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56)
가짜 용사 이야기-56화(56/310)
제56화
적색산맥 이남, 레탄 능선.
기원력 1698년 3월 29일.
골공왕 토벌 직후, 6-15B 방면 대형 궤도차에 탑승하여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골공왕ㆍ음희백 공방전으로 철도 대부분이 파손되어, 이용할 수 있는 길은 대체로 터널을 경유하는 것들이었다.
궤도차가 이따금 지상으로 나올 때마다, 고통스럽게 용암을 토해내는 산봉우리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엄청 예쁜 곳이었는데…….”
옆에서 세이라가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심연(深淵)의 힘이 적색산맥에도 손길을 뻗기 시작하다니.”
왕의 심연은 모든 대자연에 사악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했다.
옛 적룡 군단의 성역조차도 그 힘을 견디지 못한 것일까.
이제, 검은 연기와 용암으로 뒤덮인 산맥은 그저 음험해 보였다.
적색산맥도 무너졌는데…….
가짜 용사인 우리들은 과연…….
적색산맥의 몰락이, 미래의 그림자처럼 느껴지는 망념을 고개를 털어서 몰아내야 했다.
26시간 후, 궤도차는 산맥 이남 임시 경계초소에 도달했다.
산맥 이남은 화산재 섞인 모래 폭풍에 뒤덮여 있었고, 세계가 썩어서 녹아내리는 악취가 났다.
“이 철도 좀 봐, 카이센. 급하게 만든 흔적들이 역력해.”
그래, 우리가 필사적으로 싸우는 동안 청성께서는 이걸 만들고 있던 건가.
청성과 달리, 겨우 현재를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일까.
이따금씩 사람의 지각과 마음으로는 청성의 계획에는 늘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세 전선에서 심복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쓰러뜨리고, 그걸 네이갈라스가 대비하기 전에 기습해서 쓰러뜨린다. 이게 옛 왕을 봉인할 유일한 방법…….’
세이라의 말대로 철도의 얼개들에서 급하게 만든 흔적들이 역력했다.
궤도차가 계류장에 정차했다.
그 초소 앞에서 로베리스가 화산재를 막는 양산을 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세이라, 너와 철성은 두 정거장을 더 가야 한다. 철십자와는 임지가 달라.”
“네, 선배님.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갑네요.”
“아부가 점점 느는구나. 이제 아부할 선임도 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쓸데없는 진취다. 이제 그만 가봐라.”
세이라가 탄 궤도차가 서쪽으로 멀어져가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로베리스가 몸을 돌렸다.
“카이센, 해후는 나중에 나누자. 휴식할 시간도 없어. 우리가 작전 중일 때 흑장미가 공병대를 호위하여 열심히 철도를 부설하고 있었다.”
“네, 그랬다고 전달받았습니다.”
“하지만 네이갈라스도 바보는 아닌 모양이다. 뭔가 심상찮다고 생각한 듯하더군. 철도 부설 및 결계석 설치 호위에 우리들도 바로 투입되어야 한다고 한다.”
“알겠습니다.”
겨우 보름 정도 떨어져 있었건만, 살아서 다시 만난 선임 페이쿼리어는 오랜 기간 떨어져 있던 존재처럼 어색했다.
소리 없이 나란히 걷는 동안, 군홧발 아래로 화산재와 자갈이 까끌거렸다.
그때 로베리스가 발길을 멈추더니, 화산재 흩날리는 하늘을 우러렀다.
“카이센, 고르고티아가 죽었다. 음희백을 하곤 어르신의 힘으로 봉인할 때 희생했어.”
그 말할 수 없는 감정과 말하지 못하는 말들이 섞인 눈동자를 본 뒤에야, 다시 이어진 느낌이었다.
가까운 죽음 속에서.
친밀한 죽음의 슬픔 속에서.
같은 세계를 살아가고 또 같은 길을 걸어가는 가짜 용사들로서의 동질감을 느낀 것일까.
겨우 대답했다.
“이슬라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너만큼은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신 신들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로베리스의 그 말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라고 했을 때 어서 오렴, 이라고 하는 먼 일상의 소리처럼 들렸다.
지금은 잃어버린 일상 어딘가의 사소하되 소중했던 추억처럼…….
“……신들.”
“신들의 존재를 의심하나?”
“이런 상황이니, 저 스스로도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을 못 하겠습니다.”
로베리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양산을 카이센에게 씌워 주었는데, 몇 번이고 대신 들겠다고 해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난 네가 이렇게 살아 돌아와서, 나와 다시 이야기하게 된 이 순간에 신들의 임재를 느꼈는데.”
“……?”
“예전에, ‘검은 여름’의 영웅 중 한 분이 해주셨던 말이다. 아주 훌륭한 사제셨지. 그래, 그분도 이제 죽고 없구나.”
어딘가…….
먼 과거 어느 날인가, 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 것 같았다. 기억은 분명치 않았다.
“저도 선배님과 살아서 다시 만난 게 기쁩니다.”
“그래, 고맙다.”
잠깐의 휴식은 거기서 끝이었다.
뇌에 직접적으로 햇빛이 내리비치는 듯한 익숙한 감각…….
동시에 여러 목소리의 실타래가 머릿속에서 엮이기 시작한다.
[카이센, 살아 있었구나.]피와 사체의 징검다리,
잊혀진 왕 네이갈라스 토벌전 (1)
“리아.”
[그래, 나야.]“출세했던데. 총사령관 보좌라고?”
[분에 넘치는 직책이야. 부유성이 추락했고 청성께서는 회복에 전념하고 계시니…….]대화 내내 두 사람은 이슬라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영원히.
하지만 이날 이후, 둘이 나누는 대화의 밑바닥에는 그날 그들 대신 동료의 죽음이 스며 있었다.
“그래, 너도 힘들었겠다.”
평범한 잡담이라 생각했건만.
이곳저곳에서 휘파람 섞인 농담들이 들어왔다.
[허허, 돌아오시자마자 연애질이십니까?] [인기 많은 남자는 힘들겠네.] [인기 없는 남자는 벌써부터 쓸쓸한데요.] [아, 그, 죄송합니다…….]왜 사과하는지 모르겠다.
헛기침 몇 번으로 상태를 다잡은 리아가 다시 말했다.
[카이센, 미안하지만 곧바로 출전해줘. 철십자 기사단을 5개 분대로 나눠서 보낼 거야. 로베리스 선배님도 옆에 계시지?]“듣고 있다.”
[렙틸리언들이 산맥 이남에 수색대를 증파했어. 아르테의 은닉 마법으로 부설 작전을 진행 중이었지만, 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적발되고 말아. 그러니 수색대를 제거해줘.]철십자 4분대를 다시 이끌게 되었다.
고작 보름 만에, 분대원의 숫자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재회를 반기는 분위기는 웃고 있었지만 내막이 침울했다.
종자나 시종들은 거의 다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대개 칼 놀림에 자신 있는 기사들이었다.
[카이센, 지금 위치에서 동서쪽에서 제7공병대대의 연락이 끊겼어. 공병들을 구조하고 부설 작전을 재개시켜 줘.]이날 주어진 임무는, 적을 제거하고 철도 부설 작전 및 결계석 설치를 엄호하는 일이었다.
고되고 고달픈 싸움이었다.
왕이 지척에 있어서일까, 렙틸리언들의 외피에서 ‘왕의 축복’이라는 용암이 보호막처럼 일렁였다.
“페이쿼리어, 2시 방향에서 적입니다!”
“여긴 저희가 맡겠습니다! 공병대에게 가십시오!”
“트롤입니다! 꺼져, 이 고릴라 자식아!”
예전이었더라면 이때 아무도 남겨두지 않고 같이 싸우겠다고 말했을까?
일보즉참(一步卽斬).
한 발 나아가며, 아라다만텔의 칼날로 용암의 축복을 찢고 벌거벗겨진 몸을 가우므리스로 내리찍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듣던 대로 엄청난 실력이시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기 결계석이 있습니다.”
[카이센, 결계석의 힘이 돌아온 걸 확인했어. 수고했어.]“이제 여긴 괜찮으니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 감사했습니다, 페이쿼리어!”
그 임무는 그저 그렇게.
멀리서 화산이 부르르 몸을 뒤척이다가, 게걸스럽게 용암을 토해내는 음산한 어둠 속에서…….
그저 지령이 떨어지는 곳으로 이동하여 베고 또 죽이기를 반복하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본부, 제3공병연대입니다! 19번 결계석 매립지가 바실리스크 기수들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카이센, 19번 결계석 매립지의 위치를 보낼게. 바실리스크들을 제압해줘!]“10대(隊) 철새진! 화망을 형성한다.”
작전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즉시 페이쿼리어의 뒤로 집결, 열 겹의 철새진을 구축했다.
어머니의 소검을 높이 치켜드는 것으로 신호를 보냈다. 시계가 어둡기에 손보다는 잔광을 튕겨내는 소검이 효과적이다.
“기다려, 기다려, 지금! 벌집을 만들어줘라.”
바실리스크.
네이갈라스의 피조물, 고대부터 존재했던 마물 중 하나.
옛 모험가들에게 S 또는 A랭크의 위험이었던 놈들이지만, ‘검은 여름’에 개발된 대심연 은탄(銀彈)으로 일반병도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수 있게 되었다.
“미친, 바실리스크 놈들이 독을 뿜는다!”
“저놈들이 언제부터 용암을 뱉었지?”
“까불지 마! 여기엔 사상 최강 페이쿼리어가 계시다고!”
상공에서 토해내는 용암은 가우므리스의 광압(光壓) 파괴 능력으로 무력화한다.
‘그리고 이런 총탄 세례에 인내심이 고갈된 놈들은…….’
지금처럼 고공 낙하로 덤벼들기 마련.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조차 모른 채로.
일도양단(一刀兩斷).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모래 폭풍을 뚫고 급강하한 마물들의 육신이 칼집에서 솟구친 순혈의 칼날 위에서 양단된다.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두개골을 중심으로 좌우로 두 토막.
토막 난 다섯 쌍의 육신이 철새진 양쪽으로 처박히며 흙먼지를 일으키자, 환호성이 솟았다.
“캬, 미친! 진짜 어마어마한 솜씨이심다, 페이쿼리어!”
“야, 이 개새야. 땅에 떨어진 기분이 어떠냐! 머리통에 총탄을 박아주마.”
“바실리스크를 무력화했다. 결계석 정화 작업에 착수한다.”
“바실리스크 제거 완료. 감사합니다, 페이쿼리어.”
지시는 주로 흑장미 병단으로부터 날아왔지만, 리아도 전투 중일 때가 있었고 그럴 때는 로베리스에게서 명령이 하달됐다.
[카이센, 렙틸리언 부대가 45번 결계석 매립지에 출현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네가 제일 가까우니 가서 놈들을 해치워라.]“바로 가겠습니다.”
무려 이틀 동안, 낮밤을 지새워가며 그런 임무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문제는 철도 부설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발생했다.
곧 끊어질 듯한 호흡과 함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하루가 시작되었다.
[본부, 제2보병여단이다. 긴급 지원 바란다. 들리나?] [들립니다. 말씀하세요.] [현재 렙틸리언 대부대에게 임시 승강장 위치를 들켰다! 엄폐 중이지만 곧 전투가 시작될 것 같다.] [바로 지원을 보낼게요. 세이라, 임시 승강장으로 가서 보병들을 도운 뒤 장갑 열차에 탑승해!] [철성, 임무 확인.] [교전이 개시됐다! 철새진을 해체하라! 승강장 참호까지 후퇴!]본래 전장에서는 문제가 하나씩 순차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늘 적들처럼, 은밀하게 더듬이를 움직이다가 허점이 열리면 한 번에 몰려왔다.
전장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여기는 장갑 열차 1702호, 소천봉이 화산으로 변해 폭발했다! 용암이 곧 승강장을 삼킬 거다! 지금 즉시 출발해야 한다!] [쏠 놈들이 지천에 깔렸는데! 하핫, 명중이다! 하하하하하!] [확인했어요. 1702호기, 바로 출발하세요. 철십자 1ㆍ3ㆍ4분대, 리아입니다. 7번 결계석 위치로 집결하여 대기, 장갑 열차가 잠깐 정차하는 틈에 탑승하세요.] [좋아, 다 죽여버려!] [여기는 메른, 확인했다. 철십자 3분대, 7번 결계석으로 이동한다.] [비상, 비상! 지원을 요청한다!] [제3기갑연대, 상황을 보고하세요.] [1701호기로 이동 중에 적의 기습을 받았다! 당장 지원 바란다! ……끄아아아!] [제3기갑연대, 제3기갑연대? 응답하세요, 제3기갑연대!] [이미 늦었다. 원병을 보냈다가는 원병까지 열차에 수용할 수 없게 돼.] [하지만 로베리스 선배님…….]중계 지점에서 1702호기 객차에 탑승하려던 카이센이 다시 모래사장 위로 내려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저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