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96)
가짜 용사 이야기-296화(296/310)
시즌 3 : 104화
내가 보고 배운 용사(勇士), ‘검은 여름’의 종막 (9)
“아, 깨어났군.”
공허(空虛)에 삼켜진 뤼카엘은 눈을 감았다 뜨자, 세상이 암녹색 일변도로 변한 것을 보았다.
여긴 어디지? 엘디아 프라이모아 부츠를 통해 전해지는 지질의 감촉이 기괴했다.
갑주에 내장된 데이터 라이브러리가 이런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심연의 형질을 모방했으나 근원은 빛.]그래, 이 질척질척한 질감은 심연이랑 비슷한데…… 프라이모아 갑주가 어떠한 반발 작용도 일으키지 않는 게 이상해.
뤼카엘은 고개를 들었다.
방금 등에 몸을 들이받은 꼬맹이가 먼저 보였다.
「여긴 어디냐?」
그렇게 말하자마자 소녀 옆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이 세계의 색채와 너무나도 똑같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
신장은 작은 편이었으나 대단한 미청년이었다. 인간과 요정의 존재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반요다.
「웬 놈이냐?」
“이 공간의 주인이랄까. 다른 놈이 그딴 발언을 했으면 그냥 괘씸죄로 처죽였을 텐데, 엘디아께서 알아보실 정도로 대단한 놈은 아니라서.”
「그러면 관심 없다. 꼬맹이, 안리달의 핵은 어딨지? 베기 전에 말해.」
꼬맹이에게 요니울란을 겨누려고 하자, 청년이 혀를 쭉 내밀며 손끝으로 저 하늘을 가리켰다.
“그거라면 저 위에 있지롱.”
태양? 아니, 태양이 아닌 웬 불덩어리가 상공 드높이 떠 있었다.
아니 저건, 벨의 불꽃……?
뤼카엘의 생각은 아주 적확한 것이었다. 저것은 화룡 벨’다키둔의 분신, 홍염의 아키레아가 만든 불길이었으니까.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셔, 엘디아 나리. 물론,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가져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아무런 문제 없다.
마력의 발판을 거듭 만든다면, 당장에도 끄집어내올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방팔방에서 기괴한 생명체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오지 않았더라면.
“근데 이걸 어쩌지? 내 꼬봉 놈들은 예의범절이라고는 좆도 없는 놈들이라 나리께서 저걸 가져가게 두지 않겠다는데. 흠.”
그것은 공허의 피조물.
16세기 안리달 사변 때 안리달의 힘을 제압했다는 공허의 존재들이 끝도 없이, 정말 한도 끝도 없이 밀려나왔다.
「재밌군.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요니울란의 힘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그 공허의 괴수들을 어렵지 않게 찢어발겼다.
근데 숫자가 줄지를 않는다.
오히려 배수로 늘어날 뿐.
극점에 도달한 공허의 피조물은 죽음의 순간 분열하고, 그 분열 속에서 각각 새로운 생명을 얻어 부활한다.
언제까지?
술사의 힘이 다할 때까지.
“당연히 못 이기겠지 뭐. 대충 봐도 당신은 나보다 강하거든. 아키레아 나리보다도 더 강한 것 같고.”
카밀라는 망연히 술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이 사람이 바로…….
공허의 제일 사도, 아르젠…….
이 봉인구에 남아 있는 건 본체가 아니라(예전에 죽었다) 잔류 사념일 텐데도, 이렇게나 강력한 힘을 부릴 수 있다니.
“근데 못 이기기만 할 뿐이지, 여기 못 붙잡아두는 건 아니거든. 애초에 이건 그러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고.”
아르젠이 말하는 순간에도 분열하고 증식하는 공허의 피조물은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다.
요니울란의 성검 해방.
혼백 파열의 힘은 분열ㆍ증식도 불가능하게 대상을 소멸시킬 수 있지만, 엘디아라고 해서 성검 해방을 무한정 반복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아키레아 나리와 이 봉인을 끝내고 50년쯤 더 살았거든? 그 시간 동안 틈날 때마다 내 힘의 최대치를 이 봉인구에 계속 주입했단 말씀이야. 그러니까 지금 댁이 상대해야 하는 건, ‘50년만큼의 힘을 저장한 소환사’라고 보면 되겠네.”
소환사의 힘의 지표는 바로 마력이다. 어떤 마법사보다도 더 마력의 절대량이 그 힘의 강도가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공허의 사도는 소환사 계열.
공허의 피조물을 다루는 만큼 소환 마법사와 힘의 원리가 비슷한데, 그게 50년 분량의 힘을 저장해두고 있다고?
“못해도 10년은 붙잡아둘 수 있겠지. 근데 제발 부탁이니 그보다 빨리 없애주면 안 될까? 이 공간이 없어져야 나도 본체를 따라 사라질 수 있거든. 왜 나만 여기 갇혀 가지고, 어흑흑, 이렇게 재미난 구경을 다 하게 해주냐, 푸하하하하하핫!”
……그리고 여러 야사에 기록된 대로 광인 중의 광인이었다.
“야 인마, 멀뚱거리지 말고 이제 그만 나가라. 여기는 사실 미성년자 입장 금지야. 내 악마들 좀 봐. 저것들 노출증 환자라 죄다 벌거벗고 있다고. 괜찮다고? 요즘 애들은 까져가지고, 저거 보고 부끄러움도 안 느끼나?”
그때 뤼카엘은 거듭 요니울란을 휘두르면서도 어디로도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포기하지 마라…….
목표가…….
목표가 바로 앞이다…….
그런데 벌레 군주, 켈렉─샼에 필적하는 하수인 소환의 속도…… 혼자서는 길을 뚫고 나아갈 수가 없다.
「어리석은 것,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상상도 못 할 거다…….」
베고, 찢어내고, 꿰뚫고, 다시 베고, 다시 찢어내고, 다시 꿰뚫고.
다시, 다시, 다시.
요니울란으로 만들어내는 한순간의 틈새, 이 틈새를 파고들 전우(戰友)가 한 명만 있었더라면.
「모든 게 눈앞이었는데, 개죽음의 계보를 완전히 끊어내고…….」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명.
엘디아가 한 명만 더 있었어도, 심연의 진왕과 비교하면 별것도 아닌 상대인데.
「세상을 정상적인 방향으로 되돌리는 게 바로 코앞이었는데───!」
알카이오스가 앞에 있었다면.
그 위상을 벼락으로 전환시켜서 이 소환수들이 분열하기도 전에 광속으로 베어버렸을 것이고.
「──너 따위가, 이 칼의 세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인 너 하나 때문에!」
카듀엘이 옆에 있었더라면.
틈새 너머로 술사를 정확히 노려주었을 것이고.
「저 미쳐버린 세계가──!」
슈르비엘이 곁에 있었다면.
틈새를 넓히다 못해 아예 구멍으로 뚫어버렸을 것이고.
「──강자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미친 세계가!」
또 에누엘과 함께였다면.
우리들 중 가장 강한 그 녀석이라면, 이 상황 자체를 아예…….
「계속 유지되게 만들어 버렸단 말이다──!」
이 잔혹한 칼의 세계에서.
누구보다 많이 피를 뿌리고, 또 누구보다 크게 피를 흘렸고.
그 어느 누구보다 깊게 피에 절여져온 존재의 포효.
“──개죽음이 아니에요!”
그 포효에 맞서는 소리는 지극히 가냘팠으나, 그래도 똑같이 스스로의 신념으로 빛나는 외침이었다.
“세뇌된 것도 아니고요──!”
뤼카엘의 신조, 강자생존의 세계 속에서 자신은 스승님과 만날 수 없으리라. 자신은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던 약자였으니까.
만나야 할 것이 만나지 못하고.
이어져야 할 인연이 이어지지 못하는 세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오직 공포만이 있을 뿐이리라.
“먼저 빛을 받았으니까, 그 빛을 계속 다음 시대에 넘겨줘오는 싸움을 해온 것뿐이란 걸 사실 잘 아시잖아요!”
그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흑암, 그것이 바로 카밀라의 세상. 그 어둠 속으로 빛으로 찾아와주신 스승님.
그것이 카밀라의 용사(勇士).
카밀라가 보고, 배우고, 동경하고, 닮아가고, 목표로 하는 용사의 길. 용사의 빛.
「닥쳐라!」
공허의 사도, 아르젠의 잔류 사념의 눈이 전율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저 숫자를 다 뚫고 여기로 공격을 날린다고? 이게 바로 신화시대에 <온 것들>을 일선에서 보좌했다는 엘디아의 힘인가?
‘살면서 아키레아 나리 정도의 무위를 또 보는 일이 있나 싶더니만, 죽고 나서도 볼 일이군…….’
감탄할 때가 아니건만, 힘에 대한 순수한 외경심 때문에 탄성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해라, 꼬맹아!”
요니울란이 공허의 천지를 보랏빛으로 찢어발기며 내달려들 때, 아르젠이 다급하게 손을 내뻗을 때, 카밀라는 피하지 않았다.
“저는 엘디아 님이 미워요…….”
그저 고백할 뿐…….
엘디아가 해온 싸움의 규모와 세월의 길이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똑같은 삶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엘디아 님은 그 누구보다 증오하지만…….”
그 용사의 빛의 저편, 그 빛의 지평선의 맨 앞으로 눈을 돌리면 ‘그들’이 있었다.
최초의 다섯 장작, 엘디아.
빛을, 세상에서 가장 낮고 어두운 곳으로 운반해온 장작들. 자신의 몸을 태우고 또 태워서, 그 빛이 꺼지지 않게 만들어준 존재들이.
“……과거의 엘디아 님에게는 너무 고맙단 말을 하고 싶어요.”
처음에 그 존재들이 있었기에, 그 장작의 계보가 오늘 이 순간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다.
먼저, 그 존재들이.
희생과 헌신의 소명을 마쳐 주었기에, 온 세상에 빛을 운반하는 사명에 목숨을 내던져 가면서까지 충성해 주었기에.
“정말 감사합니다, 뤼카엘 님.”
그렇기에 진심을 담아서…….
스승님과 만날 수 있게 해준 그 최초의 장작에 경의를 담아서…….
허리를 깊숙이 숙여 절을 올릴 수 있던 것일까…….
“와 이런 미친, 무슨 속도가! 안 되겠다. 나와라, 일악아! 일벌아!”
공허의 사도 아르젠이 최종 보루라 할 만한 최고 심복들을 소환해냈나 늦을 것이다.
‘설마.’
공허의 피조물로 카밀라의 몸을 다른 곳으로 잡아끌려 했지만, 이 또한 늦었을 것이다.
엘디아가 사력을 끌어낸 일격.
카밀라를 찢어 죽이고, 또 아르젠의 잔류 사념조차 흩어버릴 수 있는, 가히 무(武)의 예술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궤도.
‘나까지 노린 건가? 이 공허의 세계를 끝장내려고?’
죽음이 그토록 확실했건만, 카밀라는 죽지 않았다.
멈추었기 때문이다.
요니울란의 포효가 카밀라의 심장 바로 앞에서. 정확히는 소녀의 모습 위로 떠오른 과거의 잔재 앞에서.
– 생각만 해도 마음이 떨리지 아니하냐, 뤼카엘?
그것은 옛 동료의 잔상.
기억 속에서 단 한순간도 잊혀진 적이 없는 전우의 환영.
– 우리가 먼저 걸어간 이 길, 그 발자국 위에 자신들의 발을 포개어가며 우리를 따라올 존재들을 낙원에서 맞아줄 생각을 하면?
알카이오스.
카듀엘.
– 우리와 같은 싸움을 하는 이들은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창세의 어머니께 축복을 받은 빛의 군주들을 곁에서 섬기는, 이러한 영예는 누려보지 못하겠지요. 그분들과의 동행이 곧 기쁨입니다, 뤼카엘.
슈르비엘.
– 우, 우리는 창세의 피조물이 아니라 태어날 수도 없는 존재였어. 그런데 이렇게 영혼과 육신을 갖게 된 거야. 이렇게 살아서 움직이고, 이렇게 서로 만날 수 있게 된 거고. 그, 그러니까 나는 항상 모든 게 감사해…….
에누엘.
– 만약 천 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에누엘로 태어날 겁니다. 그래서 뤼카엘, 당신과 함께 싸우고, 함께 이야기하고, 사명의 끝으로 향하겠습니다.
나는 무엇이 하고 싶었던 것인가.
수천만의 인명을 학살하고, 수천 명의 후임들을 죽게 만들고, 저딴 코흘리개를 상대로 온갖 원망의 푸념을 터뜨리면서까지…….
나는 정녕, 무엇이 하고 싶었던 걸까?
‘정말 세계를 파멸시키고 싶었던 것인가? 인구 대다수를 절멸시키면서까지? 정말 강자만이 존재하고 약자는 모두 사라진 세계를 그렇게나 간절히 원했던 건가?’
아니.
아니다.
모든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나는…….’
나는 그저…….
그 네 명의 바보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이란 걸 누려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