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47)
가짜 용사 이야기-47화(47/310)
제47화
기원력 1698년 2월.
붉은 여름 7년째, 연초 대반격.
적색산맥 이북으로 치받치던 심연의 공세를 받아친 인류는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한다.
“이 반격전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가 <아우렐리노플> 공략전이라는 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양측 모두에게 적색산맥 이남의 자색 도시, <아우렐리노플>은 전략적 가치를 형언할 길이 없었다.
“그 이유는 뭘까. 그암 페이지, 네가 대답해봐라.”
“대륙 남부를 광역적으로 연결하는 벨리소르 대하(大河), 그 물줄기가 <아우렐리노플>에서 분수령을 두고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다. 인류는 이 벨리소르 대하를 보급선으로 연결해 대륙 남부를 겨눌 전진기지로서 사용하길 원했지. 그에 반해.”
심연(深淵)은.
구공화국 영토를 통제하는 내륙 거점이자 북진을 예비하는 전진기지로 이 도시를 지켜내려 했다.
“전투의 개요는 도시 하나를 놓고 겨루는 국지적 공성전이었으나, 양측에서 가용한 병력의 규모는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는 전면전, 즉 총력전이었다.”
이때 <아우렐리노플>에는 ‘옛 귀족’이 포진하고 있었다.
기원전 고대에 전설적인 위명을 떨쳤던 존재들, ‘로텐의 영멸대(永滅隊)’.
<잊혀진 왕들> 중 하나, 도마뱀 군주 네이갈라스의 근위대로 그 숫자는 일백.
“이들 전원이 귀족의 권능을 나누어 받았으므로, 영멸대 전원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옛 귀족과 맞선다는 것과 같았다.”
최악의 마족 군단을 꼽을 때 반드시 세 손가락 안에는 꼽히는 존재들이었다.
“모든 렙틸리언, 즉 리자드맨들은 영멸대의 일원이 되기를 소망했다고 하니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 없겠지.”
이러한 로텐의 영멸대를 토벌하기 위해, 청성의 미른가디아는 페이쿼리어 세 명을 동시에 파견하는 초강수를 둔다.
제1석,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
제2석, 고르고티아 알터 지에르다.
제3석,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이 세 페이쿼리어의 활약 여하에 따라 인류 반격의 귀추가 결정될 것은 자명한 사실.
“반격의 향방이 전해지던 이날의 역사는 1698년 2월의 여름, 남부 전선 최전방에서 시작된다.”
총력전(總力戰),
아우렐리노플 공략 (5)
모래가 가루로 바스러질 때의, 허무한 절삭음.
29번째 ‘로텐의 영멸대’가 아라다만텔의 칼날 위에서 모래로 흩어졌다.
그 흩어진 모래가 생명의 씨앗이라도 됐을까, 30, 31, 32번째 영멸대가 그 모래 속에서 생명을 얻어 일어섰다.
“이 자식들 대체 뭐야! 끝도 없이 일어나잖아!”
모래가 육신을 이루는 것일까.
고대 파충류의 골갑(骨鉀) 속에서 모래가 꿈틀거리는 영멸대들은 모두 ‘수확의 낫’을 사용했다.
닿은 대상으로부터 영혼을 수확하는 그것은 한 번의 피격으로도 치명상을 입힌다.
“각하, 로베리스입니다! 영멸대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하나하나가 일반 데몬급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존재 자체가.
그 초월적 영혼의 격(格)이.
감히 마주하는 필멸의 의식을, 모래의 허상 속으로 가라앉게 만들어 익사시키려 들었는데…….
「조심해라, 페이쿼리어!」
용사 파티 멤버들은 어떠한 정신적 타격이 없이 영멸대와 맞설 수 있었다.
세츠넨이 뇌향 공명으로 그들의 의식을 지켜 주었기에.
해골 투구 안쪽에서 잔광처럼 일렁이는 파충류의 사안(蛇眼)이 그들의 의식을 범하지 못했다.
[로텐의 영멸대는 도합 백 명이다. 힘을 깎아야 한다. 한계에 달하면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하! 상급 귀족이란 놈이 뭐 이렇게 맥아리가 없나 했더니만 그런 거였구만!”
“멍청아, 지금 허세 떨 때야?”
영멸대가 하나로 합쳐진다면, 아니 하나로 합쳐지게 만들려면…….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99번째 영멸대를 베어야 한단 소리가 아닐까? 모두가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각하, 창명검은 그때 쓸 수 있겠군요.”
[그렇다. 지금은 영혼이 100개로 분열된 상태라 창명검을 써서는 안 된다.]“그러면 제가 그렇게 되도록 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용령 해방 허가를.”
허가한다, 라는 승인이 돌아오기 무섭게.
팅…….
신룡의 권능이 필멸의 육신에 임하는 청음이 모래의 소용돌이를 가파르게 찢어발겼다. 그리고.
뇌정벽력(雷霆霹靂).
폭우 속에서 벼락이 연달아서 내리치듯이, 모래의 땅 위로 벼락의 무늬가 수없이 새겨진다.
제1격.
제2격.
제3격.
뇌성이 울릴 때, 칼날에 의해 말끔하게 절단된 골갑 너머에서 귀족의 육신이 모래로 흩어져갔다.
「……?」
그리고 그 모래 속에서 다른 영멸대가 일어설 때, 일어서는 동작이 끝나기도 전에 그 몸이 모래로 부서져갔다.
「……!」
전장을 내달리는 붉은 섬광.
찰나 동안에 무수히, 통과한 자리에 참격의 자취를 남기는 초월의 빛.
그 빛의 자취 위에서, 모래로 무력하게 부서져 흩날리는 고대의 영멸(永滅).
“빨라, 영멸대가 일어설 시간조차 없이……!”
몸속 깊은 곳, 영혼에서부터 폭발하듯 솟구치는 용의 힘이 시간 감각을 길게 늘인다.
신체 능력의 비현실적인 증강.
시신경이 과부하에 달하고, 망막에 맺히는 세계는 서서히 무채색으로 변해간다.
즉, 초월(超越)에 이른다.
증강된 각력으로 지면을 한 번 박찰 때마다, 공기가 흐트러지고 모래밭이 깊숙이 파인다.
「……!」
100개로 흩어져 있던 절망(切望)의 소용돌이가 이윽고 하나의 형태로 결집하기 시작한다.
모래의 폭풍, 그 폭풍을 휘몰며 태어난 100번째 영멸대.
그것은 영멸대의 수장, <잊혀진 왕들>이 부여한 옛 귀족의 힘을 온전히 하나의 영혼에 갖춘 자.
100개의 수확의 낫은 영멸대의 양손에서 2개의 낫으로 합쳐져 교차되었다.
“그만 물러나라, 카이센. 넌 충분히 해줬어. 고르고티아, 메른. 우리들이 저놈의 발을 묶겠다. 창명검의 사격 각도를 확보해!”
“아니, 창명검을 장비하는 건 아직이야. 우선 혼의 껍질을 벗겨내야 해! 나 없이는 힘들걸.”
“이제 우리 모두 체력의 초읽기에 들어갔다. 장기전은 불리해!”
절망적으로 거친 호흡을 쏟아내면서, 카이센은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육신이 부서지기라도 할 것만 같은 격통이 일었으나, 아직 용령은 활성화된 상태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칼을 휘둘러야만 한다.
‘그렇죠? 그런 거죠?’
그때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언젠가 보았던, 아라다만텔을 쥔 카밀라의 뒷모습.
당신께서도.
당신의 삶을 깎아 나가면서 싸우는 나날 속에서 늘 이런 결의를 다지셨을까 싶었다.
“……아라다만텔, 아직 싸울 수 있지?”
그 질문에 대답하듯, 아라다만텔의 칼날에서 일렁거리던 붉은 기운이 더욱 맹렬하게 작열한다.
“좋아, 가자.”
육신을 필멸의 한계 너머 초월의 영역으로 밀어붙이는 힘은 앞으로 몇 초 남지 않았다.
다시, 땅을 박찼다.
체내에서 매섭게 회오리치는 힘이 각력을 수십 배로 증폭, 몸을 일순간 전방으로 쏘아낸다.
“……카이센, 너!”
수확의 낫이, 소름 끼치는 파공음을 터뜨리며 날아들었다.
그 낫의 서슬 위에서, 수확된 영혼들이 이리저리 뒤엉킨 채 찢어지게 절규하고 있었다.
왼쪽 낫은 칼의 궤도에 미리 들어와 방어를 굳히고 있었고, 오른쪽 낫은 그 이후의 살(殺)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온다면……!’
아라다만텔의 칼날과 수확의 낫이 충돌하며 고막을 찢는 파열음이 터진다.
쩌어어엉……!
동시에 양쪽 무릎을 굽혔다. 급작스러운 관성 제어, 모래밭 위로 미끄러지는 몸은 반격의 궤도를 완벽하게 비껴 나갔다.
──사아아아악!
그렇게 계산했으나, 얼굴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죽음의 열상감…… 입매가 전율한다.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군.
하지만.
방어와 회피가 만들어낸 시간 여유는 찰나, 하지만 초월자들의 전투에서는 본래 한순간이 영원과도 같기에 이 시간은 크다.
집중력이 더욱 가속된다.
신체 능력은 더욱 증폭된다.
뇌음(雷音), 그 찰나의 틈새로 비집고 들어간 칼날에 영멸대의 왼쪽 팔모가지가 절단된다.
빠르게.
더 빠르게.
곧장 발현되는 초고속 재생, 소용돌이치는 모래가 놈의 팔을 재생시키나 상관없다.
목표는 토벌이 아니라 유예니까.
붉은빛의 향연 속에서, 미처 시간으로 맺히지 않은 찰나 속에서, 납도와 발도가 무한히 반복된다.
[무리하지 마라, 카이센! 뒤로 물러나라. 잠시 뇌향심공명진의 연결을 끊고 뇌격의 힘을 사용할 것이니.]고귀한 떨림이 뇌리에 직접적으로 전해져왔다.
“아직…… 더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은 초월의 힘을 휘두르고 있다.
역사상 모든 페이쿼리어들이 휘둘러온 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힘을 펼칠 수 있다.
물론 한정적인 건 안다.
그러니 그 한계 속에서 다른 페이쿼리어들이 하루 동안 할 일들을 모두 이루어야 한다.
“물러나, 카이센! 뇌향께서 놈을 날려버릴 거다. 그렇게 무리할 때마다 네 수명이 몇 년씩 소모되고 있는 걸 알 텐데!”
로베리스의 안타까운 질책이 전해져온다.
상관없다. 애초에 오래 사는 걸 바라지도 않고 그런 안락함을 원하지도 않는다.
일찍 죽게 된다고 해도 좋다.
벨 수 있는 것들을 다 베어낸 뒤, 그래서, 저 남쪽 끝, 다시 어머니에게로 갈 수 있다면…….
‘그 무덤 앞에 절 한 번 올리고 기꺼이 죽으리.’
그 결의에 호응하듯 아라다만텔이 세차게 울부짖는다.
초월적인 열량의 신통력, 신룡의 힘이 쇠사슬의 형태로 배출되어 칼날을 휘감는다.
발로 지면을 박찬다.
몸을 휘돌린다.
회전력과 마나체인과 관성을 하나의 참격으로 엮어낸다. 그 모든 힘으로.
“────참(斬)!”
세계가 베어진 듯, 온갖 소음이 일순간 끊기는 적막.
그 적막의 끝에서.
성검의 칼날이 수확의 낫을 깨어내고 그 너머 영멸대의 육신을 반으로 가르며, 혼의 핵(核)을 온전히 노출시켰다.
“!”
“!”
고르고티아와 메른은 그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활시위에 신성(神聖)이 걸렸다.
창명검이란 창세칠편의 시편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창명시편을 칼의 형태로 묶어놓은 것.
창명의 힘은 창세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를 결박하여 창세 그 너머, 외우주로 추방시키는 절대적인 힘을 자랑했다.
옛 무녀, 투레이나의 죽음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청성의 미른가디아가 그 힘을 어떻게인지 복고해냈다.
복고했을 뿐인가, 본래 무수한 말을 읊어야만 발동시킬 수 있어서 실전성이 뒤떨어지는 그 힘을 칼의 형태로 집약.
옛 귀족을 상대하기 위한 특수 병기로 총 28자루를 만들어낸다.
현재 인류 진영에 남은 창명검은 총 16자루였는데 더 이상의 제작은 모종의 이유로 불가능했다.
바로 그 창세의 빛이.
다음 순간, 영멸대의 핵(核)을 양쪽에서 교차 관통했다.
모든 빛이, 이 세계에 깔려 있던 모든 빛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한순간.
핵에 빛의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빛은 점차 눈이 부시도록 강렬해졌는데, 영멸대의 사방에서 사슬로 전개되어 그 육신을 결박한다.
「──────!」
영멸대가 체통을 잃고 미친 듯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나,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이 힘은 창세신의 권위.
<온 것들>조차 아득히 상회하는, 섭리의 창조자들의 힘이 그 영혼을 붙잡아 외우주 너머로 추방한다.
「모두들 어서 내 등으로 올라라. 옛 귀족의 정원이 붕괴하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쿠구구구구…….
도시의 내성, 사막화의 힘의 중심부이자 옛 귀족의 거처였던 모래밭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예, 각하. 카이센은?”
“아니, 저기, 저기에 쓰러져 있습니다!”
“너희들은 장난 아니게 무리했잖아, 내가 데려올게!”
고르고티아가 지에르다를 휘두르자, 양쪽으로 갈라진 칼날로 활의 기능을 수행하던 성검이 접히며 칼의 형태로 돌아왔다.
그 칼을 등에 차면서, 쓰러진 후배 페이쿼리어를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투지가 남아 있어서, 한 손으로는 아라다만텔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게 참 경탄스러웠다.
“다 끝났어. 그거 칼집에 꽂아!”
“저, 저는…….”
“이야, 너 진짜 쩌는데? 마우나 로아를 잡았다는 소리를 방금 한 번 보고 납득했다고.”
“고르고티아, 서둘러라! 시간이 없다!”
“알겠어! 전 각력으로 도약할 테니 먼저 날아오르시죠, 각하!”
암반들이 무너져 지하로 무수히 떨어지기 직전, 세츠넨이 날개를 퍼덕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문제가 생긴 건 그때였다.
고르고티아가 그 위로 오르기 위해 지면을 박찼는데, 그때 하필 그 발판이 갈라지며 무너져 내려서 도약의 힘을 죽였다.
“아차……!”
거기에다가 카이센과 아라다만텔의 무게가 겹쳐지며 도약은 더욱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발아래에서는 내성을 이루던 지면이 완전히 붕괴, 둘을 집어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바로 그 위기일발의 한순간, 곰방대의 연기가 두 사람의 몸을 붙잡았다.
“알리도나, 나이스!”
그리고 그 즉시.
트발과 구렌(필중 병단 용사 파티의 전사)의 괴력이 두 사람을 등 위로 끌어 올려주었다.
로베리스가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을 신호로, 세츠넨이 날갯짓에 더욱 힘을 더해 창공으로 솟구쳤다.
“여기는 로베리스. 지금 로텐의 영멸대를 토벌했습니다. 이제 정화 작업을 시작하셔도 됩니다.”
[다들 훌륭했다. 청성의 미른가디아가 전 부대에 전파한다. 부유성이 도시 상공에 안착한 이후 정화 작업을 개시한다. 부상자들을 해당 권역으로 데려와도 좋다.]고르고티아가 휘파람을 불었다.
“캬, 정화 작업과 동시에 광역 치유를 하시겠다? 역시 뭘 하든 예술적으로 하시네.”
“그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거야.”
“그야 저분은 용 아닙니까. 얼마나 오래 사셨는데.”
트발의 대꾸에 알리도나가 어딘가 체념적인 미소를 지었다.
“글쎄, 청성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다고 해. 용현 레인 루드윅과 수룡 예리세리카에게 가르침을 직접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겠다만.”
“세상에나. 난 책 한 권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런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 하고, 저거나 보자고. 오랜만에 전장의 불꽃놀이가 시작되잖아.”
뇌향이 스치듯 지나간 부유성은 곧장 <아우렐리노플> 상공으로 향했다.
정확한 좌표, 붕괴한 내성의 상공에 정확히 안착한 부유성 하단에서 푸른 빛줄기가 쏟아졌다.
그 빛은, 사막으로 변하던 땅에 다시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기적…….
그래, 그건 기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모두가 경건해지게 되는 그런 기적이었다.
그 빛 속에서, 사막이 끝나고 다시 갈색 벌판이 펼쳐져갔다.
도시 외곽에서 말라비틀어져 끊겼던 수맥이 복구되었는지 멀리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시작으로 <아우렐리노플> 일대에서 완전히 메말랐던 벨리소르 대하의 물줄기가, 다시 수로를 따라 흘러오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이지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니까. 이걸 한 번도 못 보는 제국 놈들이 불쌍할 따름인데.”
고르고티아가 로베리스에게 시선을 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이 격전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그리고 첫 탈환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전율이,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 교차했다.
“로베리스, 그나저나 카이센 이 짜식 엄청 물건인데? 가끔 우리한테도 빌려주고 그래라.”
“안 된다.”
“뭐?”
“아마 청성께서 승인해주지 않으실 텐데.”
“흐흐, 이 녀석 봐라? 이유가 정말 그것뿐이야?”
“당연히──”
바로 그 순간, 온몸에서 솜털이 오소소 곤두서며 로베리스의 말문이 막혔다.
눈을 의심한다는 게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몽환의 꿈이 불현듯 악몽으로 변질된 느낌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어서, 한순간 숨을 들이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알리도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 뭐야…… 저, 저 심연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내성이 붕괴된 지하 속에서 솟구친 것은…… 그래, 그것은 도마뱀의 팔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팔은 아니었다.
“뇌, 뇌향 각하, 저, 저건……!”
영혼이…….
구슬피 탄식하고 찢어지게 절규하는 영혼들이…….
기이하게 뒤틀리고 뒤엉키고 뒤얽힌 채 팔의 형태를 갖춘…….
[미르, 당장 거기에서 벗어나. 미르!]뇌가 그 압도적 심연을 의식한 순간, 유전자에 새겨진 원초적 공포로 코와 눈과 귀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아니, 어떻게 이런……?]먼저, 세계가 떨면서 낮게 엎드렸다.
천지에 깃드는 사악한 변화.
인간의 끓는점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열이 지천에서 작열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래는 단 한 번도──]3개의 태양이 공포에 떨며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영겁의 감금에서 왕이 풀려난다…….
긴 역사 동안 두려움의 망각 속에서 잊혀진 고대의 왕이…….
그 광기와 광란으로 이루어진 팔로 부유성을 움켜잡더니, 그대로 으깨 버리면서 무수한 돌 조각으로 붕괴시켰다.
[청성 각하, 여기는 흑장미! 지금 시가지에서 갑자기 렙틸리언이, 리자드맨들이 출현했습니다!]그 순간의 혼돈을.
그 비명과 혼란과 광기를 어떤 역사서도 사실 그대로 묘사해낼 수 없었다.
모든 섭리와 물질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공포의 지배자, 기원전 렙틸리언 왕국의 정당한 주인.
[여기는 철성, 광기가…… 뇌향 각하의 뇌향심공명진이 광기 수치를 견디지 못합니다! 병사들의 머리가 느닷없이 폭발하고 있……] [각하, 여기는 도원수 멜빈. 제1방면군의 피해 막대, 렙틸리언의 대군이…….] [청성 각하, 제1전투비행단 단원 절반이 갑자기 핏덩이로 폭발하여 추락하…….] [제2방면군, 갑자기 산이, 화산으로 변해서 폭발, 용암이 밀려 내려오고 있…… 끄으아아아……!]광범위한 전장에서 미친 듯이 쇄도하는, 죽음과 공포의 떨림들만이 그날의 공포를 어렴풋이 짐작게 했다.
울부짖는 파멸…….
도마뱀 군주, 네이갈라스…….
심연의 주인으로부터 왕의 권능을 받은 이 절대적 악몽이 도대체 언제 영겁의 잠에서 깨어나 <아우렐리노플> 지하에 왕림해 있었던 것인가.
‘아니…….’
옛 귀족 중 근위대였던 로텐의 영멸대가 도시를 지키고 있던 시점에서 예상했었어야 했나?
아니, 장난하는 건가?
도대체 누가 이걸, 이딴 악몽을 예상할 수 있냔 말이다…… 로베리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청성 각하는 이제 없다.”
[예?]“여기는 철십자, 모든 병력에게 뇌향 각하의 명령을 긴급 전파한다. 네이갈라스가 출현했다! 도마뱀 군주 네이갈라스 출현! 모두 벗어나라. 생존을 최우선으로, 전장에서 즉각 벗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