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297)
가짜 용사 이야기-297화(297/310)
시즌 3 : 105화
내가 보고 배운 용사(勇士), ‘검은 여름’의 종막 (10)
용사(勇士)를 선망한다는 것은, 한 번도 전장에 서보지 않은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알지 못하고.
보지 않았기에.
섭리를 일그러뜨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썩게 하고 무너뜨리고 붕괴시키는 심연(深淵)을.
– 네 이름은 뤼카엘, ‘은혜를 찬송하는 자’라는 뜻이다.
내가 태어난 시대는 우주세기 4세대, 495년 12월 24일이었다.
그래, 우주세기였다.
무수히 존재하는 창세의 세계 가운데 <온 것들>이 속한 세계의 문명 수준은 유독 독보적이었으니까.
나를 ‘태어났다’고 해도 될까.
시험관에서 성화시편(聖化詩篇)에 가장 적합한 육신으로 빚어진 이후,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웬 기계와 맞붙어야 했다.
승리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살아갈 자격을 얻게 되었다.
태어났기에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가치를 증명해야 하던 것이다.
내 동반자는 요니울란이었다.
단순한 칼이 아니었다. 태어난 뒤 창조주(創造主)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친구였다.
삶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대심연 항쟁사의 폭풍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심연의 주인,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가 퇴락시킨 세계들을 정화하는 게 우리의 임무였다.
세계민(世界民)들은 약했다.
너무 약해서, 요니울란을 한 번 휘두르면 수천씩 쓰러지는 심연의 잡졸 하나에게도 저항하지 못하고 수십 명씩 죽어갔다.
그걸 보며 가엾단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내 힘은 고귀한 책무이며, 힘없고 약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받은 사명이란 것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때 내 나이가 세 살이었다.
세계민들은 두 손과 두 발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부모를 찾고, 부모가 안아주지 않으면 우는 나이에 말이다.
어찌 이렇게나 나약한가.
어찌 이렇게나 가여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나와 동갑인 세계민 꼬맹이가 천사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같잖았다.
그렇게 말하며 해맑게 눈을 빛내는 걸 보니 불쾌하기까지 했다. 너희들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닌데, 전장에 오고 싶다고 말한단 말이냐.
역으로 말하고 싶었다.
나는 너희들처럼 되고 싶다고.
약하니까, 누가 당연히 대신 싸워주는 세상에서, 하고 싶은 걸 해보고 가정을 이뤄보고 부모와 함께 어딘가로 여행을 가보고도 싶다고.
평범히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싸우기 위해 만들어지고, 또 싸우다 죽도록 설계된 내 운명 위에 평범한 삶이란 성립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외롭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 길 위에서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요니울란 말고도 운명의 동반자가 무려 셋이나 있었으니까.
알카이오스는 아버지 같았고.
카듀엘은 명석한 오빠였으며.
슈르비엘은 선임인데도 불구하고 여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이 내 삶의 한 줌.
나의 유일한 가족(家族)이었다.
생후 150년이나 이어져 온 항쟁 속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게 해준 삶의 원동력이었다.
이대로…….
이대로 전쟁을 끝내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는 것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카듀엘과 슈르비엘은 하고자 하는 일이 명확했고 꿈도 있었다.
물론 그건 춘몽(春夢)이었다.
우주세기 4세대, 635년이 되던 해에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의 모성 발라돈에서 마지막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처음부터 끔찍하진 않았다.
처음에는 동생이 생겼기에 뛸 듯이 기쁘다면 기뻤다.
엘디아 카타(05), 에누엘.
표정을 드러내는 법도 없고 말수도 적어서 귀염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처음으로 생긴 동생이었던 것이다.
에누엘은 강했다, 어마어마하게.
우리 넷을 합친 거보다 창세의 파편을 더 많이 받았으며, 창세칠편 중 가장 강력한 천명시편의 힘을 핵(核)으로 삼은 것이다…….
첫 출전에서는 요토스의 최고 심복 중 하나인 슈’율큘라를 묵사발을 내버렸다.
기뻤다.
녀석이 강한 게 기뻤다.
녀석이 빛의 군주들께 칭찬을 받을 때는 덩달아 기뻐졌다. 그리고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엘디아가 모두 살아서.
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러나 전황은 점차 화급해졌고 빛의 군주들의 전략은 다급해졌다. 군대가 분산되면서 동시다발 전선을 수행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슈르비엘이 죽었다.
벌레 군주와의 일전이었는데, 나와 에누엘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어서 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유품은 동화책 한 권이었다.
내가 꿈꾸던 미래 그대로, 엘디아 전원이 손을 잡고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동료의 죽음이 아니었다.
150년 동안 함께 싸워왔다.
태어난 이후부터 줄곧 함께해온 누군가가 사라진 것이다. 150년의 여정을 함께 나누고 추억할 수 있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삶의 일부가, 삶의 소중한 무언가가 도려져 나간 느낌이었다. 평생 그려온 꿈의 한 폭에서 중요한 부분이 찢겨져 나간 순간이었다.
– 빛들께서 서부 원정을 가신다고 하더군. 병력이 줄어서 지원자를 받는다는데.
– 나는 몸이 너무 약하니…… 루사엘라(대천사) 님들이 알아서들 해주시겠지.
– 맞아, 그분들이 싸워주실 거야.
벌레 군주 토벌전을 마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할 때, 그런 대화를 들은 적이 있었다.
웃고 있더라.
웃으면서 말하더라.
누군가가 자신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싸우다 죽는 것이 당연하단 말인가.
처음으로, 혐오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경멸감을 느꼈다.
더 이상 이것들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며, 힘이 없는 이유는 책임감과 의지가 없을 뿐인 쓰레기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 우리가 정말 저런 것들을 위해 싸우는 게 옳은가? 우린 왜 싸우고 있는 거지?
에누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했지만, 딱히 동의를 구한 건 아니었다.
에누엘은 아직 삶의 간단한 신조조차도 성립되지 않았을 갓난아기니까.
– 대장.
– 살아서 다시 보니 기쁘다.
– 슈르비엘 덕분에…….
그래도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슈르비엘의 슬픔을 공유할 누군가가 남아 있었으니까.
150년 동안의 세월을 함께 쌓아 올린 존재가 아직 둘이나 더 남아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음 전투에서 카듀엘이 죽었다.
– 가십시오. 빛이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비출 수 있도록, 저분들의 횃대가 되는 겁니다.
카듀엘이 죽었을 때, 빛의 군주들은 이 행성에서 퇴각하여 힘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슈르비엘은? 카듀엘은?
우리는 생명도 아니며, 다시 창세의 파편과 시편의 핵으로 조합해서 새로이 만들기만 하면 되는 소모품이란 말인가?
– 철수를 결정한 적 없어, 뤼카엘. 절대 그 아이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아. 너희들이 어떻게 열어준 길인데.
하지만 테르시아는, 테르시아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싸움터까지 향할 수 있었다.
– 죽지 마십시오, 대장.
당신마저 죽어버리면, 나는 이제 정말 외톨이가 되어 버리니까.
에누엘은 사랑스러운 동생이다.
그렇지만 150년을 함께해온 추억을 공유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게 가능한 존재는 이제 알카이오스뿐이었다.
– 자네도. 하지만 그 자리가 죽어야 할 자리라면 마땅히 죽어야 한다. 뤼카엘, 우린 장작이다. 불이 아니야. 알겠나? 장작은 불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 말을, 그 궤변을 듣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어…….
장작으로 태어나게 해달라 한 적도 없고, 장작으로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단 말이다.
– 대장님, 그렇다면 결국 저희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건가요?
이 순간까지 와서도, 다른 둘이 죽은 순간에 와서도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내 아픔을 알았을까.
내 슬픔을 알았을까.
내 번민을 알았을까.
알카이오스는 내 어깨를 힘주어 잡더니, 훈계하는 아버지와 같은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 아니, 이 세계의 불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거다.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게 살고 누구보다도 위대하게 죽기 위해. 뤼카엘, 그걸 잊지 마라.
아무리 좋게 포장해봐야, 아무리 멋있는 말로 포장해봐야, 죽는다는 소리 아닌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아무런 기쁨도 누려보지 못하고, 지켜줄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 개죽음 아닌가.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잊혀진 왕들> 중 최강인 황제 아쉬론, 놈의 필두 권속인 공안공(公黫公) 베샨시두그와의 싸움은 격렬했다.
에누엘이 죽게 될 위기였다.
그 죽음의 각도를 조금만 비끼면 에누엘을 살릴 수 있지만, 대신 내가 죽을 수 있게 된단 걸 알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카듀엘과 슈르비엘이 그렇게 해주었듯,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던 자신의 모습이 뿌듯했다.
– 에누엘…… 너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야. 그건 너무 슬프잖아? 크크.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 녀석, 감정이라고는 일절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얼굴로 울기도 하는구나, 싶어서.
이렇게나 슬프게 울어 주는구나, 싶어서. 나를 그렇게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 그러니까 넌 죽지 마. 끝까지 살아서, 다 끝낸 다음에, 내 무덤 위에 술 한 잔 따라줄래……? 그러면 정말, 모든 게 다 끝난 건지 나도 알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웃으면서 죽을 수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누엘이 술을 따르는 일은 오지 않았다.
마지막, 거미 군주 토벌전에서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찾아온 것은 검은 태양 카렌덴으로, 지금은 안식을 줄 수 없으며 엘디아 오메크(06)가 나타날 때까지 관할지를 수호하라는 명을 내렸다.
–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는 치명상을 입고 달아났으나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다.
생산 동력이 부족하다 했다.
생산 설비가 없다고도 했다.
–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겠나? 이 전쟁을 끝낼 준비를 마칠 때까지…….
현재 보유 중인 창세의 파편은 전부 엘디아 오메크 양성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에, 우리들은 쇳덩어리 속에 봉해진 채 각자 시설의 수호자로 보내졌다.
거기서 긴 잠에 들었다.
나중에, 카렌덴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러니까 엘디아 오메크가 나타날 시대를 위해.
잠 속에서 생각했다.
뭐지? 대체 뭐였던 거지?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싸움은, 우리는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건가, 아니면 헌신짝처럼 내버린 건가, 대체 우리의 싸움과 충성은 뭐였지?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는 지금…….
우리가 싸우는 게 당연하고, 싸우다 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약자(弱子) 놈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웃고 있을까?
웃고 있나?
웃고 있다고?
용서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누구보다 웃을 자격이 있는 게 우리이거늘, 그 자격 하나 없는 그것들이 이 평화를 누리며 웃으며 살아간다고?
우리에게도 꿈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삶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루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존재했단 말이다. 싸우다 죽는 걸 원했던 엘디아는 누구 하나 없었다.
– 창조주가 그렇게나 미우면, 당신이 신(神)이 되면 어떻겠습니까?
그 원망과 증오와 불평의 번뇌 속으로 놈이 찾아왔다.
심연의 주인, 요토스.
요토스는 현재 이 땅에서 움직일 심복이 필요하고, 나에게는 모든 과오를 돌이키고 이 세계를 정상적으로 돌릴 힘이 필요했다.
모두와 함께할 세상을 만들 힘.
요토스와의 관계는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이었다. 놈이 원하는 걸 들어주면 놈은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준다.
그저 그럴 뿐인 관계…….
나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불만이 있었던 강자들을 되살리고, 이끌고, 깨우면서 세상의 혼돈을 도모했다.
12세기의 동란기.
15세기의 아쉬론 사변.
16세기의 안리달 사변.
나는 이 세계를 파괴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구하고 싶었던 거다. 우리와 똑같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이들을.
단지, 말해주고 싶었던 거다.
너희들은 행복해져도 된다고, 너희들도 꿈을 꾸어도 된다고, 너희들도 삶을 구가해도 된다고.
그런데 대체 왜냐…….
왜 너는 그때 나에게 칼끝을 겨누었냐, 에누엘.
왜 너와 똑같이, 이 무지하고 몽매한 것들은 계속 내 앞을 막아서고 칼끝을 겨눈다는 말이냐.
왜 너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말해주고 을러줘도 이해는커녕 들을 생각조차 안 한단 말이냐.
이딴 삶이, 뭐가 좋다고…….
용사로 포장되는 개죽음이…….
내가 틀렸고, 네가 맞다면, 대체 우리의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한 걸까.
후대의 아이들이…….
우리와 똑같은 개죽음으로 향하게 만드는 삶이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았지 않았을까. 우리를 존경하는 게 아니라 원망할 텐데.
– 지금의 당신은 밉지만…… 그래도 옛날의 당신은 마음 깊이 존경하고 또 감사하고 있어요.
아.
– 당신 덕분에 스승님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뤼카엘 님.
그렇게 말하던 꼬마의 얼굴에 왜 알카이오스, 대장의 마지막 말이 겹쳐진 건 당연한 결과인가…….
제기랄…….
아, 제기랄…….
아아, 제기랄, 나는, 나의 삶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서도 그렇게나 비참하고, 다시 살아나서는, 다른 동료들보다 몇 배는 더 한심하게…….
* * *
「뤼카엘과의 통신이 끊겼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카렌덴 놈의 힘에 봉해졌으니, 오히려 잘됐군요. 어차피 지금은 준비를 마칠 시간입니다. 네이갈라스의 봉인은 제 뜻대로 불안정한 상태로 변했고, 플레이어 투입이 조만간입니다.」
「흠, 뤼카엘에 한해서는 잘되었다 하신 말씀의 뜻을 모르겠는데요. 이제는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같은데요.」
「저 힘이 필요할 때가 되면 그 육신에 깃든 심연의 힘을 강제로 증폭시켜서 꺼내오죠. 심연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인간성을 뤼카엘의 마지막 기억으로 쓴다면…… 저 불필요한 기억은 지워지고, 다시 쓸 만한 ‘병정 인형’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