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93)
가짜 용사 이야기-293화(293/310)
시즌 3 : 101화
‘빨리.’
에쉬르는 열두 개째 용혈 혈청 주사기를 무릎 아래로 꽂았다. 살점과 근막이 새로이 엮이는 광경은 언제 봐도 끔찍하다.
‘조금만 더 빨리.’
도대체 시야가, 의식이 몇십 번을 암전했을까. 에쉬르는 헤아리는 걸 그만두었다.
용혈 혈청을 이용한 초고속 재생은 ‘미래의 회복력’을 끌어다 쓰는 것에 불과하다.
즉, 그 회복을 반복하면 할수록 수명의 고갈 속도가 빨라진다. 미래의 피로 또한 밀려오는 것이다.
‘청성 각하 덕분에 치유력이 말도 안 되게 증폭됐어. 팔라딘들은 파열 부위가 나무로 접목돼 계속 싸울 수 있게 됐고.’
하지만 청성 각하에게도 한계가 있어. 네이갈라스를 봉인하느라 치명상을 입으셨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최전선에 나와 계시잖아.
청성 각하뿐인가.
뇌향 각하도 마찬가지다.
엘디아 봉인 작전이 개시되기 전에, 뇌향은 의식을 희미하게 되찾은 것이다.
– 내, 마땅히 전선에 서야 하나 전선에 설 수 없으니…… 모든 힘을 너희에게 집중시키겠다.
뇌향심공명진 : 합일(合一).
서로의 마음만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따위조차도 모두 공유하게 되는 초유의 힘.
전투에서 이 오감의 동기화는 말도 안 되는 이점을 제공한다.
요컨대 정말 말도 안 되는 지원을 받는 셈이었는데, 뇌향은 눈물마저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 그저 멀리서 너희의 등을 떠미는 게 전부인…… 나를 용서해 주거라.
삼영룡 각하, 당신들은 어떻게나 그렇게 마음마저 눈부신 건가요.
너무 눈부셔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언젠가, 비네사 스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분들의 뜻에 소명을 맡기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너도 알게 될 거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고백에 도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다.
누구나 도달하게 된다.
그분들의 곁에서, 어떤 빛보다도 따스한 그 존재감과 함께하고 있노라면, 누구나 심령과 진정으로 그분들을 따르게 된다.
‘그러니 약한 소리 할 때가 아니야.’
스승님께서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싸워나가자.
‘비네사 스승님, 못난 제자의 마지막 빛을 지켜봐 주세요.’
내가 보고 배운 용사(勇士), ‘검은 여름’의 종막 (6)
「그래, 방금 그건 공격인 동시에 치료였군.」
전장 중심에서, 청성과 마주 선 뤼카엘이 입꼬리를 씰룩 움직였다.
「창명시편의 힘은 창세 섭리에 어긋나는 이물질의 격리 및 추방, 요니울란의 ‘혼백 파열’의 힘을 다른 곳으로 추방한 거로군?」
「엘디아께서는…… 뭐가 목적입니까?」
「약자들은 살 가치가 없다.」
「창세의 주관하심 아래…… 태어난 것 중에…… 무가치한 것 하나 없습니다…….」
「너 따위가 지금 날 가르치려 드느냐? 너보다 천 년은 더 오래 살았다. 그 모든 걸 지켜보고 내가 내린 결론이다. 약자들을 위한 세계는 존재해선 안 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이냐?」
「사실 옳지 않단 걸 알면서도…… 그런 말로 약자들을 제물로 바치는 당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닥쳐라. 이야기는 끝났나?」
「강자는 약자를 돌보며 창세의 마음을 알게 되고…… 약자는 강자의 섬김을 받으며 또 창세의 마음을 알게 되니…… 다음에는 약자가 강자가 되어 약자를 돌보니…… 이게 피조물들이 당신들을 닮아 거룩해지길 바라신 창조 질서입니다……. 당신의 눈앞에 있는 페이쿼리어들이 바로, 그 증거이고…….」
뤼카엘이 발끈하며 요니울란을 휘두르려던 순간, 청성이 양손을 간절히 맞잡았다.
백운(白雲).
천지(天地).
새하얀 구름이 저 하늘이 아닌 이 땅 위로 소복하게 깔린다. 하늘의 왕국이 이 땅 위에 강림한 것인가, 아니면 땅이 하늘과 이어진 것인가.
「제2심계, 창명식 : 백운차일(彰明式 : 白雲遮日).」
발치를 휘감고 우아하게 흐느적거리는 이 구름은 형상만 구름일 뿐, 실체는 초월적 힘의 기류…….
저 안개가 술사의 형세를 엿보는 것을 차단시킨다.
술사의 위치와 술식의 전조를 볼 수 없게 만드는 건 전투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게 만든다.
‘이 힘은 카렌덴의…… 흑운차일(黑雲遮日)의 개량형?’
학습된 상하 관계의 위계 때문인지, 아니면 오로지 저 힘의 잠재성 때문인지 전신이 떨린다.
저건 단순한 구름이 아니다.
저 구름 자체가 창명시편의 부속품들, 대기조차도 새하얗게 정화시키는 저 힘 앞에서 방심했다가는, 한순간에 창명시편의 힘에 속박된다.
「그래, 네놈이었군…… 네이갈라스를 봉인한 힘의 주인이. 그럴 만해. 예리세리카보다도 강해 보이는데?」
과연, 창명시편을 다루는 재주가 카렌덴의 발끝 정도는 따라잡을 것 같군.
‘이놈이 한 네이갈라스의 봉인은 이 요니울란으로도 완전히 찢어발기는 게 불가능했다.’
틈새를 만들어, 화신(化身)을 끄집어낼 수 있게 하는 게 전부였지.
‘어디 실력 좀 볼까.’
사방에서 수백 가닥의 백운(白雲)이 촉수를 뻗듯이 내달리고 짓쳐들고 휘몰아쳐 온다.
피를 뇌로 집중시킨다.
극도로 증폭된 집중력이 시간의 흐름조차 둔화시킨다, 일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세 배는 느리게 흘러간다.
‘이 구름 또한 네이갈라스 봉인과 마찬가지로 요니울란 해방이 아니고서는 절단이 불가능.’
34가닥은 요니울란으로 요격.
42가닥은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회피.
‘하지만 상대 또한 힘의 흐름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으니, 요니울란을 완전히 제압하는 게 불가능하니 피차일반이다.’
나머지 26가닥은 피하기보다는 그 힘의 원류를 찾아내는 실타래로 삼아, 술사를 제압한다.
‘찾았다.’
주인과 일심동체로 움직이는 요니울란 또한 이미 척추 회로를 중심으로 결집, 분열ㆍ쇄도의 준비를 완벽하게 마쳐놓았다.
성검 해방 문구는 생략한다.
영창 생략이기에 그 힘의 1할을 끌어내는 게 고작이지만, 이런 초 단위의 싸움에서는 보조 없이 그걸 끌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근데 왜……?’
요니울란이 분열하지 않는다.
문득, 시야 전체를 새하얗게 물들이던 백운의 영역이 흐릿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한 곳으로 힘이 집중되는 것인데…… 그 장소는 요니울란의 칼날이었다.
‘백운이 몇 겹으로 휘돌려져 요니울란을 완전히 속박시켰단 말인가……!’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거지?
유효타를 줄 수 없는 건 피아간에 똑같을 텐데.
10초도 지나지 않았다. 가짜 놈들은 아직 몸을 완전히 회복시키기는커녕……!
파공음.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계(視界)의 저편으로부터 날아드는 위험을 청각이 감지해냈다.
머리를 옆으로 꺾었다.
동시에 높이 도약한다.
머리와 심장이 있던 장소를 정확하게 꿰찌르는 빛줄기, 고위성창 메길란과 반드레의 창극이 토해내는 광염.
“경이적이군!”
현재 최강의 팔라딘으로 불리는 에베스란과, 그 에베스란의 맹우인 요정왕 사오로 엘 바텐베르크.
“확실히 잡았다고 생각했건만, 역시 엘디아시다.”
두 창잡이는 기습이 실패하자 즉시 거리를 벌리며 새로운 간격을 설정했다.
그렇게, 방심을 유도했다.
창공에서 느닷없이 달려들어 뤼카엘을 지반에 내리꽂은 일격이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엘디아 뮤(04).”
수인 전사장, 그리프베런.
그리프베런 또한 그 이상의 추가타를 욕심내지 않고, 다시 날개를 퍼덕여 저 먼 안전지대에 착지했다.
정확히는 두 팔라딘과 더불어 세 방위에서 뤼카엘을 포위하는 위치에.
으드득…….
이빨이 갈릴 정도의 격노가 요니울란을 공명시킨다.
모든 엘디아는 창세시편을 핵으로 만들어졌다. 뤼카엘의 핵, 성화시편(聖化詩篇)이 폭주한다.
그 힘이 요니울란의 힘을 극대화시켜, 백운의 속박을 찢어발기게 만들었다. 힘의 주인이던 청성이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고대 요정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강자들이군. 나에게 대적하겠단 거냐? 다른 누구도 아닌 너희들이?」
뤼카엘이 에베스란과 사오로와 그리프베런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팔라딘, 네놈들은 제1차 타르혜 론델 전쟁 때 우리들이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놈들에게 지휘권을 내린 게 그 시초인데, 그런 나에게?」
요니울란이 세 전사를 예리하고도 살벌한 각도로 동시에 노린다.
「나는 엘디아다! 엘디아 뮤(04)! 너희 조상들은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걸 최고 영광으로 여겼는데, 조상의 삶과 뜻을 거스르겠단 거냐!」
그 일격을 간신히 피해낸 그리프베런이 외쳤다.
“아니! 이 요정들은 몰라도 내 선조들께서 섬겨오셨고 또 죽는 날까지 기다려오신 건 엘디아 카타(05), 에누엘 님이시오! 당신이 아니라!”
「닥쳐라! 너희들의 꼴을 봐라! 그렇게 싸우고 또 싸우는데도 너희를 짐승이라 혐오하는 저 약자들의 작태를!」
“그렇게 만든 건 흑마법사 제르닉스잖소! 당신이 시켰거나, 시키지 않았어도 놈을 되살린 건 당신이니 당신의 손길이 닿은 셈 아니겠소이까! 용현이 그 흑수(黑手)를 풀어주었지!”
진성검의 빛과, 고위성창의 빛들이 무수히 격돌하며 빛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 잔상이 신기루와도 같다.
그 충돌에서 일어나는 빛은 은하수와도 같다. 오직 정점들만이 펼쳐낼 수 있는 승부.
“뮤(04)께서는 남을 부정하지 않고는 자신을 긍정할 수가 없는 거요!”
그리고 그 빛의 파도 속에서 뤼카엘을 노리는 원시의 발톱, 에누엘 돌격대의 칼날.
“그러니까 남들을 그렇게나 부정하려고 하는 거지! 후임들을 모두 죽여 가면서까지!”
고위성창 메길란이 뤼카엘의 심장을 겨누다가 허공에서 찢어발겨졌다.
그 창대 쥔 오른손과 함께.
선혈이 흩뿌려지는 가운데, 팔라딘 에베스란은 고통의 신음 하나 없이 손을 내뻗어 뤼카엘의 갑주를 움켜잡았다.
「내 후임은 에누엘 한 명뿐이다! 다른 후임은 둔 적도 없단 말이다!」
에베스란이 만들어낸 것만 같았던 그 틈새를 파고들던 사오로의 전신에 혈선(血線)이 그어졌다. 그리프베런의 왼쪽 발목과 오른쪽 날개가 찢어졌다.
「너희들은 죽이지 않겠다. 특히 독수리 수인 네놈은. 그랬다가는 에누엘을 볼 면목이 없으니까.」
기동력이 차단되어 움직일 수 없던 그리프베런이 냉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지금은 있단 말이오?”
「뭐?」
“선택은 순간이나 결과는 영원하다. 선조들께서 남기신 말이오. 우리 일족의 신념과도 같지. 선조들께서는 에누엘 님을 끝까지 쫓아간 선택으로, 그 명예를 영원히 얻었소.”
「그래, 눈물이 나올 정도로 충직한 놈들이었다. 되살아나서 에누엘 돌격대의 마지막을 들었을 때도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랬을 테니까. 그래서 널 죽이지 않는 거다.」
“그렇다면 같은 원리로 뮤(04)께서는 어떻소? 다른 엘디아들께서 지금 뮤(04)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소? 그걸 누구보다 잘 아실 것 아니오.”
순간, 잊으려 해도 결코 잊어지지 않던 뤼카엘의 기억이 뇌리를 강타했다.
족히 천 년은 더 된 일이었다.
요토스와의 계약으로 새 육신을 손에 얻었을 때, 뤼카엘은 관할지인 뮤(04) 론델을 떠났다.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에, 어째서, 왜, 우리 모두를 이런 강철 속에 가둬놔야만 했는지를. 이 평화의 최고 수훈자인 우리를.
– 엘디아 오메크(06) 양성을 위해서는 모든 창세시편의 힘을 수습해야 한다. 요컨대 너희들의 육신을 재구축해줄 수가 없다.
그런데 검은 태양, 카렌덴뿐만 아니라 빛의 군주들 모두가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테르시아의 자취는 요정의 땅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 종적을 찾던 것만 십여 년, 마침내 빛의 도시 <타르키리텐>의 지하에서 ‘전우’를 만나게 되었다.
– 에누엘?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과연, 타인의 시선에 수호자가 된 우리들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 너 정말 에누엘이냐?
그래도 에누엘은 팔다리가 있는 기계였으므로, 부유형 구체에 속박된 뤼카엘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었다.
에누엘.
식별 번호, 엘디아 카타(05).
오메크(06) 프로젝트가 개시되기 전까지, 마지막이자 최강의 엘디아.
천 년 만의 해후였다.
천 년 동안, 둘 다 이 기계의 몸에 처박힌 채 관할지에서 의식마저 봉인되어 있던 것이다.
– 여기가 네 관할지냐? 어쩐지 카타(05) 론델의 좌표는 어디에도 없더니만, 네가 테르시아 님을 지키고 있었군.
근데 그 동료는, 뤼카엘을 맞은 것이 아니라 막아 세웠다. 기계의 육신을 지니고, 기계식 대검을 쥐고.
– 시설 좋은데? 곰팡이 냄새도 안 나고. 하, 핫, 뭐지? 만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았는데 막상 만나니 생각이 잘…….
에누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녀석이 대검을 치켜세우며 한 말은 대답이라기보다는 혼잣말이었을 것이다.
– 엘디아 카타(05), 시설 수호 명령 7-7에 따라 관할지에 침입한 ‘심연의 권속’ 토벌을 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