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95)
가짜 용사 이야기-295화(295/310)
시즌 3 : 103화
‘이기어검술이라고?’
에쉬르는 단칼에 잘려나간 손목에 즉시 용혈 혈청 주사기를 꽂으면서 온몸을 떨었다.
‘거의 반쯤 전설, 아니 광인의 망상에 가깝게 내려오는, 검강과 검기 그 너머의 경지……?’
검술의 오랜 역사 속에서, 신화시대의 뤼카엘이 사용했다는 전설만이 전부였다.
그걸 실제로 사용한 건, 전설의 용병 드래곤 슬레이어인데 그조차도 ‘전설의 용병’이라 불린다…….
그 힘의 폭풍에 에쉬르의 왼쪽 손목이 잘려나갔다. 선배 페이쿼리어들은 한쪽 눈이나 손가락 두세 개가 날아갔다.
[제로니 : 에쉬르, 손목 수습하는 대로 당장 와!] [에쉬르 : 선배님은 왼쪽 눈이!] [제로니 : 용혈 혈청 박고 싸우다 보면 알아서 재생돼 있겠지! 청성 각하가 저 요니울란의 힘은 다 없애주고 있으니!]이런 젠장, 대체 언제까지 무력감에 몸을 떨어야 하는 거지?
방금 죽었을지도 몰라.
뇌향 각하께서 우리 모두의 감각을 이어주지 않았더라면, 스승님들의 감각으로 몸을 움직인 게 아니었더라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된다고 해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저 36자루의 어검을 피해서……?’
전설적인 검술이 현대에 체현한 광경을 공허의 회랑에서 엿보던 카밀라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지금 나가봐야 되는 거 아냐? 이러다가는 페이쿼리어 선배님들께서 다 쓰러지겠어!”
카밀라의 시선을 받은 샤론은 화면을 유심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침묵이 길고 깊었다.
더 조바심이 날 텐데.
더 공포로 몸이 떨릴 텐데.
자칫하다가는 스승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나 샤론은 고개를 단호하게 가로저었다.
“아직 아니야. 우리가, 아니, 네가 나가는 건 접근이 100% 확실시될 뿐이야. 100%가 안 된다면 최소한 90% 이상으로.”
90% 이상이라니…….
<잊혀진 왕들>과 맞서 싸우던 존재를, 옛 용사를, 진짜 용사를 상대로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선배님들께서는 크고 작은 부상이 누적되면서 동작이 점차 둔해지기 시작했는데.
“아니, 우리가 있단 것만으로도 주의가 쏠려서 선배님들한테─!”
“─안 돼! 네 임무의 성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
“그래도, 샤론!”
“모르겠어? 우리가 실패하면 모든 게 무의미해진단 말이야! 선배님들께선 우리가 반드시 성공할 거라 믿고 저렇게 싸우고 계신 거라고!”
“──!”
“모두 다 죽게 되더라도, 네가 성공하면 이기는 거야. 알겠어? 그런 거라고! 지금 저 전투는!”
분했다, 눈물이 나올 만큼. 악다문 입술에서 피가 나올 만큼.
내가 스승님만큼 강했다면, 지금 선배님들과 함께 엘디아를 압박해갈 수 있었을 텐데.
스승님만큼은 못 되어도 에쉬르만큼만 강했어도, 엘디아에게 유효한 위협을 가하면서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죽음의 제단을 쌓아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카밀라가 고개를 떨구고 주먹을 떠는 그 순간에도, 치열한 격전은 계속되어 가고 있었다.
[제로니 : 이런 미친, 빨라, 너무 빨라! 대체 어떻게 접근하지?] [플로렛 : 사복검이 분열했다가 합쳐지는 순간의 허점을 노리는 방식이 더 이상 안 먹혀요! 저 어검 때문에!] [에쉬르 : 청성 각하께서 18자루는 어떻게 막아주시고 계신데, 6자루만으로도 저렇게 압도적이라니……!] [메이트 : 다들 집중해! 어떻게든 틈새로 파고들어!]뤼카엘이 요니울란을 휘둘러 하나의 공격을 이루면, 어검이 그 공격을 반복한다.
다른 각도, 다른 방위에.
이건 공격 범위의 증대에서 더 나아가, 체감 속도조차도 증폭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오로 : 에베스란, 어떻게든 페이쿼리어들을 접근시켜야 한다! 청성 각하의 한계가 머지않았어!] [에베스란 : 노력 중입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그리프베런 : 아쉽구려, 잠깐의 비행만 가능했어도……!]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창명시편으로 구축된 뿌리와 구름이, 성화시편으로 구현된 18자루의 어검과 연달아 격돌한다.
나머지 6자루의 어검과 진성검이 불러일으키는 참격의 소용돌이 속으로 일곱 명의 전사가 내달려 들었다.
[제로니 : 이런 염병, 팔라딘들은 저렇게나 잘 싸우는데 왜 우리 움직임은 완전히 간파당하는 거지? 우리가 저것들보다 잘나지는 못해도 못나지는 않았을 텐데.] [에쉬르 : 저희들의 원류 검법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메이트 : 그런 거라면 방식을 바꾸자. 바로 그 허점을 파고드는 거야.] [플로렛 : 무슨 말씀이시죠?] [메이트 : 뇌향 각하의 힘으로 오감을 교환하는 게 가능하다면, 움직임을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야.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움직이는 법을 알려주자.]산천을 개념째로 찢어발기는 위력의 참격, 한 번이라도 유효타를 허락했다가는 죽는다.
아까까진 정말 봐준 거군…….
그러나 그렇기에, 모든 검술을 꿰뚫어 보기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방심의 장막이 있을 터.
[제로니 : 사복검으로 쓰는 십일자도라, 재미있겠는걸. 플로렛, 너는 괜찮겠어?] [플로렛 : 검강을 어떻게 길게 늘여 부드럽게 흐트러뜨리면 사복검의 움직임을 대충 모방하는 게 가능할 겁니다.] [에쉬르 : 저는 비교적 쉽네요. 극주검법이 심플해서 그런지.]인지 영역의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건 한순간, 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건다.
‘잠깐이라도.’
‘아주 잠깐이라도.’
‘라미네아의 제자 꼬맹이에게 틈을 만들어내 줄 수 있다면, 청성 각하의 작전이 성공할 거다.’
일곱 전사의 생각이 교차했다.
예행 동작은 기존의 검술과 일부러 똑같이 잡으나, 그 자세가 맺는 열매는 완전히 다르다.
요니울란을 해당 검술에 맞게 휘두르던 뤼카엘, 그 인지와 반응 사이에서 혼란의 전류가 튀었다.
「음……?」
사복검 플라디마르테의 칼과 칼집이 보랏빛 초승달을 그리며 달려들고.
[사오로 : 에베스란!]장검 타스알포의 칼끝을 타고 길게 늘어진 검강이 채찍처럼 휘둘러지고.
[에베스란 : 알고 있습니다!]태도 르노드의 검극에 집중된 힘의 쐐기가 허점을 정확히 겨누고 짓쳐든다.
[그리프베런 : 으으아아압!]요니울란의 소용돌이를 넘어, 본체에게로 접근하는 존재를 엄벌하려던 어검들의 앞을 가로막는 두 자루의 성창과 짐승의 발톱.
사오로의 전신이 찢어발겨진다.
에베스란은 아까 잃은 손목에 더해 발목을 잃으면서 저 멀리 튕겨나갔고, 그리프베런만이 에쉬르가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를 보조해줘 큰 부상 없이 멀리 튕겨나가는 데 그쳤다.
“나갈 준비 해, 카밀라.”
공허의 회랑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샤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요란 왕녀님, 봉인구를 비슷하게 만들어줄 수 있나요? 카밀라처럼 악마가 붙잡게 해주세요. 그리고 제 스승님이 죽게 될 때, 절 먼저 밖으로 꺼내주세요. 미끼로요.”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이 녀석들은 이렇게 강한 거지?
카밀라는 요란을 바라보았다.
요정왕 사오로 1세, 즉 아버지가 온몸으로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와중에도, 호흡만 조금 거칠어졌을 뿐 평정을 유지하는 소녀를.
“뜻대로 하죠, 용감한 아가씨.”
내가 보고 배운 용사(勇士), ‘검은 여름’의 종막 (8)
– 대장은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마지막 전투에 출정하기 전에, 엘디아 알마(01) 알카이오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 평생을, 우리 넷을 다 합친 거보다도 더 오래 대심연 항쟁에서 싸워왔는데, 죽어야 하는 순간에는 기꺼이 죽으라고요?
– 그게 무슨 뜻이냐?
– 대장께서는 평생 전쟁 속에서 사셨잖습니까! 해보고 싶은 것 무엇 하나 해보지 못하고! 카듀엘과 슈르비엘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렇게, 꿈이 있는데,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그러자 알카이오스는 뤼카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 뤼카엘, 우리들의 삶에는 분명 우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비었기에, 대신 빛과의 동행이 우리 삶의 이야기를 가득 채울 수 있었지 아니하냐.
– ……!
– 뤼카엘, 그 어느 누가 우리들처럼 이토록 충만한 삶을 살아볼 수 있겠느냐?
– ……?
– 앞으로 많은 이들이 빛을 따라오며 닮아가는 싸움을 할 것이다. 하지만 빛과 함께, 빛의 곁에서, 빛의 심복으로 어둠에 싸울 수 있던 건 우리들뿐일지니. 어찌 이 삶이 내 평생의 자랑이 아닐 수 있겠느냐.
그분들과 함께 싸운 것.
그리고, 자네들과 함께 싸울 수 있던 것.
– 세상이 다시 어둠에 잠기려 할 때마다, 우리들의 삶은 빛의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가슴에 빛을 비춰주게 되겠지.
그렇게.
우리의 발자국을 따라서.
용기의 길을 걸어올 이들을 낙원에서 맞아줄 날을 생각하면.
– 기쁘지 아니하냐? 뤼카엘.
대장…….
무(武)에 관해서라면 어디까지나 그를 존경했지만, 그런 궤변을 펼칠 때는 극도로 싫었다.
「강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뭐가 기쁘단 거지?
친구도 가족도 연인도 모두 버리고, 사지(死地)로 내몰려 죽어가는 후대들이 넘쳐나게 되는 이딴 시대상이 뭐가 기쁘단 말인가.
「───군림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딴 게 어째서 용사지?
이딴 건 용사가 아니야.
광인이지.
「약자는───!」
이런 시대가 어느 때까지 이어질까 상상하면 현기증마저 인다. 나는 후대의 아이들이 우리와 같은 전철을 밟지 못하게 할 것이다.
뭐가 빛의 길이냐.
뭐가 용기의 길이냐.
그저 싸우기 위해 태어나 싸우기 위해 죽는 존재가 필요했더라면, 왜 자유의지를, 감정을 주었단 말인가. 힘만 있고 자아라고는 없는 기계로 만들면 될 것을.
「───약한 것, 즉 노력하지 않고 게을러빠진 것이 곧 죄악이니!」
왜, 즐기면 안 되는 거냐.
왜, 한 번뿐인 삶을 누리면 안 되는 거냐.
원하는 것을 얻으면 안 되고,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면 안 되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면 안 된단 말이냐.
「그 대가로───!」
왜 이 무거운 철을 짊어지고 피의 세계에서 싸우다 죽어가야만 한단 말이냐. 그딴 게 왜 순종이며 순교란 말이냐.
웃기지 마.
그딴 삶, 인정 못 한다.
그렇기에 패배할 수 없다.
내가 패배한다면, 요토스가 승리하든 빛의 군주가 승리하든, 세상의 꼴은 비참하기 짝이 없겠지.
항상.
강자는 힘이 있단 이유만으로.
희생되고, 또 희생당하게 될 것이다.
「───강자를 섬겨야 하는 거란 말이다!」
요란이 샤론에게 가짜 봉인구를 매달아줄 때, 제로니와 플로렛은 유효 살상 범위에 도달했다.
목표가……!
바로 눈앞에……!
뒤바뀐 검술을 통해 완벽하게 허점을 찔렀다고 생각한 순간, 이기어검술이 일제히 소멸하고 모든 힘이 요니울란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니.’
초고속 분열 및 재전개.
‘질 수 없다, 절대로.’
눈에 비치지도 않는 죽음의 춤이 제로니와 플로렛의 몸을 맹렬한 보랏빛 기류가 에워싸더니 한순간에 핏덩이로 뒤바꿔 놓았다.
근막을 이루는 힘줄에서부터.
세포 단위의 연결점까지.
더 나아가 영과 육의 집속까지.
그 모든 것을 끊어내는 이 힘은, 진성검 요니울란의 고유 능력인 혼백 파열.
“스, 스승니이이이이이임──!”
비명이라기보다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내며 샤론이 공허의 회랑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 모든 비명과 슬픔은 무엇 하나 제할 것 없는 진심이었으나, 동시에 기만전술의 일환이었다.
“……샤론.”
사명의 마지막 순간, 플로렛은 안도했고, 아쉬워했고, 또 기뻤다.
안도한 이유는 꿇어앉는 자세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이었다. 제자가 보는 앞에서 최소한의 위엄을 챙길 수 있었다.
아쉬워한 이유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단 점이었다. 제자를 이 위험 너머로 밀어낼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안아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기쁜 이유는…….’
너무 사랑했고, 사랑해서 평생 함께 있고 싶었던 제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나마 이렇게 볼 수 있어서…….
“여기 있음 안 돼, 샤론…….”
손을 움직일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안아봤을 텐데.
직접, 성검을 물려줬을 텐데.
멋있게, 그 등을 저 앞으로, 미래(未來)로 밀어줬을 텐데…… 무엇 하나 할 수 없어서, 단지 시선만으로 타스알포를 가리켰다.
아…….
안 돼…….
마지막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하나조차 전할 수 없는 게…… 너무 슬프고 아쉬운데…… 그래도 그걸 내색해선 안 되니…….
살짝.
아주 살짝.
입꼬리는 치키고, 눈매는 부드럽게 감아서 미소를 지어냈다.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행복했다고 전해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고마웠어, 타스알포.’
그리고 이제, 부탁할게.
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이 기운은……?」
그때, 그 순간, 샤론의 등에 매달린 봉인구를 본 뤼카엘은 온몸을 흠칫 떨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그때, 모두와 함께 토벌하던 순간부터, 되살아난 후 목표로서 찾아다니던 지금까지 한시도 잊어본 적 없다.
‘그래,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저 힘을 어떤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단체로 자살특공을 해왔다는 거군.’
그러나 모두 허사다. 또한 놓칠 수 없다. 그렇게나, 멀게만 느껴지던 목표의 끝이 바로 눈앞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뤼카엘은 일순 평정을 잃었다.
저걸, 저것만 손에 넣으면, 여기에서 죽어간 놈들부터 그 끝, 모든 엘디아들을 되살리고 신세계 계획을 시작할 수 있다.
「가져와, 요니울란!」
요니울란이 보랏빛으로 포효하며 내달렸다.
빼앗는 과정에서 저 꼬맹이의 몸을 찢어발기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안리달의 힘으로 저것마저 되살리면 그만이니까.
청성이 몸을 움직였다.
이제 어떤 힘도 쓸 수 없게 되어서, 움직이는 것만은 가능한 몸을 날려 샤론의 앞을 가로막았다. 용의 형상으로, 최대한 피격 면적을 넓혀서.
“처, 청성 각하!”
끝났다…… 온몸의 구심점을 찢어발기는 요니울란의 힘을 절실히 체감하면서 청성은 생각했다.
‘간신히 억눌러 잠재우고 있던 네이갈라스의 심연이 흐르는 통로가 되겠군…….’
이 자상만 아니었더라면, 전쟁을 끝마친 뒤 세계수에서 요양하면서 침식된 부분만 도려낼 수 있었을 텐데.
‘제로니…….’
그 공격이 절명을 피해간 건, 제로니가 죽기 직전 사력으로 휘두른 플라디마르테가 요니울란의 궤도를 살짝 틀어준 덕분이었다.
‘너희들 덕분에 다 끝났다…….’
청성이 쓰러지는 머리 위로 주홍빛 빛살이 맹렬히 날아 뤼카엘의 손목을 꿰뚫었다.
차원 붕괴.
손이 위치했던 차원이 붕괴하면서 일순간 요니울란과의 접점이 끊어진다.
‘별것 아니다.’
뤼카엘은 생각했다.
초고속 재생으로 다시 육신을 수복시킨다면,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나 그때까지 닥쳐올 위기 또한 없다.
지금 저 활잡이 녀석, 카듀엘의 모조품은 방금 이 공격을 마지막으로 모든 수명을 끌어다 사용해 자연사했다.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지. 모두를 살려내고, 이 뒤틀린 세계를 끝장내서!’
그 모든 결과로부터 생겨난 전투 의식의 괴리가, 한순간이지만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바로 등 뒤.
공허의 회랑이 현세의 차원과 연결되는 것을, 그리고 그 뒤에서 튀어나온 한 소녀가 자신에게 몸을 던진 것을.
– 내가 이걸 뤼카엘에게 가져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지?
물론, 이딴 것은 위협 따위도 못 된다.
마력을 이용해 칼날을 세우고 있었으면 뤼카엘이 바로 반응했겠지만, 어떤 적의도 없어서 반응이 늦었을 뿐.
본능적으로 휘두른 팔을, 소녀는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서 간신히 피했다.
– 그냥 가져가면 안 되고, 거리가 반응할 수 없도록 완전 영점이 되어야 해요. 그게 되면 제가 회랑에서 대기하다가 명령어를 내리겠어요.
만약 스승님에게 마력을 받지 못했더라면 피하지 못하고 즉사했을, 단순하되 엄청난 일격이었다.
‘아.’
온몸이 전율로 떨린다.
이것이 무(武)의 정점.
‘안 돼.’
상상 영역을 구축했으나, 그 무엇 하나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단 한 걸음 거리인데, 마치 태산(泰山)에 가로막힌 듯…….
‘더 나아갈 수가 없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디디려 했다가는, 바로 그 순간에 죽는다.
위압감 때문이 아니다.
그 한순간에 상상력으로 그려낸 모든 미래가, 확실하고도 분명한 죽음을 가리키고 있던 것이다.
‘일어나야 돼.’
일전에 뤼카엘의 일격을 받아내고 지면을 만신창이로 나뒹굴던 에쉬르가 몸을 일으켰다.
토혈이 끝없이 쏟아진다.
이제는 용혈 혈청 하나 없다. 제대로 된 초식을 부릴 힘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몸을 던지는 것만큼은 가능해.
‘잠깐, 주의를 끄는 건 가능해.’
에쉬르가 진각을 밟아 몸을 전방으로 튕기듯 쇄도시키자, 저 옆에 꽂혀 있던 르노드가 핑그르르 회전하며 날아와 손에 잡혔다.
「!」
요니울란의 포효가 르노드의 칼날을 수백 파편으로 분쇄시키며 그 너머 에쉬르의 전신마저도 찢고 삼키고 저밀 때.
“그만 좀 하세요────!”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카밀라가 전력으로 마침내 뤼카엘의 등에 자신의 몸을 부딪쳤다.
– 공허의 장막이 잠시 걷히는 거죠. 그때 장막을 닫아 뤼카엘의 핵을 그 안에 봉인하겠어요.
뤼카엘의 생각으로는 그저 그렇게 끝날 일이었다.
이 꼬맹이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격을 한 걸로 끝날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끝났을 것이다.
“요란, 지금이야아아아아아!”
그 순간, 수평선을 전부 가릴 정도로 광막하게 전개된 공허(空虛)가 세계를 삼키지 않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