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91)
가짜 용사 이야기-291화(291/310)
시즌 3 : 99화
아드리온 대륙 최후의 병력이 라노아 대교 북단에 군진을 짜고 정렬해 있었다.
빛의 대열이었다.
여명 저 너머에서, 인류의 병장기는 햇빛으로 번득였고 요정의 군장은 달빛으로 아롱졌으며 아인의 거신은 쇳빛으로 빛났다.
“전원 차렷, 경례!”
중역들이 걸어오자, 삼군의 장병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례를 붙이며 길을 양옆으로 열었다.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강철함대 제독, 할바론.
황은의 사사, 발브레이.
각 진영의 병사들이 각 진영의 지휘관에게 경례를 한 셈이었는데, 그들이 나란히 걷고 있었으므로 삼군 모두의 경례를 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네 녀석 제자가 아주 훌륭하게 컸더군. 처음 봤을 때는 시건방진 꼬맹이였는데 말이다.”
할바론이 말했다.
발브레이가 눈썹을 치켰다.
“먼저 본 건 분명 이 몸일 텐데, 어떤 꼬맹이들보다 시건방졌다는 건 동의하는 바다.”
“제독님과 사사님을 만나면서 배운 게 많나 봐요.”
“핫하하, 나의 존재 자체가 곧 가르침이지. 그나저나 난쟁이 친구, 직접 전선에 설 생각인가?”
발브레이의 말에 할바론이 입술을 비죽였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귀쟁이 친구. 이런 상황을 위해 개발한 거신 48식이란 놈이 있지.”
이 거신 48식은 후일 개발되는 거신 ‘대권속 거신 49식’과 ‘대진왕 거신 0식’의 모체가 된다.
“고열 포탄을 장착한 데다 크기도 통상 거신의 5배야. 근접전에 대비해서 장갑 또한 삼중이지. 화신급 마우나 로아도 이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거라 장담하지.”
오우, 발브레이가 탄성을 흘리자 라미네아를 보좌하던 아이딘이 고개를 저었다.
“화신급은 다른 데몬들과는 그 힘의 차이가 천지 차이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방심하셨다가는 낭패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말이 그렇단 거지. 하 참, 나 원, 인간 놈들이란 항상 이렇게 비관적이라니까.”
“죄송합니다, 제독님. 전쟁의 성패가 걸린 문제라 장난이신 줄을 모르고…….”
“이 자식아! 지금 이딴 사과가 바로 비관적인 자세란 거야! 그냥 웃으며 넘기란 말이다! 자, 웃어봐라. 하하하하하하!”
아이딘이 당황해서 반응을 내비치지 못하자, 라미네아가 대신 웃어주었다.
“아핫, 하핫, 아하하하하! 이제 그만 화신급이 출현했을 경우 이야기를 해보죠.”
“그러고 보니 인간들이 비관적인 이유를 내가 생각해 봤는데, 삶이 피폐해서 그런 것 같네. 자네들은 좀 우리들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제독님, 화신급 데몬이 다른 데몬보다 강력한 이유를 설명드리자면…….”
발브레이가 양손을 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미소가 그 입가에 걸려 있었다.
“함께 떠들고 있지만, 각자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군. 제대로 협동이 될는지 모르겠어.”
발브레이는 저 다리 너머 남쪽, 여명의 햇살이 감히 닿지 못하고 암흑에 삼켜지는 화산재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어디, 너희들은 상황이 다른지 보자꾸나. 마족 놈들.”
네이갈라스의 심연(深淵)의 잔재는 난폭했다.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이 다리 저편 수평선을 바다 끝까지 뒤덮고 있었다.
마족은 그 폭풍을 뚫고 대교를 넘어왔다. 핏덩이 씹는 늑대 문장의 깃발…… 하이 쿤 타르크 2위, 키랄 클랜이었다.
[크라우잔 : 적 선견대 접근 중, 홍련 병단은 대교 중앙, 철성 병단은 우익에 군진을 전개하라.]현재 그 제복이 곧 승리의 대명사가 되어 ‘레드 코트(Redcoat)’라 불리는 최정예 전열 보병 여단, 홍련 병단이 총구를 겨누며 스팀코어를 예열시켰다.
최고의 장전 속도 및 집중 포화 실력을 발휘하는 홍련 병단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총병대였다.
철성 병단은 요정의 홀트란크스보다는 못해도 무수한 전과를 쌓아 올린 인류의 중장 보병대, 방패와 장창으로 그 방진을 굳건히 형성시킨다.
[발브레이 : 그라함, 대교 좌익에 홀트란크스 진영을 전개시켜라. 최연소 팔라딘의 실력을 한번 보지.] [그라함 : 예, 최고 사사님. 모시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에베스란 님보다는 부족하나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오직 최고의 요정병만이 소속되는 것이 허용되는, 홀트란크스 진영이 대교 좌익에 강철의 성채를 만들어낸다.
[할바론 : 강철함대 및 이동포 여단, 포문을 열어라. 포격 좌표는 라노아 대교 남쪽이다. 코 파면서 대충 쏴도 백 명씩은 쓸려나갈 테니, 마구잡이로 쏴라. 군공을 조작하기 딱 좋겠구나. 본국에 귀환한 뒤 마족 천 명씩은 잡았다고 말해라.] [구스타프 : 강철함대는 제독님의 명을 따르기 위해 존재합니다. 전 함대, 포문을 열어라! 마족 놈들이 포성에 박자를 맞춰 춤을 추게 만들도록!]포성이 전쟁의 시작을 알리기 직전이었다.
그보다 반 박자 더 빠르게.
끔찍하게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옛 괴조(怪鳥), 투아키가 포병대를 겨누고 급강하해 왔다.
“투아키다!”
그 흉측한 아가리가 여섯 갈래로 찢어지며 시커멓고도 누런 이빨을 드러낸다.
그 등에 안장을 매고 올라탄 칼트쿼린 클랜의 우루크 기수들이 길이가 비정상적으로 긴 철퇴를 휘두르고 있었다.
투아키의 등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의 근골을 분쇄시키기 위한, 오직 살육만을 위해 발전된 병기.
[니븐 : 어딜, 이 뱀 새끼들이!]그것을 공중에서 요격한 공군 부대가 있었으니, 제0전투비행여단이다. 비격 병단과 필중 병단을 일시적으로 통폐합한 대부대였다.
요정의 용매 부대도 함께였다.
용과 매의 외형을 합쳐놓은 듯한 이 짐승은 요정들이 사육하는 용맹한 전투 병기로서, 그리핀보다 기동력은 낮았으나 그보다 높은 호전성과 전투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했다.
[니븐 : 공중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지상전에 집중하세요!]화산재의 폭풍은 곧 결계와도 같아, 마족들을 휩싸며 지켜내며 함께 나아왔다.
모래 폭풍의 수호에 힘입어, 포격과 총격의 포화를 뚫고 튀어나온 적의 선견대는 키랄의 늑대 기병대.
라미네아는 그 앞으로 나아가며 아라다만텔을 허리춤에서 칼집째로 끌렀다. 경건하게, 그 순혈의 칼날을 칼집으로부터 뽑아내면서 기도한다.
“나는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이다.”
대리자의 절실한 기도가 칼을 깨운다. 성검이 눈부신 검광을 발하며 이편으로 들이닥치는 암흑을 베어낸다.
“오늘도 나를 통해, 당신의 향기를 이 땅에 전하소서.”
내가 보고 배운 용사(勇士), ‘검은 여름’의 종막 (4)
“운반자께서는 이미 심연의 힘을 직접 여러 번 만나보셨죠.”
카밀라는 샤론과 함께 아공간의 회랑을 달렸다.
그 이름, 공허의 회랑.
무엇 하나 산 것도 죽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 암녹색 일색의 공간에 단지 차원의 부유물들이 발판처럼 떠다녔다.
“그 힘은 왕들에 따라 형태가 다르나, 근본은 시공간 침식에 있습니다.”
어디가 위이고, 아래이고, 오른쪽이고, 왼쪽인지, 정확한 방위를 알 수가 없었다.
길을 안내하는 것은 그녀들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요란이었는데, 소녀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었다.
난잡하게 떠다니던 차원의 부유물들이 그 발이 내디뎌지는 장소로 모여들어 징검다리를 형성했으니까.
“시공간 침식?”
요란이 카밀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테면 벌레 군주의 심연은 대상을 순식간에 썩어버리게 만드는 부패(腐敗), 심해 군주는 수분을 통한 부식(腐蝕), 도마뱀 군주의 심연은 수분과 양분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용해(溶解), 모두 한 사물에게 주어진 수명을 멋대로 뒤틀어 버리는 힘입니다.”
곧 회랑의 정경이 어스름 새벽의 황야와도 같이 변했다.
불모지대와도 같은 땅이었는데, 파수꾼처럼 솟아난 식물들은 모두 공허의 빛을 띠고 있었다.
거대한 괴식물들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요란의 앞을 막아섰다가, 요란이 손을 치켜들자 얌전히 물러서 길을 열어냈다.
“공허의 힘은 바로 그런 심연의 힘을 모방하다시피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침식의 힘에 어떤 속성보다도 더 강력하게 대적할 수 있어요.”
“정확히 어떤 식이죠?”
샤론의 질문에 요란이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좋은 질문입니다. 혹시 두 분 중 철제 무기 있으신 분? 필요 없으신 거요.”
샤론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던져주자, 요란의 머리 양쪽에서 공허충들이 나타나 단검에 달라붙었다.
저건 뭐지……?
파먹는 건가? 쇳덩이를?
근데 뭔가 이상했다. 파먹는 것 같긴 한데, 파먹힌다기보다는 뭔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지금 두 분이 생각하는 게 맞을 거예요. 공허의 힘은 대상의 근원 자체를 침식해서, 공허 차원으로 날려 버립니다. 단검은 파먹히면서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버린 거죠.”
카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고 그냥 너무 귀여운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사미글 아가씨보다는 덜 귀엽지요. 그 사랑스러움을 축복하기 위해 한 마리 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안 되겠군요.”
요란이 눈을 찡긋하자, 무언가, 여심(女心)이 찌르르 울리는 걸 느꼈다.
뭐냐, 이건?
얘 여자잖아. 근데 뭐 이렇게 여자를 잘 홀려? 아니, 여자라서 여자 마음을 더 잘 아는 건가?
“지금 그딴 장난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떠들고 있자니 어느새 불모지대도 끝나고 이제는 저 끝없는 지하의 암흑 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이곳은 적색산맥의 지층(地層).
이는 단 3시간 만에 30일 거리를 주파한 셈이었는데, 공허의 공간 전이 능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요점은, 공허의 힘에 의해 봉인된 <잊혀진 왕들>은, 이 침식 효과를 통해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견고하고 끈질기게 봉인해둘 수 있단 뜻이 됩니다. 왕의 심연을 공허의 침식이 상쇄시키니까요.”
그런데 이 계단부터는 방비가 몇 배는 엄격해졌다.
공허의 사도 아르젠이 다루었다는 얼굴 없는 악마, 나이트 페이스(NightFace; 밤의 얼굴)들이 계단 양쪽에 늘어서 있던 것이다.
원초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외형, 암녹색 날개와 꼬리를 꾸물거리는 그들은 요란에게 절하지 않았다.
“얘네는 왕녀님한테 따로 절하지 않네요?”
“덮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죠. 초대 사도, 아르젠 님의 하수인들이니까요. 저는 아직 하급 나이트페이스 한 마리도 부리지 못하는데, 이것들은 최정예예요.”
그때 마침내 계단이 끝나고, 공허의 심층에 도달하자 샤론의 눈이 커다랗게 흔들렸다.
“맙소사, 저게 뭐야?”
그것은 봉인의 제단.
공허의 소환물 중 최고위 위계에 속하는 괴식물, 보이드레이크(Voidrake)가 그 뿌리와 줄기로 웬 구체를 뒤얽고 있었다.
언뜻 구체였으나 가까이에서 유심히 보니 종양 덩어리와도 같았는데, 요란이 그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매력적인 사미글 아가씨들, 이게 바로 시간의 군주, 안리달의 봉인구입니다.”
* * *
청성은 ‘순백의 꿈’을 통해 뤼카엘의 출현 지점을 확인해 두었다.
관측하는 세계선마다 그 위치가 달랐는데, 여러 세계선에서 동일하게 관측되는 출현 지점, 즉 가능성 높은 곳에 토벌조를 나누어 배치했다.
뤼카엘은 대부분의 출현 상황에서 정면을 돌파하지 않았다. 측면에서 나타나 진용의 허점을 노렸을 뿐.
– 이는 고대 전투에서 뤼카엘이 주로 수행하던 우회 기동 임무다. 전위는 알카이오스와 에누엘이 맡았으니 말이다. 스스로의 강점을 살린다고 봐야겠지.
곧 제3ㆍ11ㆍ62ㆍ92ㆍ104ㆍ162번 세계선에서 관측된 위치에 심연이 생겨나고, 그 호면 위로 뤼카엘이 나타났다.
물론 이건 뤼카엘의 의지가 아니었다.
요토스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로 뤼카엘을 전이시킬 뿐이었는데, 청성과 인류에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라 위치였다.
「제기랄, 요토스 놈…….」
뤼카엘은 심연이 자신의 핵, 즉 성화시편(聖化詩篇)에 촉수를 뻗는 고통 속에서 휘청거렸다.
‘왔다…….’
그런 상황에서, 뤼카엘과 최초로 조우한 건 에쉬르였다.
여기에 어떤 신호 체계도 필요하지 않다. 만났다는 인지 정보만으로, 그 떨림만으로 위치 정보가 다른 토벌조에게로 전송되니까.
모두 합류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분에서 3분 남짓, 하지만 그 짧은 시간조차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는 영원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법이다.
「내가 말했을 텐데, 다시 전장에서 만나면 죽이겠노라고.」
쿵, 쿵, 쿵, 쿵, 쿵…… 정신은 무너지지 않는다 해도 공포가 육신을 제멋대로 무너뜨린다.
이것이, 엘디아 뮤(04)…….
저 검은, 진성검 요니울란…….
심박의 떨림이 어찌나 요란한지 고막이 터질 것만 같다. 정체를 알지 못하던 때보다 더 강대한 위압감이 느껴진다.
‘극위성검 르노드가 이렇게 떠는 일이 있었나?’
드득, 드득, 드드득, 드드득…… 칼집 속에서 르노드가 미친 듯이 격동한다.
저번에 싸울 때도 그랬다.
르노드가 싸움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져. 마치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듯이…….
「대체 언제쯤 그 무지함이 계몽되는 거지? 심연 속에서 엿보니, 약자들은 또다시 너희들을 버리고 도망가던데. 네 스승이 버림받던 때와 똑같이.」
공포를 억누른 건 살의(殺意)에 가까운 분노, 그 증오에 공명한 르노드 또한 세차게 울부짖는다.
십일자도 제10식, 현월(弦月).
한순간에 다섯 번 거듭 행해진 참격, 즉 다섯 개의 초승달이 에쉬르가 서 있던 공간을 제압하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1년 전에 만났을 때보다 배는 성장했군. 네 스승의 안목이 실력만큼이나 좋았단 소리겠지.」
없을 뿐인가.
바로 뒤, 호흡조차 닿는 거리에서 에쉬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게 아닌가.
진성검조차도 뽑지 않은 채.
“그 입으로 감히 스승님을 이야기하지 마!”
십일자도 제11식, 반월(半月).
발뒤축을 지면에 내려찍으며 회전축을 설정, 몸을 돌리며 방금까지 후방이었던 곳을 전방으로 변경시킨다.
그리고 참격의 반월을 통해 전방 180도를 붉게 제압하나…… 르노드는 반월을 완전히 그리지 못한 채 허공에서 정지했다.
「천부적 재능을 갖고 태어나고도 더욱 자신을 몰아붙여 여기까지 자신을 향상시킨 기개…… 너는 선택받아 마땅하다.」
말도 안 돼…… 반월을, 르노드를 손으로 잡았다고?
그랬다.
<온 것들> 기술 등급표상 엘디아 프라이모아 갑주는 제10위계로, 극위성검이 속하는 제7위계보다 아득히 높았으므로 이론상 문제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
「약자들에게 떠밀려 억울하게 희생된 네 스승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나?」
“뭐……?”
「네 스승은 죽은 게 아니다. 세상이 정상적으로 되기 전까지 잠시 잠들게 했을 뿐, 날 따라오면 다시 만나게 해주마. 이제 조만간이다.」
꿈과도 같은 소망…….
스승님을, 다시 만난다고……?
영원히 떠나버린 그 뒷모습, 그 옷자락을 손을 뻗어 잡으려던 순간, 뇌리에 떠오른 스승님의 눈동자에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 너는 세상의 별이다. 별이 밤에 빛을 내지 않으면 누가 그걸 별이라고 불러주겠냐?
아니, 그건 질책이 아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제자에게 가르쳐왔던 용사로서의 마음가짐…….
그 훈계가 길을 이끈다.
그릇된 방향으로부터, 올바른 방향으로 제자의 소망의 선로를 바꾼다.
“우롱하지 마…….”
십일자도 제12식, 만월(滿月).
표적이 어느 방위로 피하든 문제가 되지 않도록 전방위를 완전히 제압하는 십일자도의 절식.
그 반복의 횟수가 곧 실력의 지표이며, 칼과 칼집을 순수와 역수로 바꿔 잡는 것으로 간격을 조절해 상대의 예측조차 교란한다.
“스승님의 삶을 우롱하지──!”
극위성검 르노드의 검광이 눈부시게 타오르며 붉은 달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칼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칼자루를 쥔 악력은 그대로다. 그런데 체중을 실을 수가 없어. 왜지?
앞으로 치고 나가려던 몸이 불현듯 쓰러졌다. 뿌리가 잘려나간 나무처럼.
무슨……?
무슨 일이……?
두 다리가 무릎 아래로 잘려나간 것을 본 순간에서야 눈앞이 희노랗게 물드는 격통이 밀려왔다.
「이제 너희들을 죽이는 것도 지쳤다.」
격(格)이…….
힘의 격 자체가 달라…….
「모조품이라고 하기에 경멸감만 들 줄 알았는데, 그게 또 아니더군.」
확실히 자신은 성장했다.
진성검 요니울란이 허공에 남긴 보랏빛 잔상은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반응하는 건 무리였다.
스승님께서는 모두 반응하셨는데, 그때 이 르노드만 갖고 계셨더라면……!
「요니울란이 영육의 접점을 끊어 버렸으니 다리를 재생시키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거다. 잠시 그러고 있어라.」
어디를, 어디로 가는 거야…….
잡아둬야 해.
이 위치로, 모두가 모일 수 있도록…… 르노드를 쥔 손에 힘을 주자 뤼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팔까지 잘라줘야 내 말이 조금이라도 그 아둔한 머리에 전해지는 거냐?」
다시, 요니울란이 거칠게 포효하며 팔의 힘줄과 근섬유의 연계를 모조리 끊어 버리려던 그 순간.
촤르르르르륵……!
보랏빛 뱀을, 똑같은 보랏빛 뱀이 휘감았다. 그 검광의 광도나 위세는 몇 배는 약했으나 형태와 색채는 너무나도 똑같은 것이었다.
「이건…….」
허공에서 뒤엉켰던 진성검과 극위성검이 격렬한 불티를 튕겨내며 서로가 서로를 밀쳐냈다.
“요즘은 어떤 명품이건 짝퉁이 참 잘 나오거든!”
극위성검, 플라디마르테.
진성검 요니울란의 아류작.
“아, 고대의 화석 할망구는 이런 것도 잘 모르나?”
작동 원리가 똑같았으므로, 칼자루로 되돌아온 요니울란이 척추 회로를 중심으로 칼날의 형태로 합쳐질 때 플라디마르테 또한 똑같이 칼날로 되돌아갔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 짓는 건, 이딴 겉모습이 아니라 그 내재된 품격이란 걸 가르쳐 줘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