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9)
가짜 용사 이야기-29화(29/310)
제29화
“심연이 무슨 목적으로 인류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나? 재물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
위용검전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이론 교관, 라헬 듄 제라예는 늘 이렇게 질문으로 이론 교육을 시작하곤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심연의 목적은 정복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땅을 ‘탈환’하는 거지.”
“……!”
“심연에 침식된 땅은 지맥부터 변한다. 산은 화산이 되어 화산재를 뿜어 올리고, 땅은 늪지가 되거나 황무지화가 진행된 끝에 사막으로 변한다.”
인류가 계속해서 궁지에 몰리는 데에는 이런 자연적 변화도 큰 몫을 제공했다.
화산재와 안개는 시야를 극도로 차단하며, 동식물의 성장을 기형적으로 무너뜨렸다.
무엇보다 여름의 열기…….
더위를 차단하는 마도구가 없다면 병사들은 전선에서 싸울 수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 힘은 마족이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왕들>만이 다룰 수 있는 힘이란 점이다.”
“……!”
“그렇기에 용사 후보생인 너희들은 반드시 하이 쿤 타르크에 대해 알아두어야 한다.”
하이 쿤 타르크의 힘은 근본적으로 다른 우루크 클랜들과 다르다.
그들은 왕의 힘을 사용한다. 어떤 왕이 축복을 내렸는지에 따라 그 힘의 종류가 달라지지만.
아린 페리가 손을 들고 이렇게 질문하던 것까지 기억난다.
“지금 말씀하신 바가 왜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왕들만이 다룰 수 있다, 즉 왕에게 축복을 받지 않은 이들은 쓸 수 없단 점이다. 하이 쿤 타르크의 족장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사용하지만, 그건 그 개인에게 국한된다. 부족원 모두가 쓰는 게 아니란 소리다.”
“……!”
“너희가 이 족장들을 쓰러뜨리게 되면 하이 쿤 타르크 클랜은 클랜 전력의 적게는 5할(전사일 경우), 많게는 9할(술사일 경우) 가까이를 소모시키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라헬은 그렇게 설명을 하다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늘 후보생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나?”
어떤 문제든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 그것이 라헬이 후보생들에게 요구하던 덕목이었으니까.
“하이 쿤 타르크 격퇴는 바로 너희들, 용사 될 자들의 사명이다. 너희들의 선임 페이쿼리어들은 실제로 하이 쿤 타르크 4개 클랜을 괴멸시켰다.”
긴 역사 동안 하이 쿤 타르크로 군림해온 클랜은 이제 고작 세 곳 남은 상황이었다.
2위 키랄.
3위 누위긴.
4위 타후프.
‘검은 여름’ 때 2개의 클랜이, 그리고 ‘붉은 여름’의 5년 동안 또 2개의 클랜이 재기 불능으로 초토화됐다.
“그러니 너희도 해내야 한다. 우루크에게 하이 쿤 타르크가 있다면 인류에겐 페이쿼리어가 있다. 너희들, 바로 너희들이 이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을 열쇠임을 항상 명심해라.”
삼천 명 베기,
케르크누드 철수 작전 (4)
왜…….
왜 지금 이딴 기억이 떠오르는 거지…….
안구가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시각이 상실되었건만, 서서히 오감이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위대한 벌레 군주, 켈렉─샼이시여……!”
라니키칸이 <잊혀진 왕>에게 기도를 올리는 소리가 들린다.
원형을 잃고, 고름처럼 짓물러 터지고 또 녹아내린 사체 앞에서.
아직도 폭발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아니면 시각이 회복 도중이라 그런지, 사체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당신의 종이 이 불경한 자의 영혼을 올려 드리옵니다……!”
두개골 달린 지팡이로 이를 뒤적거리려던 그때, 시가지 중심부에서 빛의 폭류가 일어섰다.
청광(淸光), 도발하는 듯한 광대한 생명력이었다. 극위성검 타스알포의 빛이다.
그 도발이 먹혀들었는지, 탐스러운 제물을 발견했단 듯 라니키칸의 입가에 홍소가 번졌다.
달각, 달각, 달각…….
라니키칸이 지팡이를 끌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몸을 기괴하게 비틀던 광인들이 하나둘씩 주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기만을 기다렸단 듯, 사체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르더니 곧 ‘사체였던 것’이 수많은 나비로 날아올랐다.
“어떻게 잘 속여 넘겼군.”
폐가의 창가에 등을 딱 붙이고 서서 이를 지켜보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광창 바로브.
흑장미 병단의 간부로 이른바 ‘용사 파티’라 통칭되는 최정예 전사 중 한 명이었다.
“아르테는 전투 마법은 젬병이지만 정보전에 입각한 환각 마법은 엄청나게 잘 써.”
폭발의 순간, 보법을 밟고 나타난 이 바로브가 카이센을 구해내 이곳으로 옮겼다.
물론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극한까지 무리해서 각력을 증폭시킨 탓에 한쪽 다리가 골절되지 않았던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식성 핏물을 뒤집어쓴 몸을 부축해 옮기다가 왼팔의 살점과 근육이 녹아내려 뼈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싼값이지. 페이쿼리어를 구했으니.”
몸에 꽂은 용혈 혈청 주사기는 무려 3개, 반쯤 녹아내렸던 몸이 서서히 재생되어 가고 있었다.
흐릿했던 시야는 밝아지고 사지가 통제권을 되찾는다.
그러는 동안 이쪽을 흘끔거리며 바라보던 바로브는, 무언가를 결심했단 듯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사실 내가 널…… 아니, 미안하군. 반년 전에 꼬맹이였던 기억이 남아서 아직도 반말이 나와.”
“괜찮습니다.”
“내가 널 구한 이유는 네가 페이쿼리어라서가 아니야. 아니, 맞는데, 그러니까 그런 일차적 이유가 아니라고.”
“?”
“날 경멸해도 좋아. 너무 이기적이니까……. 샤론 단장님을 구해줄 수 있겠냐?”
구하다니.
어느새 위기에 빠졌단 말인가?
“몰라? 그분은 저놈을 죽이고 같이 죽을 생각이라고.”
“!”
“그분께선 평생 전장에서 살았어. 리아 아가씨가 페이쿼리어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곤 했지.”
골절된 다리로 무릎을 꿇는 바로브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절망적이게도 나한테는 그럴 힘이 없어. 아무리 발악해도 그 소원을 이루어드릴 수……. 하지만 너라면, 그분과 같은 용사인 너라면.”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간청을 들을 일도 아니었다.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돕는다, 그건 용사에게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우익을 포기하고 갈 수는 없습니다. 여기가 뚫리면 해안의 난민들이 모두 죽으니까.”
“그건 내가…….”
“그 부러진 다리로 말입니까?”
바로브가 당혹감 어린 침음을 흘렸다.
다시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타후프 클랜이 열어낸 길을 마족 연합군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라다만텔을 다시 쥐고 일어나야 할 순간이었다. 그때 그 기합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크아아아아아아앙!”
그 한순간 지면이 요란하게 요동쳤다.
심히 격렬한 요동침이었다.
몸이 잠시 바닥 위로 들어 올려졌다가 내려앉을 정도였다.
“캿! 슈퍼 드래곤 페이쿼리어 이슬라 등장이다! 미천한 카이센이 꼬리를 말고 도망간 곳에 이슬라는 용감히 맞선다!”
종탑을 박차고 뛰어내린 이슬라가 대망치형 성검 가우므리스로 지층을 내리친 것이다.
민가를 짓밟으며 전진해오던 트롤이 일시에 핏덩어리로 짓이겨지며 핏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철갑이 단숨에 우그러지는 위력.
그 후폭풍의 진동으로, 내달리던 우루크들이 고꾸라지며 서로 뒤엉켜서 돌진의 진이 무너졌다.
“이곳은 이슬라가 지킨다! 카이센이 있을 때랑 달리 우루크 한 마리도 못 지나간다!”
그리고 그런 이슬라 뒤로, 쿵쿵거리며 거신들이 달려와 거리를 막아 벽을 형성했다.
거신의 우측 어깨에 그려진 문장은, 뒷발로 망치를 움켜쥔 용(龍). 용추 병단의 거신들이었다.
바로브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슬라 알터 가우므리스의 담당 구역은 좌익이었을 텐데……?”
위기의 냄새를 맡고 온 걸까.
크라우잔의 지휘일 수도 있겠다. 라니키칸과 도중에 마주치지 않은 게 천운이라면 천운일까.
이슬라는 이때뿐 아니라 늘 전장의 냄새를 잘 맡았다. 위험한 곳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이슬라가 시간을 벌어준 틈에 서두르죠.”
한편 그때.
우익이 섬멸적 피해를 입고 흩어진 걸 기점으로 3선의 중심도 전화에 휩싸였다.
3선은 4선으로 물러났고.
4선은 이어서 4.5선으로…….
4.5선은 타후프를 끌어들여 섬멸 작전을 펼치기로 한 광장 구획이었다.
여기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5선 또한 돌파당해 피난 작전이 한창 진행 중인 해안가에 피바람이 일 것이었다.
그 절망적 전황의 일선에서 타후프 광인 무리를 걷어내던 샤론의 숨은 점차 거칠어져 갔다.
‘숨이 차.’
모든 전황이 샤론을 열세로 몰아가고 있었다.
장검형 성검 타스알포는 모든 성검 중에 칼날 길이가 가장 짧았으며, 극주검법은 상대의 급소를 찔러 절명시키는 검법이었다.
요컨대 급소를 찔러 죽여도 기어이 달려와서 폭발하여 타후프 클랜과의 상성은 최악이란 소리다.
‘아직 족장을 끌어들이지 못했는데 벌써 이 정도로 숨이 차다니.’
다음 순간, 연쇄적 폭발로 왼팔이 날아갔다.
쇄도해드는 우루크의 심장에 타스알포를 꽂은 한순간, 칼을 놓고 검대에서 용혈 혈청 주사기를 꺼내 왼팔 절단면에 주사했다.
용혈 혈청을 이용한 초고속 재생은 페이쿼리어의 유명한 전투 방식 중 하나.
용혈이라는 촉매가 있어야만 초고속 재생을 이용할 수 있단 한계가 있다지만.
고위 생명체만이 다룬다는 신체 초재생을 전장에서 행할 수 있는 건 분명 엄청난 장점이었다.
‘하지만 이 설명에는 한 가지 어폐가 있지.’
용혈 혈청은 생명을 복구하는 게 아니라, 남은 수명을 끌어당겨 신체 재생에 이용하게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 증거로 샤론의 백발에서는 이제 탄력과 윤기를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샤론은 <위용검전>에서 마지막 용령석을 주입하던 날에 카밀라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 그럼 어때. 우루크들 손에 죽는 것보단 낫지. 남정네들 꼬실 것도 아니고.
용혈 혈청이 주입되기 무섭게 핏줄이, 힘줄이, 뼈가, 근육이 솟아올라 엮이며 팔을 재생시킨다.
순식간에 다시 형체를 갖춰 나가는 왼팔로 타스알포를 회수, 이어 발을 휘돌려 우루크를 걷어찼다.
저만치 멀어진 타후프가 폭발했고, 그 폭발에 휘말린 다른 타후프들도 연달아 폭발했다.
‘힘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폭발하기 직전에 위치를 바꾸면서 죄다 유린할 수 있었을 텐데…….’
아, 정말 꼴사납네.
여태껏 하이 타르크 2개 클랜을 전멸시켜온 내가, 이딴 자폭 특공대를 상대로 이게 무슨 꼴인지.
아니, 인정하자. 하이 쿤 타르크에 속하는 타후프 클랜, 이놈들은 강적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잘됐어.’
마지막 싸움에서 만나게 된 놈이 이놈들이라 다행이야.
삶의 끝자락에서, 내게 이놈들을 처리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뿐이야.
내가 이놈들을 끝장내면, 리아나 카이센이 이 괴물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어, 엄청나시다…….”
“역시 우리 단장님……!”
“우리 나리는 필두 페이쿼리어야. 그 누구한테도 안 져!”
병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리아의 얼굴에서만 불길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니. 아니야. 지금 너무 무리하고 계셔. 어째서지? 설마 여기서 다 끝내실 생각인가?’
샤론 알터 타스알포의 그러한 절망적 분투도 곧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먼저 나타난 건, 폭발로 왼팔을 잃은 크라우잔이 이끄는 소규모 기병대였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무수한 광인들.
라니키칸이 도착한 것이다.
“스승님!”
광인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곧 맹렬한 폭발에 휩쓸린 샤론은 뒤로 나뒹굴었다.
나뒹굴었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이, 지면을 수차례 튕기고 외벽에 균열을 남기며 처박혔다.
진작 파손된 갑옷 밖으로 드러난 맨살은 무참하게 찢기고 그슬려 있었다.
“아, 아가씨!”
“샤론 아가씨를 지켜!”
토혈을 쏟아내는 샤론의 시야가 둘, 셋, 넷으로 흩어지다가 집중되는 걸 반복했다.
성검을 쥐고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자신의 손이 힘없이 떨리는 걸 느꼈다.
이제야 오랜 여정의 끝자락에 선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이렇게…… 끝내선 안 되는데.’
라니키칸이 몰고 온 광인 부대는 대충 만 명이 넘을 듯했다.
절망적인 숫자였지만 푸른빛의 성검으로 끝없이 헤치고 나아가, 라니키칸을 극주검법의 극의로 끝장을 내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주위를 지키는 타후프휼레르란 우루크들은 다른 광인들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으며…… 폭발의 세기가 몇 배는 강력했다.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샤론이 타스알포의 칼등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면서 마지막 자세를 잡았다.
“절원(切願), 청천광극 개(靑天洸戟 : 改).”
그리고 그 칼을 조용히, 고요히,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형언할 길 없이 빨리 내찔렀다.
칼끝을 타고 뻗어 나가는 포악한 힘의 물결, 청광(淸光).
비명을 내지르듯, 청명하게 울며 내달리는 그 빛이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광인들의 급소를 정확히 꿰찌르며 또 나아갔다.
뻗고, 뻗고 또 뻗어서.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서.
라니키칸의 목전까지 다다른 빛줄기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빛줄기가 힘을 잃고 수많은 광입자로 부서졌다.
힘이……?
한계에 다다른 힘이 마침내 수명을 완전히 불태우고 만 것일까.
쿨럭.
그와 동시에 전신으로 선혈을 뿜으며, 샤론의 무릎이 꺾였다.
“Mentakus.”
당혹감 일렁이던 눈동자로 그 푸른 검극을 바라보던 라니키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런…… 쏴!”
크라우잔의 신호에, 광장을 둘러싼 구조물들에 숨어 때를 기다리던 호센의 속사대가 모습을 드러내며 방아쇠를 당겼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광인들이 그 총탄에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총성이 귀에서 이명이 울 정도로 터지지만 그 흐름은 계속 이어지고…….
‘악몽 같아.’
그 죽음의 행진에는 끝이 없었다. 벗어날 길이 없었다. 샤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처음부터 이 세상은 악몽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