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4)
가짜 용사 이야기-34화(34/310)
제34화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중부 전선 최강의 부대에 배치된 걸 환영한다.”
로베리스가 마침내 유려한 몸짓으로 색안경을 벗어 탁자 위로 내려않아 카이센을 응시했다.
그 동작에 숨이 막혔다.
절도 있는 어조와 고급스러운 어휘, 절제된 동작 하나하나가, 정통 귀족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품위를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거느린 사람이 있다니…….’
거칠고 걸걸한 카밀라.
매사에 장난기가 넘치던 샤론.
그 두 사람도 개성이 넘쳤지만 이쪽은 그 둘과도 극도로 대비되는 분위기를 가진 용사였다.
“두 분을 모두 구했다는 말에는 어폐가─”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베리스는 제국 굴지의 대가문, 페이지 방백 가문의 장녀였으니까.
“─그만. 겸양 떨 생각은 말아. 네가 초장부터 나한테 호감을 얻었단 걸 말하려 하는 거니까.”
“……?”
“난 두 분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렇지 않은 페이쿼리어가 있나? 그분들은 날 로로라고 불렀지. 샤론 선배님이 처음 붙여줬지. 페이쿼리어가 되기 전에는 로라디라는 미들네임을 갖고 있었거든.”
먼 기억을 더듬는 듯한 로베리스의 입가에 미소의 흔적이 엷게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건 막사 밖에서 전입신고를 지켜보던 트발이나 메른에게 충격에 가까운 인상을 남겼다.
단장이 첫 대면에 누군가에게 자신의 별명과 미소를 보인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으므로.
“연결됐어.”
그때 막사 저편에서 한 여인이 고혹적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붉은 비단의 마녀 정장.
낮게 눌러쓴 고깔모자를 아래로 곰방대를 물던 마녀는 카이센의 시선을 받자 눈을 찡긋해 보였다.
[도원수 멜빈이다. 로베리스 거기 있는가?]곰방대가 간이 탁자 위에서 빙그르르 엮이더니 한 중년인의 형상을 일구어냈다.
의식 연결 계열의 통신 주술.
지대한 지식을 요구하는 주술로, 이 주술 하나만으로 저 마녀의 실력을 감히 가늠해볼 수 있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우루크 대부대가 평원 지대로 이동하고 있네. 오우거와 트롤의 반응까지 확인됐지.]“트롤을 대동하고 평원 지대라, 공성전을 치를 생각이로군요. 우루크의 군세는 어떻게 됩니까?”
[누위긴 클랜이 17개 연합 클랜을 지휘하고 있네.]“누위긴은 하이 쿤 타르크 서열 3위,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요.”
[철십자가 아니면 누위긴의 중장보병 방진을 뚫을 방법이 없네. 도착 예정 시간은 이틀 뒤네. 즉시 철십자를 인솔해 합류하게.]“예, 각하.”
철십자 기사단은 기사 522명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전통적으로 기사는 종자를 한 명씩 거느렸으며, 전투마와 갑주를 돌볼 시종도 두셋씩 대동한다.
이들도 무장을 하고 후위에서 말을 몰았으므로, 철십자 기사단은 전투 개시 시점에 2천 명에 가까운 대부대로 재편성된다.
“카이센, 말을 탈 줄 아나? 백골 병단은 보병 부대였을 테니.”
“<위용검전>에서 마상 전투를 배웠습니다.”
“그래, 그게 있었군. 그거면 됐다.”
로베리스가 시렁에서 영웅의 보검 쉬르팽을 쥐었다.
대리자의 손에서 깨어난 쉬르팽이 아라다만텔과 공명해 새하얀 숨결을 길게 뿜어냈다.
쉬르팽에게는 칼집이 없었으므로, 특제 붕대로 검대와 고정시켜서 등에 패검했다.
필두 극위성검으로 손꼽히는 그 위엄, 아라다만텔의 맑고 차가운 위엄과는 달리 무겁고 거대했다.
“아까 두 명째의 용사는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특수 전력이 새로이 충원된 게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든다.”
로베리스를 뒤따라 막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미 트발과 메른의 호령에 따라 기사단 주둔지는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종자들이 기사의 칼과 방패를 챙기고 시종들은 군마를 대령해오고 있었다.
“허웰. 블러드윈드를 데려와라.”
“예? 단장님, 그 블러드윈드 말입니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블러드윈드가 한 마리 더 늘었나 보지?”
“아닙니다. 데려오겠습니다.”
로베리스의 명령을 받은 시종 한 명이 붉은 갈기를 지닌 군마를 대령해왔다.
“블러드윈드란 말이다. 사나운 놈이지만 넌 용령을 가져서 알아서 성질 죽일 테니 걱정 마.”
“예.”
시종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주둥이를 놀리던 말은, 정말로 카이센의 손길이 닿자 잠잠해졌다.
혼에 깃들인 용의 존재감에 경외심을 갖게 되는 건 생물체의 본능인 것일까.
평생, 말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고 품종을 보는 눈도 없었으나 한눈에 명마(名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최고로 유명한 솔론디안 품종의 말이다. 페이쿼리어에게 알맞지. 아드리온 대륙이 멸망하면서 명맥이 거의 끊겼지만.”
다리는 시원하게 뻗었으며 갈기를 타고 흐르는 윤기는 바람결에 춤추는 억새밭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명마는 콧김을 조심스레 내뿜고는 복종의 의미로 머리를 비볐다.
로베리스가 친해지라는 의미로 건네준 사과를 내밀자 블러드윈드는 맛있게 먹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블러드윈드.”
“생각보다도 더 잘 따르는군. 나는 이 편지를 우체부에게 전달하고 와야 한다. 허웰, 안장이랑 마구까지 다 얹어줘. 원래 주인이 쓰던 걸로.”
“아, 예…….”
그때, 여기저기서 이곳으로 꽂히는 어딘가 불편하고도 당혹스러운 시선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의미를 알려준 건 예의 마녀였다. 철십자 용사 파티의 일원인 알리도나였다.
공화국에 비해 제국의 날씨가 서늘하단 이유로 정장의 노출도가 과격한 편이었다.
“당신이 채운 빈자리가 모두에게 내심 불편한 자리라서 그래. 로로가 그 말을 선뜻 내어주니 더더욱 그렇겠고.”
“……?”
“마가렛. 로로의 죽은 제자가 타던 말이거든. 근데 넌 제자는 아니라지만 포지션은 비슷할 테니 뭐, 금방 다들 익숙해지겠지.”
총력전의 서막,
적색산맥 공방 (2)
편서풍의 흐름에 따라, 대륙과 반도의 상공을 아울러 활공하는 땅이 있다.
그 이름, 부유성(浮游城).
필멸의 존재들은 성채라고 부르나, 이 땅은 돌의 나라가 아니라 나무의 나라였다.
그 나라의 중심을 차지한 호수에서, 세계수라는 큰 나무가 거룩한 형상으로 솟구쳐 있다.
그 줄기를 우아하게 휘감은 것은 옛 수룡의 육신, 푸르렀던 육신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계수에 동화되어 나무와 똑같은 재질과 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수의 줄기에, 순백(純白)이 기대앉아 있었다.
20년 가까이, 이 상태로 잠들어 있어서일까.
새하얀 살결에는 이끼가 덮이고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런 모습조차 거룩하게 보였다.
이 땅 위에는 다만 물과 나무와 순백뿐이었다. 고요하고 거룩한 정적이 깃드는 그 땅 위로 한 마리의 황룡이 내려앉았다.
사르르…….
새벽의 빛살이 수많은 입자로 흩어지듯, 그 용의 형체가 부서지며 광명을 쏟아냈다.
「미르.」
그 광명 속에서.
낡은 삿갓 아래로 태양의 금발을 아름답게 늘어뜨린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특이하게도 십자 무늬의 눈동자를 지닌 이 용인은 삼영룡 세츠넨, 별호는 뇌향(雷響)이었다.
「케르크누드로 분신을 보냈었다며?」
이 땅의 실체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슬플 정도로 절실히.
세계수와 호수를 청성의 백룡이 통째로 공중으로 띄워 올린 것이라는 진실을.
「이데아 반도에서 요정들도 지휘하고 있으면서 무리를 했구나.」
‘검은 여름’ 때문이었다.
그 전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심연에 깊은 자상을 입어서, 미른가디아는 세계수 곁이 아니고선 육신을 유지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방법을 택해 세계를 수호했다. 이러한 일념으로 세계를 지키려 했다.
육신이 땅에 고정된다면, 땅을 움직인다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분신을 더 멀리까지 내보낼 수 있게 되지 않는가.
「라미네아의 아들이라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던 거야?」
어떠한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흑요정 수종자가 말했다.
“관측하기 어려운 숫자의 대군이 적색산맥으로 접근 중입니다.”
흑요정.
예로부터 백룡 군단을 성심으로 떠받들어온 존재들.
바로 그 떠받듦이, 그들의 전통이자 역사였고 명예였다.
세계수의 땅이 하늘을 활공하는 이 시대에도 그들의 충절과 전통은 이어져오고 있었다.
“마족 중부 전선 침략군이 결집해 3개 방면으로 나뉘었습니다.”
본래 미른가디아는 세계수의 수면에 떠오르는 수백 개의 전황을 동시에 살필 수 있었다.
본래, 라면 말이다.
심연에 침식되어 죽어가는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흑요정 수종자들이 입으로 그 전황을 읊어 지각적 공백을 메워주고 있었다.
“누위긴 클랜과 트롤 부족이 좌익을 형성하여 평원 지대로 향합니다. 군소 마족까지 포함하여 그 숫자 50만이 넘는 대부대입니다.”
“제2방면군을 향하는 적 본대의 편성은 확인 불가능. 화산재가 너무 짙습니다.”
“네크론의 24만 병력이 독자적으로 동쪽 신화봉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까 세츠넨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마침내 돌아왔다. 청각이 아니라 시각으로.
[넨, 뇌향의 결계를 펼쳐.]호수가 잔잔하게 일렁이더니.
흔들리는 수면 위에서 수초들이 엮이며 이러한 문자열을 만들어낸 것이다.
미른가디아의 육신은 잠들어 있었으므로 성대를 울릴 수 없었다.
「응.」
세츠넨이 낡은 삿갓을 뒤로 젖히며 양손을 경건히 맞잡았다.
맑고 고결한 광휘가 퍼져 나간다.
그 맞잡은 손으로부터 천지로, 부유성 아래로 흘러 지나가던 적색산맥 전역으로.
뇌향심공명진(雷響心共鳴陣).
그 빛의 파장은, 선택된 사람의 육신에서 영혼의 실오라기를 끄집어내 하나로 묶었다.
그렇게 의식이 동기화된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세츠넨만이 펼쳐낼 수 있는 이적. 그 역량은 전장에 적용되는 폐쇄의 순리를 가뿐히 뛰어넘게 만들었다.
[도원수 멜빈, 연결됐습니다.] [아비노 제2보병연대, 부원수 로카트 연결되었습니다.] [철십자 기사단, 로베리스 연결되는 중입니다.]전장 각지에 개별적으로 흩어진 이들의 목소리가, 뇌향이 울듯 지직거리는 전음으로 전해져온다.
파편화된 정보의 집중.
수뇌부 지휘 명령의 즉각화.
이 빛의 힘으로, 세츠넨은 중부 전선의 치열했던 수라장 속에서 수많은 생명을 지켜내 왔다.
[나 청성의 미른가디아가 현시간부로 평원 지대 방어전의 총지휘권을 인계한다. 제1방면군은 도원수부터 시작해 제2작전 통제권을 지닌 지휘관까지 점호한다.]파편적인 전황의 정보들을 즉각 한곳으로 집중시켜 최종 판단으로 일시에 귀결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파편이 아니라 전체였고 전황은 작은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큰 전체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 힘의 사용법을 고안해낼 때, 미른가디아는 세츠넨에게 그렇게 설명했었다.
[제1보병여단…… 확인.] [철십자 기사단…… 확인.] [제22보병여단…… 확인.] [제36보병여단…… 확인.]……
……
[철성 중장병단…… 확인.] [제11기갑대대…… 확인.] [제4독립기갑중대…… 확인.]……
……
[제1포병여단…… 확인.] [제23포병여단…… 확인.] [제116포병연대…… 확인.] [제217독립포병대대…… 확인.]……
……
[제1전투비행단…… 확인.] [제3전투비행단…… 확인, 점호 끝.]군대는 전체일 때 강하다. 개별의 힘은 필요하되 전체와의 연대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이 전술적 발상에 의해.
통일성 없이 그저 뭉쳐서 작전을 수행했던 여러 망국, 소국, 원정군 부대들은 이렇게 하나의 군대로 재편되었다.
[제1방면군, 현재 시각 11시를 기점으로 평원 지대 방어전을 개시한다. 귀관들이 상대해야 할 적의 숫자는 50만, 모든 부대는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