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40)
가짜 용사 이야기-40화(40/310)
제40화
성년이 되기 전까지, 사람은 총 3개의 인연을 거친다고 한다.
그 인연은 하나의 운명과도 같아서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반드시 거쳐가게 된다고 했다.
그 격언은 전장에서의 삶에도 적용되는지, 세 번째 인연은 갑작스럽게 인생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올, 주인공 등장이시네.”
그 순간은 뇌향과의 만남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왔을 때였다. 알리도나가 시작을 끊었다.
“자, 다들 주목! 지금부터 우리 막내가 자기소개를 한대.”
그러자 철십자 기사단원들이 제멋대로 갈채를 보내거나 휘파람을 보내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저희가 내기를 좀 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페이쿼리어?”
“……?”
“페이쿼리어가 되시기 전에 제국 귀족이셨을 거란 데에 금화 두 닢이나 걸었습니다. 당신한테는 뭔가 그런 분위기가 있거든요!”
“……?”
“재실 것 없어요. 철십자 대부분이 귀족가의 서출이니까. 저도 그렇죠. 정통 귀족은 단장님이나 메른을 비롯해서 소수파입니다.”
뭔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제국 귀족들로만 이루어진 기사단이라기에, 다른 병단들과는 달리 딱딱하고 고풍스러울 줄 알았는데…….
아니, 확실히 체계가 있긴 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기도를 드리는 것과 외모를 관리하며 개인적 청결을 챙기는 등.
그리고 이렇게 식탁 위에 정갈하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것까지. 하지만 차이점은 여기까지였다.
서로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모습은 떠올리게 하고 만다…….
옛 백골 병단의 그림자를.
그 많고 많은 날들의 온기들을.
소리와 냄새와 촉각들을.
백골 병단이 전멸한 이후, 이런 분위기와 마주할 때면 마음이 지극히 혼란스러워.
세계가 울렁거리는 것 같아.
시야가 흐느적거리며 뒤틀려.
현기증을 느끼며 합석을 사양하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알리도나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막내, 전입되자마자 바로 전투가 시작돼서 소개할 시간이 없었는데 안면 트는 것 정도는 해야지?”
“막내요?”
“그래, 막내! 그럼 막내지 뭐야. 나이도 제일 어리고. 저기 술시중 드는 쟤 보여? 이름이 크웬인데, 이제 막 종자가 됐고 너랑 동갑이야.”
그러면서 술잔을 권했다.
술잔에서 잔잔히 일렁이는 포도주의 색은 꼭, 그날 천지에 뿌려지던 피를 닮아 있었다.
왜인지 구역질이 치밀어서 고개를 돌렸다.
“술은 조금…….”
“응, 안 돼. 자기소개 안 할 거면 그거라도 쭉 들이켜. 축하주야. 도수도 없다시피 하고, 어차피 페이쿼리어라 취하지도 않을 거고.”
붉은 머리의 무녀가 끄윽, 트림을 했는데 술 냄새가 지독했다.
이 사람은 무녀 아닌가?
구공화국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마녀들의 최정상…… 근데 골초에다가 술까지 저렇게 말로 퍼먹는다니.
세상 정말 말세란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으로 로베리스를 바라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것으로 보였을까.
상석에 앉아 포도주를 홀짝이던 로베리스는 말리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도나의 억지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군. 태생이 저런 녀석이야. 취한 모양이니까 장단을 대충 맞춰주는 척하다 보면 알아서 곯아떨어질 거다.”
알리도나로부터 술잔을 받아들기 무섭게, 부추기는 환호성이 여기저기서 커져갔다.
술잔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왜일까,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파지면서 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몸속 깊숙이, 마음 깊숙이 박아두었던 그 말들이.
“그냥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친하게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말하고 싶다.
확실히 말해두고 싶었다.
들뜬 소란이 가라앉으면서 발생되는, 저 날카롭고 적대적인 침묵을 마주하게 될 걸 알면서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야말로 어떻게 그렇게 웃고 있을 수 있는 겁니까? 나보다도 더 오래 전장에 계셨으면서?”
“……?”
“지금 옆에서 같이 웃고 떠들던 친구가, 길가의 벌레보다도, 쉽게 죽는 세상이란 걸 알잖습니까.”
“…….”
“어차피 그렇게 고통스럽게 헤어지게 될 거라면…… 그런 운명 속을 살아가야 하는 거니까…….”
함께하는 시간도.
진솔하게 나누던 마음들도.
추억(追憶)이라는 이름으로 소중하게 쌓아 올리고 간직하던 그 모든 시간들이…… 끝내 악몽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거라면.
“이렇게 친해지는 일 자체에 의미가 없는 거 아닙니까……?”
나는 태생이 이런 놈이다.
어머니같이 모두를 선도하였다는 영웅은 될 수 없어. 마음이 이렇게나 약하니까.
자신만큼이나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이렇게 분풀이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확실하게, 내 마음을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해두고 싶었다.
나는 이 길을…….
칼날 위에서 칼만을 의지해서 걸어가야만 하는 이 길을…… 그저 혼자서 걸어갈 거라고.
“흐음, 의미가 없어?”
문득, 숨결이 닿도록 가까이 알리도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왜인지, 그 행동에 살벌한 적의(敵意)가 깃들어 있어서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그러자 알리도나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뭐야, 난 또. 나쁜 아이인 줄 알았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잖아.”
“……?”
“물러서면서 가장 먼저 잡은 게 허리의 그 소검이랑 목에 건 얼음조각 목걸이잖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단 소리 아냐?”
“……!”
“그건 즉 그 만남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고.”
순간, 가슴 깊숙한 곳의 치부를 칼날로 꿰뚫린 기분이었다.
치부, 치부라고 해두자.
그날, 그걸 진심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고 어설픈 혈기만이 넘쳤다.
“카이센, 책을 읽어본 적 있나?”
진심을 인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로베리스가 그런 질문을 보내왔다.
“책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책에는 한 사람의 일생이 담기거든. 그 한 권 안에. 놀랍지 않나? 한 인생을 다 읽는 데 사람에 따라 반나절에서 한나절밖에 안 걸려.”
“…….”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끝장이 다가오지. 그렇다고 그걸 읽으면서 ‘어차피 곧 끝나는 이야기다, 그러니 의미가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안 읽는 사람은 없어.”
언젠가, 끝나게 될 걸 알지만.
슬픔도 있지만, 그 삶의 이야기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기쁨이 있으니까.
기쁨과 슬픔이 서로 반복되고 뒤엉키고 또 춤을 추면서 꽃피워내는 삶, 그 삶의 화학작용을 이루시는 신들의 섭리를.
“그런 생각으로 책을 아예 안 읽어버리게 되면, 모든 인연을 포기해 버리면, 어떻게 알 수 있지? 대체 이 삶이 어디로 이어질지, 또 어떻게 끝마치게 될지에 대해?”
세 번째 연(緣),
뇌향, 청성, 철십자 (2)
“아까 네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곰곰이 생각해봐.”
새하얗게, 머릿속에 솜이 새하얗게 가득 들어찬 느낌이었다.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해야만 하는데.
저 목소리에, 그리고 저 지극한 눈빛에 무어라 반박할 지혜도 지성도 경험도 없었다.
찬물…….
찬물을 들이켜고 싶어…….
손에 든 게 술잔이라는 것도, 그 내용물이 술이란 것조차 잊은 채 한껏 들이켜자 마음이 나아졌다.
아니, 가까워졌다.
이상할 정도로.
동시에 수상할 정도로 몸속이 뜨거웠다.
그 가까움과 뜨거움 속에서…… 마음속의 밀실…… 진심이라는 방의 문까지 다가가 그 문고리를 돌리는데 아무런 힘도 필요하지 않았다.
“날 두고 멋대로 내기를 하다니…… 좋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제대로 말해서! 피눈물 흘리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캬, 시작됐다, 시작됐어!”
“뭐야, 겨우 한 잔으로 취했어?”
“페이쿼리어는 뭔 술이든 안 취하는 거 아니었어?”
단원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로베리스도 이상함을 느끼고 알리도나를 쳐다보았다.
술잔에 포도주를 더 따라주던 알리도나가 실실 웃더니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무녀의 지식을 악용하여 포도주에 뭔가 이상한 짓을 해놨다는 소리겠다.
“저 녀석, 예전에 나한테 했던 짓을 또…….”
로베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그때 소년 페이쿼리어의 입에서는 모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몸속에서 몇 년 동안이고 응어리지고 또 응어리져서 결국에는 썩어가던 것들이.
“나는~ 땅끝 마을 아스란에서 태어났고…….”
“아스란? 구공화국식 작명법 아냐?”
“뭐야, 제국 귀족 아니었잖아!”
“캬, 어딜 빼, 인마! 금화들 다 이리 갖고 오시고!”
메른이 로베리스 옆에서 걱정스럽게 팔짱을 꼈다.
“단장님, 알리도나 님의 장난을 저렇게 놔두어도 됩니까?”
“나도 일반적인 경우면 중재했겠지만, 지금 저 녀석은 안에 든 걸 쏟아내야 해.”
“왜죠?”
“그러지 않으면 곪아서 언젠가 터지고 말 테니까.”
로베리스가 술잔에 남은 포도주를 마저 비우며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백골 병단의 괴멸…….
만난 순간에는 내색하지 않더니만, 그 수라장에서 살아남은 일 자체가 고통으로 남아 있던 건가.
“어머니의 이름은 아이린…… 이건 가명이고 진짜 이름은 라미네아……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그때 정적이.
커다랗게 들떴던 만큼이나 고요한 정적이 실내를 덮었다.
“어머니는…… 탈영해서…… 나랑 누나를 낳고…… 아버지와 같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샘이라는 사냥개도 키웠었는데…… 엄청 똑똑했죠…… 부모님이 새벽 예배를 갈 때마다 그 뒤를 종종 따라갔다가…… 교회 마당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후후, 엄청 귀여웠어요.”
“…….”
“어머니는 늘…… 제가 조금이라도 훌쩍이면 바로 달려와서…… 내가 웃기 전까지는…… 오히려 어머니가 더 울상이 되시곤 했는데…….”
다시, 가슴의 구멍이 찢어지는 아픔이 인다.
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은, 취기조차도 감히 마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가슴을 주먹으로 움켜잡고, 숨이 끊어질 듯 허덕이면서 말을 겨우 이어 나갔다.
“우루크가 쳐들어온 날에도…… 어머니가 떠나는 게 싫어서 숨은 날 찾으시다가…… 나 때문에…… 날 구하시려다 죽었습니다…….”
“…….”
“기회는, 후, 후후후후, 한 번 더 있었죠…… 어머니가 발카로를 칼타케에서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칼타케라니, 그럼 볼의 저 문장은 설마 그때…….”
“그때 내가 비명만 지르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내 삶의 기둥이었는데…… 나는, 나는…… 어머니의 삶에 있어서 평생 짐밖에 되지 않았던─”
소중한 것이,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던 시점에.
이미 다 사라져 버리고 없어.
백골 병단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가족만큼이나 소중했다고 깨달은 이제는, 그 사람들과 말 한마디조차 나눌 수 없어.
“─이런 썅, 그 우라질 주둥아리 다물어!”
말을 끝마치기 직전.
그것이 말로 엮어지기 직전에.
별안간 다가온 트발에게 멱살을 콱 붙잡히며 말문이 강제로 닫히고 말았다.
“야, 이 염병할 꼬맹아. 넌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페이쿼리어의 강화 신체조차도 가볍게 제압하여 멱통을 제압하는 괴력.
“주변 사람들이 죽은 게, 다 너한테 힘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개도 안 웃을 소리 집어치워!”
그 붙잡힌 멱살을 통해 들어오는 건 엄청난 떨림이었는데, 왜인지 적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한 거야. 아무것도! 열세 살 꼬맹이가 대체 뭘 할 수 있었다고 그 인간들 죽은 일을 죄다 자기 잘못인 줄 알고 살아가고 앉았어!”
“트발, 소리치지 말고 그 녀석 그만 놔줘.”
“아직 스무 살도 되지 못한 꼬맹이가 대체 마음에 무슨 짐을…….”
메른의 제지에 돌아서서 쿵쿵거리며 문을 나서는 트발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열 살 때 죽었다는 자신의 아들을 생각한 것일까…….
메른은 묻지 않았다. 다만 트발의 손에 붙들려 있던 카이센을 부축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카이센. 아무도 네게 그 죽음들을 잊지 말라고는 안 해.”
“…….”
“리스타 알터 쉬르팽 이야기 알아? 내 선조이신 키에스께서 그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어. 그게 내 평생의 자랑이지.”
리스타 알터 쉬르팽.
처음으로 일어난 동란의 시대를 평정한 전설적인 페이쿼리어.
리스타의 역사적 존재가 곧 쉬르팽이 아라다만텔보다 더 높은 격의 성검으로 여겨지는 이유였다.
키에스는 그 시대의 궁성, 또한 역대 제일의 궁성이자 취중사 유파의 창시자.
“대마법사 린의 희생을 통해 그 원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지. 내 선조님은 말이야, 정말 열심히 살았어. 그 누구보다도. 그게 왜인지 알아?”
“……모릅니다.”
“린을 다시 만났을 때, 네가 해준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덕분에 이렇게 가치 있게 살았다고 말하고 싶으셨대.”
그 순간 문득.
그날, 환하게 웃으며 죽었던 스승의 미소와 스승이 꿈꾸던 행복이 머릿속을 흘러갔다.
네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이야기해줘…… 스승은 그렇게 말하고 죽었다.
“난 그 이야기가 참 좋아. 늘 이렇게 울고만 있으면 먼저 죽은 사람들이 과연 기뻐할까? 우는 것보다는 그 사람들이 누리지 못했던 몫만큼 행복하게 살아가야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이딴 세계에서……?
실소를 흘리려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위용검전>에서 타르시요와 나누었던 약속이 떠올랐다.
“카이센, 블러드윈드는 네가 쓸모 있길 바라서 빌려주었던 게 아니다.”
그 먼 약속 속으로 스며들듯.
로베리스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들렸다.
“네가 우리 철십자 기사단의 일원이 된 걸 환영하는 의미로 준 선물이지.”
“……선물이요?”
“우리는 너와 같은 사명을 걷는 이해자고, 가족이다. 가족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건 특별할 일도 못 돼.”
가족이라니…….
가족에게 주는 선물이라니…….
“카이센, 도대체 뭘 그렇게 무서워하냐. 너는 이곳에 온 그 순간부터 혼자가 아니었는데.”
다음 일순간.
알리도나의 장난스러운 미소 위로 어머니의 미소가 포개진 건 환각이었을까.
“한계에 달했을 때, 울고 싶을 때, 절대 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 모든 걸 내려놓고 울어봐. 넌 신이 아냐. 용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지. 울어도 돼. 울어도 된다고. 한바탕 울고 나서 다시 일어서면 돼. 사람은 그러면 되는 거야.”
울고 싶지 않은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멋대로 두 눈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 우리 카이, 미안해. 엄마가 없어서 많이 무서웠구나. 빨래하고 온단 게 그만…….
왜.
왜 먼 기억 속에서.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일까.
– 괜찮아! 이제 엄마가 왔으니 울지 않아도 돼. 아니,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괜찮아. 괜찮아. 그래, 까꿍! 아루루루, 까꿍!
그 목소리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소중했던 모든 것이.
죽고 사라지던 날에 고장 났던 눈물의, 감정의 태엽을 끼릭끼릭 돌리기 시작했다.
– 아…… 이제 웃어주네?
* * *
“카이센은?”
로베리스의 질문에 알리도나가 트림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트발이 데려다가 침상에 눕혀줬어. 설마 울다가 잠들 줄이야. 몸만 컸지 애는 애네.”
“트발 말마따나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으니까. 이제 열여덟이야. <위용검전>에서 몸과 마음이 성숙해야 할 때 전장으로 끌려온 거지. 이번 전쟁은 페이쿼리어들의 나이가 다 너무 어려.”
로베리스는 스스로 멍한 심정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그런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았던 카밀라 선배님께서 도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기에 제자를 받으셨나 했더니…….
‘마우나 로아를 상대할 때, 카밀라 선배님이 아니라 라미네아 님의 모습이 겹쳐졌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니.’
그런 거였던가…… 영웅의 계보는, 영웅의 등불은 이렇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던 건가.
삼영룡께서는 알고 계실까?
당연히 알고 계실 것이다. 라미네아의 죽음이 은폐되었다면 법황청도 모두 알고 있을 거고…….
“철십자, 오늘 이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발설하는 건 죽을 때까지 엄금하는 함구령을 내린다.”
“죽을 때까지라니, 그거 참 다행이군요.”
“레트리, 뭐가 그렇게 기쁘지?”
“죽은 뒤에 천국 가서 자랑할 게 생긴 거 아닙니까. 우리가 말이야, 어? 라미네아의 아들이랑 술도 한잔 같이 하고, 어? 전장에서 어깨를 맞대고 싸웠다고.”
“야, 인마! 넌 등 뒤에 있었잖아. 어깨를 맞댄 건 바로 이 몸이야.”
“자식아! 어깨를 맞대고 싸웠다, 저런 건 그 뭐냐, 시적 표현같이 그냥 은유적인 것도 모르냐!”
단원들이 자축의 박수를 치면서 분위기를 환기하기 시작했을 때, 알리도나가 로베리스에게 물었다.
“근데 어쩔 셈이야, 로로?”
“뭘 말이지?”
“가족이니 뭐니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제 너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둘 사이의 슬픈 침묵이 흘렀다.
로베리스가 술잔에 마지막 남은 포도주를 따르면서, 혼잣말을 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알다시피 우리 페이지 가문은 예지몽을 꾼다. 엄청 추상적이라 해몽도 힘들고 꿀 수 있는 사람도 극소수라 별 의미도 없지만.”
“알아. 그리고 네가 그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극소수 중 한 명이잖아.”
“난 말이야, ‘검은 여름’ 때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늘 이런 꿈을 꿔.”
“무슨?”
“피바다 속에 주검들이 수없이 떠서 징검다리를 만들어놓은 꿈이야. 나는 유일한 등불을 들고 악몽 속에 서 있고, 피바다의 끝에는 ‘가을로 향하는 문’이 있어.”
“‘가을로 가는 문’이라. 넌 가끔씩 시인이 될 때가 있다니까.”
“주검들은 모두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야. 스승님, 동료, 친구, 선임, 부하들, 그리고 제자…….”
“로로…….”
“그걸 보면서 난 생각했지. 아, 내가 이들의 죽음을 넘고 또 넘어서 ‘가을로 가는 문’을 열어야 하는 거구나. 이제 그런 사명을 지게 된 거구나.”
로베리스가 지나온 삶은.
그 삶의 궤적 위에 놓인 죽음들은 카이센이 지나온 길에 쌓인 그것보다 몇십 배는 더 많았다.
그런 죽음들을 이야기하는 로베리스의 목소리는 그저 덤덤했다.
“근데 오늘 꿈을 꾸니, 내 뒤에 카이센이 서 있더라고.”
“뭐?”
“그 문을 열 사람은 내가 아니었단 거지. 나도 결국에는 징검돌이 되어야 할 사명을 지고 태어났던 거야.”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알리도나는 오랜 친구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렇기에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계속, 계속, 계속, 소중한 것을 잃어가면서.
그 소중한 것들의 무덤을 징검돌로 삼아서 ‘세상의 등불’을 앞으로, 미래로 운반하는 것.
그것이, 이 어떻게 할 수 없이 슬픈 세계에서 용사 된 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면…….
‘그 길은 사람이 도저히 걸어갈 만한 길이 아니야…….’
그 슬픔의 길을.
오직 칼 한 자루만 차고.
마지막까지 걸어가서 마쳐왔기에, 이들은 기원의 시대에서부터 용사(勇士)라고 불려온 것일까.
알리도나는 그 순간적 망념을 말로 엮지 않았다.
평생 그 길을 걸어온 친구 앞에서 감히 엮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만 에둘러 말했다.
“어떡해. 그럼 그때 저 아이는 또다시 혼자가 될 텐데…….”
* * *
기원력 1697년 12월.
마우나 로아 토벌전 이후로 적색산맥 전선은 여러 번의 대침공을 더 막아냈다.
청성의 미른가디아가 주요 지휘관들을 모두 소집하여 말했다.
「마우나 로아가 20년도 채 안 돼서 다시 형체를 갖추었다는 것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그대들은 알고 있는가?」
마우나 로아는 왕들의 화신.
왕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새로운 육체를 갖추는 데 큰 시간이 필요치 않게 된다.
「왕의 재림이 가깝다. 마우나 로아가 깨어날 정도면 고위 귀족들도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
「그러므로, 현 시각을 기준으로 모든 전선에 ‘비상 폭염 경보’를 발령한다.」
폭염 경보.
여름에 심연이 창궐하여 인류 전체가 생존권을 위협받을 때의 총동원령을 일컫는 군사 용어였다.
해당 명령이 떨어진 순간, 모든 인류는 전시 상태로 돌입하며 모든 물ㆍ인적 자원은 군대에 징발된다.
「이 전쟁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