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
가짜 용사 이야기-3화(3/310)
제3화
“약속한 거다. 내가 이기면 칼 쓰는 법 가르쳐 주기로.”
당혹스러운 침묵이 흐른 것도 잠시, 재미난 구경거리에 용병들이 일제히 환성을 터뜨렸다.
“저런 상남자가 있다니,”
“인류의 미래가 그렇게 어두운 것도 아니구만!”
요한 울프 프로스트만이 경악에 가까운 헛웃음을 흘렸다.
“결투라니? 카밀라! 장난이라도 도가 지나쳐. 이런 애와 어떻게──”
“──그냥 한번 지켜봅시다.”
필사적으로 만류하려던 울프를 용병대장 엘토람이 만류했다.
“그 위대한 일성칠검의 후기지수나 삼대검가(三大劍家)의 자제들이 왔을 때도 나리는 상대조차 안 하고 내쫓았잖소.”
“……!”
“그런데 저 꼬맹이에게는 결투의 기회조차 줬다? 저 시건방진 꼬맹이에게 뭔가를 봤단 소리 아니겠소?”
엘토람의 평가는 이상할 정도로 후했다. 방금 전의 대면에서 카이센이 가진 기이한 패기를 느꼈기 때문일까.
“그리고 볼에 새겨진 문장 안 보셨소? 가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는 발크루쉬 클랜의 문장 아니오.”
“……!”
“저건 발크루쉬의 족장이 인정한 전사라는 소리야. 뭔가 보여주지 않겠소?”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안경알 너머로 비치는 울프의 눈동자에는 수심만이 가득했다.
‘카밀라가 대체 누구인데……?’
당대 최강의 페이쿼리어로 칭송받던 영웅,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의 직계 제자다.
제국의 이름난 기사들조차도 단 3합조차 넘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 일쑤가 아니었던가.
‘그런 최강의 존재를 상대로 저 앙상하게 굶은 소년이 1합이나 버틸까?’
카이센이 칼을 움켜쥐었다.
평생 처음으로 쥐어보는 장검의 무게는 버거울 정도로 육중했다.
한 손으로는 도저히 쥘 수가 없어서, 두 손으로 붙잡아야 했다. 그제야 부르르 떨리던 칼날의 흔들림이 멎었다.
“대신 하나 물어볼 테니까 대답 똑바로 해라.”
카밀라는 등허리에 찬 성검을 뽑는 대신, 풀밭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걸로 싸운다고?”
“꼬우면 너도 이거 쓰든가. 뭐든 무기가 될 수 있어.”
압도적인 기세.
아니, 위압적인 살기.
나뭇가지다. 겨누고 있는 건 한낱 나뭇가지인데…… 나뭇가지 주위의 대기가 타들어가는 것만 같아.
하지만.
더 숨이 막히게 만들었던 건 그 검의 기세가 아니라 카밀라가 던진 질문이었다.
“자, 질문. 엄마가 죽은 게 설마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숨이 턱 막혔다.
대답할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카밀라는 답을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너 겁나 약해 빠졌잖아. 그런 네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는데?”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런 주제에 엄마가 우루크한테 죽을 때 아무것도 못 했다고 자책하고 자빠진 이유가 뭔데?”
카밀라는 그때 바랐다.
옛 스승의 아들이, 세상이라는 막연한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분명한 대상을 원망하기를.
“당연한 결과 아냐?”
절망하지 마.
압도적 절망 앞에서는 체념하다가는 언젠가 삶을 포기하게 된다.
“넌 그냥 그런 약골로 태어났거든. 원망하려거든 세상을 원망해야지 어쩌겠어?”
우루크를 증오하게 놔둘 수는 없지. 너무 위험하니까.
원망의 대상을 나로 바꿔라.
날 선 감각은 반드시 삶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줄 거다.
“넌 그때 아무것도 못 한 게 당연한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이렇게 살아남은 거고!”
카이센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감정의 격랑이 크고 사납게 일어섰다.
이 감정이 무엇일까.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용암처럼 뜨겁게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펄펄 뛰는 내열이 몸을 앞으로 튀어 나가게 만들었다.
“오우야!”
환성, 순식간에 용병들 사이에서 함성이 뜨겁게 튀어 올랐다.
“꼬마 놈이 먼저 달려들었다!”
“크핫, 기세 하나는 기사님 저리 가라인데!”
카밀라의 오랜 친구인 울프와 엘토람만이 당혹감에 이맛살을 찌푸릴 뿐.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어.’
‘카밀라 나리가 도발을? 그것도 저런 꼬맹이한테?’
라미네아가 리스타 알터 쉬르팽의 뒤를 잇는 영웅이었던 만큼, 제자인 카밀라도 당대 최강의 페이쿼리어로 맹위를 떨쳤다.
현존하는 페이쿼리어 가운데 필두 용사이니 말 다했다. 그런데 대체 저 녀석이 뭐길래?
엘토람이나 고참 용병들은 문득 숨을 죽이고 돌진한 소년의 반응에 집중했다. 대체 뭘 보여줄 거냐? 하지만.
뻐억……!
다음 순간 보인 것은, 소년이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나가떨어지는 광경이었다.
승부에 결착을 낸 건 카밀라의 손가락.
장난스럽게 쥔 나뭇가지를 쓰기는커녕 그저 살짝 잡아당겼다가 튕긴 딱밤이었다.
당연히 일합의 승부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그 일격에 지면을 세 바퀴나 나뒹군 카이센의 머리에서 생각이란 것이 날아갔다.
“저게 뭐야?”
대장 엘토람과 고참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검을 쓰는 법조차 모르는데요?”
“아니. 검은커녕, 아예 무예를 배운 것 같지도 않은 동작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발크루쉬 클랜의 인정을 받은 거지?”
그런 카이센에게, 페이쿼리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갔다.
“그건 네 잘못도, 느그 엄마 잘못도 아니고.”
스릉, 카밀라의 허리춤에서 스승의 소검이 칼집을 스치며 뽑혀 나와 섬뜩한 인광을 뿜었다.
“항상 그런 자리에는 없는 나 같은 페이쿼리어들의 잘못이야! 네가 아니라! 그러니까 울 것 같은 얼굴로 복수니 뭐니 짖지 마라.”
카밀라가 소검을 있는 힘껏 내리찍은 그 순간, 구경꾼 모두가 경악의 헛숨을 들이켰다.
“카밀라!”
“뭐야, 진짜 죽였어……?”
“웜매…… 말하는 건 악당이어도 사실 우리 나리가 착한 사람이라 믿고 있었는데!”
아니, 죽이지 않았다.
황급히 달려온 울프는 소검이 카이센의 머리 바로 옆에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카밀라가 카이센의 얼굴에 소검의 칼집을 툭 던지며 말했다.
“재능이라고는 개미 똥만큼도 없는 얼라가 뭔 놈의 복수? 칼을 가르쳐줘? 복수는 내가 대신 해줄 테니 그거 가지고 꺼져.”
카밀라는 말을 마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라미네아 스승님께서는 이놈을 지키고 죽었다.
그리고 이놈이 이 나이 먹도록 칼을 쓰는 법을 아예 모른다는 건, 칼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으셨단 거겠지.
‘스승님께서 심사숙고해서 내리신 그 결정을 내가 감히 깨트릴 수는 없어.’
카밀라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서려던 그때, 그 순간.
“!”
픽…….
정강이 각반을 스치고 지나가다 부러진 무언가가 있기 전까지.
‘나뭇가지……?’
진짜 결투였더라면 아무 의미도 없었을, 비천한 공격.
“공격, 성공이지……? 뭐든, 무기가 된다며.”
기절한 줄만 알았던 소년의 그 공격에 카밀라도 울프도 엘토람도 용병들 전부 잠시 말을 잃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스쳤으니까…… 나리의 패배인 건가……?”
멍하니 중얼거리던 용병들은 카밀라가 매섭게 노려보자 입을 다물고서는 딴청을 피웠다.
“저게 정말 꼬맹이의 눈인가?”
엘토람 또한 당혹스러웠다.
저건 전사의 눈이다.
저런 상황에서조차 투지를 잃지 않은 눈동자…… 일류 전사의 그릇이라는 건가?
“카이센, 괜찮니? 애야! 정신 차려!”
그리고 혼절하다시피 눈을 뒤집은 카이센을 울프가 끌어안고 다급히 상태를 살폈다.
“얘야! 얘야! 이봐, 자네 둘! 천막을 준비해. 자네는 내가 말하는 약재를 가져오게. 어서!”
유년기,
여름의 서막 (2)
“여긴…….”
이튿날 저녁에, 화산재로 뒤덮인 들판이 황혼으로 붉게 들뜰 무렵에 카이센은 눈을 떴다.
구수한 오트밀의 냄새가 허기진 뇌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머리맡에 앉아 있던 울프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니? 정말 다행이다.”
침상에서 일어나 앉으려던 카이센은 윽, 신음과 함께 다시 쓰러졌다.
온몸에서 고통이 들끓었다.
한 달 동안 쌓여온 피로가 폭발한 듯싶었다. 무엇보다 이마, 이마에 맞은 딱밤이 정말 아팠다.
‘그건 진짜 딱밤이었나? 그게? 마치 쇠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냄비의 오트밀을 스푼으로 정성스레 섞던 울프가 밥그릇에 담은 뒤 카이센에게 건넸다.
“일단 영양부터 보충하자. 그래야 빨리 낫는단다.”
“……혼자서도 먹을 수 있어.”
“무리하지 말고, 자. 지금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잖아.”
거칠게 따지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울프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고요하고 또 다정했기에.
이 사람은 대체 누구지……?
대체 누구기에 초면에 가까운 나한테 이렇게까지 친절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맛이 어때. 너무 싱겁니? 그렇다면 미안하구나. 약재를 넣고 오트밀을 만든 건 오랜만이라.”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울프가 떠먹여준 오트밀을 조용히 오물거리던 카이센.
맛은 없었다.
솔직히 식감도 없었다. 분명 그러한데, 어째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눈시울에 맺힐까.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있던 거니? 이거 참 감동인데.”
“아니.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맛이 없던 거라고.”
“그렇구나. 역시 내가 만든 음식은 쓰레기구나. 훗, 그럴 줄 알았어. 나란 녀석은 마법 말고는 다 못하는 쓰레기거든…….”
울프가 갑자기 의기소침해지나 싶더니, 돌아앉아 수첩에 무언가를 음울하게 적기 시작했다.
‘뭐야, 이 인간……?’
카이센이 순간 뭉클해진 이유는 맛 때문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이토록 따스하고 정성이 깃든 음식을 맛봤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래 주셨던 것처럼…….
“미안하구나.”
울프가 불현듯 사과를 건넨 것은, 오트밀을 다 먹은 그즈음이었다.
“이런 음식을 먹게 해서?”
“아니, 카밀라에 대해 말하는 거야. 냉혹하게 보이기는 해도 원래는 엄청 상냥한 녀석이었거든.”
“그 인간이?”
“진짜란다. 단장님이 죽은 이후로 저렇게 변해버린 거야.”
단장?
카이센이 고개를 갸웃하자 울프가 꿈꾸는 어조로 말했다.
“대부분의 페이쿼리어에게는 스승이 존재해. 우리 병단의 단장님이 카밀라의 스승이셨지. 정말 훌륭한 분이셨는데…….”
“……?”
“그때부터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 않아. 아니, 감정조차 보이지 않지. 그랬었는데 오늘 왜 너를 가지고 장난을 쳤을까? 나도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그 단장이란 사람을 엄청 좋아했었나봐.”
“카이센, 우리 모두가 그분을 좋아했단다. 그분을 싫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울프가 지은 미소는 처참했다.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슬픔으로 가득한 미소였다. 울프가 카이센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못난 친구를 대신해서 사과할게, 카이센. 네가 용서해주렴.”
“용서고 뭐고 필요 없어! 칼 쓰는 법만 가르쳐주면 돼! 그러면 뭐든 용서할 수 있으니까!”
“…….”
“이제 배울 수 있는 거지? 스치기만 해도 승리라고 했잖아!”
낮은 한숨과 함께 울프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지. 과연 카밀라가 그걸 패배로 인정하긴 할까?”
“그럼 다시, 다시 도전하겠어.”
“언제까지?”
“될 때까지.”
집념에 가까운 증오…….
마치 한 자루의 예리한 칼날 같구나.
복수심을, 증오를 버리고 전선에서 떠나서 살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
“가르친다고 해봐야 오늘 있었던 일이 반복될 뿐이야. 카이센, 글을 읽을 줄 아니?”
울프가 내밀은 건 일반적인 서적이 아니라 전문가들만이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게 가능한 마도서였다.
숫자……?
숫자의 나열? 뭔 뜻이지?
숫자가 이상한 규칙을 갖고 난잡하게 쓰여 있었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못 읽겠지? 지금 네 상황이 이것과 똑같단다.”
“……?!”
“일말의 기본도 없이 핵심을 배우려 한단 소리야. 봐서 알겠지만 카밀라가 기본기부터 차근차근 알려줄 위인도 아니고.”
“그럼 어떻게 하라고?”
순간 울컥한 카이센이 불손한 어투로 말을 쏟아놨지만, 울프의 상냥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알려주는 대로 하면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확언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지금부터 알려줄 방법이 전적으로 네 재능에 달려 있기 때문이란다.”
재능……?
그런 걸 알기도 전에 두들겨 맞았는데. 있기는 할까? 울프가 카이센의 이마를 엄지로 톡 쳤다.
“엘토람은 네게 전사의 재능이 있다고 했어. 그러니 지금은 푹 쉬렴. 회복된 이후에 차근차근 알려줄 테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그래.”
“쉴 필요 따위 없어. 지금 당장 가르쳐주면 되잖아! 뜸 들일 게 뭐 있어? 기본기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렇게 소리치는 소년의 어조는, 눈가에 맺히는 물기는, 주먹 쥔 손에 이는 떨림은 비참하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못 했단 말이야…… 엄마가 죽을 때도…… 그런데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카이센…….”
“우루크 그 새끼들이 저렇게 활개 치고 있는데! ‘아무것도’라는 말은 엿이나 먹으라 그래! 다 죽여 버려야 한다고! 1초라도 빨리! 죄다! 한 놈도 예외 없이!”
분노로 얼룩진 울음에는 본디 소리가 없는 법, 소년의 눈에서 들끓는 울음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울프의 탄식은 깊었다.
아아.
이 세계는 너무나도 비참하구나.
악을 진멸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흔하디흔한 용사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지…….
깊은 한숨을 토한 울프가 순백색의 마법사 망토를 어깨에 걸치며 힘없이 웃었다.
“그렇다면 따라올래? 따라올 수 있다면 말이지만.”
카이센은 악을 쓰며 일어섰다.
앞서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걷는 울프의 보폭은 짧고 느렸다.
그는 상냥했다. 먼저 걷다가도 뒤를 돌아보며 기다려 주었다.
“검술의 기본이란 뭐라고 생각해, 카이센?”
그렇게 카이센은 울프를 따라 언덕의 비탈을 걸었다.
천천히, 상냥하도록 천천히.
흘끗 올려다본 하늘은, 아직 여름의 화산재에 잡아먹히지 않은 밤하늘이었고 4개의 달이 흘리는 달빛을 들풀이 품었다.
“내가 검술에 정통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호기심이 많아서 말이야. 단장님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
“뭐라는데?”
“바로 보법이라 하셨지. 그게 모든 무예의 기본이자 핵심이라고.”
언어학으로 따지면 문법과 단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울프가 언덕마루에서 멈춰 섰다.
“여기쯤이야.”
울프가 손바닥을 펼치자, 서릿빛 마방진 하나가 태어나 빙그르 돌았다.
다시 하나가 나타나 겹쳐진다.
그리고 또다시 하나.
제국의 7성 마법 체계에서 고위 마법사들만이 이룰 수 있는 3성 마법의 경지였으나, 촌놈 카이센이 그걸 알아보고 감탄할 리가 없었다.
채애앵!
울프가 세 겹으로 겹쳐진 마방진을 움켜쥐며 깨트린 순간, 카이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지, 환각……?
불현듯 냉기로 이루어진 그림자가 언덕마루에 나타났다. 칼을 쥐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
“이건 3성 마법, ‘능동 추적 : 재현’이라는 마법이야. 사법관들만이 쓸 수 있는 마법인데, 내가 빙결 속성을 베이스로 모방해본 거야.”
울프가 손짓하자 하얀 그림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난폭하면서도 우아한 춤을.
“이건……?”
카이센은 멍하니 당황했다.
그 검무가 넋이 나가도록 현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본 동작이었으니까. 일상이라는 시간들 속에서, 어머니를 통해.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겨우 억눌렀다. 울프가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카밀라의 동작을 재현시킨 거거든.”
카밀라의 동작이라니…….
그렇다면 설마 카밀라의 스승이라는 게 정말로 어머니를 말하던 것인가?
“그 녀석한텐 은근 성실한 구석이 있어서, 지금까지도 단장님이 정했던 시간에 검술 훈련을 해. 그래서 이 마법으로 찾기가 쉽지.”
울프가 다시 손가락을 튕긴 순간, 그림자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검무 하나에 카밀라가 20년 가까이 쌓아 올린 검술의 정수가 담겨 있는 거야. 보법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에서는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해.”
“……!”
“아까 말했듯이 카밀라에게는 단장님에 대한 병적인 애착이 있어서, 그분이 생전에 남긴 가르침은 반드시 지키거든.”
그리고 그런 말 중에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멋진 여자가 된다]라는 가르침도 있어. 울프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모든 걸 따라 하는 건 바라지 않아. 하지만 일단은 발만이라도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어야 해. 그래야 카밀라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야.”
이건 딱히 울프의 비책 같은 게 아니었다.
저 눈부셨던 어린 날, 카밀라가 라미네아의 제자가 됐던 날에 이렇게 교육을 시작하는 걸 봤던 것뿐이지.
“어때, 해볼 수 있겠니?”
그때 라미네아 또한 카밀라에게 이렇게 물었고.
당시 제국의 삼대검가 중 하나, 벨체스터 가문의 서녀였던 카밀라는 스승의 보법을 엉성하게나마 따라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라미네아의 보법은 일반적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카밀라는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그 동작을 따라 했다.
‘그런데 뭐지?’
이 아이도, 지금 똑같이 해내고 있잖아.
그래서 한순간 카이센의 등 위로 어린 카밀라의 모습이 겹쳐졌던 것일까. 울프의 눈동자에서 그리움과 경악감이 뒤엉켜 나타났다.
‘이건 도대체……?’
부상 때문에 동작이 자유롭지 않을 텐데도…… 그럭저럭 비슷한 수준으로 따라 하고 있잖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자신도 슬쩍 따라 해 봤으나, 세 번째 부분부터는 도저히 쫓을 수가 없었다.
‘압도적…… 아니, 이게 바로 폭력적인 재능이라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카밀라, 카이센에게 재능이 없다고?
‘천만에.’
그저…… 지금껏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