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0)
가짜 용사 이야기-30화(30/310)
제30화
전투가 일어나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본래 케르크누드는 구공화국 시대에 번성한 해안 관광도시였다고 한다.
이는 군용 성채와는 달리 기본적인 설계부터 효율성보다는 낭만을 추구한다는 것을 뜻한다.
“경이의 도시라…….”
남문으로 이동하던 카이센은 도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화산재의 휩쓸린 핏빛 태양이 서서히 서쪽으로 저물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4개의 달이 흐릿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귓가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어른거렸다.
– 카이, 먼 심연의 시대에 이 세상을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여신이 네 분이나 계셨단다.
– 네 명의 여신?
– 응. 달은 그분들이 만들어주신 거야.
무슨 감상에 빠지는 걸까.
시선을 더 들자 일라누스 광장이 새하얗게 펼쳐졌다.
고대식 열주로 둘러싸인 광장은 달빛을 깊숙이 빨아들여 그윽하게 빛났다.
“카이센.”
리아가 옆으로 다가온 건 그때였다. 가파르게 심호흡을 하는 숨결이 가늘게 떨렸다.
기품 있는 곱슬머리의 소녀가 카이센의 시선을 피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서.”
“사과?”
“그날, <아리스타포>에서…… 미안했다, 카이센, 정말…… 널 혼자 두고 가서.”
<아리스타포>라는 지명이 들렸을 때, 무의식적으로 손끝이 떨린 걸 느꼈다.
<아리스타포>.
지금도 기억한다. 머리에 와 닿던 스승의 손길과, 스승이 지어주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미소를.
“카밀라 님을 구하러 간다고 했을 때 널 혼자 보내서는 안 됐었는데…….”
“…….”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널 막으려 했어. 카밀라 님은 어차피 죽을 거라는 망발을 내뱉고. 정말, 정말 미안해.”
그렇게 말할 때, 리아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 어조는 가녀리되 진실했다.
리아는 이런 녀석이구나. 상냥한 성정을 갖고 있어. 그것 때문에 다시 만난 나를 어려워했구나.
“사과할 필요 없어. 딱히 원망한 적도 없는 일이고.”
“하지만 그때 나는……!”
“정말이야.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
그러자 리아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너나 샤론 선배님이 기를 쓰고 날 막았더라면 아마 제시간에 못 갔을 테니까.”
“……!”
“스승님께선 웃으면서 죽었어. 너나 선배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지. 그러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 오히려 나야말로 예전에 샤론 선배님을 모독해서 미안하다.”
선두에서 앞서 걸으며, 제자의 은밀한 밀회를 훔쳐듣던 샤론 알터 타스알포는 가슴에 아릿하게 치미는 아픔을 느꼈다.
슬픔과 그리움이란 아픔을.
달빛보다도 새하얗게 바래버린 머리칼을 흩날리며, 필두 페이쿼리어는 두 눈에 뜨겁게 맺힌 눈물을 훔쳤다.
– 후훗, 오늘도 누가 수석이 될지 시합이야, 카밀라.
– 관심 없어, 상년아.
– 카밀라, 넌 대영웅의 제자였던 년이 입이 뭐 그렇게 걸걸하냐?
– 올리에르, 그만하렴. 지나가던 백정보다도 입이 거칠지만 그게 카밀라의 매력 아니겠니?
– 저딴 게 매력이라고?
– 매력은 니미 썅. 니들 이리 안 와? 어딜 도망 가! 다 뒤졌어. 이리 와!
그 찬란하고.
찬란한 만큼이나 그리운.
옛 생도 시절을 떠올리면서, 샤론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앞으로 향했다.
‘곧 만나러 갈게, 카밀라.’
그날 일을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 없겠구나.
다행이야.
그래…… 정말 다행이야.
삼천 명 베기,
케르크누드 철수 작전 (5)
절원, 페이쿼리어만이 사용할 수 있는 최종 비기.
그것을 이용해 천 마리에 가까운 숫자를 줄이기는 했으나, 어차피 잔챙이들에 불과했다.
이런 숫자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전장에서 과정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오직 결과만으로 말하는 곳이 전장이다.’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은 샤론에게로 리아 라일리가 황망히 다가갔다.
“스승님, 정신 차리셔야 해요, 스승님!”
자신의 허리춤에서 용혈 혈청 주사기를 꺼내 샤론의 몸에 꽂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머릿속에서 불길한 가능성이 고개를 들었으나 억지로 무시했다.
그 일순간, 하늘과 땅의 위치가 뒤엉켰다.
어지러이 뒤집히는 시야로, 폭발의 열풍과 파편에 휘말려 튕겨 나가는 스승의 몸이 보였다.
‘뒤에서……?’
진로를 우회하여 돌아온 타후프 광인이, 샤론이 처박힌 외벽 너머에서 제 몸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외벽의 화강암이 산산이 깨어져 나가면서, 잔돌이 비산해 얼굴에 박혔고 흙먼지가 자욱했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리아 라일리가 스승의 팔을 낚아챈 건 기적에 가까웠다.
“스, 스승님, 잡았어요……!”
제자의 손에 붙들린 샤론의 몸은 피범벅이었다. 핏물로 백발이 붉게 젖었고 팔이 미끈미끈했다.
“리아.”
“스승님, 제 팔을! 제발, 미끄러져요…… 어서, 빨리…….”
“리아는 내게 있어 너무나 과분한 제자였어.”
이별을 고하는 스승의 목소리는 낮고 또 담담했다.
고요히 떨리는 어조만이 이별의 상실과 슬픔을 제자에게 속삭였다.
샤론이 떨릴 여력조차 없는 손길로 극위성검 타스알포를 검대에서 끌러 제자에게 내밀었다.
“이걸 갖고 바로 항구 쪽으로 달리렴, 알았지? 우루크들한테 넘겨줘선 안 돼.”
리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폭발이 연발해서 터지고, 병단 병사들이었던 시체 조각들이 이리저리 날리고 있었다.
스승을 부축하고, 성검을 쥔 채 뒤에서 우악스럽고도 집요하게 쫓아오는 타후프 광인들을 떨쳐내는 건 불가능했다.
“가, 어서. 마지막 용령이 남았어. 이걸 폭발시켜서 일대를 통째로 날려 버리겠어. 저 못생긴 놈과 동귀어진이야.”
“싫어요, 싫다고요……!”
“널 정말로 사랑했단다, 리아.”
다음 일순간, 리아의 어깨를 잡아 누르듯 작렬하던 중압감이 사라졌다.
샤론이 방긋 웃었다.
그것이 리아가 본 스승의 마지막 모습이었을 것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던 순간, 리아가 지면을 박차고 뛰어나가 스승과 광인 사이에 서지 않았더라면.
“리아……!”
“안 갈 거예요, 혼자서는 절대 안 갈 거라고요!”
“이건 나랑 너 둘만의 문제가 아니야! 넌 타스알포를 법황청으로 가져가서 페이쿼리어가 될 의무가 있다고!”
스승이 내세우는 건 정론에 반박할 수 없었으나 따를 수가 없어서, 리아는 마구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리아! 항상 말을 잘 듣더니 왜 지금 그래! 안 된단 말이야!”
무너져 내리는 시가지 저 너머에서는, 악몽(惡夢)이 절뚝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타후프 치프, 라니키칸.
놈이 오른손에 쥔 지팡이에서 음기가 질퍽하게 흘러나왔다. 그 양옆으로 타후프 휼레르 수백 명이 몸을 흐느적거렸다.
앞으로 4초?
아니 3초쯤일까.
스승과 제자는 저 광인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고, 타스알포는 다른 다섯 자루의 성검과 마찬가지로 소실될 운명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리아 라일리는 미칠 듯이 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생각하려 애썼다.
‘먼저 달려드는 우루크의 호흡을 훔쳐서 목을 꿰뚫은 다음 그리고 옆에 있는…….’
전술적 사고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아.
‘……저 수많은 광인들을 내가 과연 얼마나 벨 수 있을까?’
전망은 캄캄한 절망뿐이었다.
그리고 라니키칸이 지팡이를 내뻗은 순간, 기괴한 몸짓으로 달려든 광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목숨을 빼앗겼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챠르르르릉──!
차원을 가르며 눈부시게 작렬한 섬광이 없었더라면.
그 섬광의 색채는 홍련화를 떠올리게 하는 적색이었다.
그 섬광이 휘몰아쳤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타후프 다섯 마리의 목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어서 한 번.
또 한 번, 또다시 한 번.
연이어 사납게 작렬한 홍련의 칼날에 타후프 십여 마리가 송장이 되어 돌바닥을 핏물로 적시다가 폭발했다.
“리아.”
절망적인 순간에 만나서일까.
희망의 불꽃처럼 나타나서일까.
귀족이자 페이쿼리어의 제자로서의 체통이고 체면이고 없이 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카이센……!”
카이센, 카이센이었다.
그의 상태도 온전치 않았다. 상반신을 감싸고 있었던 누비 갑옷이 바스러지면서 드러난 피부는 얼룩덜룩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교차하는 새살, 이는 폭발로 날아간 신체를 재생시켰다는 증거.
“미안, 좀 늦었어.”
카이센은 아라다만텔을 납도해 등허리의 띠돈에 매단 후, 샤론을 일으켜 세워 리아에게 업혔다.
“카이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리아를 데리고…….”
생명력이 다해가는지, 샤론의 목소리는 꺼져가는 불꽃처럼 미약했다.
“싫습니다.”
“뭐……?”
“그런 방식으로 이별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정말로?”
샤론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카이센이 샤론을 리아의 등에 빠르게 업히는데 샤론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카이센, 명령, 명령이야! 리아를 데리고 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혼자서──”
“──대체 왜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세간의 전설은 말한다.
용사는 절대 지지 않는다고.
용사는 결코 동료를 버리지 않으며 기어이 모든 사람들을 구해내 함께 웃게 된다고.
“저, 용사 아닙니까?”
그것이 설령 가짜일지라도.
그건 정말 의문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강조였을까.
그렇게 물을 때의 낮은 목소리가, 황금의 눈동자가 설명할 수 없이 눈부셔서.
스승을 부축해서 전장으로부터 벗어나려던 리아는 심장에 날카로운 통증이 이는 걸 느꼈다.
“리아, 안전한 곳에서 응급처치를 끝내고 병사들을 규합해줘.”
“카이센, 너는?”
라니키칸의 시커먼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어른거렸다.
당혹감과 흥미.
그 시선 끝에 매달린 것은 역시나 남자 페이쿼리어였다. 잔혹하게 벌름거리는 혓바닥이 군침을 다셨다.
라니키칸이 지팡이를 내뻗자, 소름 끼치는 비명을 터뜨리며 돌진해오는 광인 무리.
“여기서 저놈을 끝장내는 게 전략 목표잖아.”
전략 목표, 아니, 라헬 듄 제라예는 이게 페이쿼리어의 사명이라고 했다.
내가.
내가 해내야만 한다고.
벌 떼처럼 몰려드는 광인들과 정면으로 마주 서며, 등허리에서 아라다만텔을 다시 뽑아냈다.
챠아아아아앙…….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야.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진리가 있어. 이 잔혹한 세상에서 이제 용사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거야.
누군가가.
누군가가 용사가 ‘되어야만’ 해.
자기 자신의 사랑도 행복도 웃음도 미래도 과거도 현재도 모두 버리고.
용사라는 이름의 꽃으로 피어나, 이 땅에 사랑과 행복과 웃음과 미래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져야만 하는 거다.
어머니께서 그러하셨고.
스승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3분.”
아까는 놈이 족장이란 확신이 없어서 바로 사용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겠어.
이놈이 족장이다.
그러니 전력을 다할 수 있어.
팅───!
칼자루 쥔 손의 검지로 왼쪽 손목에 찬 억제기의 핀을 뽑았다.
용령 해방(解放).
그 일순, 절대적 생명력이 필멸의 육신 위에서 폭발적으로 휘몰아쳤다.
“3분 안에 끝낸다.”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의 전설적 무훈 중 하나인 ‘삼천 명 베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