>의 테르시아는 베르켄시아를 통해 <잊혀진 왕들>을 절멸시킬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함.
– ……?
– 그 목적은 KP-1 토벌이라고 적혀 있는데, KP-1은 최우선 작전목표라는데, 그건 요토스라는 이름을 지칭하고 있음. 그때 공안공이 말한 요티아토스라는 이름과 비슷함.
난제였다. 어째서 <온 것들>은 미봉책에 가까운, 봉인의 방식을 써야 했을까?
<잊혀진 왕들>을 완전히 없애 버렸더라면 영원한 새벽을 밝히는 게 가능했을 텐데. 어째서?
또 하나의 난제는, 요티아토스라는 언어가 가진 패악의 농도였다. 그 이름을 읊는 것뿐인데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 그래, 베샨시두그 그놈은 그때 분명 요토스란 존재를 두고 진정한 왕이라 했어. <잊혀진 왕들>보다 더 상위 격인 존재인가? <온 것들>은 그걸 토벌하기 위해 <잊혀진 왕들>을 죽이는 대신 봉인했단 소리고?
그 연구의 시간은 매우 신비한 비밀을 파헤치는 시간이었지만,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미봉책의 위기는 곧 찾아왔다.
<잊혀진 왕들> 중 가장 강대한 왕, 황제(皇帝) 아쉬론의 봉인이 깨져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 먼저 아쉬론의 봉인을 풀어서 제압한 뒤 다시 봉인하겠다니, 불가능함. 그게 성공할 리 없음. 너무 위험함.
– 미르, 지금 나는 성년이야. 인생에서 가장 강할 시기지.
– ……?
– 물론 내 생애에 아쉬론의 봉인이 풀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
– 잘 알면서 어째서 그런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것임…….
– 하지만 그다음은? 너희만 남겨졌을 때 놈이 깨어난다면? 아니면 내가 힘없는 늙은이가 됐을 때 깨어난다면?
– ……!
– 나는 그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너희를 위험으로 내모는 것보단, 내가 그 자리로 가는 게 백번 낫겠더라.
지금도.
지금 이 순간에도.
잊을 수 없는 건.
– 미르, 너는 착한 아이다. 선한 마음속에 냉철한 이성도 가졌지. 아키와 넨에게는 없는 소질이야.
그때, 머리에 손을 얹으며 지어 보이시던 당신의 미소. 울 것 같기도 한 미소.
– 그러니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가 누나들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게 잘 챙겨주렴.
그리고…….
어떻게 할 길 없는 무력감…….
– 사람이 죽으면 말이지? 다시는,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돼…….
두려웠다.
어떻게 할 수 없이 두려웠다.
세계수의 땅에 남겨진 채, 그 귀환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온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그때부터였다.
학식과 지식과 실력을 향한 앙망(仰望)이 갈망(渴望)으로 변하게 된 것은.
이보다 더 높은 상식, 이보다 더 드넓은 지식, 그 모든 것을 품어야만 당신과 같은 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물론, 역사가 기록돼 있듯이 용현은 아쉬론을 봉인하는 데 성공했고 성공적으로 생환했다.
하지만…….
그 두려운 경험은…….
어린 날, 어떤 고통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마음속에 남은 상처는 평생 사라지지 않았다.
– 미르, 이제 어느새 나보다 키가 더 커졌구나.
– 제 키도 컸지만 허리가 굽으신 것도 있습니다, 아버지.
– 녀석이, 나 정도면 허리가 곧은 편이다…….
청성에게 있어, 용현은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머릿속 학식을 모두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 어떤 비유로 설명해줄 필요 없이, 스스로의 전부를 드러내도 그 전부를 모두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 하지만 생명의 흐름을 읽다 보니 내 끝도 거의 다가왔다는 걸 알겠구나.
– 아버지.
– 늙으면서 잠이 적어져서, 하르바도니아(Harbadonia; 설경, 아크라드 대륙 북부를 지칭함)를 수색하며 <온 것들>의 문헌을 연구할 시간이 많아졌다. 제일 중요했던 건 카렌덴의 연구였어.
– 어떤 연구였습니까?
– 종전(終戰)을 위한 연구였다. 아니, 발명이라고 해야 하나?
– 종전?
– 엘디아 오메크(06) 프로젝트라더군. 오메크는 <온 것들>에게 숫자 6을 의미하는 동시에 끝을 의미하기도 했다. 즉, 마지막 장작이라는 뜻이 되겠지.
– ……!
– 법황청 사변, 시간의 군주가 깨어날 뻔했던 그 사건을 아느냐? 나는 그 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카렌덴께서 날 구해주시지 않았더라면.
–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 나는 세상의 멸망을 막을 존재가 아니라, 전달하는 존재라 하셨다.
– 전달? 무엇을요?
– 마지막 시대의 빛을.
그렇게 말할 때, 용현은 슬픈 미소를 짓고 계셨다.
이제 자신은, 심연이 닿지 않는 저 너머의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인데, 무엇 하나 이룬 게 없단 표정이었다.
물론 그 표정의 정확한 의미는 이별의 순간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렇게 말했다.
– 그러면 제가 마지막 시대의 빛이 되겠습니다.
– ……?
– <온 것들>이 점지한 빛이 아닐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렇다면 그 빛이 올 때까지 세상을 밝히는 호롱불이라도 되겠습니다.
지극히 부끄러운 발언이지만, 이건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당신을…….
오직, 당신을…….
나를 죽기까지 사랑해 주셨고 사랑해 주시고 또 사랑해주실 당신을 위해서.
– 그래서 언젠가, 심연이 전부 끝장나고 ‘온 세상의 새벽’이 밝은 순간, 빛의 전달자로서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이 완성되도록.
용현이 그렇게나 하염없이 울던 모습은, 옛 삶의 동료셨던 피피와 배우자 미리아 루드윅이 죽을 때 말고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보았다.
마지막 순간, 황혼 속에서 꽃봉오리를 펼치는 황혼초의 꽃밭 위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 앞으로 너희들이 감당해야 할 시대를 생각하니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그제야 알았다. 저번에 ‘마지막 시대의 빛’을 언급하시며 슬픈 미소를 지으셨던 이유를.
또 그제야 알았다.
내가 지금까지, 그러할 것이라 여겨왔던 용현의 감정은 모두 틀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알지 못하고 묻지 못했던 마음이 있으셨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알고 싶었다.
기억 속의 아버지께서는 어느 순간에나 맑게 웃고 계셨는데, 그 웃음 속에 숨겨진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동일한 웃음이 아니리라…….
웃음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것이라, 그 안에 깃든 마음이 따로 있을 것이리라.
그렇기에 목표가 정해졌다.
시간을 되돌려 용현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 마음을 알고 싶었으므로. 하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했으므로, 용현과 똑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면…….
그러면 언젠가…….
알게 되리라…….
그 많고 많던 웃음들이 품고 있던 마음들을, 그렇기에 네이갈라스는 반드시 봉인해야 했다. 용현이 아쉬론을 봉인하셨던 것처럼.
“나 원,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그러냐?”
이제는 결코 들려올 리 없는 목소리였건만, 선명한 미소와 함께 어깨에 손을 얹는 그분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버지…….
용현이 싱긋 웃었다. 끊기기 직전이었던 의식이 한순간에 전력으로 되돌아왔다.
「아주 다급해 보이는구나. 돌아가고 싶으냐? 출구를 찾아서라도? 하지만 그런 길은 없느니라. 호, 호, 호.」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 여태껏 방어 일변도를 고집해왔던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네이갈라스가 접근해 오도록.
술자와 술식 간의 거리에 따라 술식의 위력이 증강되는 건 피아간에 마찬가지다.
순백(純白).
순청(純靑).
백과 청의 뒤섞임이, 세계의 혼탁함을 맑게 저어 풀어낸다. 단지 그 두 가지의 색채만을 남긴다.
심연이 용암의 형태라면 성질도 비슷하여 물과 만났을 때 효과도 엇비슷하게 나타난다.
수온에 의해 용암의 겉면이 빠르게 냉각되는데(물론 내부에서는 용암이 계속 물을 밀쳐내기에, 형태는 타원형을 이룬다) 이를 베개용암이라 부른다.
「고작 물 따위로 용암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일순간의 냉각을 증폭시킨다.
「용암은 모든 대자연의 법칙조차 무시하는 포식자! 삼키지 못하는 것 하나 없거늘!」
물을 인공적으로 냉각하는 것과, 자연법칙의 냉각력을 증폭시키는 것 사이에는 차원이 다른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
창명의 호수…….
다음 순간, 청성이 결계를 느닷없이 거두어 버리면서 호면이 용암과 만나며 그 겉면을 냉각시키기 시작했다.
「가여운 것, 이제 힘이 다한 모양이구나. 흐, 흐, 그럼 어디─」
그 힘을 극대화한다.
「─주여소계대반, 개령(改令).」
폭발하듯 솟구치는 수폭(水爆)의 역장은 네이갈라스를 사면 전체로 뒤덮었다.
‘위기는.’
몇 겹이고, 몇 겹이고…….
‘기회의 뒷면.’
애당초 단순한 호수가 아니다.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창세의 메아리, 창조의 편린, 고요한 새벽을 노래하는 창세의 문자열.
…………………………………!
창명시편의 문자열에 새 어절과 음절을 붙여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니, 그 뜻은 동결(凍結).
섭리를 왜곡시키는 존재들을, 섭리 저 밖으로 추방하는 빛의 결정체들.
그 빛이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낸 힘이 도마뱀 군주가 속한 공간 전체를 격리시켰다. 아직도 붉게 타오르는 용암이 시퍼런 얼음의 빛 속에 사로잡혔다.
‘미흡했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미흡했다…….’
청성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 앞에는 연푸른빛 구체가 떠올라 있었다.
수평선의 절반을 가득 메우는 그 구체의 내부에는 왕의 핵(核)이 봉인돼 있었다.
‘누군가, 놈의 핵을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노출시켜줄 수 있었더라면…….’
<온 것들>과 아버지가 그러하셨듯, 핵을 정면으로 꿰뚫어 봉인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저…….
핵 주위의 공간을 무한의 결정체로 뒤덮어 얼려버렸을 뿐. 세츠넨의 도움만 받을 수 있었어도, 결과가 확연히 달랐을 텐데.
[타르스 : 각하, 청성 각하! 용암이 마족들까지 삼키기 시작하며 적진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 하하하! 렙틸리언들이 모래로 사라져 갑니다! 성공하셨군요!]이러면 머잖아 다시 봉인이…….
[니븐 : 정말, 말이 안 나옵니다! 혼자서 왕을 봉인하시다니! 용현과 똑같은 업적을 세우신 겁니다!]그러나 이것이 현재 청성이 할 수 있는 한계이자 최선이었다.
[메이트 : 각하, 지하에서 어서 나오셔야 합니다! <슈리가나큐스>가 이제 붕괴할 것 같습니다!]더 욕심을 내었다가는…….
[크라우잔 : 각하께서는 대답할 시간이 없으신 듯하네. 자네들은 휘하 병단을 이끌고 철수하게!]위에 남겨두고 온 아이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청성 : 청성 미른가디아가 전 부대에게 전파한다……. 곧 <슈리가나큐스>는 소멸한다……. 용암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기 전에 빠져나가라. <오르벤하임>에서 합류하겠다. 교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