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1)
가짜 용사 이야기-31화(31/310)
제31화
“이건 억제기라는 장비요.”
<하랄도니키>의 법황청을 떠나기 직전에, 그러니까 아직 심연이 범하지 못한 여름의 품에 안겨 있던 시절의 기억.
“편하신 쪽 손목에 착용하시오. 중앙 부분 핀을 열쇠처럼 돌려 뽑으면 용령의 힘이 해방될 거요.”
즉, 서임식이 끝난 날이었다.
신성공방의 수석 야장 스탠이 둔중한 빛을 발하는 구속구를 내밀었다.
“꽂혀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체내의 용령을 제어해서 실수로 용령의 힘이 해방되지 않게 되지. 핀은 마력으로 재구축되니 잃어버려도 상관없소. 뽑고 나서 마음껏 버리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재질인 용골(龍骨)로 제작된 것으로, 전투에 큰 지장을 주지 않게 설계했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야장 어른.”
“용사가 그게 무슨 말이오. 나야말로 전장에 나서는 당신께 드릴 게 이것뿐이라 미안하외다. 하지만 명심하시오. 갑작스럽게 폭발적인 출력이 몸을 덮치는 게요. 3분도 길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더 빨리 의식을 잃을 수 있소.”
“시간 싸움이란 거군요. 감사합니다.”
삼천 명 베기,
케르크누드 철수 작전 (6)
가짜 용사가 세(勢)를 잡았다.
그 손에 들린 채, 핏빛으로 울어 젖히는 태도는 성스럽다기보다는 요사스러웠다.
칼이, 피를 갈구하듯이.
주인의 눈동자라고 다를까.
죽음을, 끝없는 아수라를 갈구하는 날이 황금의 눈동자에서 고요히 일렁였다.
“네놈이 어떻게 살아 있지?”
라니키칸이 휘두르는 지팡이 끝에서 검푸른 독기가 휘몰아친다.
암현충(暗鉉蟲).
저 먼 심연의 시대, 산 것들의 뇌와 척추 속으로 파고들어 몸의 통제권을 빼앗았다는 옛 기생충들이 반응한다.
두근, 두근, 두근…….
체내에서 기생하던 암현충들이 타후프 광인들을 채찍질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루크들이 가득 세차게 밀려들던 순간.
우우우, 아라다만텔이 피를 노래했다.
챠아아아앙─────!
허공을 잡아 찢는 홍련의 궤적.
그 궤적에 휘말린 수십 수백 광인들의 상반신이 찢겨져 나갔다.
빠르다.
너무나도 빨라서.
광인들이 폭발할 때에는 이미 페이쿼리어는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범인의 눈에는 그저 붉은 차륜이 회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
리아는 눈앞에 펼쳐지는 무위를 보고 감탄 말고는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다.
‘뭘 한 거지? 찰나조차 되지 않는 순간에 우루크가 몇백 씩 죽어 나가잖아.’
그때, 카이센은 터질 듯이 박동하는 심장의 격통을 침을 삼켜 억눌렀다.
용령 해방.
인간에게 주어진 신체 능력과 반사 신경을 극한 너머 진룡의 경지까지 이르게 하는 황금의 물결.
그 절대적 힘이 혈관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갈 때의 반동.
3분이다.
3분 안에 끝내야 해.
카이센이 쿵, 진각을 밟을 때마다 발자국 주위로 일종의 파장이 퍼져 나갔고──
일합잔상(一合殘像).
──그 파장을 보았던 타후프들은 어째서인지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천지의 회전이 멈췄을 때는 시선이 지표면에 처박혀 있었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야로 머리통이 없이 휘청거리는 사체를 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들의 몸이었다.
그 초현실적인 검무를 일순간 넋을 잃고 바라본 라니키칸의 등허리에 오싹 오한이 일었다.
‘단순한 참격이 아니다. 뭐냐? 아까 만났을 때와는 격 자체가 다른 것 같은데?’
페이쿼리어가 용의 힘을 이용하여 신체 강화를 이룬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
생명력을 힘으로 전환시킨다는 용언의 힘으로.
하지만 그래봐야 용언.
‘고작 하찮은 비룡 따위가 새겨 넣은 용언이 저런 압도적 힘을 낼 수 있을 리가…….’
앞에 세워둔 광인의 숫자만 3천 명은 족히 된단 말이다. 그걸 정면으로 뚫고 들어와?
챠아아아아앙……!
용사는 일직선으로 내달리며,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베고 또 베어서 길을 만들었다.
그것은 분명 길이었다.
그 재료가 벽돌이 아닌, 시체와 피로 이루어졌단 것만 다를 뿐.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적진 단신 돌파합니다!”
접안경으로 사태를 주시하던 관측병이 멍하니 보고했다.
“타후프 클랜 속수무책…… 반응조차 못 합니다. 페이쿼리어, 앞으로 계속 전진 중!”
격변하는 전황에 몸을 부르르 떨던 크라우잔이 손을 들고 외쳤다.
“엄호해라! 페이쿼리어가 타후프 치프에게 갈 수 있게 원호해! 총탄과 포탄을 아끼지 말고 쏟아부어!”
크라우잔의 호령에, 넋을 잃고 그 무극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성검의 칼날에 비해 무력하기 그지없으나, 총탄의 포화는 광인들이 수비 대열을 짜는 걸 어지러뜨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가짜 용사가 피탄 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총탄조차 쫓지 못할 정도로 빨랐으므로.
트럼펫 소리와 함께 광장을 겨누던 화포들이 증기를 뿜었다.
“1열 발사! 2열 대기, 발사!”
지붕 위에서 대기하던 총병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포연이 걷히기 무섭게, 흑장미 병단의 기병대가 튀어 나갔다.
다급한 함성 속에서, 카이센을 포위하려던 광인들과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휼레르!”
라니키칸이 외쳤다.
타후프 휼레르는 일반적인 광인들과 달리 고대 청동 병기로 무장한 근위병들이었다.
라니키칸의 암술에 폭주한 타후프 휼레르들이 전신으로 흑광을 섬뜩하게 뿜으며 돌진했다.
─ 십문자도 10식.
그때 카이센은.
칼과 칼집을 십자로 교차.
타후프 휼레르들의 공격을 막아낸 다음.
─ 십자참수(十字斬首).
광인들의 몸이 한순간에 네 토막으로 절단되기 전에.
그 살점들이 지면에 떨어지기도 전에, 첫 핏방울이 땅을 적시기도 전에.
다시 앞으로, 또 앞으로.
‘암현충을 백 마리씩 박은 타후프 휼레르마저도……?’
그때, 마녀들의 결계가 도시 사방에 흩어져 있다가 집중되는 광인들의 발목을 붙잡아 세웠다.
“Tahuf!”
그때, 흑장미 병단의 기병들이 카이센의 뒤를 잡으려는 광인들에게 충돌, 폭발과 함께 산화했다.
“뭣들 하는 거야! 저놈을 없애!”
그리고 그때,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이 대리자의 의지에 공명한다.
바람을 가르며 드높게 우는 칼의 울음. 칼날에서 터져 나오는 홍련의 휘광.
도화지에 물감을 휘두르듯 세계를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빛기둥으로 용솟음치는 검광.
그 폭발의 광채는 살벌하고 섬뜩하되…… 고고했다. 그 앞에서 살아 있던 모든 것이 핏빛으로, 죽음으로 물든다.
전율(戰慄).
라니키칸의 두 눈이 전율했다. 이성을 압도하는 공포를 느꼈다.
‘누구냐.’
눈부시게 작렬하는 빛과 자욱하게 일렁이는 연기 속에서, 다음 순간 뛰쳐나온 그림자가 눈앞까지 쇄도해 들었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라니키칸의 지팡이가 위기를 직감하고 질퍽하게 울부짖었다.
‘발크루쉬 클랜의 낙인, 이놈이 설마…… 키랄의 애송이를 베었다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라니키칸의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흑광, 주위의 대기에서 일렁이는 힘의 파동.
스스로의 몸에 천여 마리의 기생충을 심어서, 신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는 마지막 비기.
카아아앙────!
다음 순간, 빛의 칼날과 어둠의 창날이 격돌하며 고막이 찢길 듯한 쇳소리가 전장에 낮게 깔렸다.
– 카이센.
순간, 카이센의 시야에 거미줄처럼 돋아나는 붉은 선이 있었다.
살(殺)의 선이었다.
극위성검이 인도하는 신념의 불길이었다.
– 너는 이 칼이란 물건을 어떤 방식으로 쓰고 싶니?
빠르게.
빠르게, 더 빠르게.
용령으로 증폭된 시야가 세상을 느리게 만든다. 인지의 속도에 신체의 속도가 따라오게 만든다.
‘아…….’
샤론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등허리를 차갑게 훑고 지나가는 떨림은 경이의 떨림이었다.
칼날을 보기조차 힘들다.
칼날이 세상을 훑은 잔상만이 남아, 이 잔혹한 세계에 홍련의 꽃잎을 피워내는 것만이 보일 뿐.
‘저 막무가내식 싸움법, 정말 카밀라를 빼닮았는걸…….’
잠시 죽은 친구의 등이 그 제자의 위로 포개진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그리움으로 눈가가 희뿌옇게 얼룩졌다.
채애애애앵!
칼날에 맞부딪쳐 오는 저항이 카이센의 손목을 부술 듯이 쑤신다.
시야 가득 흩날리는 핏물.
싸늘하게 식어가는 전신에서 고통이 힘차게 팔딱거린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칼을 놓지 않는다.
‘네놈들은 생명을.’
크게 휘둘러진 성검이 토해낸 비상식적인 열량의 검압에 광장 저편의 예배당이 무너져 내린다.
‘일상을.’
라니키칸이 그 검압에 저항하려고 몸을 움츠린 순간, 성검의 칼날에 그 오른팔이 잘려 나가며 핏물을 흩뿌린 순간.
‘사람들의 삶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어 라니키칸의 왼발을 깊숙이 베어 기동력을 차단한 아라다만텔이 포효하는 순간.
‘도대체 얼마나 고상한 뜻이 있어서 그 모든 걸 마음대로 죽이고 빼앗고 짓밟는 거냐.’
바로 칼집과 지팡이가 격돌.
맹렬한 충격으로 지팡이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허공을 휘돌 때.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 찰나.
아주 짧은 찰나.
‘너희보다 약하니까 빼앗고 짓밟는 게 당연한 거냐?’
라니키칸이 허점이 오롯이 드러난 찰나.
양손으로 극위성검을 칼집에 납도하며 머리 위로 치켜든 찰나.
아라다만텔의 칼날 위에 새겨진 고대 용언이 찬란한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
그날.
어머니가 아들 대신 죽은 그날.
목 놓아 울던 가슴에 품었던 의지와 성검의 용언이 공명한다.
─ 십문자도 발도술, 장작 패기.
예술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자세에서 이루어지는 참격이 세상을 갈랐다.
그 한순간 그 신들린 전투를 목격한 모든 이들은 넋을 잃었다.
화산재의 먹구름을 뚫고, 수평선을 흑백으로 물들이며 전장에 내리꽂히는 붉은 낙뢰 때문에.
그것은 칼의 벼락이었다.
반 박자 늦게 강렬한 충격파가 발목을 휩쓸며 지나가고, 한 박자 늦게 뇌명이 울듯 아라다만텔이 맑게 울더니 빛을 잃고 스러졌다.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벼락의 후폭풍이 끝난 적막 속에 서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타후프키펠 라니키칸은 업화의 벼락에 휘말렸다.
그 참격의 일순간, 주인을 지키기 위해 참격의 궤도 위로 산더미처럼 육벽을 쌓아 올린 타후프 광인들도 예외는 없었다.
그 모든 육신들이 불살라지고 잿가루로 타들어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했다.
‘검기(劍氣)라니…….’
리아의 두 눈이 크게 열렸다.
검기.
마나체인으로 마력의 칼날을 구축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그 힘을 여러 형태로 발현시키는 것.
‘그야말로 절정 검사의 상징…….’
이 싸움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병사들의 입에서 멍하니 환성이 흘러나왔다.
“이겼어…….”
“혼자서 저 타후프 치프의 모가지를 땄다고……?”
“지금 감탄할 때냐! 놈들이 도망치잖아! 죄다 쏴 죽여!”
거기까지였다.
주인을 잃은 암현충들이 체내에서 폭주하면서 광인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크라우잔이 명령을 내렸다.
“그만! 이대로 다른 우루크들과 혼선을 이루게 놔두어라. 방어선을 재정비한다. 5선을 최대한 사수하며 철수 작전을 마무리하라!”
그렇게 진격해오던 군소 부족 우루크들과 광인들이 마구잡이로 뒤엉키다가, 그 몸이 폭발하고…….
병사들은 이따금씩 방어선을 뚫고 들어오는 소수의 우루크들만 쏘아 넘어뜨리면 그만이었다.
카이센이 흐릿한 의식으로 확인할 수 있던 건 거기까지…….
“3분…….”
칼집을 지팡이 삼아 무너지기 직전의 몸을 지탱했다.
용령 사용의 반동이 끼쳐온다.
필멸자의 정신이, 영혼이, 그 폭풍처럼 거대한 힘의 흐름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므로.
“아슬아슬했나…….”
혼을 지키기 위해 휴면 상태로 들어가려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카이센!”
용사는 그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카밀라가 그러했듯이.
“정신 차려, 카이센!”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카이센이 이상해요! 뭐지? 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고 있어! 방금 그 힘이 신기루였던 것처럼.”
“저희가 엄호하겠습니다!”
영원처럼 길었던 한순간.
리아가 달려와 어깨를 부축해준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겨우 의식을 붙잡으려 했으나, 기억할 수 있는 장면들은 난잡한 전황의 편린들뿐…….
“……곧 아침이 밝는다…….”
“……철수 작전 현황은……?”
“……이제 마지막입니다. 수비대도 철수하라 합니다……!”
“……우루크가 사방에서 몰려오는데 어떻게…….”
“……내가 남겠다. 천 명쯤의 결사대가 필요해…….”
“……도원수 각하, 어찌…….”
“……어서! 나가 놈들이 마녀들의 해안 결계를 깨부수기 직전이지 않나……!”
“……아뇨, 제가 남겠어요. 카이센이 이어준 목숨,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걸지도 모르죠…….”
“……이슬라는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 이슬라가 모두 막는다……!”
“……맞습니다. 거신들은 전용 수송선이 없이는 배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부교 여기저기에서 내가 싸우겠다, 아니 내가 남겠다며 다투는 혼란…….
케르크누드 해안은 수심이 얕았다. 부교가 아니라면 전선이 들어올 수 없었다.
어선들을 통해 사람들을 먼바다에 떠 있는 군선으로 나르는 형태를 사용해야 했다.
그때 나가들이 결계를 부수고 해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물 아래에서 배들을 부숴 침몰시킬 것이다.
“……철수, 철수해……!”
“……배를 빼……!”
의식이 아득히 멀게나마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첫 여명이 떠올랐다.
아니, 그것은 정말 여명이었을까. 어떤 여명이 저렇게나 맑게 울면서 떠오른단 말인가?
그건 여명이 아니었다.
용의 광휘였고, 용의 포효였다.
그런데도 진실로 어떤 여명보다도 아름다웠다.
세상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음색이었다. 차갑고, 순수하고 맑은 음.
눈앞에 고요한 호수가 펼쳐지는 것만 같은, 아니 실제로 펼쳐지는 순수한 음색이었다.
고개를 들 힘이 없어, 눈동자만 조심스레 움직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눈이 부셔.
한순간 이 참혹한 화산재의 밤에 최초의 여명이 오른 것만 같았다. 리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청성의 백룡, 미른가디아 각하시다…….”
청성의 미른가디아.
은(銀)의 시대를 열었던 용현 레인 루드윅이 이 땅에 남긴 세 가지 기적, 삼영룡 중 하나.
이 멀리에서조차 그 풍채는 가슴이 떨려올 정도로 고귀하고 위엄찼다.
「Kal(열리다).」
「Gurs(양쪽으로).」
「Oufari(물).」
「Diale(격랑).」
백룡의 호령에 대자연이 넙죽 엎드렸다. 바다가 요동치면서 뒤집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적(異蹟).
인간은 결코 일으킬 수 없는 신의 힘.
신들이 떠난 세계에 있을 수 없는 희망의 빛이 체현된다.
먼저, 군선이 있는 곳까지 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갈라진 끝에서 격랑이 일어 나가들을 멀리 쓸어냈다.
흰 거품을 일으키며 우는 물은 그대로 해일이 되어, 밀려드는 우루크 육군 부대를 덮쳤다.
적들은 도시로 쏟아지는 물벼락 앞에서 황망히 달아나기 바빴다.
“청성 각하시다!”
“청성 각하께서 와주셨어.”
“청성 각하, 모두 쓸어버리십쇼!”
백룡이 하늘을 활공하며 다시 울음을 흘렸다.
그러자 갯바위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군선의 갑판까지 오르는 길을 만들어냈다.
그 기적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슬픈 게 아니라 기쁜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용의 시대가 끝나버린 이 마지막 때에, 최고의 용이 기적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이었으니까.
* * *
그 이후.
수면이 흘수선 위로 올라오도록 인원을 가득 채운 철수 선단은 순풍 가운데 탈리아 섬에 도착했다.
선단의 뒤를 집요하게 쫓아온 나가들은 청성 미른가디아와 마녀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도시를 수비한 수비대의 8할에 가까운 병력이 죽었으나 그들의 희생 덕에 무려 230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심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케르크누드 철수 작전.
이 작전은 ‘붉은 여름’의 서막을 마무리하는 대승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러나 아직 ‘붉은 여름’의 서장이 끝나기까지는, 그러니까 인류의 반격이 시작되기까지는 하나의 전투가 더 남아 있다. 바로 적색산맥 회전(會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