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39)
가짜 용사 이야기-39화(39/310)
제39화
기원력 1697년 10월.
인류 연합군은 적색산맥 총력전에서 마우나 로아를 봉인하고 마족의 침공을 격파.
마우나 로아를 중심으로 결집했던 마족의 공세는 섬멸적 타격을 입고 흩어졌다.
이때,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은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을 뒤이어 마우나 로아 토벌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도마뱀 군주의 마우나 로아였다.
그날의 승리는 마족 공세의 예봉을 확실하게 꺾은 쾌거였으나, 인류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저러한 전설적 전공에 취할 수 없을 정도로.
제2방면군은 5할의 사상자를 내며 반파.
제1방면군과 제3방면군은 각각 총병력의 3할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면서 겨우 전선을 유지.
마우나 로아에 휩쓸린 산맥 방어 체계가 그 설비를 잃고 붕괴.
그것이, 카이센이 의식을 되찾고 나서 들은 전과의 일각이었다.
“하! 일단은 인정해주지! 그놈의 콧대를 그렇게 거만하게 세우는 이유를 말이다. 물론 아주 요만큼만 인정한 거지만!”
그리고 이건, 트발이 가슴팍을 검지로 내리누르며 건넨 말이었다.
수습해야 하고 걷어내야 할 사체가 무더기였으므로, 축배를 들 시간도 쉴 시간도 없었다.
제1방면군 전체가 투입되고 있었고 카이센도 깨어나자마자 그 노역에 동참했다.
그때 만난 트발이 저렇게 떠벌리고는 용골창을 어깨에 짊어진 채 저 멀리 걸어간 것이다.
“놀라지 마. 트발이 저 정도면 엄청나게 극찬한 거니까. 둘이 좋은 콤비가 될지도 모르겠는걸.”
메른이 그렇게 말했다.
철십자 기사단 단원들이 트발을 바라보며 히죽거리며 서로에게 금화를 튕기고 있었다.
“대단하셨습니다, 아까 그 일격.”
“하이 쿤 타르크를 일격에 날려버린 것도 모자라 데몬을 상대로 그런 승부를! 그런 건 난생처음 봤습니다!”
“몸이 다 떨려 왔다고요! 이제는 우루크 슬레이어 따위가 아니라 데몬 슬레이어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러한 이야기 속으로.
싸움이 끝나고 쓰레기들로 뒤덮인 땅 위에서 피어나는 맥 빠진 미소들 속으로, 카이센은 스며들 수 없었다.
그것이 옛 동료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까.
“승리의 주역인 거치고는 너무 조용한 거 아니야?”
그때 어디선가 찾아온 백발의 미인이 입꼬리만을 움직이는 미소와 함께 물었다.
세이라 알터 솔랑.
<위용검전>의 동기 페이쿼리어로 웃고 있는 건 표정뿐이었다.
“데몬을 상대로 아주 난리법석을 피웠다며? 여기까지도 소문이 자자해.”
“나 혼자 한 게 아니야.”
“그래? 만약 이슬라였더라면 다 자기 공적이라며 동네방네 뛰어다녔을걸. 아우, 귀여웠겠다.”
정말 그랬을 것 같았다.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게 이슬라의 매력이지.”
“어머, 이 아저씨 좀 봐. 이슬라한테 그런 마음이 있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페이쿼리어에게는 연애도 결혼도 허가되지 않는데.”
“이 아저씨, 마음이 있냐고만 물었더니 대체 진도를 어디까지 빼는 거래? 이거 벌써 머릿속으로는 손주들까지 봤겠는걸?”
“안 봤어.”
“솔직히 말해봐.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할 테니까. 자식은 몇 명까지 생각했어?”
“생각 안 했어.”
“기왕 낳는 거 군단 하나를 만드는 건 어때? 너희 둘의 힘으로 용 군단을 재건하는 거야. 이른바 이슬라 주니어 군단! 이슬라를 빼닮은 아이들이 수천 명?!”
이슬라가 수천 명……?
그건 너무 끔찍할 것 같았다.
매일같이 고막에서 피가 흘러내릴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식량 부족 현상이 생기지는 않을지?
“이거 못 막아. 너무 귀여워서 <잊혀진 왕들>조차도 깨어나자마자 죽을걸. 사인은 심쿵사.”
“그만해. 장난칠 기분 아니니까. 페이쿼리어는 비혼인 거 잊었어?”
그렇게 말하자 문득 아버지와 어머니의 미소가 뇌리를 스치며 가슴의 구멍을 꿰찔렀다.
고개를 급히 흔들어야만 했다.
그 기억, 마음에 칼날로 꽂히는 그 아픔을 몰아내야만 했다.
“그래서 이슬라는 어떤데. 전투 끝나고 만나봤어? 무사하고?”
화제를 돌리자 세이라가 아쉽다는 듯 입꼬리를 비죽였다.
“너무 건강해서 탈이던데. 자기가 활약해야 하는 걸 네가 빼앗아서 화도 내던걸.”
“녀석답네.”
“그렇지. 오필리아도 남모르게 너한테 경쟁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걘 결국 먼저 가버렸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이라가 어깨 너머로 정중히 경례를 올리고는 자리를 피했다.
로베리스가 오고 있었다.
세이라의 뒷모습과 카이센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본 로베리스가 물었다.
“두렵나?”
“무슨 말씀이신지?”
“남들과 인연을 만드는 걸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거든.”
“…….”
“카이센, 동기들을 소중하게 여겨라. 네 숙명에서 유일한 동반자들이자 이해자들이니까.”
“그렇습니까?”
“카밀라 선배님께서도 ‘검은 여름’이 끝나고 난 뒤 많이 어두워지셨지만, 그래도 샤론 선배님과는 항상 친하게 지냈다.”
로베리스의 통찰은 예리한 칼날이었다.
어린 날에 소년의 심장에 뚫린, 그리고 유년기의 끝에서 감당할 수 없는 넓이로 확장되어 버린.
영혼 한복판의 구멍을 찌르는 칼날이었다.
“제 어머니는 절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백골 병단도 같은 결말을 맞았죠.”
“…….”
“이제 누군가와 친목을 다진다는 게 두렵기만 합니다. 그 끝이 고통뿐인 걸 아니까요.”
로베리스는 평복 차림이었다.
종자와 시종들이 그 휘황찬란한 장미 판금 갑주를 모두 벗겨준 덕분이었다.
로베리스가 품에서 일기장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건 내 일기다. 내 삶을 기록하는 거야.”
“……?”
“예전에 내 제자가 죽을 때, 그 작은 입으로 그 짧은 순간 동안 뭘 그리 말하고 싶었던지, 나에게 계속 고통스레 뭔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끝내 죽더군.”
지천에 널린 삶의 쓰레기들을 돌아보는 로베리스의 눈동자에 고요한 슬픔이 깃들었다.
“나에게는 막둥이 동생이 있다. 너보다 두세 살 아래다. 올해 열여섯 살이니까. 여하튼 그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적어두는 거야.”
동생…….
먼 기억, 늘 동생이랍시고 자신을 골리던 누이 라텔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라텔도 그날 죽었겠지. 폐허로 변한 마을에서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
“내가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나에 대해 더 알면 알수록, 내가 죽은 뒤에 동생이 더 고통스러워할 텐데 말이지? 그런 표정이군. 부정하지 마라.”
카밀라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느 누구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늘 카이센을 퉁명스럽게 밀어내려고 했던 것 같지만…….
“카이센, 난 그렇게 생각한다. 용사가 된 이상, 그게 설령 가짜라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로베리스가 어디를 내다보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로베리스의 어법에는 학자의 지성을 품은 자만이 거느릴 수 있는 이지적 분위기가 있었다.
늘 책을 읽고 또 늘 글을 쓰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이 일기로 내가 겪은 절망의 크기를 전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그 절망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말하고 싶다. 그게 이 아이에게 희망이 되고 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
“나는 가짜 용사야. 모든 이들의 용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동생에게만은 그런 용사가 되고 싶다.”
그렇게 말할 때, 로베리스의 입가는 맑게 웃고 있었다.
“카밀라 선배님께서 네게 설명하시지 않았나? 그분이라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했겠지만.”
로베리스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대화라기보다는 선배로서의 조언이라고 해두자. 어쩌면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일 수도 있었다.
그 짧은 대화의 끝자락에서, 문득 샤론 알터 타스알포가 한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렴. 진정한 용사란 무엇인지에 대해.
그러한 생각의 흐름은, 망연히 스승의 마지막 발자취에 닿았다.
설령, 가짜라 하더라도…….
용사이기에…….
그날, 그 순간, 모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당신께서는 항상…….
그러한 행동들로써 나에게 용사란 무엇인지 가르침을 주려고 하셨던 건 아닐는지…….
산맥의 황혼 속으로 투명하게 새어 나온 이슬 하나를 서둘러 눈가에서 감추어야 했다.
세 번째 연(緣),
뇌향, 청성, 철십자 (1)
잔당 소탕이 끝난 사흘 뒤에는 영결식이 진행되었다.
죽어간 모든 이들은 이제는 하나의 죽음으로 하나의 비석 위에 승리의 포석으로 새겨졌다.
청성의 미른가디아가 그 영결식을 이끌었으며, 장려한 수사로 모든 죽음을 애도했다.
“카이센은?”
철십자 기사단을 이끌고 영결식에 참석했던 로베리스가 주위를 흘끗 돌아보곤 말했다.
“안 왔습니다.”
“어디 갔지?”
“어디서 검술 훈련이나 하고 있겠죠. 데려올까요?”
이런 곳에 참석하면 옛 기억이 떠오르고 마는 것일까.
백골 병단이 궤멸할 때의…….
로베리스가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됐다.”
그때, 카이센은 메른의 말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왼손으로는 어머니의 칼을, 오른손으로는 아라다만텔을 휘두르고 있는 이 순간이 좋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어떤 기억에도 고통받지 않고.
가슴에 뚫린 구멍조차 잊은 채.
순수하게 어머니와 카밀라를 추억할 수 있었으므로.
기억 속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자세를 잡을 때 어머니의 자세가 그 위로 포개졌다.
그리고, 그렇게 잡았던 자세의 허점과 결점을 짚어주던 카밀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 그게 아니라니까, 이 멍청아!
감각을…….
마우나 로아를 토벌할 때의 그 감각을 몸에 확실히 익혀야 해…….
– 자, 이렇게 잡아봐. 그래, 그렇게!
그때, 납도와 발도 사이에서 허점이 크게 열렸었다.
왕들의 화신, 마우나 로아는 그 허점을 완벽하게 간파하고 집요하게 파고들어 왔다.
철십자 용사 파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진작 죽었을 것이었다.
‘모자라, 아직 많이 모자라…….’
신룡과 진룡의 힘을 받았으면서 언제까지고 이렇게 무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용령의 사용법, 단 3분 정도밖에 허가되지 않은, 신의 힘…….’
오직 그 3분 동안만.
용령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는 방법을 수련할 수 있었다.
3분 이후 강제적으로 휴식 시간이 주어졌으므로, 이론적으로 하루에 가능한 훈련 횟수는 고작 두 번뿐이었다.
‘이것이 나의 추도식이다…….’
수많은 죽음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일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철조차 들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 깨달은 대로, 이 세상의 죽음에는 등가교환이란 게 없었으니까.
원수의 칼로 제단을 쌓고.
원수의 피로 제단을 축성하고.
원수의 시취(尸臭)로 향불을 올리는 것.
「그것이, 칼을 찬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추도식이라고? 벌써부터 슬픈 길을 가려 하는구나.」
불현듯 찬란한 햇살이.
황금의 바람이 몸을 따스하게 간지럽히며 찾아든 기분이었다.
“당신은…….”
용현 레인 루드윅의 유품, 낡은 삿갓 아래로 우아하게 굽이쳐 흐르는 금발.
뇌향의 세츠넨…….
곧바로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려는데, 그 존재가 몸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잠시 따라오너라.」
세츠넨이 양손을 맞잡자, 허공에 빛의 신기루가 생겨났다.
차원의 장막이었다.
세츠넨이 눈웃음을 짓고는 그 장막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다 발을 옮기니, 분명 산성에 있었던 몸이 하늘 위의 성채에 내려앉았다.
‘차원 이동…….’
부유성 남쪽 끄트머리였는데, 그 아래로 세계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넓이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지난 전투에서 죽었던 모든 이들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가 솟아올라 있었다.
바로 그 위령비에서,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아닌 미색을 품은 뇌향의 용이 카이센을 맞았다.
세츠넨은 늘 위령비를 세워 죽어갔던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며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그들의 혼이, 빛 가운데에서는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오랜만이구나, 카이센. 네 길에 항상 빛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했단다.」
위령비 앞에서 양손을 맞잡고 기도하던 세츠넨이 낡은 삿갓을 뒤로 젖히며 카이센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찌 된 연유인가…….
상공의 찬 바람만이 맴도는 곳이건만, 햇살이 볼을 따스하게 어루만진 것만 같은 이유는.
「내가 기억나지 않느냐?」
기억이라니…….
질문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곧게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리스타포> 패퇴전 때 세츠넨은 옛 귀족을 상대로 피난민 백만 명을 구해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는 수많은 병사들을 구하고 카이센의 생명도 구해냈다.
「네가 라미네아의 혈육인 건 처음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불현듯, 세츠넨의 말과 생각이 뇌리에 직접적으로 전해져 들어왔다.
이는 세츠넨을 대표하는 이적. 뇌향이라는 뜻에 걸맞은 힘. 의식 공명(意識-共鳴).
세츠넨은 자신보다 격이 같거나 떨어지는 존재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또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
「아, 이렇게나 장성한 네 모습을 라미네아가 보았더라면 참으로 기뻐했을 텐데.」
“정말 그러셨을까요?”
「내 그 아이를 잘 안다. 젖먹이 시절부터 보았느니라.」
마음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평생,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고 또 외면할 수도 없는 구멍이.
그런데 어째서일까, 세츠넨의 그 목소리를 들었던 일순간…….
“……칼의 길에 들어오신 걸 보고서 슬퍼하셨을 겁니다.”
잠시나마.
정말 잠시 동안이지만.
그 구멍 속으로 햇살이 따스하게 비쳐드는 것만 같았던 건…….
「그래, 그 아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세츠넨을 만난 사람은 모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숭배에 가까운 심정으로 따르는 이도 있었다.
그 찬연한 미색 때문이 아니라, 지극한 자애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돌봐 주었기에.
태양처럼 순수한 충만함으로, 상대로 하여금 행복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므로.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줘서 그 자조를 꺾고 싶으나, 그건 나중에 직접 보는 게 더 좋겠구나.」
십자 무늬의 눈동자에는 개구쟁이 같은 장난기와 어머니 같은 상냥함이 공존했다.
“직접이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세츠넨의 시선이 카이센을 사랑스럽게 훑더니, 그 입가에 진솔한 미소가 걸렸다.
「후일에 직접 보아라. 이 이상은 말해주고 싶지 않구나.」
세츠넨의 시선은 다시, 저 먼 땅끝으로 향했다.
산맥이 닿지 않는 땅은 화산재로 새까맣게 덮여 있어서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았다.
적색산맥 너머로는 다만 화산재와 모래와 죽음뿐이었다.
그것은 세계의 운명처럼 보였다. 이 산맥을 수호하지 못한다면, 모든 세계에 닥치게 될 운명.
「동란의 시대마다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영웅이 나타났다. 자신을 죽이고 세상을 살리는 숙명을 타고난 이들이지. 그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창세의 섭리인지…….」
“…….”
「600년 전에는 리스타 알터 쉬르팽이 있었고, 270년 전에는 용현 레인 루드윅이, 150년 전에는 공허의 사도 아르젠이, 그리고 20년 전에는 라미네아가 있었다.」
슬픔의 장송곡을 노래하는 음색으로 중얼거리던 세츠넨의 시선이 다시 카이센에게로 돌아왔다.
그 돌아온 시선이 운명의 칼날과도 같았을까, 등허리에 매달린 아라다만텔이 구슬프게 울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느냐, 라미네아가 사랑으로 낳고 그 제자 카밀라가 직접 택하고 기른 기적의 아이야?」
“……모르겠습니다.”
「이제, 네가 그들이 갔던 길을 걸을 차례가 온 것 같구나.」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걸 아느냐?
네가 가야 할 운명의 험로가, 네 어미조차도 포기했던 삶의 무게가 더없이 잔혹해서, 그런데도 나로서는 그 짐을 덜어줄 수가 없어서, 마음이 아프구나…….
세츠넨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가겠습니다.”
그 말의 메아리가 사그라지기도 전에, 카이센이 시선을 내리깔며 그렇게 대답했으므로.
바로 그 길 위에, 불타 무너진 고향이 있을 테니까.
그 길 위에, 어머니의 시체 위에 심은 도토리나무가 있을 테니까.
그 생각 위로, 카밀라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겹쳐보면서.
“그 길이 그렇게나 고통스럽다면, 제가 가는 게 나을 테니까요.”
이제 나에게는.
잃어버릴 만한 삶의 보물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 보물이 있는 사람 대신, 아무것도 없는 내가 가는 게 나을 것이라고…….
「아…….」
그 마음이.
저 나이에 저러한 마음이 이루어지도록 만든 날들이 너무나도 슬프고 또 애달픈 것이었기에.
그 마음을 읽은 세츠넨은 카이센을 품에 끌어안고 어깨를 떨면서 울었다.
울 수 없는 소년 대신 울어주는 그 눈물은 하염없었다.
아느냐…… 네 어미는 어려서부터 도라지꽃을 좋아했다…….
네가 태어난 해, 내가 그곳에 갔을 때 너를 품에 안고 어찌나 맑게 웃던지…….
네 어미가 어린 날에 어떤 아이였는지, 그 많고 많은 날들을 모두 이야기해 주고 싶지만…….
그게 오히려 네 마음을 더 아프게 하여, 네가 끝내 부서지고 말까 봐 두렵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