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03)
가짜 용사 이야기-303화(303/310)
시즌 3 : 111화
카밀라가 법황청이 위치한 <하랄도니키>로 가는 열차에 탑승한 건 기원력 1676년 5월 23일이었다.
최전방과 달리, 아인 신식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아크라드 대륙의 열차는 흔들림의 리듬이 더 크고 번잡했다.
대륙을 건너는 열차 안에서 새근새근 졸던 카밀라는, 문득 차창을 통해 흐르는 세상의 풍경에 깨어났다.
산…….
강…….
그리고 꽃…….
늦봄에 만개하는 도라지꽃 몇 송이가 여름의 꽃들 사이에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 이 꽃의 이름은 도라지꽃이야. 그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래. 그래서 나는 이 꽃이 너무 좋아.
스승님, 도라지꽃이에요…… 맑게 웃으며 옆자리를 돌아봤으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꿈이 깨어졌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스승님의 향기조차 희미해져 가는구나…….
카밀라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울었다.
프리퀄의 에필로그, 나, 당신과 같은 용사가 되어 (3)
대륙 횡단 열차 ‘닉 – III호’는 적색산맥을 빠져나오고 머지않아 칼날반도 역권으로 진입했다.
초원과 강과 산맥이 거듭되던 풍경이 멀어지더니 이제는 끝없이 펼쳐지는 물, 바다가 끼어들었다.
법황청 <하랄도니키>는 칼날반도의 중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햇살이 바다 위에서 빛의 가루로 부서져 반짝였다.
[이번 역은 <하랄도니키>, 황금의 도시 <하랄도니키>입니다. 법황청에 용무가 있으신 분들은…….]전성관에서 기관사의 안내 음성이 나올 때, 카밀라는 여행 가방을 굳게 닫고 채비를 마쳤다.
5년 만에 찾은 <하랄도니키>는 지검제(地劍祭)를 위해 찾았던 그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만큼 군중으로 미어터지는 건 아니었으나, 도시 전체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건 똑같았고 법황청 건물은 구름 속으로 들어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법황청 근위대가 창을 세워 치안과 도시 질서를 돌보고 있었다.
전통적인 중세 무장으로 실용성 면에서는 시대착오적이어도 옛 위엄과 품격을 계승하고 있었다.
“카밀라? 카밀라, 너야?”
법황청행(行) 대중 마차를 기다리는데, 붉은 머리의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올리에르였다.
오랜 인연을 재회하는 기쁨 너머에서, 카밀라는 올리에르가 이 자리를 어려워하는 것을 느꼈다. 미리 준비해온 말을 하려는 기색이었다.
“하지 마, 올리에르.”
“……?”
“그런 말 안 해도 돼. 그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스승을 따라서 거길 떠났을 거야. 아예 전장에 안 온 사람도 있는데, 그때까지 싸워준 것만 해도 대단하지.”
카밀라의 말에 올리에르는 문득 솟구친 눈물을 훔쳤다. 그 눈물에서 친구의 자책과 사죄를 느꼈다.
위로받아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겠지만…….
카밀라는 올리에르의 어깨를 두드려 그 마음을 추스르게 도와주었다. 만약, 스승님께서 옆에 계셨더라면 이렇게 하라고 말하셨을 테니까.
“루드윅 가문은 어떻게 됐어?”
“네 말대로더라. 곧 혼인할 것 같아. 근데 라디스 언니의 상태가 별로 좋질 않더라고.”
“적색산맥에는 영험한 산삼들이 많이 나는데, 보내주실 수 있으면 보내달라고 스승님께 편지할게.”
“그래, 고마워.”
대중 마차는 반나절을 달려 법황청 앞에 도착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황룡의 숫자는 꾸준히 줄어 이제는 고작 다섯 분이 법황청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위엄의 그늘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자, 지팡이로 하늘을 가리키는 용현의 동상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카밀라.”
그리고 그 앞에서, 도착 날짜를 어떻게 알았는지, 두 남자가 카밀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델프레드 울프 블라도.
요한 프로스트.
델프레드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카밀라는 일부러 건강하고도 씩씩한 척을 했다.
“괜찮아요. 이것 좀 봐요. 돌아와서 얼마나 잘 먹었는지 키도 더 큰 것 같아요.”
델프레드는 왼손으로 두 눈을 가려야 했다.
어떻게 짐짓 씩씩한 척을 하는 것조차 제 스승을 닮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라미네아는 <위용검전>에 입교하는 게 아니라 졸업하던 날이었지만, 스승을 잃은 슬픔을 숨기는 행동이 이렇게나 똑같을 수가 있구나.
“열심히 수신(修身)에 힘써라.”
델프레드는 손을 내밀었다.
평생 전장에서 학문을 연구하느라 부르트고 찢어진 손으로, 친구가 남긴 살아 있는 유산을, 그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카밀라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두 눈에 물기가 맺혔다.
“나랑 요한은 북부로 간다. 지식은 칼날과 같아서, 항상 연마하지 않으면 무뎌지거든. 요한은 <윈터홀드> 수석 졸업을 노린다. 요한은 수석 휘장을 차고, 너는 아라다만텔을 차고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요한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지내.”
카밀라가 그 손을 맞잡았다.
“너도.”
정말, 정말 많은 것이, 오가는 한순간이었다.
이제 여기 들어갔다가…….
용사가 되어 나오고 나면, 이 손을 이성으로 잡는 날은 없겠지.
“가자, 요한. 카밀라에게도 할 일이 있고, 우리도 열차를 타야 하잖아.”
델프레드와 요한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카밀라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요한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네가 카밀라냐? 네 무훈은 많이 들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날 오후, 법황청 오주(五柱) 추기경단의 선임 추기경인 인라히트가 카밀라를 친히 심사했다.
인라히트는 용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황금의 용린으로 육신이 휘황찬란했는데, 냉철한 위엄을 거느리고 있었다.
자상했던 요슈하르와 달리 인라히트는 물어야 할 것만을 물었다.
「용사가 되고자 하느냐?」
“네.”
「용사는 어떠한 혈육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를 아느냐?」
“네.”
「용사는 토지나 가옥 따위의 사유재산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이를 아느냐?」
“네.”
「왜 용사가 되고자 하느냐?」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제 스승의 성함입니다. 제자로서 그분을 닮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인라히트는 소녀의 올곧은 기상(氣像)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법황청 추기경단은 그날 즉시 카밀라의 훈련 권한을 <위용검전> 교련단에 이첩했다.
사실 심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애시당초 이 문답은 최종 논고에 가까웠으니까.
“오랜만이네, 카밀라.”
<위용검전> 교관 파티슈가 카밀라의 신변을 인수하여 숙사를 배정해 주었다. 올리에르가 뒤이어 신문을 위해 추기경의 호출을 받았다.
“네, 교관님. 여기로 오기로 약속했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예전엔 애새끼였는데, 지금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된 얼굴이네. 한 대 피울래?”
“아뇨. 괜찮습니다.”
“왜? 열아홉 살이면 이제 성인인데. 누가 욕하면 좆까라 해.”
“누가 욕하지는 않겠지만…… 스승님이 피우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마음대로 피웠다간 스승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거예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카밀라의 얼굴에서 파티슈는 문득, 죽은 친우의 얼굴을 보았다.
– 담배 피우면 안 돼, 파티슈. 몸에 안 좋아.
넌 죽어서까지 잔소리냐…….
파티슈는 피우던 궐련을 손으로 움켜쥐어 으스러뜨리고는, 다른 손을 카밀라의 머리에 얹었다.
“그때 그 꼬맹이가 라미네아 곁에서 5년을 보내더니 나보다 더 멋진 어른이 돼서 왔구나.”
“혼자 와서 죄송합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파티슈는 카밀라의 머리를 담배 냄새가 배지 않은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
“979기의 시작은 7월 초부터야. 그 전까지 후보생들이 시험을 하나 치러야 하거든.”
“네, 들었습니다.”
“하긴, 루드윅 가문은 이미 라미네아를 통해 시험 내용을 알고 있었겠네. 양산형 성검 디알레를 깨울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여독을 푼 다음 날 아침, 파티슈는 법황청 22층으로 카밀라와 올리에르를 안내했다. <위용검전>에 입교하기 위한 적성 심사를 위해서였다.
양산형 성검 디알레.
그 성검을 바위 깊숙이 꽂힌 상태에서 끄집어내는 것. 이는 근력이나 마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는 오직.
기원(祈願)으로만 가능하다.
기원이란 성검과의 공명, 스스로의 의지를 주고받는 과정…… 카밀라는 디알레를 바라보던 눈을 조용히 감았다.
– 기원이란 말이지, 누군가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눈꺼풀 안쪽에서 방그레 웃던 스승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 카미의 고백이 있어야 해.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순간에나 항상 앞에서 이끌어 주시고 옆에서 손을 잡아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시던 스승님이 계셨다.
– 용사와 용사가 아닌 사람의 차이점은 바로 삶의 고백이 있고 없고의 차이야.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삶의 모든 순간이, 그분과의 동행 위에서 성립하고 있었다.
그 동행이…… 끊어졌다.
옆에서 잡아주던 손과 뒤에서 밀어주던 힘은 모두 사라졌지만, 앞에서 이끌어주던 목소리는 아직도 남아 마음을 울린다.
– 카미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카밀라는 손을 뻗어 디알레의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 그 검으로 무엇을 이루고 싶어?
나는 왜 성검을 쥐려 하는가…….
성검을 쥔다면, 그 끔찍하고 잔혹한 세계에서 평생을 살다가 죽게 될 것인즉…….
어째서 그 참혹한 땅으로 제 발로 들어가려고 하는가…….
‘스승님을 지키고 싶었다.’
스승님이 바로 눈앞에 살아 계시고, 성검을 쥐는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었더라면 이 고백은 한결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님은 죽었다.
스승님이 없는 세상에서, 스승님을 위해 칼을 쥐는 이유를 이 세상에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겠구나 싶었다.
‘비록, 스승님은 죽었지만.’
이 땅에 다른 형태, 다른 소리, 다른 냄새로 존재하는 ‘무수한 스승님과 나’를 위해…….
‘나는 네 힘이 필요해, 디알레.’
사소한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어 창대하게 이루어지는 창세 인연의 섭리를,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되면 좋겠어.
‘나는 너를 쥐어 내 뜻을 이루고.’
소망이 없이, 이 소망 없는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저마다의 소망을 만날 수 있도록.
‘너는 나를 통해 네 원(願)을 이뤄라.’
성검의 칼날이 바위를 미끄러져 빠져나오며 그 검광이 찬란하게 물결쳤다.
디알레의 칼날은 한 번의 막힘도 없이 바위를 빠져나왔다. 카밀라는 디알레를 온전히 뽑아내 그 칼날의 맥동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파티슈의 눈이 크게 열렸다. 입교 첫날, 그것도 당장 첫 시도로 디알레를 뽑아낸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아, 라미네아…….’
파티슈는 궐련의 연기로 눈물을 가렸다. 연기 때문에 눈물이 나온 것처럼 연기했다.
이게 네 제자야…….
네 제자가 이렇게나 컸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내가 아니라, 너일 수 있었더라면…….
* * *
생도 자격을 획득한 카밀라에게는 대기명령이 내려졌다. 979기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있었다.
플로렛의 제자, 샤론.
타르스의 제자, 로베리스.
니븐의 제자, 고르고티아.
제로니의 제자, 엘티레.
실키의 제자, 류넬.
류넬은 나이가 열세 살이라 정식 생도는 아니었으나, 교관들이 죽은 스승을 대신해서 <위용검전> 비본을 통해 용광추검(龍光椎法)을 가르치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가 전부인 <위용검전>의 유일무이한 귀염둥이기도 했다.
“아니, 카밀라 선배님!”
고르고티아가 카밀라를 망연히 쳐다보다가 들뜬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랑 엘티레는 디알레를 뽑는 데 한나절, 로로는 반나절이나 걸렸는데, 한 번에 뽑으셨다고요?”
“좆도 없던데.”
“진짜 대단하시네요! 역시 카밀라 선배님은 저희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니까요!”
이들 중에서 다른 건 자신이 아니라, 너라고 말하고 싶었다.
스승을 잃은 이들은 웃음 속에도 슬픔이 있고, 즐거워 보여도 마음속에 근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스승을 잃지 않은 고르고티아를 향한 한심한 시샘이라는 걸 깨닫고 카밀라는 그 마음을 그 순간 아예 지워버렸다.
“그래, 내가 누구냐? 너희 같은 찌꺼기들이랑은 다른 발도 천재란 말씀이지.”
“캬! 역시!”
사흘 후에는, 가장 늦게 법황청에 도착했으나 적성 시험을 끝내는 데 1시간이 채 안 걸린 샤론도 합류해왔다.
올리에르는 그로부터 34일 후에 디알레를 뽑아내 기수 동기가 되었다.
6월 말에는 후보생 접수가 마무리되면서, 수석 교관 리노야 듄 제라예로부터 연도별 수업 개관을 설명 들을 수 있었다.
“성숙한 나이에 입교했다고 조기 졸업시키지는 말라는 추기경단의 뜻이 있으니, 너희도 3년 동안 여기서 용사에 대해 배워야겠다.”
“네, 교관님.”
카밀라는 수업을 마치고 공중 회랑을 걷다가, 저 아래로 광대하게 펼쳐지는 <하랄도니키>를 내려다보았다.
물비늘이 찬란하게 깔린 항구에서 증기선들이 매연을 토하고 있었다.
항구는 번잡했고, 번창했다.
저 부두 위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이 살아 숨 쉬고 있었고, 크고 작은 만남이 이루어지며 웃음이 형성되고 있었다.
카밀라는 자신의 소명이 저 일상과 만남과 웃음 아래, 그 모든 삶을 떠받치는 기둥으로서 세워졌음을 알았다.
바로 이 마음이.
그녀가 보고, 듣고, 배운 용사(勇士)였으므로.
자신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또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 주셨던, 그녀의 스승,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께서 그러하셨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