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53)
가짜 용사 이야기-53화(53/310)
제53화
“여기는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지금 막 복귀했습니다. 작전명령 하달 바랍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말했으나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질문은 전송되지 않는다고?
뇌향심공명진이 전개되던 시점에 범위 안에 없었기 때문인가. 그저 그런 이유이기만을 바랐다.
[철성의 넬퀸이다. 골공왕 하이르칸이 지금 산맥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무슨…….] [철성 병단의 모든 분대는 서둘러 피난 엄호 작전을 마무리하고 집결 장소로 모여라. 이상.]자동도로가 끝난 지점은 산맥 중서부 중턱이었다.
본래는 봉우리까지 연결되었어야 하나, 렙틸리언들에 의해 길이 파손된 데다 발전기가 멈췄는지 동력이 끊기고 말았다.
다시, 등자를 밟고 블러드윈드의 안장 위로 올라탔다.
[마법포대! 여기는 호센의 속사대다! 지금 골공왕의 공격을 받고 있다! 마법포대의 요격이 절실한 상황이다!] [알겠다. 좌표를 전송하라.] [좌표 전송!] [좌표를 확인했다. 섬화천격포(殲火闡激砲)를 즉시 보내겠다.] [섬화천격포라, 끝내주는 게 오는군!]용이 불꽃을 토해내듯 위엄차게.
마법포대가 위치한 영선봉(靈仙峰)으로부터 비스듬히 솟구친 불줄기.
그 불줄기가 모래의 폭풍을 뚫고 설화봉 깊숙이 꽂히며 화염 폭발을 일으키는 광경이 보였다.
[속사대, 상황 보고하라.] [이런 미친, 분명 직격했는데 피해가 전혀 없어! 마법이 통하지를 않는다! 막을 수가 없다!] [그럴 리가…… 대기하라, 즉시 두 번째 마법을 보내겠다. 뇌장방혈 준비!] [대기, 대기할 수가 없다! 끄아아아……!]처참한 비명이 뇌리를 울렸다.
입술을 깨물던 그때, 카이센은 마침내 인류 패잔 부대와 조우할 수 있었다.
“살려, 살려줘! 누가 좀 제발!”
“계속 쫓아온다!”
“엄폐해!”
병사들은 사상자들을 호송하고 있었는데, 그 가냘픈 후미 방어를 뚫은 렙틸리언들이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일벌폭섬(一伐爆閃).
고대의 파충류 수십의 육신을 일격에 파괴하여 광입자로 흩어버리는 빛의 노도.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병사들이 그 눈부신 빛의 폭발에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가우므리스를 휘둘러 핏물과 살점을 털어내며 물었다.
“어느 부대 소속이지?”
“페, 페이쿼리어……?”
“뭐야, 어디서 나타난…….”
“카이센,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야! 데몬이랑 키랄을 벤 분이라고!”
장교가 급히 경례하며 고했다.
“제14보병여단 4연대 3중대장입니다. 담당 방어선이 돌파당해 후퇴 중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경례를 물렸다.
“산맥에는 방금 도착했다. 잠시 후미를 호위해줄 테니 상황을 보고해라.”
“산맥 동부 전선이 고위 귀족에게 동시에 공격을 받았습니다. 철십자가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자 즉시 중부 전선에 골공왕이…….”
“지금 총지휘관은 누구지?”
“도원수 멜빈 각하입니다.”
“병력이 왜 이렇게 적은지 설명해라.”
“각하께서 후퇴 명령을 내리셔서 현재 주력부대 8할이 산맥 방어선을, 나머지는 산맥 아래쪽에서 피난 대열을 지키고 있습니다!”
청성과 뇌향께서는 어디에…….
그런 보고를 받는 사이에도, 머릿속에서는 각지의 전황들이 화급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남방 연합군, 유리우스다. 지금 새 열차를 보내겠다. 철도의 안전을 확인해주길 바라겠다.] [고맙네, 유리우스 방백. 제2보병여단, 여기는 도원수 멜빈이다. 도시로 이어지는 철도만큼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알겠나?]아무래도 이 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총사령관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필요가 있었다.
총사령관이 아니라면, 그로부터 어떠한 명령을 받았을 누군가.
철십자 기사단이라든가, 철성 중장 병단이라든가, 페이쿼리어 병단이라면 뭐든 괜찮다.
“반격 작전은? 피난 작전이 작전의 전부는 아닐 것 아냐.”
“철성 중장 병단의 세이라 경께서 골공왕 토벌 작전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페이쿼리어께서 도와주신다면 수월해질 겁니다.”
“수월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혼자서는 아예 불가능해. 철성 병단의 집결지가 어디지?”
“신화봉 중턱입니다.”
신화봉…….
적색산맥 힘의 핵심부에 있나.
“너무 멀어.”
“남동쪽 경사면에서 궤도차를 얻어 탈 수 있다면 금방 갈 수 있을 겁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궤도차는 철도 위를 달리도록 설계된 소형 차량이었다.
중형 증기기관만으로도 운용이 가능하였기에, 경제적으로 산맥 전체의 병참을 잇는 게 가능했다.
일선 병사들은 우스갯거리로 궤도차를 적색산맥의 혈류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럼 부탁하겠다.”
“3소대, 궤도차 중계역으로 페이쿼리어를 안내한다. 따라와!”
“거긴 지금 도마뱀 놈들이 점거한 곳 아닙니까?”
“페이쿼리어께서 철성 병단과 합류할 수 있게 도와드려야 한다. 3대(隊) 철새진!”
3소대의 도움을 받아, 모래와 렙틸리언들을 뚫고 궤도차 중계역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때, 내 총알 맛은! 마음에 드냐? 이 개자식들아.”
“내부 진압 완료!”
“좋아, 이제 안을 샅샅이 뒤져서 궤도차를 찾아드리자.”
철도는 결계로 지켜지고 있어 아직까지는 멀쩡해 보였다.
다만, 남아 있는 궤도차는 단 한 대로 측면이 깨지고 증기기관이 심히 낡아 보였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블러드윈드와 함께 궤도차 위로 올라타자, 장교가 기관 레버를 당겼다.
“페이쿼리어, 도울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궤도차가 털털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교와 그 소대원들이 경례를 붙였다.
잠시 그 경례를 쳐다보았다.
저 경례에 담긴 건 어떤 마음일까, 경의일까, 소망일까, 알 수 없지만 그 경례를 정중히 되받았다.
“너희들의 조력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조심히 내려가도록. 헤쳐.”
동시다발 전선,
골공왕 하이르칸 저지 (2)
철도 위를 빠르게 내달리는 궤도차가 양옆으로, 뒤바뀐 산맥의 경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적색산맥의 힘의 중심부였던 신화봉조차도 전화(戰禍)와 모래 폭풍으로 뒤덮인 것은 새삼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목격한 대부분의 군용 시설들이 옛 위용을 잃고 무참히 파괴되어 폐허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어머, 이게 누구야. 누추하신 데몬 슬레이어가 이런 귀한 곳까지 다 와주셨네.”
장교의 말대로였다.
신화봉 중턱의 중계역에 철성 병단이 집결해 있었다.
중계역에서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반가운 목소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온 걸 알고 있었어. 뇌향 공명 여기저기에서 네 얘기가 떠들썩하게 나오더라고.”
그때, 세이라는 귀족적 느낌을 물씬 풍기던 땋은 머리칼을 단검으로 잘라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수라장을 뚫고 나왔는지, 머리칼 전체가 피딱지로 엉겨 붙어 있던 것이다.
그때, 페이쿼리어들은 서로의 몰골을 보고 서로가 어떤 전투를 겪었는지 짐작했다.
“그런데 이슬라는?”
“이슬라는…….”
차마,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에 뚫린 구멍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하며, 심장과 성대의 연결을 끊어서 공기가 솟지 않았다.
그때 할 수 있던 건 단 하나.
등에 차고 있던 가우므리스를 말없이 앞으로 내미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페이쿼리어의 삶의 증거인 동시에 죽음의 증거였으니까.
“아…….”
세이라는 가우므리스를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이내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됐구나.”
“……미안하다.”
“그게 왜 네 잘못이겠어. 사실 예상하고는 있었어. 청성께서는 ‘네’가 올 거라고 하셨지, ‘너희들’이 올 거라곤 안 했거든.”
슬픔을 예비하고 있었단 말인가.
난 아직까지도 말이 안 나올 정도로 가슴이 아픈데…….
하지만 중요한 정보가 언급되었으므로 언제까지 비탄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청성 각하께서? 그럼 지금 이 상황, 이 작전 모두가 청성 각하의 작전이라고?”
“응. 잘 알다시피 예전처럼 총지휘를 하실 수 있는 상태는 아니시지만…… 네가 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어.”
철성 중장 병단은 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중보병 3천 명으로 구성된 병단이었다.
시대착오적인 창검과 대형 직사각형 방패로 무장하고, 판금 갑주로 전신을 감싸며 전열을 형성하는 중보병 집단.
철성 중장 병단은 전장의 방파제라는 별명으로 ‘검은 여름’ 때부터 그 명성을 널리 떨쳐왔다.
“여기는 철성의 세이라입니다.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합류했습니다. 작전 2단계 승인을 요청합니다.”
[도원수 멜빈이다. 무사하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이로군,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마우나 로아를 토벌한 페이쿼리어의 힘이 절실한 상황이다.]“카이센은 옆에서 듣고 있어요. 계속 말씀하시죠.”
[골공왕이 산맥 방어선을 돌파하여 이곳으로 직진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피난민만 7백만 명이 넘어. 자네들 말고는 놈을 무찌르고 이들을 지킬 사람이 없네. 해주겠나?]전장에서는 항상, ‘할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 대신 ‘해 주겠느냐’라는 질문이 쓰였다.
이 땅에서는 가능성을 그 누구도 확약할 수 없었다.
단지 그 의지를 확인하기만 할 뿐. 카이센이 세이라를 통해 그 의지를 전송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이상.”
[그 길에 신들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하겠네, 페이쿼리어.]골공왕이 설화봉을 넘어서 즉시 경사면으로 들어섰다면, 그 진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요격하기 위해서는…….
“레반필레 협곡이야, 세이라.”
“레반필레?”
“거기밖에 없어. 거기에서 막아야 돼.”
레반필레 협곡.
설화봉의 북쪽 사면은 험악한 지세로 유명했다.
다른 산세를 경유하지 않고 산 중턱을 통과하여 기슭으로 내려서기 위해서는 레반필레 협곡이라는 긴 협로를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래, 거기가 좋겠어. 내 병사들의 힘을 최대한 살릴 수도 있겠고…….”
세이라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투구의 면갑을 내리며 소리쳤다.
“철성, 진격 명령! 능선을 비스듬히 타고 내려가서 레반필레 협곡에 먼저 도착해야 해!”
역시, 세이라도 같은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중보병들이 방패와 방패를 맞대어 서로의 허점을 메우고 진격하는 광경은 이상적인 면이 있었다.
그것이 원시의 군대를 효율적으로 튕겨낸 다음 도륙했다.
신화봉, 즉 산맥 중부로 온 이후 적의 구성이 바뀌었다.
렙틸리언은 현격히 줄어든 반면, 파충류의 비늘로 뒤덮인 두 손과 두 발로 땅을 기는 기괴한 형태의 인간이 나타났다.
– 이들은 원시인(原始人)이다.
<위용검전>의 이론 교습 때 분명히 배운 적이 있었다.
– 공왕의 권위를 받은 골공왕은, 다른 왕들처럼 인간에게서 혼을 빼앗아 망자로 뒤바꾼다. 원시인은 바로 그런 망자다.
혈족과는 차원이 다르다.
혈족은 죽인 이후에 부정한 피를 주입해서 혈노를 만드나, 하이르칸은 산 채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 구할 방법은 없습니까?
– 없다. 솔론드의 왕족들이 해낼 수 있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검은 여름’ 때 모두 죽었다.
– …….
–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너희들 말고 누가 그 가엾은 육신을 베어 갇힌 영혼을 해방시켜 주겠느냐?
혼의 해방이라…….
한때 인간이었어, 라는 마음을 억눌러 다잡고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앞을 보았다.
“적이 앞에 있다!”
“이것들이 어딜!”
“이 도마뱀 자식들을 밀쳐내!”
페이쿼리어 병단과 일반 보병대의 전투력 차이는 상당했다.
잔병들을 처리할 때는 둘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동하는 동안 숨을 돌리는 동시에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널 기다리던 사흘 동안 산맥 방어선이 돌파됐어. 렙틸리언을 대부분 전멸시켰다 싶었는데, 골공왕이 나타나니까 원시의 군대가 나타나 버려서.”
“철십자는?”
“로베리스 선배님은 음희백을 처치하기 위해 동쪽으로.”
“골공왕이 네이갈라스의 심복 중 가장 강한 옛 귀족일 텐데 어째서 이런 작전이 된 거지?”
“훗, 너와 내가 그만큼 강하단 소리 아니겠어?”
세이라가 피식 웃었다.
카이센은 웃을 수 없었다.
“뇌향 각하께서는? 통신의 질이 좋지 않아.”
“뇌향께서는 지금 산맥 전역에 뇌향심공명진을 펼치고 계셔. 옛 귀족을 대면한 것만으로도 일반인은 몸이 터져 죽는다는데, 이렇게 저항할 수라도 있는 게 다 그분 덕이라고.”
“그래, 전선에 나설 수 없으신 게 당연하겠군.”
그래, 그런 거였군.
무사하다면 그걸로 됐어.
이제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기에, 긴장된 표정이 풀렸다.
“그나저나 이런 미인 동기를 앞에 두고도 다른 여자들만 생각하는 거야? 괘씸한걸.”
세이라가 농담을 던지는 사이에도, 산맥 전체에 걸쳐 화급한 전황이 계속됐다.
[도원수 각하, 철성 중장 병단이 레반필레 협곡으로 내려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지원하겠습니다.] [허락한다, 18보병여단.] [적색산맥 승강장 방어군, 여기는 피난민 수송 열차 F-882호. 곧 승강장에 도착한다. 안전 확인 바란다.] [여기는 승강장 방어군 제2기갑연대, 아직까지는 안전하다. 어서 들어오도록.]철성 중장 병단이 레반필레 협곡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그런 보고가 오가고 있었다.
다행이군…….
아직 안 늦은 모양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협곡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흙먼지의 대류 아래로 피난민이 우글대는 산맥 승강장이 어렴풋이 보였다.
‘여기가 마지막 거점. 여기서 막아내지 못한다면…….’
숨을 고를 새도 없었다.
옛 시대의 악몽이 멀리서부터 흙먼지를 이끌며 나타났으니까.
“골공왕 출현!”
처음에는 흙먼지가 너무도 자욱해서 그 정체를 또렷하게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놈은 숨이 저절로 가팔라지는 초현실적인 존재감으로 먼저 자신의 존재를 암시하며 나타났다.
“철성, 방진 구축! 한 놈도 빠져나가게 두지 마!”
먼저 엄습해온 절망의 감각은 소리였다.
구슬피 찢어지는 비명…….
그 비명 속에서 새롭게 부화하는 고대의 생명체…….
체내 깊숙이 새겨진 공포 속에서, 숨을 허덕거리지 않으면서 놈과 직면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제발, 제발…… 으아아아악!”
내달려오는 흙먼지에서 누군가가 기어서 도망쳐오고 있었다.
도우러 갈 틈도 없이, 무언가가 부화하듯 그 육신이 안쪽에서부터 찢어발겨졌다.
그리고 그 찢어진 안쪽에서, 도마뱀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해골이 네 발로 일어섰다…….
원시인(原始人).
골공왕 하이르칸은 옛 귀족 중에서 유일하게 공왕의 지위를 받은 존재.
절걱…….
본래 원시 왕국의 왕이었다는 하이르칸은 자신의 나라와 백성 모두를 네이갈라스에게 제물로 바쳐 그 지위와 권능을 얻었다고 한다.
절걱, 절걱…….
하이르칸은 왕에게 받은 그 힘으로 인간을 원시인으로 탈바꿈시켜 자신의 군대를 꾸려 나갔다.
절걱, 절걱, 절걱…….
그것이 바로 저 원시인 군대.
네 발로 기면서, 하이르칸을 호종하는 망혼의 군대.
그 숫자는 백만은 아득히 넘길 것처럼 보였고 협로를 가득 메우고 밀려들었다.
절거덕…….
그 대열의 선두에서 협로의 한가운데를 걸어오는 건 하이르칸 본인이었다.
용암으로 연단되었다는 심연의 갑주 라쿠켄을 걸친 전신에서 열기가 끓어올랐다.
어깨에 걸친 대검은 무수히 통곡하는 영혼이 희뿌옇게 뒤엉키고 뒤얽히며 칼의 형상을 이룬다.
‘신장은 대략 9척쯤, 베헤─리크처럼 비현실적으로 크지도 않고 로텐의 영멸대같이 수없이 증식하고 부활하지도 않아. 조금도 어려울 것 없다.’
그저 단순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인간형.
외형은 그토록 간단하게 형언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심장의 방망이질이 멈추지 않는 이 초월적 공포와 살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Du roho sei…….」
하이르칸이 그 걸음을 멈추고는 이쪽을 응시했다.
그것은 망념의 덩어리.
고대의 속삭임, 우주의 유혹, 섭리를 초월한 무언가의 매료…… 철성의 중보병들이 입과 코로 피를 쏟았다.
두 자루의 성검이 떨렸다.
뇌향의 힘이 없었더라면, 이 순간 몸이 모조리 터지고 원시의 군대로 전락했을까.
‘그러니까 여기서 막는다.’
이놈이 피난민 대열에 갔다간 모두 순식간에 죽고, 원시의 군대만 증식될 거야.
시간을 벌다 보면, 청성과 뇌향께서도 분명 마련해둔 수가 나타날 거다. 그러니까.
억제기의 핀에 손가락을 얹은 순간, 하이르칸이 대검으로 협곡 아래를 가리켰다.
「A ki b dum.」
아니, 이건 말도 안 돼…….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협곡의 가파른 사면 위를 원시인들이 네 발로 기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때, 골공왕은 그 해골 턱주가리를 딱딱거리며 홍소를 터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모든 학살과 살육과 난도질이 그저 장난의 일환이라는 듯이.
그렇기에 그때,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싸늘하게 식었다.
“너 이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