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08)
가짜 용사 이야기-308화(308/310)
시즌 3 : 116화
<위용검전> 979기 기수들 중에 최전선, 즉 테르쉬 열도 방어선 파견을 명받은 건 카밀라와 샤론이었다.
카밀라는 홍련 병단의 생존자를 중심으로 새 병단을 소집해 백골(白骨)이란 이름을 붙였다.
순백색 제복에 검은 해골.
자신은 스승님과 같은 향기를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오직 이 삶의 길 위에 백골만을 쌓아가리.
그러면 언젠가는…… 스승님과 같은 푯대에 닿지 않을까.
그리프베런은 이제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니라며 대신 자신이 키웠다는 제자를 붙여주었다. 백곰 수인 엘토람이었다.
멜레느는 더 이상 전쟁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였다. 조용히 잠적해서 제자를 기른다고 했다.
델프레드는 전쟁의 참화로 골병을 얻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기원력 1689년에 서거했다.
샤론은 흑장미 병단의 생존자가 상당한 편이었으므로 병단을 재건하는 데 큰 시간을 쓰지 않았다.
올리에르는 성검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듄 제라예가 되었고 홀로 법황청에 남아서 교관 교육을 새로이 이수하고 있었다.
“그럼…… 잘 가, 카밀라, 샤론.”
병단을 이끌고 향하는 동기들을 항구까지 배웅 나온 올리에르의 눈빛에는 슬픔 어린 안타까움만이 가득했다. 카밀라가 말했다.
“야, 올리에르.”
“응?”
“기왕 될 거면 좋은 교관이 되어라. 우리를 개처럼 굴린 썅년들처럼 되지 말고.”
“뭐?”
“그 뭐냐, 나도 언젠가는 제자를 받지 않겠어? 근데 내 성격이 이렇잖아. 뭘 제대로 가르치기나 하겠냐고.”
샤론이 푸훕, 하고 웃었다.
물론 당장 철권의 응징이 가해져 그 웃음의 맥이 끊겼지만.
“샤론 넌 아가리 닫고 있어. 근데 올리에르 넌 짜증 나는 성격이긴 해도 착실하니까 교육을 잘 시켜줄 거 아냐.”
카밀라는 겸연쩍은 얼굴로 주저하다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올리에르는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 카밀라 맞아?”
“뭐?”
“좀 달라졌는데. 예전에는 그냥 험악하고 날카롭기만 하더니…… 대륙 순행하는 동안 뭘 잘못 먹은 거 아냐? 아니면 좋아하는 남자라도 생겼나?”
“뭐래, 썅.”
물론 카밀라 본인이 이 이상한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죽을 것만 같았는데, 정말로.
마음속에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세상의 온갖 풍파가 오가서 모든 근골과 장기가 갈려나가 죽을 것만 같았는데.
벨르윈 저택에서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난 순간부터, 어째서인지 마음이 편해져 있음을 느꼈다.
스승님의 향기 속에 잠들어서 그런 건가? 대체 뭐였지?
여하튼 분노와 증오와 슬픔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숨이 막혀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여력조차 없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아가리 닫고 손이나 잡아. 사람 부끄럽게 할래?”
올리에르가 놀라고도 들뜬 눈빛으로 친구의 손을 맞잡았다.
샤론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맞잡은 그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세 용사는 그때 멋쩍게, 맑게, 그리고 서로에게 솔직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세 용사는 이날을 기억했다.
이날의 기억을, 평생 소중히 마음에 품고 추억하며 간직했다.
저 머나먼 날, 서로가 서로의 소명(召命)을 마치고 죽게 되는 그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프리퀄의 에필로그, 나, 당신과 같은 용사가 되어 (8)
“뭔 뼈다귀를 문장으로 삼고 있냐? 들개도 아니고.”
두 병단을 테르쉬 열도까지 전송할 군선을 수송대에 징발할 필요는 없었다.
아인 최고 사령관에 오른 할바론 손 에베소가 그 임무를 자청했으므로.
아인들의 증기선은 인류의 배보다 더 크지만 더 견고하고 더 빨랐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멋있으면 됐죠.”
“멋있는 건 해골이 아니라 철이다. 차라리 스패너 같은 걸로 했어야지. 이 중요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나처럼 지혜로운 사람의 의견은 듣지도 않은 거냐?”
“스패너는 무슨 시팔! 노망이라도 났어요? 스패너 병단이라 하면 잘들 오겠다!”
카밀라가 발끈하자 할바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카밀라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 부하들이 그에게 명령을 받았고 군선과 거신의 여기저기를 닦고 조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카밀라는 할바론이 나사를 조이던 거신에 기대서며 말했다.
“사령관님은 보기보다 엄청 좋은 스승이신가 봐요. 작명 센스만 조금 구릴 뿐이지. 제자들이 엄청나게 많네요.”
“누가 저걸 보고 제자라 한단 말이냐? 골칫덩어리들이라고 하면 모를까. 인류가 모두 너처럼 멍청하니 기술 단계가 아직도 그 모양 그 꼴인 거야.”
“말이 좀 심하시네.”
카밀라는 피식 웃었다.
할바론의 말은 항상 이토록 신랄한 데가 있었으나, 악의적인 비난으로 받아들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번도.
항상, 그 말속에 진솔한 미소가 함께였기 때문일까.
“이건 그러니까…… 만약의 일인데요. 사령관님 제자 중에, 사령관님 뒤를 따라오려고 엄청 애쓴 누군가가 있다면요.”
“그런 놈은 널리고 널렸다. 남자고 여자고 죄다 가랑이가 찢어졌을 뿐. 뱁새가 황새 쫓는 것처럼. 핫하!”
“아 씨, 웃기지 좀 말아봐요! 지금 진지하다고요! 근데 그 뱁새가…… 사실 황새가 자기에게 모든 걸 맞춰줬단 걸 깨닫게 되면 어떻게 하실래요?”
제자로 거두어지고 지금까지, 용사에 뜻을 둔 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해왔다.
그분을 좇는 싸움을 해왔다고.
스승님의 뒤를, 등을, 향기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건, 이 길을 따라가면 푯대에 분명히 도달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어서였다.
‘근데…… 전혀 아니었어.’
한 발, 한 발. 한 걸음, 한 걸음…… 갓난아기를 돌보는 어머니보다도 더 자애롭게 그분께서는 곁에 계셨다.
손을 꼭 잡아주고.
뒤에서는 밀어주고.
앞에서는 끌어주고.
후임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다 보니 그 애정의 크기를 비로소 알게 되더라.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되더라.
그분의 크심을, 알게 되더라.
그리고 또 알게 되더라. 나는 결코 이렇게 될 수 없으리란 걸. 그런 자신조차 없었다.
“전 아마…… 좋은 스승이 못 될 거예요. 스승님이나 할바론 사령관님처럼요. 그게 조금 분해요. 나도…… 음, 뭐라 해야 할까, 멋진 스승이 되어서요, 내가 받았던 걸 그대로 돌려주는 걸 생각했었는데, 이젠 자신이 없네요.”
요한이나 샤론처럼 가까운 친구나, 에쉬르처럼 혈육 같은 언니나, 스승님에게는 부끄러워서 결코 낼 수 없었던 말.
그 말을 내니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할바론이 가까우면서도 먼 것 같은, 그런 사이라서 가능했던 일이리라.
“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냐. 4번 스패너나 내놔.”
“…….”
“뭘 째려봐? 얼른 가져와, 인마. 그리고 잘 봐라. 내가 지금 이걸 어떻게 닦고 조이는지. 이 예술적인 손놀림을 좀 보란 말이다.”
나 원, 진짜…… 어이가 없어서 할바론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이런 사람이니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던 거야.’
더욱 편해진 기분을 느끼며 스패너를 가져다주었다.
그건 11번 스패너였다.
일부러 다른 걸로 가져다준 것이다.
‘근데…….’
딱밤이나 지적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규격이 안 맞는 스패너로 저 망가진 기계장치를 완벽하게 고쳐내고 있는 게 아닌가.
“와…… 뭐지? 일부러 이상한 거 가져오라 해서 제대로 된 거 가져오게 한, 그런 고도의 심리전이었어요?”
탄성을 흘리는데, 스패너로 태엽을 감던 할바론이 입을 열었다. 특유의 장난기는 하나도 없었다.
“이 세상에 좋은 스승이란 없다. 나쁜 스승도 없고.”
“……?”
“실력 있는 스승과 실력 없는 스승만 있을 뿐이야. 후자는 사기꾼이라 해야 더 적합하겠지만, 여하튼 말이다. 실력만 확실히 있으면, 제대로 배우고자 하는 놈은 네가 싸놓은 똥만 보고도 많은 걸 배운단 말이다.”
“…….”
“인간들은 죄다 쓸모없는 놈들뿐이지만, 넌 기계장치의 예술미를 이해하는 편이고 하니 제법 장래가 유망하단 말이지. 덤으로 그 야만적인 무기, 검도 꽤나 잘 다루고 말이다.”
할바론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기계장치의 태엽을 완전히 감은 후 스패너를 빼내자, 기계가 부르르 떨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밀라가 그걸 유심히 보려고 고개를 들이밀자, 할바론이 스패너 끝으로 이마를 톡 때렸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니냐? 네가 퍼질러 싼 똥 하나를 보고 열을 배우게 되는 어떤 또라이 제자가, 이 미친 전쟁을 아예 끝내버릴지?”
카밀라는 이마에 걸쭉하게 남은 기름을 닦아내며 인상을 찌푸렸다가…… 저 말이, 어처구니가 없고, 또 너무 장난 같고, 또 꿈 저편의 이야기 같아서, 키득, 웃었다.
“설마요.”
그때 할바론이 문득 스패너를 떨어뜨렸다. 그 손이 경련하는 것을 보니, 전후 상처가 도진 것이 틀림없었다.
“괜찮으세요?!”
“주워줘.”
어딘가 명령에 가깝도록 싸늘했다.
카밀라가 그걸 줍기 위해 할바론 앞에 주저앉은 순간, 문득 머리에 와 닿는 손길이 있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할바론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닮듯,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너에게서는 라미네아와 같은 향기와 느낌이 나.”
“……?”
“네 지금 이 모습을 그 녀석이 볼 수 있었더라면, 정말, 누구보다 기뻐했을 텐데.”
만약,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미안하다…….”
어머니와 생이별했는데, 버팀목이 되어줄 아버지가 있고, 그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 거야…….
“그때 어떻게든 네 스승과 함께 돌아왔었어야 했는데…….”
카밀라는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물결치며 무너지는 걸 느꼈다.
“사과하지 마세요. 사령관님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건…….”
왼팔로 눈가를 가리자 제복에 물기가 깊숙이 배어났다.
“카밀라, 너는 오래 살아라. 다시 만날 날까지 죽지 마라. 알겠냐? 너는 오래오래 살아라.”
* * *
–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잠시 멈췄을 뿐인데, 이제 저는 싸울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아이딘은 시간이 날 때면 일기를 썼다. 누가 봐줬으면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심란한 심정을 정리할 길이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남았나…….
결국 이 비루한 삶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게 없는데…….
– 나에게는 과연 살아남을 자격이 있던 걸까요. 아니, 이렇게 행복해질 자격도 없는,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살아왔건만…… 차라리 마을이 무너질 때 죽어야 했던 건 아닐지…….
아이딘은 고개를 돌려, 저 먼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직 끝나지 않아서, 언젠가 다시 돌아올 잔혹한 운명이 저 너머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위해 살아남았으며, 무엇을 위해 이곳에…….
“아빠, 아파?”
분명, 품에서 따스한 침을 흘리며 잠들어 있었던 막내가 고개를 들고 그렇게 물었다.
아이딘은 빙그레 웃어주었다.
소맷자락으로 아이의 침을 닦아주며 고개를 젓는데, 막내는 버둥거리며 품에서 벗어나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광주리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첫째가 성실하게 아침부터 산과 숲에 들어가 캐온 약초들이 그 위에서 메말라가며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막내가 약초 하나를 입에 물고는 아이딘에게로 돌아왔다.
흔들의자의 발치로 돌아온 막내는 약초를 오물거리며 양팔을 벌렸다. 안아달란 뜻이었다.
어리둥절하며 다시 품에 안아들자, 입에서 오물대던 약초를 손에 뱉은 막내는 그걸 아이딘의 볼에 정성스레 펴 발랐다.
‘엄마가 제 누이에게 해주던 걸 어깨너머로 배웠나…….’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막내가 활짝 웃었다. 꽃이 만개하듯이.
“아빠, 이제 안 아파!”
그 미소에, 그 웃음에, 문득, 불현듯, 느닷없이, 갑작스레, 평생 해소되지 않고 밝혀지지 않던 의문의 지평선에 여명의 빛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영혼의 새벽이었다.
그 빛 속에서, 백골이 진토가 되고 피가 강을 이루는 세상의 모든 암흑이 걷혔다.
그 빛 너머에는 슬픔이 없었다.
고통도 눈물도 아픔도 없었다.
다시는 끝나지 않을 봄이 화사하게 피어나, 죽고 죽어가던 모든 이들에게 안식을 내리고 모든 여름과 겨울과 암흑과 밤을 끝냈다.
그래, 그건 창세의 미소였다.
창세의 자애가 만면에 드러나는 미소였다.
‘아…… 아아…….’
나에게 이걸 보여 주시려고…… 살게 하셨구나…… 이렇게…… 이 아이를 만나게 하시려고…… 그날부터…… 오늘까지…… 살아오도록…… 붙잡아 주셨구나…… 보게 하시려고…… 만나게 하시려고…… 지어 주시려고…… 이 미소를…….
“아빠?”
울고 있었다, 막내를 품에 끌어안은 채로, 그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숨죽여 울고 있었다.
이게 생명의 기쁨이구나…….
이게 창세의 섭리로구나…….
마음속에서, 소리 내어 우는 어린 자신의 환영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촌 마을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말했다.
– 이제 괜찮아요, 선생님.
– 선생님 열심히 하셨잖아요.
– 선생님을 미워하지 않아요.
대영웅이 열 살이 되던 해, 아이딘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다.
대영웅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 그는 칼 한 자루와 자신의 몸을 거름으로 그 끝없던 전쟁을 끝내고 영원무궁 끝나지 않는 봄을 이 땅에 꽃피워냈다.
아이딘이 아들의 그 순수하고 맑은 웃음 속에서 엿보았던, 푸른 도라지꽃이 수평선 가득 만발하는…… 바로 그 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