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58)
가짜 용사 이야기-58화(58/310)
제58화
문득 왜 그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이 기억이 언제 있었던 일이었더라.
그래, 분명 신년 축제 때였다.
그 축제는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피의 향연을 벌여야 할 싸움의 나날 도중에, 축제가 열릴 수 있다니.
로베리스는 그 의문을 명료한 언어로 내리눌렀다.
– 신년이란 말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 낡은 날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날이 온다는 희망이지. 이런 축제를 계기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다.
– 병사들에게 말입니까?
– 모든 사람에게. 너도 포함해서 말이다.
로베리스는 카이센을 직접 데리고 축제의 땅으로 나아갔는데, 다른 용사들이 먼저 와 있었다.
– 캿! 이슬라가 또 해냈다! 백발백중이다!
– 대단해, 우리 이슬라는 참 대단해.
– 캬캿, 더 칭찬해도 좋닷!
목총으로 인형을 쏘아 넘어뜨리던 두 사람은 평복 차림이었는데, 카이센도 로베리스에게 받은 귀족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비단옷이 살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감각은 낯설다 못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시대에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이런 시대의 용사가 입어야 할 옷도 아니었다.
‘이런 시대에, 이러한 옷을 입고 웃고 떠든다는 건…….’
그렇게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카이센의 등을 로베리스가 부드럽게 밀었다.
– 나는 꿈을 꾼다, 카이센. 피바다 위로 사체들이 떠올라 징검다리를 만들어놓은 꿈이야.
왜일까.
저 꿈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머릿속에 피바다가 붉게 펼쳐지며, 밟고 온 길의 뒤쪽으로 슬픈 이별의 단말마들이 보였던 건.
– 나는 그 길을 걸어왔다. 만약 혼자였더라면 그 길을 걷지 못했을 거다. 너도 마찬가지야.
– 무슨 말씀이신지…….
– 동기들을 소중히 여겨라. 동기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저 아이들도 너와 마찬가지로 혼자다. 혼자라서, 서로 웃고 이야기해야 혼자가 아니게 된다.
카이센은 그 말이 거느린 의미에 놀랐다. 그 말에 지층처럼 쌓인 슬픔의 깊이에 놀랐다.
그 말의 깊이에 떠밀렸다.
결국 동기들과 하릴없이 어울리던 카이센에게 세이라가 말했다.
– 너도 이슬라를 좀 칭찬해줘. 네가 칭찬 안 하니 계속 저렇게 까부는 거야.
– 됐어. 쟤가 무슨 애도 아니고.
– 이슬라는 열네 살이 아니라, 사실 이제 세 살이야. 올해 생일이 되면 네 살이 되는 거고.
– 세 살?
– 완전 아기지?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해. 그래서 나중에 카세나 님한테 자랑할 거래.
그 축제는 축제라기보다는 장례식처럼 느껴졌다.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며 울면서 용사님, 용사님, 하고 외쳤기 때문이었다.
그건 왜, 곧 죽을 자신들을 위해 미리 흘리는 애도의 눈물처럼 느껴졌을까.
–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위대한 용 이슬라가 다 끝내겠다! 울 필요도 없닷!
그 눈물 속에서, 이슬라는 한 명 한 명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용사님, 용사님, 하면서 울었다.
이 가엾은 세상에는 이미 진짜 용사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가짜뿐이었는데도.
– 사람들은 말이야. 저렇게 용사님, 용사님, 이라 부를 존재가 있단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해. 용사라는 언어 자체에 감동이 있나 봐.
감동이 있어서, 그 호격을 부를 때는 언젠가는 반드시 흑암이 걷히고 다시 빛이 비칠 것이란 확신이 왔다.
그 빛은 무엇이었을까.
잃어버린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소망이었고 빼앗긴 일상을 되찾길 바라는 희망이었을까.
– 그래봐야 우리는 가짜인데.
– 가짜라고 해서 꿈조차 가짜 꿈을 꾸어야 한단 법은 없잖아?
그 순간 문득, 유언에 풀려 나온 스승의 못 이룬 꿈이 떠올랐다.
소박한 꿈이었으나 가짜 용사에게는 지대한 사치였다. 아, 당신께서도 그 꿈에 닿기 위해 칼을 휘둘러 오셨나요…….
세이라는 자신의 꿈을 말하지 않았지만, 저 말을 할 때의 표정이 죽던 스승과 비슷했다.
– 너나 나나 무슨 꿈을 품었건 간에 좁은 문이야. 알아. 험난한 길이겠지. 그래도, 카이센.
세이라가 주먹을 앞으로 내밀며, 입꼬리를 들어서 웃었다.
– 그 길 위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잖아?
그때, 로베리스가 한 말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랐다.
혼자이기에, 서로 이야기할 때 혼자가 아니게 된다는 말이 너무나도 명료해서 다시 한번 놀랐다.
로베리스가 등을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싶었다.
그리고 과연 자신이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었을지도.
– 그래, 혼자가 아니야.
피와 사체의 징검다리,
잊혀진 왕 네이갈라스 토벌전 (3)
네이갈라스 토벌전…….
그날의 기억은 눈물겹도록 낯익은 슬픔으로 다가와,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 분기점이 되었다.
1703호에서 분리된 차량에서 뛰어내렸을 때, 시야를 압도하며 펼쳐지던 것은 전장.
이곳은 청소년기의 마지막 전장.
불타는 사막의 폭열.
폭풍우 치는 모래의 폭풍.
그 폭풍에 뒤덮여, 기괴한 울음소리를 흘리며 누렇게 다가오는 고대의 악마들.
그 숫자는, 먼지처럼, 아무리 쓸어내린다 한들 끝이 없을 듯했으나 지원은 없었다.
그 앞에서, 철십자와 철성, 이 두 줄기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두 줄기가, 전부였다.
그 두 줄기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죽음이 헛되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모든 죽음의 무게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각하, 알리도나의 탐지에 의하면 도시 내부에 포진해 있던 렙틸리언의 숫자가 상당합니다. 뭉치기 전에 차근차근 수를 줄이지 않으면 골치 아파질 겁니다.”
그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
오직 청성의 목소리만이 길을 분명히 비추는 등불이었다.
[뇌향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심연의 군세를 막아내라. 네이갈라스는 내가 붙들고 있겠다. 현장 판단은 이제 로베리스 자네에게 모두 일임하겠다.]“알겠습니다. 청성은 모루가 되고 철십자가 망치가 되어 적을 쓸어 담아서 격파한다. 준비됐나?”
[여기는 세이라. 철성 병단 모두 준비됐습니다.]“좋아, 바로 시작하자. 네이갈라스는 대규모 공격만 생각했는지 <아우렐리노플>에 남겨놓은 병력이 그리 많지 않다.”
[흠, 그게 5만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요.]“아주 희망적인 소식 고맙다, 세이라. 네이갈라스가 이쪽에 도달하기 전에 그 숫자를 최대한 줄이는 게 목표다. 협공당하는 일은 피해야 해. 왕을 하나 상대하는 것조차 벅차다.”
그날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뇌향의 결계조차도 뚫고 들어와, 숨통을 틀어막고 아찔한 현기증을 유발시키던 비현실적인 고열 때문이었던가.
눈동자와 입 안 깊숙이 파고들어 화상을 입히는 모래 알갱이들이었던가.
“여기는 카이센, 뒤따르겠습니다.”
모른다.
지금도 알 수 없다.
[첫 번째 대열 발견! 본대와 끊어서 앞으로 몰아라!]황잡하게 교차하는 명령…….
그게 주어질 때마다 그저 미친 듯이 베고, 또 베고, 그저 베어 나가면서…….
칼날의 피 고랑을 흘러 지면을 적시던 핏물만이 그날의 기억 중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이었다.
[세이라, 몰아가는 중이다!] [철성, 창 세워! 전부 꼬챙이를 만들어버려! 이슬라의 복수다!]나중에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토벌 작전이 총력전의 연장선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을.
그 세부 내용을 훑어보면, 그건 중부 전선 군대와 네이갈라스 왕조의 공멸을 노리고 계획되었다.
[2시 방향에서 거대형 렙틸리언 출현!] [이슬라랑 용추만 있었어도 저딴 조무래기들은…….] [하! 골통 깨는 맛이 있겠는데! 내가 가지!] [저 녀석 혼자 보내긴 걱정되는군. 메른, 같이 가라.] [네, 단장.]공멸, 공멸이라니까…….
전쟁이 끝난 뒤 몇 날 동안 그저 그 두 단어를 말없이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리아의 작전이 제대로 통했군. 시운전조차 안 해본 그 작전 하나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우리 막내가 그 아이를 엄청나게 추천했잖아. 보는 눈이 있어. 서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현재 작전 중이다. 잡담은 거기까지다.]모두 사실은 마음속으로는 다 알고 있었을까.
장갑 열차로 <아우렐리노플> 외곽을 성채처럼 둘러싼 흑장미 병단과 보병과 포병들도.
열차와 열차 사이의 공백을, 두 발 달린 성문으로 메워냈던 거신병들도.
[단장, 제1파를 완벽하게 제압했습니다. 이상.]애초에 죽으라고 명했었으니까.
청성의 미른가디아가 그날, 그곳에서 자신과 함께할 모든 이들에게 죽으라고 명령했으니까.
그들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소리는, 사위를 가득 메운 장갑 열차의 포성 소리에 실려 왔었다.
[복귀해라, 메른. 신속하게 재정비하고 제2파와의 교전에 대비한다.]이것은 청성을 비난하는 게 아니며 비판하는 것조차 아니다.
청성께서 없으셨더라면.
그날 새벽, 산천을 가득 메운 피와 주검과 뼛조각들을 누가 역사서 위에서 ‘공멸’이라는 단어로 엮어낼 수 있었을까.
[이런 미친, 무슨 산이 걸어 다니는 것 같잖아……!] [메른, 무슨 일이지?] [네이갈라스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서 본대 쪽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돌겠군, 본 것뿐인데 온몸에서 피가 납니다.]<잊혀진 왕들>은 세상의 그 어떤 왕들과도 다르다. 그 어떤 옛 귀족들과 격 자체가 다르다.
그들은 절대자(絶對者).
우주의 지식을 읽고 창세 너머의 불법을 알며 부정한 존재로부터 왕의 권위를 받은 존재들이었다.
필멸의 사고를 초월하며.
필멸의 상식을 왜곡한다.
영겁의 잠에서 깨어난 그 절대적 지각 앞에서, 인간 세계의 어떤 힘도 능력도 지력도 무의미했다.
하지만 청성은.
청성과 뇌향 남매는.
그 절대적 존재의 패악으로부터 울면서 유리걸식하는 이 세계를 지켜내려 했다.
[청성 각하께서는 당한 건가?]저 수평선 끝에서.
천지개벽(天地開闢)의 힘을 백광과 청광으로 휘몰아쳐 왕의 심연과 맞서던 빛의 격류가 멎었다.
그때,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청성의 안위를 이 멀리서 생각하기에는 모든 것이 난잡했다.
[너무 멀어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네이갈라스가 여기로 오고 있다면 아무리 봐도…….] [서둘러라, 카이센! 분대를 이끌고 당장 본대에 합류해. 철십자, 적의 앞 대열을 짓뭉갠 다음에 본대로 돌아온다!] [기온이 폭주하고 있어! 현재 기온 260도! 로로, 막아내라는 명령을 받기야 했다만 저걸 우리 힘으로 막아낼 수 있긴 할까?]운명의 부름이 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이센, 이리로 오너라. 시간이 촉박하다.」
의식을 회복했을까.
마침내, 방법을 찾아낸 것일까.
가파른 숨으로 눈을 뜬 세츠넨이 다급히 불렀다.
「너는 지금부터 전투에서 이탈한다. 내 곁으로 오너라.」
“각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카이센은 철십자 전력의 핵심입니다.”
로베리스가 말했다.
카이센도 말했다.
“각하,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죽게 된다면 함께 싸우다 죽고 싶습니다. 동료들을 놔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 직접 보아야 한다. 그리고 네가 빠지는 것으로 이들이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것도 아니다.」
메른과 트발도 한마디씩 했다.
[카이센을 대체할 다른 아군이 있단 겁니까? 여기에?] [각하, 네이갈라스를 막아내던 청성 각하를 대신할 놈은 카이센 저놈밖에 없습니다.] [기온 더 증폭! 현재 실외 온도 320도! 네이갈라스가 이제 거의 다 왔어!]네이갈라스의 접근에 따라 기온이 400도까지 치솟은 그 순간, 그 목소리의 밑바닥에 깔린 어둠을 밝혀내기라도 하듯…….
전율의 홍염(紅焰)이 일었다.
먼 하늘로부터, 지축에 내리꽂히는 초현실적인 불길.
그것은 과거 용들의 시대, 카르스 드라고니아(용들의 평화)를 살아가던 이들의 전율을 짐작게 하는 그런 생명의 불길이었다.
모든 이들이 웃음을 지켜내며 황금시대의 태양을 밝히던 불길은 고대의 파충류를 걷어내고 옛 왕조차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아니…… 이건? 북쪽 정면에서 어마어마한 열 반응, 네이갈라스의 몸이 불타고 있어!]“네이갈라스를 불태운다고?”
[엄청난 힘이야…… 계속 이쪽으로 접근 중! 내가 아는 어떤 주술보다도 상위 등급의 불꽃, 저건 용의 불꽃이야!] [단장, 이제 제 눈에도 보입니다! 붉은 용린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용 뿔이 머리에서 돋아난 진룡급 용입니다.] [하, 외형을 설명할 필요가 뭐 있어? 저런 불꽃을 쓸 수 있는 존재는 이 세계에 단 한 분뿐인데.]“홍염의 아키레아 님…….”
그 희망의 이름을 망연히 읊던 로베리스의 표정을 기억한다.
삼영룡.
용현 레인 루드윅이 이 땅에 남긴 세 개의 기적. 그 기적을 역순으로 열거하자면 아래와 같다.
삼남, 청성의 미른가디아.
차녀, 뇌향의 세츠넨.
장녀, 홍염의 아키레아.
청성과 뇌향이 인류사에 끼친 영향 또한 대단한 것이었으나, 홍염 앞에서는 그 위엄을 세우기 어려웠다.
홍염의 아키레아.
옛 아드리온 대륙의 수호자, 다섯 여의주를 모두 품은 진룡, 공허의 사도와 함께 시간의 군주를 토벌한 무훈시의 주인공.
하지만 말미의 설명이, 홍염이 전투의 전면에 나설 수 없는 한계를 재단했다.
그 전투에서 시간의 군주에게 깊은 상처를 입었기에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세츠넨이 말했다.
「빛의 아이들아. 시간을 더 벌어다오. 용현께서는 거미 군주 아쉬론을 상대할 때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 그곳에 가두어 봉인하셨다. 미르는 그 지식에 매달렸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게 무슨 뜻이죠?]「미르가 그 힘으로 네이갈라스를 붙잡기 위해서는 한순간이라도 네이갈라스를 완벽하게 무력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오직 카이센이 그 길을 열 수 있다.」
세츠넨은 덧붙였다. 이 힘은 진리에 다다른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창세의 유산.
용현 사후의 긴 역사 동안 그 힘을 다룬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너희들의 피와 눈물의 봉사 속에서, 미르는 마침내 이 진리에 다다르는 것과 동시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죽은 모든 이들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죽은 거군요.]세이라가 낮게 말했다.
「그래. 용기의 선진(先進)들이 뭘 위해서 죽어갔는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기를 간청하겠다.] [하! 알겠습니다. 뭔 소리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청난 일을 기획하고 있단 건 알겠군요. 다만 서둘러 주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보고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래, 이렇게 될 일이었군…….”
그렇게 중얼거린 로베리스는 문득 카이센을 똑바로 돌아보았다.
“카이센, 내가 예전에 네게 해준 징검다리 이야기 기억하냐?”
카이센의 시야에서 불타는 사막이 사라지고, 대신 피바다와 사체의 징검돌이 펼쳐졌다.
<온 것들>로부터 이 세상에 전해져, 삼영룡과 용기의 선진들을 통해 운반되어온 횃불을 들고 로베리스가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으로, 더 이상의 징검돌은 없었고 아직 초가을의 햇살이 비쳐드는 문은 저 멀리 있었다.
그 마지막 징검돌 앞에서.
로베리스는 자신을 따라오던 소년 용사에게 횃불을 건네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의 미소가, 아아, 로베리스 평생에 가장 맑은 미소였다.
“이제 내 때의 끝이 왔다. 카이센, 나를 밟고, 미래로 가라. 이제 네 차례다.”
그것이 작별 인사였을까.
신들이 허락했던 마지막 시간이었을까.
그 말이 가져올 미래의 충격으로부터 슬픈 미소를 나누는 것이 당신과 나의 작별 인사였던가.
“자, 알아들었으면 각하께 가라.”
“선배님, 방금 그 말씀은─”
“─어서! 다 끝날 때까지 안 나오면 그때는 두고 갈 거다.”
아키레아 홀로 네이갈라스와 대적하고 있었다.
용암과 모래의 폭풍과 뒤엉키며 포효하는 불길의 춤…….
그 전투는 범접 불가능한 섭리들의 싸움처럼 보였으나, 힘의 우열은 명백했다. 우열의 격차가 곧 시간적 한계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그러니 선배님, 부디…….”
죽지 마십시오.
부탁이라기보다는 기도와도 같은 그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