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41)
가짜 용사 이야기-41화(41/310)
제41화
“진실로, 인간이란 추하기 그지없구나.”
악몽(惡夢)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악몽은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으나, 온몸의 혈관을 촉수처럼 밖으로 내빼고 있었다.
그 촉수가 토해내는 핏물들이 칼날이 되어 인간 병사들의 살가죽을 찢고 그 심장을 적출했다.
“이놈은 대체 뭐야! 촉수가 끝도 없이 생겨나잖아!”
“그냥 맞추는 걸로는 안 돼! 불태워야 한다고!”
“이 나쁜 자식, 란을 놔줘!”
“멈춰! 갔다간 너도 죽는다!”
“피, 피가! 끄아아아아아아!”
별빛의 선율이 아롱지듯, 우주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은발의 사내가 긴소매에 튄 핏물을 핥았다.
“쉿, 조용. 그토록 목소리를 크게 내는 건 품위가 없는 행동이다.”
그 사내 주위로, 핏물이 무수한 가시들로 일어서 있었다.
그 하나의 가시마다, 몸이 일자로 꿰뚫린 채 마녀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 엔두르샤가 부여하는 품위를 품고 나서 다시 일어서라, 진정한 왕의 축복을 너희에게 내린다.”
고통스러운 신음들이 그 순간 고막을 찢는 절규로 바뀌었다.
피의 가시가, 혈관을 타고 죽어가던 인간들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고…….
흰자위가 뒤집히던 인간들은 곧 의식도 몸도 시공간의 저편 우주의 납골당에 내어 맡긴 채, 하나의 꼭두각시가 되어 일어섰다.
“그래, 훌륭하구나. 침묵이야말로 귀족의 덕목일지니.”
치솟는 전운(戰雲),
영겁에서 깨어난 옛것들 (1)
[철십자, 현재 시점에서 모든 진입로가 안전하지 않다. 서둘러 길을 만들도록.]기원력 1698년 1월.
순백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새해의 새벽은 정초부터 뒤숭숭했고, 그 정초를 달리는 철십자 기사단 주위에서 심연의 열기가 들끓었다.
“알겠습니다. 알리도나, 작전목표 재확인해.”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이 철십자를 대표해 대답했다.
“설화봉(雪火峰) 결계 발생소가 혈족 군대에게 함락됐어. 화산재 확장을 저지하는 결계를 발생시키는 곳이니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
“적의 수뇌는 어떻게 됩니까?”
카이센이 물었다.
알리도나가 곰방대로부터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뱉으며 답했다.
“혈족 군대를 이끄는 건 ‘창백한 준남작’ 중 하나야. 1시간 전에 적현마녀회를 괴멸시켰지.”
창백한 준남작이란, 옛 왕들에게 귀족에 준하는 작위를 받은 혈족의 세 지도자를 뜻했다.
물론 옛 귀족처럼 불멸ㆍ영생의 권능을 얻은 게 아니라, 명예직의 작위였다.
옛 귀족과 비교하면 심히 미흡한 적수였으나, 그래도 카밀라가 놈들 중 하나를 죽일 때 제법 고전했던 걸 기억한다.
메른이 물었다.
“적현마녀회라니, 알리도나 님 직속 마녀들 아닌가요?”
“그렇지. 이젠 다 없어졌지만. 청성께서는 우리 철십자가 이곳을 확보하길 원해.”
제자들의 죽음을 말하는 무녀의 어조는 오늘의 날씨를 말하듯 단출했다.
전장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죽음은 사방에 쌓여 있어서, 애도의 시간이나 어휘가 끼어들 틈새가 없단 걸 소년 페이쿼리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녀들이 다 죽다니, 거 귀찮게 됐구만.”
트발이 용골창으로 어깨를 두들겼다.
“하! 그냥 마법포대(魔法砲臺)에서 융단폭격을 가하면 끝 아닌가? 봉우리 위라서 쏟아부으면 끝이겠는데.”
“진심은 아니겠지? 중요한 시설이라 그딴 건 안 돼.”
“둘 다 그만. 창백한 귀족을 쓰러뜨리고 설화봉을 다시 확보할 수 있도록, 본대가 합류할 길을 만드는 게 우리 임무다.”
“뭘 어렵게 재고 그러시죠, 단장. 명령만 하시죠.”
“먼저 외곽 통로를 모두 확보한다. 카이센, 너 혼자서 북쪽과 동쪽 산길을 뚫어라. 기사 오십 명 주겠다. 종자 시종 포함해서 이백 명쯤 되겠지. 가능하겠지?”
“오십 명 없이 혼자서도 가능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엄청난 자신감인걸.
알리도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메른과 트발은 나와 같이 가장 가까운 서쪽 통로를 뚫고 먼저 중심부로 향한다. 알리도나는 상공에서 전체를 지휘해. 카이센을 최대한 보좌하고.”
“알겠어.”
“임무가 끝나는 즉시 둘 다 중앙 사원으로 오도록. 길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창백한 귀족을 죽이는 것도 우리 임무다.”
혈족은 6대 마족 중에서, 데몬을 제외하면 그 숫자가 가장 적었다.
특유의 특권 의식에서 비롯된 행동 방식으로 그들은 후대를 극도로 통제하여 만들어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될수록 그 세력은 서서히 강성해졌는데, 인간 입장으로서는 가장 혐오스러운 족속이었다.
– 놈들은 저주받은 피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혈노(血奴; Blood Slave)를 만들어 거느린다.
혈노들을 도시나 성 안쪽으로 들여보낸 뒤 내분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공방전을 쉽사리 끝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하지만 이런 혈족들에게도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피의 주인, 즉 피를 주입한 혈족을 죽이면 혈노들도 그를 따라 죽게 되니까.
“작전 개시, 이따 보자.”
“자, 뒷자리에 타. 날씨도 좋은데 누나랑 같이 신나게 달려보자고.”
알리도나가 빗자루 위에 느긋하게 걸터앉더니, 살가운 손짓으로 뒷자리를 두들겼다.
마녀들은 빗자루를 다루어 하늘을 날 수 있었다. 둘 이상을 태우고도 균형을 유지하려면 그 실력이 상당해야 한다.
카이센은 양발로 빗자루 작대기 위에 올라섰다.
[항성의 마녀 베라프입니다. 들리시는지요, 무녀님.]“응, 잘 들려.”
[외곽 사원마다 설치된 결계 발생 장치를 혈족들이 점거하고 있습니다. 숫자가 아주 많아요.]“지금 가는 중이야.”
[서둘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들로는 역부족입니다. 20만은 족히 되겠어요.]휘몰아치는 대류 아래로 눈을 치켜뜨자, 산길을 점거한 혈족의 하수인들이 보였다.
혈노…….
인형처럼 느긋하게 걷되 백정처럼 살벌하게 병사들을 도륙하는 꼭두각시들.
“우으…….”
“우아아아…….”
“아어어어…….”
혈노들이 떼거리로 내달렸다.
총탄에 다리가 날아가고 몸통이 박살 나도 계속 달려서, 주인의 명령을 반드시 이루어냈다.
그 강박적이고 집요한 동작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타후프처럼 위협적인 건 아니었으나…….
“흐흠, 겁나게 많은걸.”
“여기에만 8만은 있을 것 같습니다.”
“흠, 알고 있겠지만 혈노는 인간이 아니야. 혼이 빠져나가고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인형일 뿐.”
“처리하겠습니다.”
“저걸 다?”
“세 놈이면 됩니다.”
“얘, 잠깐!”
카이센은 아라다만텔의 칼자루 위에 오른손을 포갰다. 칼이 사납게 울고 있었다.
그다음 순간, 빗자루의 작대기를 박차고 급강하했다.
추락할 때, 지면에 꽂은 칼집에 낙하의 충격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표적의 위치를 눈에 담았다.
‘혈족의 숫자, 하나, 둘, 셋.’
붉은 물결, 즉 혈노들 틈바구니에서 그것들을 조종하는 세 명의 술사를 찾아낸다.
혈족.
놈들은 인간과 외형적으로 상당히 흡사하여 차이점이 거의 없다.
– 교관님, 그러면 놈들을 아예 구분할 수 없는 겁니까?
–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햇빛 아래서는 걸을 수 없기에, 이러한 밤이나 화산재 아래서만 활동이 가능하단 것은 신체적 차이점이다.
– 그리고, 피부색이 메스껍도록 창백하고 눈이 별처럼 파랗단 것이 외형적 차이점이다.
– 그것뿐입니까?
–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놈들은 선민의식에 가까운 자존감을 빼면 시체인 놈들이라, 아주 거창하게 치장하고 다니니.
지금 시야 끄트머리에 걸린, 이 세 놈처럼.
“흥, 페이쿼리어라?”
혈족들은 단신으로 격전지 중심에 낙하한 페이쿼리어를 흥미롭고도 괘씸하게 여겼다.
피를 이용하여 사술(邪術)을 부린다고, 놈들은 혈귀라고도 불렸다.
세 혈귀들의 몸에서 뻗어 나온 핏물이 칼날이 되고 창극이 되어 팔방에서 짓쳐들었다. 그 일순.
발도일섬(拔刀一閃).
낙하의 충격을 마력으로 변환.
이미 변환된 마력으로 들끓고 있었으므로, 칼집에 새로운 마력을 충전할 필요는 없었다.
해당 과정이 필요 없다는 건, 발도 동작을 제외한 시간은 필요치 않다는 뜻이 된다.
“?”
“?”
“?”
망막 위에서 어지러이 회전하며 비친다.
카이센이 칼을 뽑아냈다가 다시 절도 있게 납도하는 풍경이.
그 회전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몸뚱어리가 절단면으로 선혈을 뿜어내며 휘청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현실을 자각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혈족들의 몸체가.
그 유려한 레이스와 주름 장식으로 치장된 옷을 입은 몸체가 뇌를 잃고 쓰러진 것과 동시에.
외곽 사원을 도모하던 병사들에게 벌 떼처럼 내달리던 혈노들도 실 끊어진 인형처럼 픽 쓰러졌다.
“아주 깔끔했어. 실력 정말 끝내주는걸.”
알리도나가 담배 연기를 한껏 빨아 마셨다가 토해냈다.
그 숨결은, 하강하면서 강렬한 불길이 되어 혈노들의 사체를 태우기 시작했다.
전장의 쓰레기를 태우는 그 연기를 헤치고, 알리도나가 외곽 사원 입구에 착지했다.
“어디 볼까.”
외곽 사원 내부에는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표면에 용언과 주술로 점철된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저것이 화산재들을 몰아내는 결계였다.
물론 혈족들의 핏물로 손상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이것들이 내 걸작에 아주 지랄을 해놨네.”
“고칠 수 없는지요?”
“아니, 이래서 담배를 못 끊는다니까. 봐, 얼마나 편리해.”
알리도나가 곰방대로 표면의 핏자국을 지졌다. 그리고 담뱃재로 술식의 공백을 메워냈다.
심히 지저분하긴 했으나 그 노련한 솜씨는 과연 일류의 증거.
곧 비석이 파장을 뿜어내, 부분적인 결계를 하늘로 쏘아내 화산재의 먹구름을 찢어냈다.
“좋아. 이렇게 하나 끝났고.”
이런 식이었다.
외곽 사원을 찾아가서, 혈족을 베어내고 결계를 복구할 때까지의 과정들이란.
그 과정을 총 세 번 마무리했을 즈음 로베리스의 전언이 왔다.
[알리도나, 외곽이 정리되는 즉시 설화봉 사원으로 와 줘야겠는걸.]“막내 덕에 안 그래도 방금 다 마무리됐어. 바로 갈게.”
빗자루를 타고 이동한 설화봉 사원, 그 안뜰은 선혈로 뒤덮여 있었다.
혈족과 혈노와 기사와 병사들의 사체가, 극심한 열대야 속에서 벌서 질퍽하게 녹아내렸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피와 시즙으로 덮여서, 돌길도 잡초도 보이지 않고 안뜰은 다만 새빨갰다.
“참 운치 좋은 곳이었는데.”
그리고, 처참하게 부서진 사원의 돌문 안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카이센이 서둘러 그곳으로 들어갈 때 알리도나는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섰다.
혈노로서 푸른 눈을 갖게 되고 조종당하다가 죽은 마녀들의 시체를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고요함은 어딘가 소름 끼쳤다.
[서둘러서 카이센을 데리고 와, 알리도나. 한계다. 여기서는 메른 말고는 힘을 쓸 수 없어.]사원 내부는 긴 세월의 연륜으로 고고한 풍미를 풍겼다.
대단히 높은 천장도.
아름다운 용상(龍象)들도.
태내처럼 따스한 열기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지금처럼, 발목까지 핏물이 차오르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지하 계단을 곧장 따라 내려오도록 해.]카이센은 사원의 기나긴 복도를 내달렸다.
옛 무녀, 프리데가 기거했다는 침실을 지나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렸다.
그리고 지하 공간 한복판에서, 별빛과 싸우고 있는 철십자 용사 파티와 합류했다.
“과연, 품위라고는 일절 느껴지지 않는 동작이로구나. 너희들의 품위 없음이 한탄스럽다.”
창백한 준남작, 엔두르샤.
별빛처럼 찬란한 은발 위로 고귀한 윤기가 흐른다.
겨울날의 신기루처럼 너울거리는 도복에는 인외적(人外的) 품격을 내비치고 있었다.
“닥쳐, 이 우라질 놈이!”
그리고 그 등…….
그 등에서 수십 가닥 솟아난 혈관이 몸부림치듯 날뛰며 부식성의 핏물을 이리저리 쏟아냈다.
핏물은 자유자재로 변형했다. 가시가 되어 솟구쳤다가, 칼날로 변해 회전했다가…….
“메른!”
일순, 메른이 쏘아낸 청광의 화살이 그 머리통에 직격한 순간.
아니, 직격하기 직전.
그 육신이 마치 무수한 박쥐 떼가 활공하는 듯한 안개로 흩어졌다가 기둥 저편에서 다시 형체를 이루었다.
“이 자식.”
엔두르샤는 협소한 지하 공간을 능수능란하게 부렸다.
로베리스와 트발은 중병기를 휘두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답답함 속에서 수세만을 반복했다.
로베리스는 결국 쉬르팽을 패검하고 마법을 사용했다. 허공에서 마력과 화살과 핏물이 연신 맞부딪쳤다.
“그러면 이건 어때?”
촤르르륵, 카이센이 끼어들 틈새를 찾던 그때, 두루마리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리도나의 입에서 창세의 외침이 목소리로 엮어지며, 힘을 입어 나타났다.
엔두르샤의 발치에서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 저 문자들은 바로 창세의 문자.
“이건……?”
창세의 힘은 창세칠편(創世七篇)이라는 이름으로 7개의 시편으로 엮였고 무녀들은 예로부터 이 힘의 수호자였다.
7개의 시편 중 4개의 시편이 소실되었으나, 여전히 3개의 시편은 인류의 품에 남아 있었다.
알리도나는 이 일곱 시편 중 명세시편(明世詩篇)의 수호자.
창세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들에게서 육신의 힘을 크게 빼앗는 힘이 발현되었다.
그 힘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광역 둔화.
“카이센.”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몸을 낮추고 있었다.
칼집을 왼손으로 붙들었다. 칼자루를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십문자도는 본래 4개의 기본 초식에서 상위 초식으로 연계시키는 검법.
하지만 카이센에게는 4식만을 사용했다. 그 길밖에는 없었다.
발(發) :
십문자도 11식, 뇌격단(雷擊斷).
미끄러져 나오는 칼날에서 광염이 소용돌이친다.
일순, 엔두르샤의 육신이 붉은 안개로 변하기도 전에 섬광으로 베어 쳐내는 칼의 울음이 있었다.
휘두른 칼날이 엔두르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챠챠챠챠챵───!
광염이 사방으로 난반사되며 수십 가닥의 혈관을 정확하게 찢어발겼다.
참격의 궤도에 수십 개의 미세 검기를 남겨놓는다.
그 검기는 쐐기가 되어 상대방의 육신을 꿰뚫는다. 이는 십문자도의 12개 초식 중의 열한 번째에 속하는 고위 초식.
“아, 이 미천한…… 것들이……!”
엔두르샤의 목에서 선혈이 왈칵 터져 나왔다.
핏물이 실처럼 절단면을 꿰매려 했으나, 내부 근막을 파괴한 미세 검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때 그 순간, 엔두르샤의 육신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어떠한 소용돌이가…….
“뭐지?”
“개짓거리하기 전에 없애버려!”
그건 분명 한순간이었으나 영원처럼 얼어붙은 듯 길게 느껴졌다.
그 육신을 찢어발기듯 비집으며 거대한 손가락 하나가 솟구쳐 나오던 위기일발의 순간.
아라다만텔과 쉬르팽과 용골창이 교차하며 엔두르샤의 육신을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
“…….”
“…….”
일순간 닥쳐왔던 소란이 잠들자, 각자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적막이 내리깔렸다.
“방금 그건 뭐였지?”
트발이 숨을 돌리며 말했다.
알리도나가 대답했다.
“소환 술식 같았는데…….”
“소환술? 뭘 말입니까?”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알리도나가 곰방대를 휘두르자, 지하 공간에 차 있었던 핏물이 불살라지고 바닥이 드러났다.
사악한 문자들이 글귀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걸 읽어 나가던 알리도나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트발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호코롬…… 귀족이란 뜻이야. 이 녀석, 귀족을 불러내려 했어.”
불길한 정적.
메른이 눈을 끔뻑였다.
“불러내다니, 대체 어디서? 아니, 여기로 올 옛 귀족이 있다고요?”
부유성 사령부와 교신하던 로베리스가 화제를 탁 끊었다.
“그건 뇌향께서 직접 알아보신다고 한다. 알리도나, 지금은 사원 전체에 결계 펼쳐.”
“왜?”
“마법포대에서 융단폭격을 할 거라는데. 외곽에 주둔한 혈족 잔당을 쓸어낸다고.”
알리도나가 광역 결계를 펼친 직후, 사원은 육중한 굉음 속에서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유성 사령부에서 융단폭격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유성들이 수없이 떨어져 지형을 으깨고 부정한 존재들을 멸하는 동안 로베리스가 말했다.
“카이센, 넌 나와 함께 간다.”
“이번엔 어딥니까?”
“전투 임무가 아니야. 아인 군부 원수가 왔는데 너를 만나 보겠다고 한다.”
트발이 어이가 없단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아인 원수라니, 거긴 지금 군부 제정(帝政) 아닙니까. 난쟁이 황제가 직접 행차하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