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89)
가짜 용사 이야기-289화(289/310)
시즌 3 : 97화
<오르벤하임>에서 청성의 합류를 기다리는 열흘은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에게 있어 삶의 전환점과도 같았다.
수명의 소모.
천수의 한계.
죽음은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서서히 기력이 다해가는 육신으로부터 죽음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난 내가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기로 했어.”
사랑하는 남자와 처음으로 입을 맞춰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밤에 함께 잠에 들고, 함께 아침에 깨어나는 건?
“라미네아 경, 잠깐, 아니……!”
끝나가는 삶에 대한 허무감이 외로움이 되었던 걸까, 아니면 잔혹한 세상에 비행이라도 저질러서 시위해보고 싶었던 걸까.
단 하루의 일탈.
단 한 번의 군율 위반이었을 텐데…… 그로부터 닷새가 지났을 무렵 아랫배에 둔중하게 이는 충동을 느꼈다.
‘거짓말.’
이것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아픔이 아니었다.
생명의 태동…….
사람의 몸에서 사람이 낳아지는, 창조 질서의 충격이었다. 신체가 변질된 페이쿼리어이기에 수정과 착상의 과정이 더없이 빠른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불임의 몸이 되는데…….’
이건 창세의 선물일까?
매일 밤, 자포자기에 가깝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던 그 꿈의 내용을 이루어 주시기 위함인가?
“그러면 스승님이 예전에 말한 그 허무맹랑한 꿈도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비스킷…… 항상 제일 맛있는 걸로 가지고 다닐 테니까. 거울 보면서 입술 앞에 검지 세우면서 웃는 연습도 좀 하고요.”
그런데 제자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카미가 이걸 아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이딘도 모르고 있는데.
라미네아는 그날 밤, 바람이 흘러드는 창가에서 제자가 선물한 소검과 태내에서 새로이 맺힌 생명을 동시에 어루만지면서 숨죽여 울었다.
‘살고 싶다, 1년만이라도 좋으니, 더 살고 싶어. 그래서, 그래서…… 그 꿈을 카미와 함께 누려보고 싶어. 하루라도 좋아. 하루라도 좋으니까.’
내가 보고 배운 용사(勇士), ‘검은 여름’의 종막 (2)
그러나 꿈을 꿀 시간은 없었다.
청성 미른가디아가 <오르벤하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최고 지휘관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그래도 잠시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긴 했다.
“청성 각하께서 소집령을?”
“먼저 돌아오셨단 소리야?”
“백부님, 백부님!”
누구보다 밝게, 누구보다 빠르게 회의실로 향한 스승님의 미소가 비참하게 무너지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라미네아, 왔느냐…….」
청성, 미른가디아였다.
그런데 누구보다 지엄하고 고귀하게 말하던 그 목소리에 끔찍한 탁음이 꼈다.
울혈이 쏟아져 나온 소리였는데, 손으로 입을 가렸음에도 피가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로 출혈량이 많았다.
「……무엇을 하고 있느냐. 어서 자리에 앉아라.」
청성은 늘 새하얀 존재감을 갖고 있던 존재였다. 저렇게나 핼쑥하고 창백한 인상이 아니라.
“백부님, 도대체 어떻게, 몸이 왜 그렇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고, 청성은 설명할 수도 없었다.
거듭 시작된 기침 때문이었다.
청성은 <잊혀진 왕들>에게 홀로 맞섰고, 그 힘을 일시적으로 봉인하는 업적을 세웠다. 그 대가가 없을 리가 없건만…….
‘가능하다…….’
청성은 말할 수 없고, 말해선 안 되는 계산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딱 1년…….
지금 이 상태 이대로, 1년 정도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심연에 침식된 혼의 일부를 도려내서 버릴 수 있다.
‘힘은 크게 약화되겠지만, 심연의 침식을 차단하여 다시 일선에 서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없는 1년 동안, 세상이 어떤 꼴이 되어 있을까…….
그 1년 동안…….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 1년 동안 이 아이들은 이 세상에 저버려두고 내 몸을 돌보는 걸, 아버지가 기뻐하실 리가 없다…….
“회의를 주재하실 때가 아니잖아요, 백부님! 지금, 지금이라도 당장 법황청이나 세계수로 가셔서 몸의 요양을─!”
「─그만 앉아라, 이건 명령이다……. 낮은 저물고 밤이 시작되어 가니, 때가 급하다…….」
최고 지휘관 회의에 소집된 이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소스라칠 정도로 놀란 건 똑같았다.
그건 정말, 세 종족을 아우르는 모든 요인이 다 모인 자리였다.
요정만 해도 요정왕 사오로 엘 바텐베르크부터 황은의 사사 발브레이까지 무려 16인의 중역이 참석했다.
아인은 강철함대 제독 할바론과 부관 구스타프를 위시해 5인으로 제일 적었다.
가장 많은 건 인류로, 무려 53인이었다.
생존한 도원수 2인과 페이쿼리어 7인을 제외하고도, 아드리온 대륙에 뿌리를 두고 있던 망국의 왕이나 지휘관, 또 아크라드 대륙에 거점을 둔 제국의 제후나 왕국의 지휘관들이 여럿 있던 것이다.
여기에 일성칠검과 팔대학파나 무림, 마녀 협회 따위의 대표자들도 참가해 회의장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기 직전이었다.
「지금부터 작전 개요를 설명하겠으니, 잘 들어라…….」
다음 순간, 회의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당연히 예상한 일을 뒤엎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라노아 대교를…….”
“폭파시키지 않겠단……?”
“각하, 지금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라노아 대교는 타신 섬과 아드리온 대륙의 징검다리다.
이 광대한 다리가 없다면, 아드리온 대륙과 타신 섬은 해협을 통해 분리되어 자연적인 방어선을 설정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타신 섬이 앞으로 마족을 막아내는 최전선 방파제가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 다리를 완전히 무너뜨리려면 전력을 쏟아도 족히 10시간은 필요했다. 하지만 청성의 힘이라면 그보다 배는 짧게 가능할 터.
「해협의 너비가 그리 넓지 않으니, 마(魔)의 물결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또 이곳은 테르쉬 열도와의 거리가 멀어 병참 수급에도 차질이 생긴다. 이곳을 최전선으로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그러므로 이곳은 방어선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리멸렬(支離滅裂)의 지름길일지니……. 그러하므로 이곳을 최후 결전의 자리로 삼는다.」
모두가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대로 방어선이 설정되거나 철수가 진행되나 싶더니만, 최후 결전이라고?
「분신을 이용해 ‘순백의 꿈’에 접속하니, 흑교회의 첫 번째 기둥이 최초로 대교를 넘을 것이 예지되었다…….」
청성은 말하지 않았다.
예언자의 정체를.
이 결전이 끝난 뒤로도 관계된 모든 이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이를 위한 토벌대를 편성한다. 인류에서는 메이트, 제로니, 플로렛, 에쉬르로…… 총 네 명이며 요정에서는 사오로와 에베스란, 그리고 수인 중에서는 그리프베런을 뽑겠다…….」
“……!”
「일개 병사는 그 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호명된 이는 휘하 병대를 다른 곳에 배속시키고 혼자만 따라오너라.」
회의실이 시끄러워졌다.
스승님께서는 자신은 어디로 가냐며 물었고, 다른 이들은 예언자를 뒤따라오는 마족은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물었다.
「세츠넨의 의식이 점차 돌아오고 있으니, 그 힘을 이용해 토벌대와 예언자만 다른 공간으로 날릴 것이다.」
그렇게 생겨나는 틈새로 마족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올 것인즉, 적의 주력부대와의 격전은 남겨진 이들에게 맡긴다.
「홍련, 필중, 철성 병단은 크라우잔의 지휘를 받고, 발브레이는 요정병들을 지휘해 라노아 대교를 막도록…….」
“……!”
「강철함대는 토벌 작전이 시작되면 함상 포격을 라노아 대교에 집중하라. 9시간 안에 수몰시켜야 하니, 늦지 말라…….」
예언자 토벌전의 승산은 3할 정도이며, 그 상세 내용은 극히 중요한지라 관계자들에게만 전파할 것이라 덧붙였다.
회의실 분위기가 일변했다.
최종 결전이었으므로, 7할의 가능성으로 여기 있는 모두가 전멸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두의 침묵도 납득할 수 있었다.
「오늘, 너희의 죽음은 곧 생명의 떡이다. <온 것들>부터 시작해 용현에 이르기까지, 그 삶과 죽음은 너희들에게 일상(日常)이라는 떡을 내렸다.」
“……!”
「이제, 너희들이 그렇게 될 때다. 너희의 죽음이 세상의 생명을 주기 위한 살과 피가 될 때다. 세상이 너희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다시 살게 되리라.」
청성의 미른가디아는 자신의 논리가 뒤섞이는 모순을 느꼈다. 논리의 실타래가 풀리지 않았다.
그것은…….
그 까닭은…….
용현이 그에게 주었던 것은 진정 생명의 떡이었다.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창세의 섭리를 증명하는 사랑의 떡과 피였다.
지금…….
미른가디아가 이 무지하고 약하며 가녀린 것들을 기만해 강제로 먹이려는 죽음의 떡이 아니라.
“……각하, 테르쉬 열도로 후퇴해서 진용을 가다듬는 방안은 왜 안 되는지요?”
당신처럼 되고 싶었는데.
「불가하다. 상대가 테르쉬 열도를 우회하면 아크라드 대륙에 똑같은 학살이 자행될 것인즉, 아직은 그 방어선을 설정할 시간이 없다.」
당신을, 닮아가고 싶었는데.
“……각하, 그럼 그냥 여기에서, 저희들은 일당백의 싸움을 하다 죽어가야 하는 건지요?”
그래서.
삶의 마지막 날에.
“……죽고,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저는, 고향이, 가족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개죽음하려고 온 게 아닌데!”
“……돌아가겠습니다. 대륙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저희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내쳐지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을 다시 뵙게 되는 그날에, 내가 이룬 의(義)를 보여드리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어째서…….
닮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싸움을 원치 않는 자들은 모두 배에 타서 이곳을, 전장을 떠나라. 적전 도주나 항명 따위의 죄를 묻지 않겠다.」
첫 발소리가 들리기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누군가가 일어서자 그 물결이 모두의 마음을 휩쓸었다.
한 명, 한 명.
일성칠검을 비롯한 유명 검파들과 팔대학파들과 각종 명문가들이 떠나간다.
한 명, 또 한 명.
그중에는 염룡검파도 있었는데, 떠나는 장문인을 향해 올리에르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어? 아니, 장문 어른! 이, 이대로 가는 건지요?”
“어서 와라!”
“여기서 네가 죽으면, 네 스승을 누가 보필하며 누가 그 검을 잇는단 말이냐!”
올리에르가 망연한 시선으로 카밀라와 샤론을, 그리고 장문인을 번갈아 보다가 어깨를 붙들려 끌려갔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또 한 명.
지휘관들의 이탈로 회의실이 순식간에 휑해졌다. 남은 이들은 반절도 되지 않았다.
“…….”
4할, 3할, 2할…….
도원수나 페이쿼리어를 제외하면, 남은 인류 지휘관이라고는 아드리온 대륙의 망국의 왕족이나 지휘관들뿐이었다.
아크라드 대륙, 여름이 아직 범하지 못한 그 대륙에 삶이 있는 이들은 대거 떠나가 버린 것이다.
「너희도 가려느냐?」
소요 상태가 잠잠해지자 청성이 입을 열었다.
인생에는, 어떤 한순간이 있다.
한순간, 삶 자체를 뒤바꾸게 되는 한순간이 있다. 죽는 그날까지 생각이 나고, 모든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꿔버리는 한순간이 있다.
“각하, 우리의 소명이 여기 있사온대 저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때, 메이트 알터 지에르다를 시작으로 용기의 선진들이 보여준 그것이 카밀라를 비롯한 제자들에게는 바로 그 한순간이었다.
샤론(후일 알터 타스알포).
로베리스(후일 알터 쉬르팽).
고르고티아(후일 알터 볼비에르).
엘티레(후일 알터 플라디마르테).
아레시아(후일 알터 솔랑).
그렇기에 그 모두가, 먼 훗날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마지막 사명을 받들고 그 자리를 지키게 됐던 것일까.
“그 썅년 무섭다고 도망쳤다가는 부끄러워서 타르스 선배님이나 자카드린 얼굴도 못 보죠.”
주먹으로 심장을 치고.
그 주먹을 곧게 펴서 심장, 즉 소명을 바칠 대상에게 향하는 그것은 경례(敬禮).
이 세계의 첫 번째 장작, 엘디아로부터 시작된 용기와 충성의 계보, 빛의 수호자들의 위엄.
“각하, 페이쿼리어에게 명령을 내리소서. 우리가 심령과 진정으로 따르겠나이다.”
청성은 눈을 감아 울음기를 억눌렀다. 새하얀 눈꺼풀로 세상과의 길을 닫은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부푸는 것을 느꼈다.
아, 놀랍구나…….
볼 때마다 새롭구나…….
사람의 성장에서 나타나는 창세의 섭리는…….
하나의 씨에 불과했던 이들로 이 각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하시고, 싹을 틔우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신 뒤, 더 장성하여, 어느 누군가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거목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 미르.
아마, 이런 마음이셨을까.
내가 마지막 빛이 되겠다고 했을 때, 당신께서는 지금 나와 똑같은 슬픔을 느끼고 우셨던 것일까.
이래서, 사람은 부모가 되어봐야 한다는 것인가…….
누군가를 보살피고.
또 기르는 과정에서.
자신을 보살펴주고 길러주었던 이의 마음을 하나둘 알아가게 되기에…….
– 너는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무엇을 이루고 싶으냐.
청성은 옛 유년기, 용현께서 항상 지으시던 미소를 생각했다. 그 미소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고 또 오르면…….
그 끝으로 향하는 입구에 <온 것들>이 있을 것이고…….
그 끝단에는 창세의 어머니 겔드하리아와 아버지 유르벨의 마음이 있을 것이리라…….
사람은 그렇게…….
창세의 섭리가 허락하신 삶 속에서 거룩하신 이들을 배우고 닮아가는 것이구나…….
「지금부터 엘디아 뮤(04) 봉인 작전에 대해 설명하겠다. 모두 잘 들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