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52)
가짜 용사 이야기-52화(52/310)
제52화
빛에 사로잡힌 의식이 어둠 속으로 고꾸라진다 싶더니, 불현듯 순백의 공간에서 정신이 각성했다.
새하얀 공간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든 일들이 그저 악몽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공간 이곳저곳이 어린애의 낙서와 장난감으로 가득했는데, 그 평화의 중심에 이슬라가 서 있었다.
“이슬라.”
웃음기로 넘쳐야 할 공간이었건만,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씁쓸한 적막뿐이었다.
“너 제대로 끝낸 거 맞냐?”
그래서 그저 그렇게, 허탈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무사했구나, 라거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같은 비현실적인 말을 읊지 않았다.
그런 말들이, 이 세상에서 무의미하단 걸 알고 있었으므로.
“여긴 어디야?”
“이슬라의 마음속 공간이다. 카이센과 조금만 더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이렇게 됐다.”
“이런 것도 용의 힘이야?”
“그렇다! 바로 용의 힘이다!”
이슬라가 순박하게 웃었다.
그래서, 함께 웃었다.
마음을 들뜨게 하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서서히 가라앉히는 쓴웃음이었다.
“이슬라는 항상 시험관 안에 있었다. 1년에 딱 한 번만 시험관 밖으로 나와 카세나와 프리스비아를 만날 수 있었다.”
카세나, 프리스비아.
모두 300년 전의 인물들이다.
300년 전에 존재했던 전설의 모험가들이다. 거기에다 프리스비아는 증기기관 기술의 시조 같은 존재고.
“프리스비아는 항상 말했닷! 아키나 미르같이 위대한 용이 되라고. 용이 되어 땅 위에 평화를 세우라고 했다.”
그 말이 그대로 너의 신념이 된 거구나.
그 말이 전해졌을까.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리까는 이슬라의 눈동자에 비탄이 어렸다.
“어느 해부터 프리스비아는 오지 않고 카세나만 왔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했고 머리가 하얘서 왠지 마음이 아팠닷.”
그건 아마도…….
프리스비아가 죽었기 때문이 아닐까.
“카세나는 말했다. 이슬라가 위대해질 필요가 없댔다. 한 명, 한 명이라도 좋으니 그 한 명을 전심으로 도와줄 수 있는 용이 되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다시 만날 때 정말 기쁠 거랬다.”
“그래?”
“그리고 카세나는 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영원히. 나중에 할바론과 류넬이 깨워준 뒤에야 시험관 밖으로 나왔다.”
그날 이후로 영원히.
그렇게 말할 때, 평소보다도 맑게 웃던 이슬라의 그 웃음은 어떤 슬픔보다도 더 슬프게 보였다.
그 슬픔을 알고 있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
“그래서 이슬라는 그런 용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다 실패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다 죽었다. 약속들도 다 지키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치만 카이센은 도울 수 있었다! 카이센은 미천하지만, 덕분에 카세나를 만났을 때 웃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
그 작은 몸이.
이 순백의 공간과 함께.
빛의 입자로 바스러지며 흩어져가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슬라는 외로웠다. 근데 카세나와의 약속을 생각하면 크아앙, 하고 힘낼 수 있었다! 카이센은 나약하니까 똑같이 힘낼 수 있게 약속을 하나 해주겠다.”
총총, 가볍게 다가와서.
힘없이 축 늘어진 손가락 위로 자신의 작은 손가락을 포갰다.
“이슬라는 실패했지만 카이센은 모두를 돕는 위대한 용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만났을 때 이슬라가 마구 칭찬해 주겠다!”
몸속의 빛이 얼굴에서 피어나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모두 사라졌다.
이슬라도.
그 공간도.
그리고 다시 현실이라는 이름의 악몽만이 오감을 잠식하며 분명하게 되살아났다.
쿨럭…….
기도와 식도를 막고 있었던 흙과 썩은 살점을 입 밖으로 쏟아내며 의식을 회복했다.
끔찍한 악취가 코끝을 자극했다.
오감이 돌아왔을 때, 고대의 피와 살과 뼈로 더럽혀진 파도가 몸 위로 철썩이고 있었다.
“해안가…….”
용령 해방의 반동이 사그라지고, 기억이 각성하기 시작한다.
가우므리스의 특수 능력과 이슬라의 폭주 능력은 베헤─리크의 내벽에 작은 균열을 열었다.
거기로, 결계를 둘러준 카이센을 내보낸 뒤 이슬라는 영혼의 핵에 창명검을 꽂아 넣었을 것이다.
영혼이 가두어지면 육신은 붕괴한다. 이 해안가를 시커멓게 뒤덮은 살점과 핏물이 바로 옛 귀족 토벌의 증거물이었다.
“그래, 제대로 끝냈구나…….”
세계는 모래와 죽음의 찌꺼기들로 뒤덮여 있었다. 아직, 모래가 삼키지 못한 하늘의 틈새로 여명이 내려앉았다.
새날의 여명이었다.
어린 날의 잊지 못할 날들처럼,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다시 보게 된 새날이었다.
또…….
또 이렇게…….
또 누군가가 대신 죽어서 목숨을 연명해 나가고…… 그 아픔을 품고 남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건가.
– 그럼 안녕이다, 내 미천한 친구 카이센.
그렇게 그저 영원히 쓰러져 있고 싶었다. 무언가가 다가와 얼굴의 진흙과 핏물을 핥지만 않았어도.
“블러드윈드.”
어떻게 찾아왔을까.
렙틸리언의 살기가 사라진 자리들만을 골라가며 이 사지까지 나를 찾아온 걸까.
블러드윈드의 마구를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킬 때 블러드윈드가 푸르륵, 하고 울었다.
웅, 웅, 웅…….
등허리에 매달린 아라다만텔이 붉게 흐느꼈다. 어떤 울음과 부둥켜안고 울듯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 해안가 한복판에서 주인 잃은 성검이 함께 흐느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극위성검, 가우므리스.
그 고유 광채인 금빛으로 명멸하는 모습은 어째서인지 주인의 죽음에 흐느껴 우는 것처럼 보였다.
“가우므리스.”
고통 속에서 절뚝거리며 다가가, 가우므리스의 자루를 붙잡았다.
“나랑 같이 가자.”
손아귀에서, 가우므리스는 오랜 친구의 손을 맞잡은 듯 친숙하고 편안한 질감과 무게로 들렸다.
그 질문에 대답하듯 가우므리스가 황금의 광채를 내뿜었다. 그걸 승낙의 뜻으로 알아들었다.
가우므리스를 등에 차고, 발걸음을 옮기며 하나 남은 용혈 혈청 주사기를 가슴 한복판에 꽂았다.
왜일까.
결손 부위는 다리 쪽이었는데.
혈관을 타고 내려간 용혈이 부러진 다리를 부글거리며 재생시킬 때, 빈 주사기를 연신 가슴에 꽂았다. 다시, 다시, 다시.
왜…….
도대체, 왜…….
이 가슴에, 마음에 뚫리는 구멍은 계속 커져가기만 하고, 고쳐지지는 않는 거냐고…….
아직, 여름이 한창이었다. 여름 속에서 적들은 온 천지를 뒤덮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니 다시 나아가야 한다.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며, 두 자루의 성검을 차고 말 위로 오르는 가짜 용사의 발치에 빗방울이 한 방울 떨어졌다.
또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
그날, 고대의 모래 폭풍에 가려진 새벽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동시다발 전선,
골공왕 하이르칸 저지 (1)
베헤─리크 토벌 임무를 마치고 산맥으로 돌아가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적색산맥의 평원 지대 방어선은 붕괴됐다. 이용할 역참도 없고 궤도차도 없었다.
방벽은 전부 모래바람 속에서 황폐하게 무너졌고, 그 위로 널린 사체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렙틸리언들은 보이지 않아…… 후퇴했을 리가 없으니 필시 북상했을 터.’
서둘러야겠어.
한시라도 빨리 본대와 합류해야 했다. 군화의 박차로 블러드윈드의 옆구리를 질렀다.
평원 지대를 지날 때, 볕 잘 드는 양지마다 우후죽순 돋아났던 민가들은 모두 버려져 있었다.
“…….”
그러나 이틀 가까이 굶은 육신에서는 현기증마저 일고 있었다.
문이 부서지고 핏자국이 찍힌 민가에 만들다 만 귀리 빵 반죽이 남아 있던 건 천운이었다.
모래를 털어내고, 불에 대충 구운 다음 씹어서 삼켰다. 귀리라 그런지 블러드윈드도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좀 낫냐? 그래? 기력을 되찾았으면 더 서두르자.”
산맥에 가까워지는 동안 포성과 폭음은 그칠 기미가 없이 격렬해져 갔다.
본대는 현재 어떤 상황일까…….
알 수 없으나 심각한 상황인 건 명백했다. 인류가 렙틸리언과 파티를 벌이며 축포를 쏘는 건 아닐 테니까.
“저것 봐, 블러드윈드. 산맥이 모래에 집어삼켜졌어.”
인류의 영산, 적색산맥이 모래 폭풍에 광범위하게 뒤덮인 채 말라비틀어져 가는 광경은 심히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저 안쪽에 렙틸리언이 바글거리겠지…… 블러드윈드, 뒤에서 조심히 따라와.”
현재 산맥 서부를 지배하고 있는 건 이제 인류가 아니라 렙틸리언들이었다.
사체의 살을 파먹던 놈들이 달려들 때, 아라다만텔의 칼날이 즉시 순백의 칼집에서 뽑혀 나왔다.
아니다…….
이놈들을 상대로는…….
반쯤 뽑은 아라다만텔을 납검하고 등 뒤에 매달린 가우므리스의 자루를 쥐었다.
일격(一擊).
가우므리스의 광압 능력을 발동시킬 필요도 없었다.
퍼엉, 단 한 번만 휘둘러도 렙틸리언들의 전신을 핏자국으로 다져줄 수 있었으니까.
렙틸리언을 무력화할 때 아라다만텔은 세 번에서 다섯 번 베어야 했으나 가우므리스는 한 번이면 족했다.
‘잡병들이고 숫자도 많지 않아. 주력은 다른 곳에 있나…… 있다면, 그래.’
렙틸리언들을 베어 넘기며, 주검과 핏자국으로 뒤덮인 발전소를 찾아냈다.
모든 증기기관이 파괴돼 있었다.
그러나 비상 발전기는 기밀 사항으로 은폐된 덕택에 렙틸리언들도 찾아내지 못한 듯했다.
‘설명서.’
비상 발전기의 설명서를 읽었다.
기계치답게 몇 번이고 고개를 위아래로 돌린 뒤에야, 증기기관이 칙칙거리며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상용 석탄]의 마대 자루를 전부 안에 털어 넣자, 자동계단이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자동계단은 산맥 요소들을 잇는 주요 이동 수단이었다. 덕분에 이동 속도가 현격히 빨라졌다.
[……유리우스 페이지다. 전 기마헌병대는 피난민들의 퇴로를 사수하고 포병대는 후방을 원호하라. 최대한 많은 이들을 도시에 수용시켜야 한다.]이제 다시, 인류 관할 영역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뇌향심공명진의 영향으로(페이쿼리어는 제2지휘명령 직위로 대부분의 통신을 받는다) 뇌리에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전황 보고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 연결이 흐릿하고 느슨한 데다 이따금씩 끊기기까지 하는 게 불길했다.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전장을 하나로 엮어서 통솔하던 절대적 위엄, 청성 미른가디아의 명령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연락들이 다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 도저히 통일된 하나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페이지 방백 가문.
제국 최고의 마도 명문가.
오랜 역사 속에서, 페이지 가문은 적색산맥에서 제일 가까운 제국 도시 <골든로즈>의 주인이자 제국 제일의 마법대학 <델라이텐>의 학장이었다.
가문의 전대 당주(로베리스의 아버지)가 종교 혁신의 시작과 동시에 처형당하면서 페이지는 혁신의 폭풍에 휘말렸다.
분명 그렇게, 휘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로베리스의 첫째 동생 유리우스 페이지는 사적 원한보다 인류 명운을 우선시했다.
‘붉은 여름’의 시작과 동시에, <골든로즈>로는 무수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유리우스는 그들 모두를 내치지 않고 도시로 받아들였고, 가문의 사비와 창고를 털어 재우고 먹이고 있었다.
그뿐인가.
적색산맥 이북, 산자락이 끝나고 평야가 펼쳐지는 자리에는 망국 군인들의 가족들이 거주했는데 그들에게도 식량을 가져다주었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거지?’
그런 이들마저 모두 도시로 피난하고 있는 상황인 것처럼 보였다.
산맥에서 피난해야만 한다면.
산맥 방어선은 이미 돌파되었거나 돌파되기 직전이란 뜻일 텐데…… 부디 후자이길 바랐다.
“여기는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지금 막 복귀했습니다. 작전명령 하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