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3)
가짜 용사 이야기-33화(33/310)
제33화
적색산맥(赤色山脈).
본래 화룡 벨’다키둔이 적룡 군단을 거느리고 기거하였다는 영산으로 기원의 시대부터 인류를 수호해왔다.
천험(天險)의 형세로, 모든 외적으로부터의 침범을 차단하며.
천혜(天惠)의 영기로, 심연을 흡수하여 문명 세계에 타락의 영향이 일지 않도록 작동한다.
“이러한 사전적 설명이 주효한 건 5년 전까지의 일이다.”
‘붉은 여름’이 시작되던 1692년.
청성의 미른가디아는 적색산맥 전체를 요새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산맥의 능선을 따라 세워진 석축의 총길이 9,842리.
산맥의 북사면을 이루던 자연의 아름다움은 구획별로 정리되었다.
자연이 사라진 빈자리에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자동계단, 자동보도, 승강기 따위의 군사적 시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이로써 각 봉우리의 요새들이 하나의 점(點)이 아닌 선(線)으로 기동하게 된다. 말 그대로 천험의 요새가 된 것이지.”
남사면은 계곡을 험준하게 깎아서 자연적인 해자로 강화, 숲을 베어내서 사격 시야를 확실하게 열어냈다.
“이 모든 게 단 3년 만에 이루어졌다고, 역사는 이곳을 삼년산성(三年山城)이라고 일컫는다.”
바로 이 삼년산성이다.
붉은 여름, 인류 최후의 저지선으로서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1년 동안 활약하게 되는 무대가.
그리고 그 영웅의, 애달픈 청소년기가 끝나기까지의 배경이.
총력전의 서막,
적색산맥 공방 (1)
이튿날 새벽, 카이센은 청성 미른가디아에게 철십자 기사단 배치를 명령받고 중부 전선으로 향했다.
증기선을 타고 육지에 상륙한 뒤에는 대륙 순행 열차, ‘바트’호에 탑승하여 적색산맥의 고갯길을 넘었다.
대륙 순행 열차에는 큰 명성을 떨쳤던 모험가의 이름이 붙는 것이 관례라 했다.
바트는 용현 레인 루드윅의 동료였던 자로 거미 군주 토벌전으로 이름을 남겼다.
‘동료.’
그 단어는 언어가 아닌 칼날로 가슴을 찔러오는 듯싶었다.
앞으로의 삶에서, 동료라는 걸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만들어 낸다면 세계가 잔혹하므로 또 죽을 것이고, 가슴에는 또 구멍이 뚫릴 것인데…….
내가 그걸 버틸 수 있을까.
아마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카이센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코를 고는 이슬라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슬라는 ‘카세나’라거나 ‘프리스비아’라거나 ‘아키’라거나 ‘류넬’이라는 이름을 잠꼬대로 웅얼거렸다.
한창때의 아이처럼 잠을 많이도 잤으나, 끼니때마다 귀신같이 일어났다.
삶은 달걀이 차내식으로 나왔고, 이슬라는 달걀 3개를 한 번에 입에 넣고 힘차게 우물거렸다.
“그렇게 급하게 먹음 목 막혀.”
“용은 이딴 계란 따위로 목 안 막힌다! 10개도 먹을 수 있다!”
“그러면 내가 먹을 게 없는데.”
“이슬라는 용이다! 계란 10개도 조금 먹는 거다! 잔뜩 크려면 이것보다 더 먹어야 한다! 이것도 봐주는 것이다! 카이센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항상 음식물을 튀기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음식물을 양쪽 볼에 가득 채운 모습은 용이라기보다는 다람쥐 같았으나, 용족의 자존심을 염려해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에 튄 음식물을 굳이 닦지 않았다. 항상 이슬라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도로 먹었으므로.
다시, 이슬 맺히는 차창 너머를 내다보았다.
어느덧 열차는 화산재 덮인 세계를 벗어나, 여름 하늘이 푸르게 펼쳐지는 산악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바다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다의 빈자리로 산맥이 기승을 부리듯 일어서고 있었다.
“적색산맥.”
새벽을 맞이하는 산맥이 감당할 수 없는 아늑함으로 깨어나고 있어서, 멍하니 그 이름을 읊었다.
신성(神聖).
그래, 신성했다고 해두자.
붉은 영기를 두른 산맥은, 새벽의 햇살 속에서 초자연적 위엄을 세우고 있는 듯했다.
산맥으로서 적세를 차단하고.
산맥으로서 방진을 결집시킨다.
인페르노 라인의 인위적 위엄 또한 살벌하고 아뜩했건만, 그 강철의 위압감도 이 산맥 앞에서는 그 빛이 바래는 느낌이었다.
참으로 수려하구나…….
이것이 진정 대자연이구나…….
이런 것이 심연과 문명 사이에 놓여 있으니, 제국인들이 세상의 다급함을 모르고 저들끼리 치고받는구나…….
그렇게, 세상의 모든 걸 놀라워하는 소년의 눈으로 차창 너머를 바라볼 수 있던 시간은 열흘뿐이었다.
10일 차의 아침에 ‘바트’호가 정거장에 정차했다.
정차한 기관차가 매연을 뿜는 소리는 새로운 전장으로 이끄는 군가처럼 들렸다.
“이번 역은 <골든로즈> 외곽, <골든로즈> 외곽입니다. 중부 전선으로 이동한 병사분들께서는 이번 역에서 내리시면 되겠습니다.”
황동제 전성관을 통해 기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뒤쪽의 2~3등 객차에서 장교들이 윽박질러 사병들을 깨우는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기관차가 힘차게 토해내는 매연 속으로 아침의 첫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산맥의 아침이었다.
“얼른 꺼내! 뭣들 하냐! 힘을 쓰란 말이다!”
화물칸에서 각종 중장비, 거신이며 야포를 끌어내는 포병들과 공병들의 신음이 고달파 보였다.
“그럼 이슬라, 나중에 보자.”
“이슬라가 보고 싶다고 울지 마는 것이다. 그럴 때 편지 정도는 써도 된다. 용의 자비심으로 답장은 써주겠다.”
이슬라는 열차 안에서 헤어졌다. 이슬라는 용추 병단을 인솔할 것이다.
철십자 기사단이 승강장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철십자 용사 파티의 일원인 용창(龍槍)의 트발이 젊은 기사 세 명을 대동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흑색 제복에 회색 십자를 철로 아로새겼다. 화려하지 않되 단아하고 올곧은 미색이었다.
기사들은 허리를 곧추 펴서 위엄을 갖추었으며 품행거지에 망설임이 없었다.
“네가 카이센이냐?”
“그렇습니다.”
“하! 네놈 때문에 이것들에게 금화 3닢을 주게 생겼잖아.”
트발과의 첫 만남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트발은 자신보다 눈높이가 높은 남자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카이센을 훑었다.
다부진 체격과 험상궂은 얼굴은 긴 전쟁을 지나온 자 특유의 흉터가 가득했다.
“트발, 저희가 이겼군요.”
젊은 기사들이 히죽거리자 트발이 인상을 찡그리며 품에서 황룡 금화를 3개 튕겼다.
“네가 나보다 키가 클 것이라고 저 괘씸한 놈들이 금화를 걸었지. 난 나한테 걸었고. 하! 남자 페이쿼리어가 진짜 있었구만.”
“사과를 원하시는지?”
“사과는 개뿔! 잘 들어라, 병아리 페이쿼리어. 나는 최강의 창잡이다. 페이쿼리어가 아니더라도 최강이란 말씀이지. 그러니 나를 얕잡아볼 생각은 말아.”
트발이 어깨에 걸머쥔, 자신에게 용창이라는 이명을 준 전설의 용골창을 위협적으로 으쓱였다.
용골 중에서도 가장 예리하고 단단한 부위인 쇄골만으로 만들었다는 이형의 창.
창이라기보다는 대검, 아니 기둥에 가까웠는데…… 그 길이며 너비가 트발의 허우대에 맞먹게 거대했다.
“뭐 하는 거야? 단장님께서는 데려오라고 했지, 쓸데없이 위협하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트발의 혈기 넘치는 경쟁심에 제동을 건 궁수가 있었다.
아인이 아닐까 싶도록 작은 체격의 여자였다.
신록의 색채를 담은 머리칼 아래의 표정이 극도로 차갑고 한쪽 눈이 애꾸인 여자였다.
등에 찬 활이 새하얀 백광을 내뿜었는데, 용골창과 맞먹는 위상을 가진 백창궁 세르웨본이었다.
두 무기 모두 용현 레인 루드윅의 동료인 바트와 렘의 무기인데 역사가 어마어마했다.
용골창의 경우 최강의 금강 등급 용병이었던 드래곤 슬레이어까지, 세르웨본의 경우 동란기를 평정했던 전설의 궁성 키에스까지 그 계보가 올라갈 정도니까.
“적색산맥에 온 걸 환영해. 나는 메른이야. 저 멍청이의 이름은 트발이고.”
간단한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다.
적색산맥 주둔지로 향하는 내내 트발과 메른은 사소한 문제 하나하나로 티격댔다.
산길은 자동계단으로 개조되어 있었기에, 증기기관의 힘으로 계단이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정말입니까?”
그때 기사 한 명이 물었다.
“혼자서 하이 쿤 타르크를 궤멸시켰다고 들었는데요.”
“그냥 산맥 전체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우루크 슬레이어라고들 말하죠.”
“첫 출전이라 들었는데, 정말 엄청나시군요, 용사님.”
우루크 슬레이어…….
저들의 존경 어린 웃음에 섞여들 수가 없었다.
저 별명은 본래 존경이 아닌 장난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었던가.
– 어이쿠, 우루크 슬레이어 나리 아니신가!
– 점마 저거, 진짜 우루크 슬레이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 우하하하하하!
웃음이란 결과물은 같았으나 그 안에 깃든 감정은 달랐다.
그 옛 감정을 공유하려면 옛 기억을 먼저 공유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이제 없었다.
이제, 없었다.
트발이 뒤를 홱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으스대지 않는 게 좋을걸. 실력깨나 있는 모양이지만 최강의 페이쿼리어는 네가 아니야. 우리 단장님이 진정 최강이지. 필두 페이쿼리어시라고.”
철십자 기사단.
중부 전선의 격전지에서 종군해온 이 정예 부대는 살벌한 무위를 떨치고 있었다.
오직 제국의 청장년 기사들로만 구성된 중기병 부대로, 랜스를 이용하는 돌파력의 명성은 크고 두려웠다.
이 집단을 통솔하는 용사의 이름은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
아라다만텔보다도 더 고고한 전공과 역사를 지닌 극위성검 쉬르팽의 대리자였다.
극위성검들에게 서열이 매겨진다면, 쉬르팽이 반드시 1위를 차지하리라.
샤론이 전역하고 필두 페이쿼리어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중부 전선 격전을 세 번이나 승리로 이끈 바 있었다.
그런 로베리스를 지휘관 막사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그녀는 전사라기보다는 학자처럼 보였으므로.
막사의 간이 탁자에 앉아서, 낡은 색안경을 쓰고 수첩을 만년필로 휘적거리고 있었다.
적막(寂寞).
적막이란 현상을 분위기로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심각하되 차분한 표정은 이지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어깨로 떨어지는 백발의 삼엄함과 안경이 그런 느낌을 증폭시켰다.
“네가 카이센이냐?”
그래,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인생의 두 번째 스승,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과의.
그때 로베리스는 수첩으로부터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이렇게 물었었다.
“도원수부를 경유해서 네 정보는 다 읽어봤다. 실력이 더할 나위 없이 좋던데.”
그때 복숭아 꽃잎을 물고 불어온 산바람에 수첩이 마구 펄럭이자 로베리스가 인상을 살짝 구겼다.
“하지만 내 부대에 필요한 건 두 명째의 용사가 아니라 한 명의 병사다. 허가하지 않은 개인행동은 용납지 않겠다. 이해했나?”
그래,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인생의 청소년기이자, 가짜 용사로서의 태동기를 지도해준 스승과의 만남은.
산맥의 복숭아 향기 속에서, 가지런하게 흐르는 로베리스의 백발은 새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금제 용머리 머리핀은 카밀라와 똑같은 것이었다.
“이해했습니다.”
그 색채와 머리핀에서, 옛 스승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것은 슬픈 비극의 그림자.
이 무너져가는 세계를 지탱하는 마지막 등불들이 영혼에 품고 살아가는 소명의 향기.
“사무적인 인사는 이쯤 하지.”
그렇기에, 어쩌면 그날.
복숭아꽃이 흐드러지던 세계에서의 그 만남은.
“사지(死地)로 뛰어들어 카밀라 선배님과 샤론 선배님을 구해냈다고 들었다. 실력뿐만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 마음에 들어.”
인연의 첫머리부터.
똑같은 결말이 예정되어 있던 걸지도 몰라.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중부 전선 최강의 부대에 배치된 걸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