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6)
가짜 용사 이야기-36화(36/310)
제36화
“오늘 너희들이 배워야 할 적은 바로 데몬이라는 존재들이다. 6대 마족의 최고봉에 위치해 있지.”
흩날리다 이마 위에 내려앉아 검댕으로 녹아내리는 화산재 속으로, 옛 기억이 포개졌다.
<위용검전>, 유황의 악취 대신 신들의 임재가 평화라는 이름으로 내려앉은 이론 교습실.
그곳에 앉아 라헬 듄 제라예에게 수업을 듣던 기억이.
“데몬의 정식 명칭은 마우나 로아. 왕들의 화신이라는 뜻이지. 이들이 처음으로 기원후 역사에 출현한 건 12세기, 첫 동란의 시대 때다.”
데몬은 절대적 악(惡)이라는 뜻이었는데, 첫 등장부터 두려움의 언어를 명칭으로 갖게 되었다.
데몬과 인류 사이에는 절대적 힘의 차이가 존재했으므로.
황금시대로 일컬어지는 태평성대 속에서 살아가던 인류는 데몬과의 첫 조우에서 패퇴일로를 겪었다.
“그 시대에 활약했던 게 바로 리스타 알터 쉬르팽이다. 화룡의 무녀 프리데, 궁성 키에스와 함께 대마법사 린의 희생을 딛고 동란을 평정했지.”
라헬은 거기까지 말하고 생도들을 바라보았는데, 카이센이 손을 들어 이렇게 질문했었다.
“교관님, 그런데 어째서 놈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는 겁니까?”
“완벽한 질문이다. 앞서 말했듯 데몬은 왕들의 화신, 왕들의 힘이 봉인 밖으로 빠져나와 독립적 형체를 갖춘 존재다. 왕을 토벌하지 않으면 계속 태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그렇기에 이 전투는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없다. 인류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재탄생의 주기는 본래 수백 년.
허나, 21년 전 ‘검은 여름’ 때 나타났던 도마뱀 군주의 데몬들이 또다시 나타났으니, 그 주기는 비현실적으로 빨라져가고 있었다.
이는 하나의 분명하고도 절망적인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다.
“바로 <잊혀진 왕들>이 깨어나고 있다는 거다.”
그 잔혹하도록 분명한 절망 앞에서, 이 아이들은 다만 칼을 들어 세계를 지켜내야만 했다.
“마우나 로아들에게도 우루크들과 마찬가지로 서열이 존재한다. 용족에 대입하면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용족은 그 힘과 권위에 의해 3개의 계위로 나뉜다.
세 마리의 신룡.
그 각 휘하의 다섯 진룡.
그리고 용 군단의 대다수를 이루는 비룡. 지금은 황룡 군단 말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지만.
“신룡급 존재, 즉 진짜 ‘왕의 화신’인 데몬을 각 군주마다 하나씩 거느리고 있다. 이를 화신급 데몬으로 부른다.”
‘왕의 화신’이 자신의 힘을 분열시켜서 세 마리의 고위 데몬을 부렸고, 고위 데몬들 또한 각기 세 마리씩 하급 데몬을 만들었다.
“여기서 중부 전선, 즉 도마뱀 군주의 군세와 인류 주력군과의 격전이 가장 치열하여 벌써 데몬 11기가 토벌되었다.”
라헬은 아까 나누어 주었던 유인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카이센은 그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 고위 데몬 토벌 :
ㆍ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 1기.
ㆍ샤론 알터 타스알포 1기.
– 하급 데몬 토벌 :
ㆍ로베리스 알터 쉬르팽 3기.
ㆍ엘티레 알터 플라디마르테 2기.
ㆍ고르고티아 알터 지에르다 2기.
ㆍ아레시아 알터 솔랑&류넬 알터 가우므리스 1기.
그리고 카이센이 이 <위용검전>의 수업을 듣는 동안 로베리스의 철십자가 고위 데몬을 하나 더 토벌했다.
“이제 하급 데몬 1기만 남았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가장 강력한 마우나 로아도 남아 있으니.”
생도들 사이에 흐르던 적막의 무게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리고 그런 망설임과 두려움의 적막을 꿰뚫듯이 울려 퍼지던 운명의 이정표를.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희들의 몫이 될 거다.”
총력전의 서막,
적색산맥 공방 (4)
촤르르르륵!
극위성검 베룸페이라가 날아다니며 마족의 몸을 찢고 힘줄을 끊고 살점을 도륙 냈다.
“페이쿼리어, 저기 한 놈이 또 옵니다!”
오필리아 알터 베룸페이라는 그 즉시 허공에서 뱀처럼 꾸물거리는 칼의 궤도를 바꾸었다.
화산재를 폭풍처럼 몰고 오는 정체불명의 적에게…….
하지만 감각이 이상했다. 등줄기에 원초적 소름이 내달릴 정도로 기괴했다.
‘극위성검은 강철조차 고깃점처럼 저미는데?’
그 깨달음이 뇌리에 닿은 순간.
화산재에 뒤덮여, 부유성에서 적의 정보를 확인하지 못한 일순간.
화산재 속에서 솟구친 무언가가 신참 페이쿼리어의 몸을 짓이겨서 핏덩이로 만들었다.
그 나이, 이제 열여섯 살이었다.
제2방면군은 산맥의 중심, 대륙을 가로지르는 산세의 중앙을 지키는 부대였다.
산세가 가장 험악하였으므로, 포진한 군세의 크기가 가장 작았고 배치된 페이쿼리어도 한 명뿐.
뱀그림자 병단을 이끄는 오필리아 알터 베룸페이라.
올해 새로이 임관한 신참 페이쿼리어였다.
제1방면군과 제3방면군을 각각 필두와 차석 페이쿼리어가 지키는 것과 비교하면 그 지리적 이점이 어떠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뱀그림자 병단…… 전멸했습니다.”
“데몬이 석축 내부 결계를 돌파했습니다! 제2방면군은 방어선이 붕괴돼 패퇴 중!”
“지고하신 청성이시여, 제1방면군과 제3방면군을 즉시 투입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산맥 방어선이 돌파됩니다!”
흑요정들은 절망의 소식을 화급한 어조로 강조해가며 외쳤다.
그때, 청성의 미른가디아의 몸은 단지 고요해서 그 위에서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머릿속에서는 현실로 들이닥친 미래에 대한 통찰과 판단과 애도가 소용돌이쳤다.
‘오필리아 알터 베룸페이라가 마우나 로아에게 죽는 미래는 100개 중 27개뿐이었건만…… 날 용서하지 마라, 오필리아.’
뇌향의 세츠넨은 양손을 합장한 채 동생의 침묵을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마침내 침묵이 끝났다.
[제1방면군과 제3방면군을 전열을 갖추지 않은 채 데몬과 직면하게 할 수는 없다. 다급한 판단은 파멸을 낳는다. 마법포대(魔法砲隊)에 융단폭격 좌표를 보내라.]「미르……?」
마법포대는 미른가디아가 고안한 대마족 전투 교리의 힘의 핵심부였다.
전장을 활보하며 고위 마법이나 주술을 난사할 수 있는 마법사와 마녀는 지극히 드물었다.
전장의 피비린내 속에서 마법을 연산하거나 주술을 영창하기 위해서는 이하의 자질이 요구되었으므로.
하나, 적재적소에 알맞은 마법/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 수학적/술법적 이해.
둘, 전장의 폭풍 속에서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신체적 역량.
셋, 죽음에 죽음이 덧대어지는 전장의 공포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정신력.
이 모든 소양을 갖춘 존재들은 대개 대마법사나 무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제국의 17대 대마법사 자발 루드윅과 18대 대마법사 요한 울프 프로스트는 제국의 종교 혁신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른가디아가 내놓은 해답이 바로, 마법포대였다.
‘술사들은 항상 적의 최우선 표적이 된다…….’
‘그렇다면 술사들을 전장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혼자서 고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여러 명이 힘을 합치면 될 것이다…….’
미른가디아가 제작한 마법포대의 방진 위에 열다섯 명의 특무 마법사가 대기 중이었다.
방진은 다섯 겹 포개져 있었다.
용언으로 증폭시킨 이 방진 위에서 시전되는 마법은 그 위력이 정확히 17배 강화된다.
제국의 7성 마법 체계 중에서, 아퀴자드(5성, 대마법사)들이 다루는 최고위 마법을 사용하기에 알맞은 자리였다.
이것이 미른가디아의 해답, 저 힘의 폭발력은 일대 전체를 날려버린다.
「하지만 아직 저곳에 남은 이들은? 다 휩쓸려서 죽게 될 거야!」
세츠넨이 황망히 변호했다.
죽어가는 이들과 아직 죽지 않은 이들과 덜 죽은 이들의 생명을.
[대의 앞에서 모든 죽음은 충(忠)에 닿을지니. 좌표 47.32167. 뇌장방혈이다. 7발 모두 동일 좌표에 내리도록.]미른가디아는 그 말을 명령으로 얼버무렸다.
오직 수많은 죽음과.
단지 무수한 선혈과.
다만 끝없는 눈물만으로 지탱되어 가는 이 가엾은 세계에서, 누군가는 그 죽음과 피와 눈물이 있을 자리를 정해 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자신이었다.
항상, 자신이었다.
미른가디아는 누이들 대신 자신이 그 가혹한 역할을 맡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이들의 여리고 가녀린 성정으로는 이런 일을 감당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
세츠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생이 에두르는 말에 깃든 뜻을 짐작했다.
몸속에서 들끓는 말을 내뱉는 대신, 그녀 또한 에두르는 대답으로 진심을 전했다.
「……아버지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걸, 분명.」
그러자 휴면 상태에 있는 미른가디아의 몸이 흠칫 흔들렸다.
삼영룡들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영혼에 남겨진 빛의 자취였다. 행복의 온기였다.
그 머리 양쪽에서 나뭇가지처럼 돋아난 뿔에 앉아 있던 뱁새가 화들짝 놀라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런 결정을 기뻐하시지도 않으실 거야.」
세츠넨이 합장 자세를 풀고, 용의 형상을 입는 동시에 부유성을 떠나 하계로 날아갔다.
[넨…….]하나로 결집되었던 빛의 가닥이 쏟아지며 흩어졌다.
산맥 전역을 치열하고도 순순하게 하나로 잇던 뇌향의 힘이 사라졌다.
그러나 통신선이 끊어지기 전에 좌표는 마법포대에 정확하게 전달된 바 있었다.
“과장님, 폭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마방진의 형태는 오각형.
여덟 가지 속성 중에서 준수한 살상력과 제일 빠른 속도를 가진 뇌전 계열 마법의 방진이다.
“그래, 나도 들었네.”
분대장이 중심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열네 명의 분대원이 둘씩 짝을 지어 4개의 외곽원에 가부좌를 틀었다.
마법사들이 일제히 수인(手印)을 맺기 시작하자, 마방진에서 전류가 튀기 시작했다.
파직, 파직, 파지직…….
마방진에 그려진 온갖 룬과 수학식이 찬란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최종적 수학 계산을 마치던 분대장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졌다.
이 마법의 창시자, 대마법사 린은 혼자서 이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고 하건만…….
“청성이시여! 현재 뇌향께서 전장에 내려가 계십니다. 포대에 폭격 유보 명령을!”
[상관없다. 쏴라.]“하오나……!”
[쏴라. 뇌향은 황룡, 벼락의 생명체다. 인간이 빚어낸 벼락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이윽고 마지막 수인이 맺어졌다.
마방진의 빛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황금의 꼬리를 길게 끌며 가파르게 승천했다.
다음 순간, 화산재가 집어삼킨 하늘을 찢는 빛들이 있었다. 벼락들이 어둠을 태우며 급강하했다.
‘미르…….’
그때 세츠넨은, 앞이 보이지 않는 화산재의 폭풍 속을 활공하고 있었다.
세츠넨의 눈이 닿는 곳마다, 총 쥔 병사들이 화산재에 뒤덮여 죽고 철퇴를 맞아 죽고 도끼날에 갈라져 죽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과, 이미 죽어서 죽처럼 녹아내리는 이들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그 빛은 그들의 육신을 땅의 속박에서 끊어내 다른 땅으로 옮겨냈다.
거기까지였다.
일곱 발의 낙뢰가 산봉우리에 내리꽂혔다.
눈이 타들어갈 듯한 섬광.
두개골이 쪼개질 듯 뒤흔들리는 굉음.
쾅………!
……콰앙……!
…………쾅……!
…………………콰앙……!
…쾅…………!
산봉우리가 지반째로 박살 났다.
빛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면서 산길을 허물고 절벽으로 깎았다.
그 무차별적 힘은 데몬에게 유의미한 타격으로 작용하진 못했으나, 애초에 지반을 붕괴시켜 그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목표였다.
“타격 성공! 데몬, 산비탈 아래로 떨어집니다!”
흑요정의 말은 다급했으나, 말 끝난 자리에는 안도의 숨이 배어나 있었다.
호수에 비치는 상에서 데몬의 윤곽은 사라졌다. 그러나 화산재의 소용돌이는 여전했다.
전투는 이제 시작이었다.
[잠시 걷어냈을 뿐이다.]이 세계의 현실은 늘 이토록 분명하고 단단했다. 희망이 헛되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결계를 재구축하고 제2전투비행단의 그리핀 기수들을 소집해라. 구두로 명령을 하달하겠다.]* * *
그때, 제3방면군이 담당하는 동부 산악과 제1방면군이 맡은 평원 지대에서도 전선 붕괴의 징조는 분명히 보였다.
화산재, 산맥 중심부를 새까맣게 뒤덮은 악몽…….
통신 두절…….
일곱 발의 낙뢰, 산맥 지세 붕괴…….
일련의 혼란들은 심상치 않은 상황을 암시하고도 남았다.
산맥 저 너머, 전황은 자세히 보이지 않으나 새까맣게 솟구치는 연기만큼은 선명했으므로.
트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뇌향심공명진의 통신도 끊겼어. 부유성에 적이 침입한 거 아냐?”
“그런 것 같지는 않아. 하늘을 봐, 부유성은 멀쩡하잖아.”
알리도나가 곰방대로 하늘을 가리키던 그때, 그리핀이 날개를 펼치며 다급히 낙하해왔다.
“제2방면군 패퇴! 폭염 특보 발령! 제1방면군은 부대별로 집결하여 제118고지로 향하라는 명령입니다! 철성 병단 및 13개 연대는 이곳에 남습니다!”
기수의 목소리는 심히 다급했다.
그 얼굴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었다.
트발과 메른은 귀를 의심했다.
“제2방면군이 패퇴……?”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거긴 뱀그림자 병단이 지키고 있었잖아! 간단히 뚫릴 리가.”
“데몬입니다! 화신급 데몬 출현!”
승리의 환성이 적막 속으로 가라앉았다.
적막의 기저에서 술렁거리는 절망의 꿈틀거림을 로베리스는 읽을 수 있었다.
그 적막의 바닥에서 폭발할 수 있는 불온한 사기 저하의 물결이 두려웠다.
“데몬이라니, 무슨 데몬? 다른 군주가 깨어나기라도 한 건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청성께서는 마우나 로아라고…… 예전의 그놈이 다시 깨어난 것이…….”
“마우나 로아? 마우나 로아라고?”
메른이 고함치듯 되물었다.
그러나 기수는 화산재의 열기 속에서 숨이 막혔는지 거품을 물며 눈이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무리하지 마라. 알리도나, 이 그리핀의 응급치료를 해줘.”
“심연이 너무 깊이 스몄어…… 네이갈라스의 심연은 용암처럼 체내를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데.”
“데몬이 다시 나타난 게 놀라운 일입니까? 저번처럼 또 저희들이 박살 내버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트발이 용골창을 으쓱이며 묻자, 메른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난해? 화신급 마우나 로아는 ‘검은 여름’ 때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께서 토벌한 놈이라고. 그게 살아 돌아왔단 소리야.”
“그 전에는 리스타 알터 쉬르팽이 해치웠었지. 또 나타났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단장, 그렇지만 그 주기가 이상합니다. 어떻게 20년 만에…….”
“그만해라, 메른. 넌 말을 타고 다니며 가까운 부대에 최대한 빨리 해당 명령을 전파해라.”
“네.”
블러드윈드의 등에 죽은 듯 매달려 있는 카이센은 이 소식이 뜻하는 바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젠장, 힘의 반동 때문에…….’
신룡과 진룡의 힘의 무늬가 몸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해서, 용령의 힘을 쓴 다음에는 언제나 이랬다.
체내가 탈 듯이 뜨겁고.
체외는 부서질 듯이 차갑다.
이때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혈관이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제2방면군이 패퇴라면, 뱀그림자 병단이 궤멸되었다면…….’
블러드윈드의 말고삐를 쥐고 있던 세이라 알터 솔랑이, 그 생각에 두려운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제2방면군이 궤멸이라면 오필리아도 죽었겠구나. 베룸페이라는 그대로 소실된 걸까.”
<위용검전> 수료 동기의 죽음을 말하는 세이라의 어투는 사무적이기까지 했다.
악감정이 있어서라거나, 인연이 얕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이랬다.
죽음이 지천에 쓰레기처럼 널려 있어서, 대부분의 죽음이 특별하게 여겨지지 못했다.
아, 얼마나 좋을까…….
하나의 죽음이 더없이 소중하고 진중하게 여겨지는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 나, 나 때문이에요. 내가 산나물을 캐러 갔다가, 메, 멧돼지가 나와서, 날 지키다가 그만…….
어린 날, 마당에서 기르던 샘이라는 이름의 사냥개가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하고 사람을 정말 잘 따르고 혀를 길게 내밀고 맑게 울던 녀석이었다.
샘은 누이를 지키기 위해 멧돼지와 싸우다 죽이고 죽었다.
넝마가 된 주검을 아버지가 묻어줄 때, 그 앞에서 누이와 끌어안고 밤새 울었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그렇게 울 수가 없었다.
– 라텔, 네 탓이 아니야. 응, 네 탓이 아니야. 누구의 탓도 아니란다.
죽음을 대신 묻어주던 아버지도 없고, 눈물을 대신 닦아주던 어머니도 없고 같이 울 누이도 없는, 이 고독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이제 그런 세계는 그저, 동화 속 망상처럼 느껴질 뿐이다.
로베리스가 세이라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광경만이 현실이었다.
“세이라, 너는 네 병단을 수습해서 평원 지대에 방어선을 새로이 구축해라. 서둘러. 지금부터는 너 혼자 지켜내야 한다.”
“네, 선배님. 무운을 빕니다.”
세이라가 특유의 입꼬리만을 움직이는 미소와 함께 카이센의 머리를 톡 쳤다.
갈래를 지어 길게 땋아 내린 머리칼은 핏물과 살점으로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세이라는 그것을 전리품이라 말했다. 치열한 수라장을 뚫고 나와 살아남았다는 전리품.
“그럼 가볼게. 미인 동기한테 간호받을 기회를 놓쳤다고 너무 슬퍼하진 마. 또 기회가 있겠지.”
카이센은 그 말장난을 들을 여유조차 없었다.
제2방면군이 이렇게 쉽게 궤멸되었다면, 제3방면군도 위험에 노출되었을 것이고…….
제3방면군은 고르고티아 선배님과 이슬라가 있는데…….
그러면 이슬라는 지금…… 애처럼 삶은 계란을 입에 잔뜩 밀어 넣던 그 녀석은…….
로베리스가 그 식은땀 흐르는 망상을 강제로 중단시켰다.
“지금은 몸을 추스르는 데 전념해라. 쓸데없는 걱정으로 잡념을 품지 말고.”
“……선배님.”
“지금 총지휘관이 누구냐? 청성 각하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결단을 내리시는 분이지. 이미 최선의 조치가 취해졌을 거다.”
“……!”
“그분의 판단은 항상 옳았어. 수많은 승전이 그걸 뒷받침하지. 그러니까 너도 생각해. 지금 네가 우선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계속 이렇게 짐짝으로 있을 셈은 아니겠지?”
문득, 그 절망의 바닷가에 비쳐들던 순백의 빛이 떠올랐다.
세계의 어둠과 마음의 어둠을 모조리 걷어내던 그 빛은 거룩하고도 순결하게 보였다.
용현 레인 루드윅이 이 땅에 남긴 빛은 지금도 인류를 앞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우선해야 할 일은…….’
카이센은 주저하고 주저하다 결국 의식의 끈을 놓아주었다.
힘을…….
힘을 회복해야 한다, 서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