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04)
가짜 용사 이야기-304화(304/310)
시즌 3 : 112화
청성 미른가디아는 라미네아의 생환을 기원력 1676년 6월 23일에 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 달 뒤였다.
그때 청성은 이데아 반도 북부, 순백의 호수의 세계수에 기대앉아 영육을 추스르고 있었다.
흑요정 수종자들이 심연의 침식을 저지하기 위해 수발을 들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이건 청성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지식으로 대응책을 마련해서, 다시 일선으로 갈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청성이 세계수와 의식을 연결하면, 순백의 호수를 통해 대륙과 반도와 열도의 미래의 파편을 엿볼 있었다.
그 미래의 파편들을 짜 맞추어 청성은 세상의 흐름을 유추했고, 심연의 준동에 대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청성에게는 100개의 눈이 있다, 세상 전부를 내다보는 눈이 있지’라는 속설도 나돌았으나 청성에게는 현재 하나의 눈을 돌볼 만한 여력이 없었다.
「미르.」
그러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뇌향이 청성을 찾아왔다. 뇌향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미른가디아를 미르라고 불렀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저 먼 유년기에 얻었던 애칭이었다. 청성은 그 유년기의 시절을 좋아하는 만큼 애칭 또한 좋아했다.
“뇌향 각하.”
“오셨사옵니까.”
뇌향에게 예를 표하는 수종자들을 모두 물리니, 뇌향이 삿갓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라미네아와 아이딘을 보호 중이야. 땅끝 마을 아스란에 숨겨뒀어. 다른 이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인지 장애의 결계를 걸어뒀고.」
「……?」
「라미네아와 카밀라, 그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은데 추기경 어르신들을 설득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어. 미르, 네가 도와줄 수 없을까?」
살아…… 있었다고……?
뇌향이 가지고 온 이 정보는,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는 청성에게 호흡이 멎을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선사했다.
「라미네아는 아이를 품고 있어. 그 태내에…… 아이딘의 아이야.」
그 둘이…….
살아 있었다고…….
청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저녁 무렵의 호수는 다만 고요했다.
‘라미네아는 현재 인류의 영웅으로 선전되고 있는데…….’
뤼카엘 봉인 작전을 세상에 공표할 수 없던 만큼, 다른 페이쿼리어들의 전공은 축소되고 라미네아의 전공이 더욱 확대ㆍ조명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 라미네아가 평생 쌓아 올렸고 죽음으로 완성시킨 위업은 기대감으로서 그 제자인 카밀라에게 넘어갈 것이다.
언론이 카밀라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카밀라의 사소한 태도 변화조차도 세상은 놓치지 않을 것이고 추기경단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둘을, 살아서 만나게 할 길은 없었다.
방법이 있다면 추기경단의 우려를 단번에 물리칠 수 있는 광룡 하라데리만의 명령뿐일 텐데, ‘검은 여름’ 동안 광룡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2년째 혼수상태였다.
청성은 양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먼저 창세의 섭리에 이 기쁜 소식을 허락하심에 감사했고, 천국 낙원에서 창세의 어버이들과 함께 자신을 지켜보고 계실 용현에게 물었다.
‘아버지, 제가 대체 어찌하여야 좋겠습니까?’
약육강식을 폭력으로 윽박질러 주장하는 저 마계의 물결로부터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라미네아의 삶을 기도했다.
‘죽어서 길을 마친 줄 알았더니, 살아 있다 하니…… 그 아이를 어찌하오리까.’
모든 이들을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건만, 세츠넨이 그 아이에게 안식을 베풀었다는 것을 듣고 울며 기뻐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아이를…… 페이쿼리어의 신체 개조 때문에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그 잉태는 상식조차 어그러뜨린 일이니, 창세의 주관하심인가? 창세의 뜻하심이 그 잉태에 있는 것인가?’
프리퀄의 에필로그, 나, 당신과 같은 용사가 되어 (4)
청성은 그날 분신을 만들어 법황청으로 보냈다.
이곳 이데아 반도 북부에서 용의 형상으로 하늘을 전력으로 날면 법황청 칼날반도까지 3시간이 걸린다.
광룡의 상태가 지극히 위태로워서 광룡을 알현할 수 없을 줄 알았건만, 법황청 천궁(天宮)에서 추기경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라미네아를 다시 법황청으로 데려와야 한다. 라미네아는 인류의 구심점이다. 인류의 힘을 집속시켜야 한다.」
추기경 하곤이 말했다.
선임 추기경이자 가장 냉철한 인라히트가 고개를 저었다.
「데려온다면 군율을 세우기 위해 그 목숨을 베어야 할 것인즉, 은밀히 데려와야 한다. 인류의 구심점으로서 그 아이의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까지 페이쿼리어의 규율을 정면으로 깨트린 건 그 아이밖에 없었다. 베어야 한다면 광룡께서 친히 참(斬)하여 용기의 법도를 세우셔야 할 것이다.」
요슈하르가 그 주장에 정면으로 맞섰다.
「라미네아는 평생을 용기의 길 위에 바쳤고 이제 겨우 살아 돌아왔더니, 죽음을 바라보는 마지막 시간조차 그렇게 소비되어야 한단 말인가? 광룡을 보필하느라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평생을 싸운 아이다.」
「요슈하르, 네 말이 아름답지 않다. 아무도 그 삶을 강요한 적 없다. 라미네아는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살겠노라고 서약하였다. 니븐이나 모즈나라고 혈육의 품이 그립지 아니하겠는가? 가정을 선망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아이들은 라미네아와 달리 용기의 길을 저버리지 않았다.」
「네 말이 참으로 잔혹하다. 창세의 어머니께서 설파하시는 사랑의 길에서 멀어지는 말이다.」
「용사에게 중요한 건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빛의 길을 따르는 용기다.」
요슈하르는 인라히트의 말에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단 것을 느꼈다.
인라히트의 말은 정론이었다.
정론을 깨트릴 말은 없었다. 정론은 그 주장과 근거가 완벽하기에 정론인 것이다. 요슈하르는 감정에 호소해야 함을 알았다.
「광룡 성하, 그 목숨을 바쳐 이 땅에 봄의 꽃을 피워낸 라미네아의 공을 부디 잊지 마소서.」
요슈하르는 정신이 없는 광룡이 머리를 누인 곳으로 이마를 연신 찧고 울며 탄원했다.
추기경단은 주춤했다.
인라히트만이 광룡의 뜻을 어지럽히는 행위라며 요슈하르를 제지하려 했으나, 청성의 분신이 요슈하르 곁에 서서 그를 막았다.
「제 모든 업을…… 빛의 생명책에서 지우셔도 좋사오니…… 그 아이가 제자와 만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청성의 목소리는 호수의 파문처럼 고요했으나 넓게 퍼져나갔다.
인라히트는 청성의 목소리에서 옛 수룡 예리세리카의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삼신룡 중 장녀인 예리세리카는 몸이 온전할 때는 곧잘 법황청을 방문하여 광룡과 함께 세상의 일들을 논하고 또 염려하였다.
<화염만리>가 세워지기 전에는 화룡 벨’다키둔도 함께였다.
광룡은 끝없는 인류의 죄과에 지친 것처럼 보여도, 수룡과 화룡을 만날 때면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했다.
광룡의 분신으로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흐뭇했다.
「심연(深淵)은 아직 인류의 영혼 깊숙이 들러붙어 있다.」
<온 것들>이 창세의 세례를 베풀어 심연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나, 죄악을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요토스의 유혹은 인류의 영혼에 여전히 남아 있던 것이다.
광룡과 추기경단은 빛의 가르침을 전하는 종교로 그 마음을 엄격하게 징계하되 또 자상하게 이끌고자 했다.
그러나 인류는 항상 그 통제를 벗어나고자 했고, 문명과 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무신론도 기승을 떨치고 있었다.
그 상황에 라미네아가…….
인류의 영웅이 빛의 사명을 정면으로 위배했단 소식이 온 땅에 퍼지게 된다면…….
그 결과로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어느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인라히트 또한 라미네아를 기억하고 있었다. 요슈하르와 같은 편애의 감정을 내비치지는 않으나 잊을 수 없는 아이였다.
빛과 같은 아이였다.
항상 아이처럼 웃으나 어른의 무게를 가진 아이였다. 옛 용현의 빛을 눈동자에 품은 아이였다.
뭇 인간들이 경외하기에 어려워하는 추기경들을 대할 때도 그 아이는 스스럼이 없었다.
처음 뇌향의 손을 잡고 법황청에 와서, 추기경들에게 맑게 웃으며 배꼽인사를 올릴 때는 소풍이라도 나온 아이인가 싶기도 했다.
한 아이의 웃음에서…….
창세의 빛이 드러난다던데…….
사실이구나, 사실이었어…….
그 친부가 용현의 삶을 따라 최전선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며 살았는데, 딸인 라미네아는 아버지의 삶을 본받은 것인가.
인라히트는 엄격해져야만 법도를 지켜낼 수 있고, 법도가 지켜져야만 유지될 수 있는 이 세상의 행태에 한탄하며 한참 망설였다.
그 망설임을 끝내준 건 청성이었다.
청성은 형식적인 서열은 낮아도 수룡의 여의주를 계승했으므로 수룡의 위상을 품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수룡의 말이었다.
「그 아이를 참(斬)하자는 의견은 거두어들이겠다. 허나, 그 제자와 만나게 할 수는 없다. 그 제자, 카밀라는 용사의 위상을 품고 있다. 그 위상에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그 스승의 검을 물려받아야 한다.」
청성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일단은 읍하고 물러났다.
‘일단은…….’
두 사람의 만남을 허락받지는 못하였어도, 요슈하르와 협력하여 라미네아 은거를 향한 추기경단의 승인을 받아낸 것은 큰 진취라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허락해줄 것이다.’
‘검은 여름’이 끝났으니 광룡의 상태에도 곧 차도가 보일 것이다.
광룡께서 깨어나셨을 때 독대를 청해야겠노라고 다짐했다.
자신의 삶과 이뤄온 것들을 먼저 열거한 뒤, 그 모든 포상을 라미네아와 카밀라의 재회로 접속시키겠노라고 결심했다.
자신의 과(過)도 크지만.
공(功)도 작지 아니하므로.
광룡께서도 그 가르침을 물리치시지는 않을 것이었다.
인라히트의 성품과 요슈하르의 성품 모두가 광룡에게서 나왔으니, 요슈하르의 마음으로 허락해줄 것이다.
자신의 힘만으로 안 된다면, 홍염의 아키레아와 뇌향의 세츠넨과 함께 오는 방법도 있었다.
광룡은 그 둘도 크게 아꼈다.
아키레아는 붉은 진룡, 즉 화룡의 진룡의 여의주를 모두 품고 있었고 뇌향의 세츠넨은 카렌덴께서 점찍은 아이란 이유에서였다.
청성은 자신의 누이들을 향한 광룡의 무한한 애정을 그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그러면 저는…… 요양을 위해 그만 물러가 보겠나이다…….」
분신을 새하얗고도 푸른 광입자로 흩을 때, 청성은 자신의 고향 벨르윈 저택에서의 먼 봄날 흩날리던 꽃잎을 생각했다.
– 이 세계의 피비린내를 꽃향기로 바꾸고 싶더냐.
창세의 빛과 숨결로 부풀어 오른 꽃밭에서 라미네아의 돌잔치가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창세의 아름다움이었으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맥동하는 라미네아의 웃음 그 자체였다.
라미네아는 검도 성서도 마도서도 쥐지 않고, 저 멀리 떨어진 꽃을 신기해하더니 그 꽃을 쥐었다. 그 꽃의 이름이 도라지꽃이었다.
– 그렇다면 내, 너에게 라미네아라는 이름을 주겠다. 꽃향기라는 뜻의 용언이다. 용족은 모두 이름에 맞는 삶을 산다. 너도 그리되어라.
그 말을 알아들었을까. 라미네아는 청성이 준 이름과 같은 삶을 살았다.
피비린내와 적개심으로 황잡한 세상에 피어난 빛의 꽃으로서, 그 빛살과 꽃향기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루었다.
천 년이 두 번 지나가도록, 수없이 포개어진 죽음과 죽음의 징검다리 위에 부끄럽지 않은 징검돌로 자신의 사명을 마쳤다.
‘이제 그만,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땅에서, 아이를 낳고, 믿음의 가정을 꾸리며, 편히 쉬어라……. 이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