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50)
가짜 용사 이야기-50화(50/310)
제50화
[고정 궤도 연결, 증기기관 점화 가속, 마력 발생, 3, 2, 1. 완료. 기관 작동 요구치 도달.]장갑 열차의 거대한 차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했다.
아인 군대가 진작 예비 시동을 걸어두었긴 했으나, 그럼에도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 뒤에야 열차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카이센은 귀에 꽂은 초소형 장치가 치직거리면서 음성을 쏟아내는 것에 새삼 놀랐다.
[통신 연결을 확인한다. 여긴 거신 49식이다.]“잘 들립니다, 폐하.”
[신식 기술에 당황한 모양이군, 카이센. 이게 바로 과학이라는 거야. 무선통신기라는 물건이지.]“놀랍습니다. 뇌향 각하의 힘을 이렇게 재현해낼 수 있다니…….”
[결만 같지, 아직은 비교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열등해. 겨우 뼈대만 모방해냈을 뿐이다.]이것은 겸양일까…….
뇌리에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뇌향 공명과 달리, 귀에서 울리는 것이란 한계가 있긴 했다.
‘그리고 직접 말을 해야 한다는 한계도 있어.’
이건 화자나 청자가 위치한 전장의 소음에 대화가 묻힐 가능성이 존재한단 소리였다.
뇌향 공명은 위급 상황에는 생각만으로도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한계들을 감안하여도, 아니 더 자잘한 한계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물건이야.’
뇌향 공명이 전장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경험해본 사람은 다 아는데…… 그걸?
[폭식공 토벌 작전 동안에는 내 명령에 따라야 할 거야. 청성께서도 지휘권을 일임하셨다.]“알고 있습니다.”
[이슬라, 네 부하들이 새로 받은 거신 33식은 여러 기능이 추가됐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것들이니 금방 익힐 수 있을 거야. 다행히 실습 상대는 사방에 깔려 있다.]용추 병단의 거신병들은 기존의 낡은 16식 거신에서 33식 거신으로 갈아탔다.
할바론이 이슬라에게 줄 선물로 미리 승강장에 준비해준 물건들이었다.
장갑이 더욱 경량화되어 기동성이 높아졌고, 거대 포신이 복부에 장착되어 발포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슬라는 거신 조종하는 법 따윈 모른닷!] [네가 아니라 네 부하들이라고 했을 텐데.]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저희 몸의 일부인 것마냥 완벽한데요. 엄청난 물건인데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게 누가 만든 물건인데.] [나중에 줬다 뺏으시면 질질 짤 겁니다. 이슬라랑 함께 가서요. 고막 터지실 각오 하십시오.] [이슬라의 부하들은 제 주인을 닮아 예절머리가 없구나. 아무리 그대로 명색이 타 종족의 황제인데 못 하는 말이 없군. 모두 괘씸죄로 즉결 처형해주마.] [저흰 페이쿼리어 병단입니다. 황제고 왕이고 그냥 친구 먹어도 문제없죠.] [이슬라는 용이다! 제일 높은 존재! 용은 예절 따위 필요 없다!] [이제 그만. 육해군 전 부대, 장갑 열차 세 대가 전부 이 수라장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호위해야 한다. 철로를 확보하라.]‘붉은 여름’ 최초의 인류-아인 합동 전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전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 장갑 열차를 인계한 뒤 승강 기지에서 탈출하는 것. 둘, 폭식공 베헤─리크의 토벌.
청성의 미른가디아는 베헤─리크가 네이갈라스 토벌전 때 지대한 위협이 되는 미래를 보았기에 토벌을 계획했다.
아니, 사실 거기서 더 나아갔다.
네이갈라스뿐만 아니라 그 군주의 군벌 세력을 완전히 일소할 계획을 입안한 것이다.
이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그 비루한 삶이 끝나기 전에.
이 세상에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고 가기 위해서.
그렇기에 3개 전선에서 고위 귀족을 각개격파 한 다음, 후방에서 힘을 수복 중인 네이갈라스의 목을 겨눌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날의 싸움이 반드시 승리의 초석 중 하나로 다져져야만 했다.
[폐하, 강철함대 함대장 구스타프 율리우스입니다. 함상 원호 포격이 준비됐습니다.] [잘했네. 전 함대, 49식이다. 폭식공이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장갑 열차에 진입하지 못하게 지연 포격을 가하라.] [제군들은 모두 용전분투하라. 황제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 승리의 영광을!]반격의 향방,
베헤─리크 토벌전 (3)
[여기는 장갑 열차 1701호기! 다수의 적이 철로 위를 가로막고 있습니다!]그날, 7시간의 전투는 악몽의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었다.
기억 자체가 불명료했다.
2개의 작전이 하나의 전장에서 교차하였으므로, 숨을 돌리거나 무언가를 머리에 새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여기는 제3기갑여단의 레베레히트. 장비된 포탄의 숫자가 많으니 사용하지 마라. 그건 해안을 벗어난 후에 써야 할 물건이다.] [알겠습니다.] [흑장미 병단, 정면을 돌파하라. 용추 병단은 장갑 열차의 측면을 지키면서 계속 이동하라!] [하지만 적이 너무 많습니다!]“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끝이 없이, 모래의 폭풍처럼 밀려들어 장갑 열차의 측면에 달라붙던 고대의 군세는──
일발뇌진(一發雷震).
──그 무한한 힘의 폭풍을 찢어내듯, 선명한 일직선으로 붉게 그어지는 한 줄기의 번갯불.
낙뢰 이후의 침묵.
그것은 창세의 섭리 중 하나.
일제히 목이 잘린 시체들 위로 죽음의 적막이 내려앉았고, 그 적막을 부수고 열차가 달려 나갔다.
[캬, 그거 참 언제 봐도 쌀 것 같은 발도술입니다요!]“아니, 실수했다.”
모래 섞인 마른침이 넘어갔다.
목이 잘린 사체들이, 더듬거리며 자신의 머리통을 찾아가더니 절단면에 갖다 붙이는 광경을 보면서.
잠시 잊고 있던 정보에, 심장이 크게 떨리는 걸 느꼈다…….
‘성가시게 됐군. <위용검전>에서 배운 그대로잖아.’
도마뱀 군주, 네이갈라스가 받은 권능은 영혼의 수확.
네이갈라스가 영혼을 붙잡아 두었으므로, 렙틸리언들에게 육신이란 허물일 뿐 영원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육신을 완전히 파괴시켜야만 했다. 혼이 살아 있어도 움직일 몸이 없도록.
“크아아앙!”
지금 바로 저렇게, 이슬라의 망치에 완전히 핏덩이로 짓이겨진 놈들은 부활하지 못한다. 아니면 불태우거나.
“카이센은 나약! 미천! 이슬라는 강함! 위대! 절망하지 마라! 용과 인간의 차이는 큰 것이다!”
저런 말만 하지 않으면 완벽할 텐데.
“왜 이슬라한테는 똑같은 칭찬을 안 해주는 것이냐?”
[와! 그거 참 쌀 것 같은 망치질! 대단하다, 이슬라!]“캬캬캬캬캬캬캬! 더, 더 해도 된다!”
이슬라 병단의 활약도 대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추 병단의 거신들에게 렙틸리언의 한정적 부활 능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포탄 장전 완료! 포격 실시!] [캬! 저놈 저거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렸는데? 이 거신 성능 미친 거 아니냐. 양산형 거신이랑 비교가 안 되는데.] [적 대열 붕괴! 길이 열렸다. 잘했다, 용추 병단.]그에 반해…….
대상의 약점을 겨누어 즉살시키는 것이 검술의 특징인 리아의 고생은 안 봐도 훤했다.
타후프 때 샤론 선배님도 그랬지만, 상성이 너무 나쁜걸.
[카이센, 12-22 지점에서 렙틸리언들이 철로를 파괴하기 시작했어.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이야! 선로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큰일이야. 서둘러줘!]그런 식으로, 혼란은 끝날 만하면 다시 시작되었다.
그저 부르는 곳으로 이동하여 닥치는 대로 베고 또 베었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길 반복했다.
핏물에 온몸이 흠뻑 젖었…….
설마, 이건 내 피인가…….
그렇다면 용혈 혈청을 주사…….
아니, 내 피가 아닌 것 같…….
그러는 사이에 귓가에서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교차하며 전장의 화급함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갑니다.”
[좋은 실력입니다, 페이쿼리어!] [함포, 일제사격 실시!] [1702호기 후미에 붙었다! 지원 바람!]“이동 중.”
[저 괴물들이 기관실을 노리고 있다! 위로 올라탔어! 떼어놓을 수가 없어!]“처리 완료.”
[아주 훌륭한 솜씨다, 페이쿼리어! 이제 동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지가 눈앞이다!] [폐하, 흑장미입니다. 동문을 적 병력이 점거하고 있는데 아직 방어 포탑들이 기관 에너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이슬라가 간다! 도마뱀 녀석들을 다 삼켜주마!] [아니, 우리 쪽에서 해결하겠다. 강철함대, 49식이다. 동문에 일제 포격을 가하라.] [알겠습니다. 하오나 1701호가 휘말리지 않을지 우려됩니다.] [붕괴의 잔해는 장갑 열차의 장갑과 마력이면 뚫고 가고도 남는다. 흑장미 병단은 이제 1703호에 탑승하라.]강철이, 강철의 비가 승강 기지의 동쪽에 무수히 쏟아진다.
석벽을 부숴 무너뜨리는 강철의 소나기, 그 일대를 점거한 렙틸리언들을 살점과 뼛조각으로 분리시켜 흩뿌렸다.
그리고 그 자욱하게 일어서는 먼지의 안개를, 그 돌무더기를 깨부수고 열차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뿌우우우우우……!
우선 1701호 한 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1702호.
마지막으로 병력의 3할 가까이를 잃은 흑장미 병단이 탑승한 1703호까지.
[폐하, 리아 알터 타스알포입니다. 세 차량 모두 승강 기지를 벗어났습니다. 이제 호위는 필요 없습니다. 대단히 감사했습니다.]하아…….
먼지 속으로 빠져나가는 열차의 뒷모습을 바라본 뒤에야, 카이센은 막힌 숨을 겨우 토해냈다.
‘자, 그럼 이제…….’
물론 숨을 돌리는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다음 싸움을 예비하기 위해 크게 들이마시는 숨결이었다.
[카이센, 이슬라. 여기는 49식. 이제 작전 제2단계로 들어간다.]“알겠습니다.”
“이슬라는 지금 다리가 아프다! 할바론은 당장 탈 것을 보내라!”
[이미 무개화차가 가는 중이다. 탑승항 부두 구획으로 이동, 수송함 2207호에 승선하라. 그게 너희를 저 괴물의 배 속으로 옮겨줄 목마다. 예전에 청성께 받은 창명검 한 자루가 거기에 있다.]무개화차는 외벽과 지붕이 없는 객차로, 거신들을 수송하기에 유용한 철도 운송 수단이었다.
“확인했습니다, 탑승합니다.”
거신을 모두 수용한 무개화차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카이센은 저 먼 남쪽 수평선에 출현한 악몽을 바라보았다.
베헤─리크.
옛 귀족 중에서 초월적으로 지대한 크기로 전설 속에서 악명을 떨친 악몽.
‘미쳤군…….’
웅, 웅, 웅.
원초적 절망감에 맥박이 날뛰고, 식은땀이 이마에 맺혔다.
대리자의 심박 이상을 감지한 아라다만텔이 높이 울었다.
‘마우나 로아보다도 몇십 배는 더 크다고? 저건 정말 베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는데?’
용암을 미친 듯이 토해내는 고대 파충류의 머리통은 도합 3개, 목에서부터 길게 돋아난다.
생물체의 흔적은 거기까지였다.
지금처럼 멀리서 볼 때, 그것은 생물체가 아니라 화산 지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길게 잇닿은 화산들…….’
등판의 산봉우리들이 수평선 저 끝 보이지 않는 곳까지 출렁거리면서 달려가는데, 봉우리마다 용암이 흘러내렸다.
그 화산 지대가.
인간의 팔을 수천 개의 다리로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광경은 악몽 그 자체였다.
‘저것은 과연 고대의 파충류인가, 고대의 지네인가, 그것도 아니면 고대의 화산 지대인가…….’
<위용검전>의 이론 교관, 라헬 듄 제라예는 이렇게 말했었다.
베헤─리크.
그 뜻은 옛 언어로 폭식(暴食).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삼키는 게 아니라 세상 그 자체를 삼켜서, 거친 황무지와 붉은 화산과 모래의 세계로 만들었다고.
– 베헤─리크의 신체는 그야말로 화산 지대라, 신체 외부에서 유의미한 타격을 주는 것은 인간들 입장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무적이란 말인가?
그 질문에 라헬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칠판에 그려놓은 베헤─리크의 신체 약도, 그 내부에 동그라미를 쳤다.
– 필두 어센시쿼리어, 알카이오스는 이때 체내로 들어가 그 영혼의 핵을 파괴시키는 방법을 썼다. 인류에겐 이 방법밖에는 없다.
청성이 고안한 작전도 마찬가지였다.
신들의 전쟁이 남긴, 희망이라는 이름의 빈약한 정보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야만 했다.
그렇기에 가야만 했다.
이제 저 지옥의 끝단까지, 진짜 성검이 아닌 가짜 성검을 쥔, 진짜 용사가 아닌 가짜 용사들로서.
언젠가, 세츠넨이 그 이유를 슬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 비록 가짜일지언정, 너희가 이 가엾은 세계의 마지막 용사(勇士)들임을 잊지 말아라.
여기서 할바론의 생각은 달랐다.
규격 외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면, 이쪽에서도 규격 외의 병기를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검은 여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 바로 49식, 통칭 초대형 거신이었다.
[표적, 목표 위치 도달. 49식 출격한다.]통상적인 거신은 본래 거신병 네 명(거신장, 양팔 조종사, 양발 조종사, 포수)으로 운용된다.
하지만 그보다 31배나 큰 49식은, 저 비상식적인 크기의 기체를 통제하기 위해 103명의 조종사와 3,233명의 포수를 필요로 했다.
이것은 <온 것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아티팩트’를 77개나 장착시켜서 만들어낸, 그야말로 과학의 첨단(尖端).
그리고 여기서 전체를 통괄하는 거신장을 맡은 건, 최고의 거신병이기도 한 할바론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두 거체가 서로에게로 다가가는 가운데, 그 발이 닿는 지면마다 균열이 퍼지고 지진이 일었다.
[그래, 덤벼볼 테냐?]베헤─리크가 기어 다니는 화산(火山)이라면, 49식은 걸어 다니는 암산(巖山)이 아닐까.
그 육중한 체고가 베헤─리크와 같았다.
장갑 열차 10대를 움직이고도 남는 마력의 217계위 증기기관을 5개나 장착, 그 양팔로 베헤─리크를 붙잡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이제 그쪽으로 보내겠다!]일발의 추진력으로 돌진한 베헤─리크를 붙잡은 49식, 예비 동력로 3개가 추가로 기동되며 기체의 근력을 크게 증폭시켰다.
[전 함대, 베헤─리크의 거대한 엉덩이에 포탄을 쏟아부어라. 물놀이가 얼마나 재밌는지 저 고대의 멍멍이에게 가르쳐 주어라!]그 일순간, 카이센은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해냈다고……?
저 고대의 화산을 넘어뜨려서 해안가에 빠뜨리는 걸 정말로……?
[조준 완료, 발사!] [표적 확인!] [먹어라!] [폐하, 여기는 제3전함분대. 폭식공이 함대 쪽으로 주의를 돌렸습니다! 현재 일어서는 중!] [보고 있다. 카이센, 이슬라. 할바론이다. 너희도 준비됐나?]“준비됐닷!”
“네, 폐하. 현재 용추 병단 전원과 함께 2207번 순양함에 승선했고 창명검도 인수받았습니다.”
[함대장 구스타프 제독이 명령한다. 2207번 순양함의 모든 승무원은 지금 즉시 다른 함선으로 이함하라!]폭식공 베헤─리크는 그 이명대로 세계를 삼키며 달려들었다.
돌진 궤도 위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함선들은, 그 거대한 주둥이에게 집어삼켜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슬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뭐라고?”
“너무 많이 죽는다. 이슬라는 용인데 어째서 이런 상황에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인가.”
그건…….
무어라 대답할 길을 찾지 못하던 카이센은 불현듯 등줄기에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 늘 명심해라. 우리는 모두 구해낸다는 비현실적인 일을 해낼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니, 해야만 하는 건, 덧없는 개죽음이 숭고한 희생이 되게 만드는 것뿐이다.
아, 그래. 그때 로베리스 선배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이유를 알겠구나.
아니, 이유가 아니야.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어떤 마음이셨는지 알 것 같아.
그건, 바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이 무력감이었구나…….
[폐하, 제9구축함전대 전멸했습니다! 목표, 바다 위에서 기동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나 여전히 강력합니다.]하나, 또 하나.
온 세계를 삼킬 듯한 기세로, 베헤─리크는 바다와 함선을 모두 삼키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 상황이 닥쳐오니 공포가…… 온몸이 부르르 떨리던 그때였다.
[카이센, 나다. 개인 회선이다.]“말씀하십시오, 폐하.”
[두 눈으로 보고 있겠지만 폭식공이 곧 너희를 삼킬 거다. 너희들이 배 속으로 이동하면 49식으로 놈을 상대하겠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지. 그사이 창명검을 가지고 놈의 심장부로 향하도록.]“알겠습니다.”
[이 임무를 위해 내 휘하의 최정예 해륙 전단을 동원했다. 그리고 좋을 대로 희생시키고 있지.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줘라.]“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폐하의 무운을 빕니다.”
[너도 무운을 빈다. 이슬라를 부탁한다. 이상.]서로 덕담 따위를 주고받을 심리적인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때, 그 순간,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 잔혹한 신의 하수인을 베어야만 했기 때문에.
곧, 수송함 2207호기가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위가 광대한 어둠으로 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