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44)
가짜 용사 이야기-44화(44/310)
제44화
정찰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을 때 반가운 얼굴과 재회할 수 있었다.
리아.
리아 알터 타스알포.
제국 귀족의 귀티로 찰랑거리던 금발은 새하얗게 바래서 윤기와 탄력을 잃은 채였다.
“오랜만이라고 인사하면 이상하려나?”
어딘가 수줍고 어색한 인사를 건넬 때, 마주 보는 눈동자는 카이센과 똑같이 황금빛의 용안이었다.
그 ‘같아짐’은 반갑다기보다는 슬픈 느낌을 주었다.
외모가 같아지면서 삶의 길 또한 같은 길을 걷게 되는 페이쿼리어의 운명이란 이런 것일까.
“벌써 임관했구나.”
“너랑 걸린 시간이 똑같아.”
“내가 8개월이었고 넌 8, 9, 10, 11, 12, 13, 1, 2…… 그러네.”
“스승님이 카밀라 님께 자랑할 게 생겼다고 막 웃으셨었어. 올리에르 수석 교관님과 함께.”
“전황이 다급하다 보니 임관 과정이 많이 단축된 건 아니야?”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설마 무능한데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뒷말을 생략한 건 아니겠지?”
입을 다물면서 어깨를 으쓱이자, 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마구 따지고 들었다.
그러기도 잠시, 서로 반쯤 고개를 저으면서 맥없는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 소리는, 기억 깊은 곳을 울리는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에, 용사가 되기 전 소녀 때의 장난기가 남아 있어서 그랬던 걸까.
<아퀴타이나>에서 모두와 함께 있던 시절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나게 해주었던 건.
“넌 변한 게 없구나.”
그러자 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 덕분이지.”
“내 덕분?”
“그때, 네가 스승님과 허무하게 사별하지 않게 해 주었으니까…… 만약 그랬으면 나도 어떻게 됐을지 몰라.”
샤론 알터 타스알포는 리아가 임관하는 모습까지 본 이후에 죽었다고 했다.
오랜 친구와 다르게.
살아서 제자가 장성하여 당신의 성검을 계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먼저 죽은 친구와 다르게.
준비된 이별의 고요 속에서 많은 기쁨과 슬픔과 추억을 나누고 갈 수 있었으며.
그리고 또 이제 만날 수 없는 친구와 다르게.
<위용검전>에서 옛 친구와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후배들에게도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고도 했다.
“다 네 덕분이야.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네게 고마워하셨어.”
감정이 절제된 말이었다.
몇 번이고 슬픔을 곱씹어 그 슬픔을 억누른 말이었다.
먼저 겪어 봤으므로, 그 무엇으로든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단절의 슬픔을 잘 읽을 수 있었다.
“난 말이야. 스승님이 죽을 때 시간이 너무 없었어. 서로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듣기만 해야 했지.”
“카이센.”
“너나 샤론 선배님은 그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됐다니 다행이야.”
이제 다시 만나러 갈 수 없고, 다시 만나 이야기할 수 없는데.
만나고 싶은 마음만은 결코 사라지지를 않아서…….
스승을 이야기할 때면 가슴에 뚫린 구멍에 아픔이 치받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고마워. 그렇게 차분하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괜찮아 보이는구나. 많이 걱정했는데.”
“왜?”
“왜냐니…… 그렇게 모른 척할 필요는 없잖아.”
“뭐를?”
“설마 정찰대는 모르는 거야? 작전 회의에서만 언급된 건가?”
리아는, 낭패라는 듯이 미간을 짚었고 대답을 몇 번이고 얼버무리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아우렐리노플>을 지키는 우루크 클랜의 우두머리가 바로 키랄 클랜이래.”
“……!”
“작년 이맘때 <아리스타포>에서 백골 병단과 흑장미 병단을 궤멸시켰던…….”
총력전(總力戰),
아우렐리노플 공략 (2)
「그대들 모두 알다시피 <아우렐리노플>은 전란의 세월 동안 구공화국의 핵심 요충지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어쩌면 당연한 순리이게도.
함락당한 지금 시점에서는 심연의 영토 침공의 최고 거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마족 중부 방면군은 지금 마우나 로아를 잃을 때의 대패로 군사력이 어느 때보다 약화되어 있다. 이는 <아우렐리노플> 공략의 천재일우의 기회다.」
이것은 처음 주어진 기회…….
또한 동시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아우렐리노플> 공략과 그 너머 남벌은 영원히 시작되지 못하리라.
“하지만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도원수 멜빈이 입을 열었다.
“<아우렐리노플>은 과거 칠대도시 중 하나, 그 방위 능력은 가히 난공불락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게다가 적 수비군은 키랄 클랜이 이끄는 80만 우루크 대군과 창백한 준남작이 이끄는 혈족 군대 20만!”
부원수 레나탈이 목소리를 더했다.
“거기에다 6대 마족 이외의 다른 군소 마족들을 모두 합한다면 그 숫자가 500만은 족히 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중부 전선 전군이 그곳으로 모일 겁니다.”
“그에 비해 산맥 방어군은 하나로 결집시킨다 해도 그 숫자는 120만. 이 수치는 물론 모든 방어를 포기했을 때입니다.”
“산맥 방어를 포기하는 건 역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전투에서 고정 진지가 아닌 장소에서의 승률은 2할조차 안 됩니다.”
도원수 아시울프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물었다.
“총력전을 감행하실 작정이라면, 키랄 클랜의 기병대를 누가 돌파하겠습니까?”
“키랄 클랜은 하이 타르크 중 가장 많은 정예 기병 부대를 거느린 클랜! 그 늑대 기병들의 무력과 잔혹성은 이미 무수한 전투 등에서 입증된 바!”
“그래, 그 무패의 백골 병단조차도 작년에 키랄에게 전멸당했었지 않소…….”
도원수와 부원수, 그리고 영관급 장교들이 짧은 탄식을 주고받으며 카이센의 눈치를 살폈다.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그때 전사한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의 직계 제자이자, 그 학살의 수라장에서 살아남은 장본인.
“적색산맥에서 전쟁의 양상이 공성전으로 변하면서 기병 위주의 키랄이 맥을 못 추리고 있습니다만, 평지에서의 전투는 역시…….”
“산맥 방어선은 지금도 굳건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굳이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실 필요가……?”
“각하, 꼭 나가셔야 한다면 키랄을 먼저 산맥에서 대파시킨 다음 나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휘관들이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청성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적색산맥은 인류에게 안락한 장소였다.
청성은, 미래를 보지 않고 오직 현재만을 바라보는 인류의 한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 내일 이 시간에 전군을 출병시킨다.」
“그렇다면…… 키랄 클랜의 상대는 대체 누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침묵을 지키던 페이쿼리어들의 대열에서 문득 목소리가 나왔다.
곧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서는 대부분 밀려 나오려던 반발의 목소리를 주워 담았다.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그 이름이 단기간에 쌓아 올린 무훈은 그토록 높았다.
“자네가 하겠다고?”
“예, 멜빈 각하.”
“타후프 클랜의 삼천 명을 베던 것과 누위긴 클랜을 상대로 돌진하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되네.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평원 지대로부터 이어지는 정면, 서문을 돌파하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이번 전투는 다르단 말이네. 적의 단위가 달라! 수없는 명장들이 키랄의 발치에 짓밟혀 전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네!”
“문제 되지 않습니다.”
“자네 스승뿐만이 아니야! 엘티레 알터 플라디마르테도 <아우렐리노플>이 함락될 때 키랄에게 죽었다! 그런데 그걸 자네 홀로 정면으로 돌파해 내겠다고? 3분 안에?”
도원수 멜빈의 목소리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의문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쩌면, 반대의 목소리 속에서 유일하게 찬성을 던지는 젊은이의 치기에 대한 훈계 같기도 했다.
청성의 고요한 눈동자가, 새하얀 빛과 함께 카이센에게로 향했다.
「원래 철십자에게 정면 돌파를 주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이센, 그대는 그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로 배치하려 했었다. 그 까닭을 아느냐?」
“모릅니다.”
「복수심에 휘말려 냉정함을 잃는 미래를 관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100개의 미래 속에서 99번이나 평정심을 잃고 그곳에서 죽었다.」
문득, 백골 병단이 눈앞에 떠올랐다.
떠오른 기억 속에서, 도끼에 갈라져 죽고 둔기에 으깨져 죽고 늑대에게 찢겨 죽은 사체들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백 발이 넘는 화살과 도끼날에 유린되어 온몸이 으깨져 털가죽 밖으로 허연 뼈가 튀어나온 채 죽은 백곰 엘토람이 떠올랐다.
빗속에서, 마지막으로 웃으며 죽던 카밀라의 미소가 떠올랐고 그때 얼굴을 타고 흐르던 눈물의 온도가 생각났다.
그 거두지 못했고.
이제는 거둘 수 없는 주검들은.
화산재 속에서 어떻게 썩고 어떻게 메말라 갔을까.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던 그들의 죽음의 끝자락에는 애도조차 표할 수 없었다.
나 혼자 살아남아…….
나 혼자 그 죽음에서 벗어나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도저히 그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가슴 깊숙한 곳, 그 너머 영혼의 심층에 뚫린 구멍에서 불이 이글거려서 마른침이 자꾸만 나왔다.
카이센에게 있어 추모식은.
애통해하며 우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죽음으로 그 죽음들을 갚는 칼의 의식이어야만 했다.
“평정을 유지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럴 마음도 없고.”
「…….」
“하지만 반드시 모조리 베어서 뚫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겠습니다.”
다시, 장내에서 웅성거림이 커져갔다.
고르고티아 알터 지에르다가 휘파람을 불었고, 그 복수심을 이해하는 세이라와 리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청성이 다시 물었다.
「그 자리에서 용령을 해방하는 걸 불허한다고 해도?」
청성은 감정을 힘으로 바꾸는 필멸자들의 힘을 알고 있었다.
몸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분출되는 그 뜨거운 것은, 용사들에게 있어 힘의 간헐천이었다.
그리고 그 뜨거움 속에서, 용사들의 몸은 삭아서 죽어갔다. 마치, 스스로의 몸을 불태워 세상을 밝히고 스러지는 장작처럼.
“예, 각하.”
우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용령 해방이 없이 키랄을…….”
“자네는 용령이 없으면 다른 페이쿼리어보다 못하지 않나……!”
그런 소동을 칼로 끊어내듯, 필두 페이쿼리어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이 입을 열었다.
“철십자가 전력으로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을 보좌할 테니 모두들 심려치 마십시오.”
“무엇이……?”
“자네는 찬동한단 건가……!”
“이 말도 안 되는 돌파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청성께서 명령하신다면 따르는 게 페이쿼리어로서의 본분. 오직 본분을 행할 뿐입니다.”
청성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새하얀 속눈썹으로 덮인 눈동자 안쪽에서, 인간은 볼 수 없고 보지 못하는 미래가 수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참 뒤에, 모든 웅성거림이 적막으로 가라앉았을 즈음 그 눈이 꽃이 피어나듯 조용히 열렸다.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의 철십자 기사단과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에게 <아우렐리노플> 서문 돌파를 맡긴다.」
* *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정 회의가 마무리되고 철십자의 진지로 이동할 때 로베리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두 가지만 약속하면 된다.”
“말씀하십시오.”
“정면을 돌파하되 불나방 짓은 하지 마라. 그때는 널 도우러 가지 않을 거다. 부하들에게 개죽음을 명령할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또 내게 감사해할 것 하나 없다.”
로베리스가 주먹으로 카이센의 가슴 한복판을 때리며 말했다.
“너만 그분의 원수를 갚길 원하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키랄에게는 그것 말고도 빚진 게 많다.”
“……다른 한 가지는 뭔지요?”
“감정을 표출하는 건 이걸 마지막으로 해라. 특히나 복수심 같은 감정은 말이다.”
“어째서입니까?”
“용사란 무릇 그래야 해. 부정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그 말을 맺을 때.
로베리스는 이 세상 너머, 세상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현자처럼 느껴졌다.
“카이센, 네 스승을 뛰어넘어라. 그래서, 그분의 스승 라미네아 님과 같은 영웅(英雄)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