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42)
가짜 용사 이야기-42화(42/310)
제42화
순백(純白)이 실체를 입었다.
분신이기에 그 형체는 아지랑이처럼 흐릿했다.
빛은 하늘 위의 하늘에 닿는 황금의 궁전, 법황청 99층 용령전 안으로 들어갔다.
각기 위치에 앉은 다섯 마리의 누런 진룡이 인자한 위엄 속에서 말했다.
「남방에서 심연의 안개가 천지를 삼키고 있다. 모든 땅이 황무지로 변하고 산은 화산으로 변하고 있구나.」
「도마뱀 군주를 그곳에서 깨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왕이 깨어나는 것이다. 허나, 우리에게는 이를 차단할 도리가 없구나.」
「어찌 할지 생각해 두었느냐. 슬기의 이름을 가진 백룡아. 광룡께서 이제 생각할 여유가 없으시니 우리는 네 판단을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2천 년 가까이 세상을 살펴온 진룡들은 위태로운 어조로 무너지는 세계를 논했다.
미른가디아는 영겁의 흐름 가운데 늙고 무력해진 진룡들의 의존적인 질문에 몸을 떨었다.
왕이 깨어나면 세계의 빛이 완전히 사라져갈 것이거늘…….
이 황잡한 세계에서 또다시 나에게 방도를 찾으라 하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미른가디아는, 부유성으로 하늘을 떠돌며 3개의 전선을 모두 돌보고 있었다.
「이제 오주(五柱) 어르신들께도, 또한 저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시대에 반드시 이 전쟁의 끝을 봐야 할 것입니다.」
「계획을 말해보아라.」
「세 종족이 통합 전선을 구축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정의 동부, 아인의 서부, 인류의 중부. 이들이 통합될 때까지 제가 기필코 시간을 벌어 보겠사옵니다.」
추기경 요슈하르가 물었다.
「깨어나고 있는 왕은 어찌하겠느냐.」
미른가디아는 공손하게 맞잡은 손가락이 떨리는 걸 느꼈다.
격렬하게 명멸하고 있는 세계의 운명이 자신의 숙명과 겹쳐지는 걸 느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고개를 들 때, 길고 새하얀 속눈썹에 감추어진 눈동자에서 삶을 내려놓는 자의 각오가 빛났다.
「이미 그에 대한 방도는 생각해 두었습니다.」
「말해보아라.」
「왕이 깨어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왕과 그 수하들을 맞이하러 가야 하옵니다. 그 방도 이외의 미래는 없었나이다.」
치솟는 전운(戰雲),
영겁에서 깨어난 옛것들 (2)
“허, 이게 누구야. 네가 정말 로베리스냐? 로로라고 놀림 받던 꼬맹이가 어엿한 여걸이 다 됐군.”
아인 군부에서 왔다는 거물은 할바론 손 에베소였다. 그것이 그 영웅과의 첫 대면이었다.
만병기장(萬兵器匠), 할바론.
아인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1제국을 이룩한 원수이자 황제, 옛 에베소 왕조의 왕족이었고 지난 ‘검은 여름’ 때 아인들의 영웅.
아인들은 마법과 기적을 다루지는 못했으나 기술력은 세 종족 가운데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일례로 총기와 증기기관 모두 아인의 발명품이었는데, 전장에 맞게 개량한 것이 바로 이 할바론이었다.
“이슬라한테는 왜 그런 말 안 해준 것인가! 이슬라도 여걸이 다 됐다! 이제 엄청 세졌다!”
모든 병기를 자유자재로 만들어내고 또 개량할 수 있다고, 만병기장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증기기관의 발명자인 프리스비아의 후손이기도 했다.
그런 엄청난 인물과의 대면은, 그 머리를 물어뜯는 이슬라의 존재 때문에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이놈아, 아직 키도 그렇게 작아선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슬라 키, 이제 할바론과 맞먹는다!”
“이슬라, 물러나 있어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로베리스의 명령에 이슬라는 물러서긴 했으나 여전히 할바론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 이슬라는 프리스비아가 용족과 인간과 아인의 유전자를 결합해서 만들어낸 생명체였다.
프리스비아의 가계에 속하는 할바론은 이슬라에게는 대부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이제 부하에게 명령하는 목소리에 위엄도 있고, 정말 어른이 다 됐군. 그때 그 꼬맹이가 말이야.”
할바론이 침으로 범벅이 된 군모를 털어내며 말했다.
얼굴부터 팔까지, 무수한 흉터가 있을 뿐 영락없는 미소년이었으나 실제 연배는 40대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고 겪은 전투의 숫자는 세 자리가 넘는 노장이었다.
소년의 얼굴에 노년의 연륜을 지니고, 장년의 어투와 눈빛을 사용한다는 것이 심히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아인은 원래 저렇다.
“당신은 여전하시네요. 아이처럼 어려 보입니다.”
“그게 아인의 장점 아니겠나?”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서 늙은 것처럼 보이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쪽은 주로 난쟁이라 불리지만.”
“흥, 난 아니야. 이 피부를 봐. 아직도 아기 같지. 부럽냐?”
“아닙니다.”
“얼굴에 주름이 생길 때쯤이면 부러워서 미칠걸.”
“어차피 주름살이 잡힐 때까지 살지도 못할 겁니다.”
“에라이 염병, 페이쿼리어란 족속들은 분위기를 망치는 데 아주 일가견이 있다니까. 그래서 이쪽이 그 녀석인가? 라미네아처럼 마우나 로아를 토벌했다는?”
라미네아.
대비하지도 못한 채 듣고 만 어머니의 이름에,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근데 이상하군. 우리가 언제 어디서 봤던가? 상당히 낯이 익은데 말이야. 남자 페이쿼리어를 보는 건 처음인데 이상하군.”
할바론이 카이센을 위아래로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베리스가 나섰다.
“노안이 오신 건 아닐는지요.”
“야, 이놈아! 날 골방 늙은이 취급하려면 아직 멀었다.”
로베리스와 할바론이 고요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오랜 사선을 함께 지나온 자들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미소였다.
이슬라가 그걸 질투하는지 할바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비명이 끝나자 로베리스가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렇지. 청성 각하께서 내 신병기가 필요하다지 뭐야.”
“신병기가 뭔가?!”
“장갑 열차라고, 열차를 완전무장 시킨 내 걸작이지. 이동하는 포대라고나 할까.”
“완전무장 열차요? 뭔지 상상조차 안 되는데요.”
“훗, 너희들 같은 범인들은 그럴 수밖에 없지. 보면 까무러칠 거다. 내가 라미네아한테는 몇 번이고 말했었지. 완성시키면 가장 먼저 보여 주겠다고 말이야.”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인지.
그렇게 말하며 할바론이 흘긋 카이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근데 그 녀석은 이제 죽고 없구나. 그 까칠한 제자 꼬맹이한테나마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년도 결국 죽었다지?”
“…….”
“그런 표정 짓지 마라. 페이쿼리어란 놈들은 왜 죄다 세상 슬픔 다 짊어진 얼굴인지 모르겠어. 라미네아를 좀 본받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로베리스로부터 발언권을 받지 못했지만,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라미네아 님을 아십니까?”
그 질문에 할바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기도 잠시,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 하핫! 로베리스, 지금 이놈이 누구보고 누굴 아냐 마냐고 묻는 거냐?”
“본인이 제일 잘 아시면서 왜 제게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고, 저걸 그냥 확. 라미네아, 그놈은 내 전우였다. 내가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인정한 영웅이고, 그리고 내 둘도 없는 친구였지.”
“그렇군요.”
그렇군요, 라고 말할 때 카이센은 잔잔한 기쁨을 숨겨야 했다.
어머니와의 친분을 저렇게나 기쁘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를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이렇게나 신기한 기분이로구나.
“항상 똥 씹은 표정인 너희들에게 내 새로운 걸작을 보여주고 싶군그래.”
“걸작! 맛있는 건가!”
“멋있는 거다. 초대형 거신이란 놈인데, 옛 왕과 아마 가위바위보도 할 수 있을 거다. 주먹다짐까지도 할 수 있게 만드는─”
로베리스가 한숨 섞인 고갯짓으로 할바론의 열정을 짓밟았다.
“─핵심만 이야기하고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날밤을 새우고 싶진 않군요.”
“쯧쯧쯧, 예나 지금이나 귀염성 하나 없는 건 여전하구나. 그래, 이번에는 옛 귀족이 나타날 뻔했다고?”
“창백한 준남작이 그런 시도를 했으나 저지했습니다.”
“우린 나가 놈들을 상대하고 있지. 옛 바다의 군주를 섬기는 그 바다뱀 놈들 말이다. 하급 귀족 몇을 박살 내긴 했는데 대륙 전선에 비하면 새 발의 피로구만.”
이 전쟁에서.
아인들은 나가의 본대를, 요정들은 네크론과 혈족의 본대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대륙 전선을 담당하는 인류는 6대 마족의 모든 주력과 맞서 싸워야 했지만…….
“그나마 좋은 소식이군요.”
“좋은 것까진 아니지. 시간이 없단 소리야. 해양 전선이건 대륙 전선이건 하루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어질 거다.”
“뭐 어쩌겠습니까? 산맥 방어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고역인데.”
할바론이 어깨를 으쓱였다.
“청성께서는 생각이 다르신 것 같던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못 들었나? 청성께서는 도마뱀 군주의 재림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야. 마우나 로아나 옛 귀족이 깨어나는 정황만 봐도 확실하지.”
“그건…….”
“군주가 깨어나고 힘을 완전히 되찾은 뒤에는 너무 늦어. 용현과 공허의 사도가 각각 거미 군주와 시간의 군주를 어떻게 토벌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할바론은 질문을 끝마치기 전에 시선을 이슬라에게 주었다.
입을 떠듬거리는 이슬라의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슬라는 그런 거 모른다! 미천한 필멸자들만 그런 지식에 의존한다! 용한테는 그런 지식 따위 필요 없다!”
“그러시다는군. 우리 위대한 이슬라와 달리 미천한 인간 페이쿼리어인 너는 답을 알고 있겠지?”
“예. 용현은 한계에 달한 거미 군주의 봉인을 먼저 깨트렸고, 공허의 사도는 시간의 군주의 봉인이 깨지자마자 바로 싸웠다고 배웠습니다.”
카이센의 대답에 할바론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이슬라에게 눈을 짐짓 흘기다가 또 물어뜯겼다.
“봐라. 그 괴물 같은 양반들도 초기 결전을 노려야 한단 걸 알았던 거야. 놈들의 몸 상태가 완전해진 다음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거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산맥에 웅크리고 있다간 너무 늦어버릴 거다.”
그러자 이슬라가 까치발을 들더니 은근슬쩍 카이센의 귓불을 잡아당기고는 속삭였다.
“이슬라는 용현을 직접 만나본 적도 있다. 부러운가?”
“?”
“뭐냐, 그 눈은…… 지금 용의 말을 못 믿겠단 것인가! 인간 주제에 용을 무시하는 것인가!”
아니…….
300년 전의 인물을 무슨 수로?
“사실 이슬라의 나이는 300살이 넘는다. 엄밀히는 말이다.”
“허…….”
“이건 카이센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인 것이다.”
“흠…….”
“그 반응은 뭐냐? 존경심을 보여야 정상인 것이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젓자, 이슬라가 펄쩍 뛰어올라 카이센의 머리를 콱 깨물었다.
“그러면 아까 말씀하신 그 무장 열차가─”
“─장갑 열차다.”
“그 장갑 열차가 공격을 위해 만들어졌단 겁니까?”
“제작이야 공수 겸비로 만들었다만 청성께서는 그런 목적으로 쓰실 것 같더군.”
이슬라의 송곳니가 박힌 정수리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와중에 카이센이 물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청성의 판단은 필멸자의 생각을 열 수는 앞선다.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애송이였던 시절부터 나돌던 말이지. 청성께서는 어떠한 판단도 섣불리, 무의미하게 내리는 법이 없다. 잘 알아두도록.”
로베리스가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턱을 매만졌다.
“그러면 공세로 전환되는 게 확실한 거군요.”
“그게 아니면 내 부하들이 왜 매일 철야에 피똥을 지려가면서 해양 전선을 공략하고 있겠냐?”
“되도록 빨리 와주실수록 저희도 좋습니다. 2개 전선을 합쳐서 남벌(南伐)을 시작한다, 라…….”
남벌.
그 단어가 가진 뜻은 뭔가 가슴 깊숙이 스몄다. 가슴 깊숙한 곳, 증오라는 곳에.
“아직 인간들에게는 말하시지 않은 것 같으니 너희만 알고 있어라. 이슬라, 너 말이다, 너! 너한테 하는 말이다. 이 입이 방울보다도 가벼운 녀석아.”
“이슬라는 용이다! 어떤 종족보다도 입이 무겁다!”
“퍽이나.”
“이미 한 달 전에 폭염 경보를 발령하셨습니다. 그 정도 중요 정보는 곧 공개하시겠죠.”
그리고 로베리스와 할바론은 또 몇몇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할바론의 부하가 와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고 로베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산 중턱의 정자에서 나누었던 재회의 시간이 끝났다.
“할바론은 이제 떠나는 건가?”
“그래, 나 없으면 똥조차도 제대로 못 싸는 놈들뿐이니 어서 가봐야 한다.”
“이슬라도 할바론이랑 같이 가고 싶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네가 있으면 모든 군함이 내부 폭발로 가라앉을 텐데.”
“크아아앙!”
달려드는 이슬라를 노련하게 제지한 할바론이 말했다.
“장난이다. 청성께서도 하도 독촉하시니 빨리 승부를 내야겠지. 너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라. 곧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러자 이슬라의 눈이 맑게 빛났다.
몸속의 빛이 눈동자로 모두 드러나는 그런 미소였다. 생명이 저렇게도 웃을 수 있구나, 싶었다.
“진짜냐! 이슬라 최선을 다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그래, 열심히 해라. 로베리스, 다음에 보지. 그리고 카이센이라고 했나?”
“예.”
“네 스승은 아주 훌륭한 녀석이었다. 그 녀석의 제자였단 사실을 평생 자부심으로 품어라.”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냐? 그놈이 기뻐하겠구나. 자기가 하도 한심해서, 나중에 제자를 받게 되어도 존경은 못 받을 것 같다며 걱정했었거든.”
그러자 로베리스가 피식 웃었다.
“선배님께서 그러셨습니까?”
“그래! 그놈이 나한테 그런 푸념을 다 했다니까.”
먼 기억의 바다 저편…….
카이센은 닿지 못하는 시간대의 일을 말하는 할바론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그리고 그 시간대의 기억과 슬픔의 표정은, 뭉클거리면서 영혼의 공백에 스며들었다.
“……감사합니다.”
그 뭉클거림을 표정 밖으로 내비치고 싶지 않은 쑥스러움에.
그리고 그런 쑥스러움 너머, 마음을 진심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고개를 깊숙이 숙여서, 어머니와 스승의 전우에게 예를 갖추었다.
“뭐가 말이냐?”
“방금 그분의 이야기를 해 주셨잖습니까.”
어떤 책에도 실려 있지 않은 울림들, 오직 그 시대를 같이 살아간 이들만이 알고 있는 기억들.
웃으며 죽은 스승에 대해서 더 알고 싶지만, 이제는 더 알 수 없으므로…….
이렇게 누군가에게 그 기억을 듣는 것만이 그분을 향한 호기심과 존경심을 채우는 일이었다.
“하.”
할바론이 헛웃음을 흘렸다.
“카밀라 그 녀석, 자신을 똑 닮은 제자를 받았구나. 분위기가 똑같아. 맑고 강하지.”
* * *
「적색산맥에서 총 27번의 충돌이 있었고 그대들은 지금까지 총 27번의 침탈을 격파해냈다.」
로베리스의 예상대로였다.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청성의 미른가디아는 적색산맥의 주봉, 신화봉(神火峰)에 전군을 사열시켰다.
전군을 사열시킨 것은 산맥 방어선을 결성하던 첫날 이후 처음이었던지라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족들의 군세는 흩어진 게 아니며, 저 대륙 남쪽에서 지금도 분명한 위협으로 인류를 겨누고 있다.」
일률적으로 도열한 페이쿼리어들의 백발이 산바람에 나부꼈고, 각각의 성검이 햇빛에 찬란하게 반짝였다.
「마족과의 타협은 불가능하다. 산맥 방어선 때문에 북방 공략을 포기했을 리는 없다. 인류가 생존할 유일한 수단은 마족들을 이 땅에서 절멸시키는 것뿐이다.」
“……!”
「한 달 동안의 원정 준비를 마치고 제1방면군을 선봉으로 인류는 반격에 나선다.」
“……?!”
「방어전은 끝났다. 이제, 탈환전의 시작이다.」
제1, 제3방면군의 도원수와 페이쿼리어들이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그에 따르듯.
그들 뒤로 시립한 장교들이 일제히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는 소리가 산봉우리를 울렸다.
「먼저 중부 전선의 활로를 뚫어서 아인의 서부 전선과 합치는 것이 이번 원정의 목표다.」
심히 혼란스러운 결정이었다.
그러나 탈환전, 그 어구가 가져다주는 울림은 그 모든 혼란을 뒤엎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사기충천의 함성은 산맥을 뒤덮을 정도로 격렬했다.
“……한 달 동안 준비를 마친 뒤 선공이라니, 이 천혜의 요새를 포기하고 왜?”
하지만 간부들의 생각은 달랐다.
사열식을 끝마치고 주둔지로 향하는 승강기 내부에서 트발이 말했다.
“모든 방면군이 제법 큰 손실을 입었는데 말이지.”
“산맥 요새도 타격이 커. 보수해서 지키는 것보단 나가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신 거겠지.”
“흐음, 갑작스러운 결정이란 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네.”
알리도나가 곰방대에 담뱃불을 붙이려 하기 무섭게 동료 모두의 지탄을 받았다.
“이 썅! 밀폐된 공간에서 담배 피우면 그 주둥이랑 곰방대 꿰어 버린다고 했지 않습니까!”
“이건 신성한 연기야. 이 냄새를 맡으면 전설의 무녀 프리데 님의 축복이 너희 모두에게 깃들지 않겠니.”
“개소리로 흡연을 합리화하고 자빠지셨군요, 골초 아줌마.”
“뭐? 아줌마?”
밀폐된 공간에서 예절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아마 지금과 같은 상황에 단장이 카밀라였더라면 알리도나를 쥐어 패지 않았을까.
카이센은 침묵을 지키는 로베리스에게 공손히 시선을 던졌다.
“군사적 열세 속에서의 공세 전환이라니, 이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용검전>에서 뭘 배웠냐. 전략을 세우는 건 페이쿼리어의 역할이 아니야. 우리는 격변하는 전황에서 그때그때 적확한 전술만 세우면 돼.”
“분명 그렇게 배웠습니다만, <케르크누드>에서 리아는…….”
“샤론 선배님의 제자 말이로군. 거점 방어 체계였던가? 그 보고서는 읽었다. 그 녀석은 예외로 하지. 아니, 그래도 청성 직하의 지휘 체계에 소속돼 있었다면 그 녀석도 예외가 아니었을걸.”
그때 승강기의 문이 열렸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돌풍과 주둔지의 소란은 귀가 울릴 정도로 깊었다.
승강기 내부에서 그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며 로베리스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다. 청성 각하를 믿어라, 무조건적으로. 할바론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너와 난 내다볼 수조차 없는 미래까지도 통찰해서 승리로 엮어내는 분이니.”
그때 당신은 알고 있었을까.
그 마지막 싸움을 승리로 엮어내기 위해서는, 당신이 죽어야만 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다만 각오하고 있었을까.
나는 모른다…….
항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