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59)
가짜 용사 이야기-59화(59/310)
제59화
무엇일까.
세츠넨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자, 문득 초고열의 사막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곳에는 오직 태양빛만이 가득한 공간에 와 있었다.
그것은 영혼의 공간.
오직 용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혼(魂)의 처소.
‘이슬라와 같은…….’
이 낯익은 공간 한복판에, 이슬라 대신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중갑의 형태를 한 그것은 존재 자체가 무(武)였고 강(强)이었으며 병(兵)이자 압(壓)이었다.
기원 자체가 힘의 산물이었을까. 피에 절여진 역사를 갖고 있을까. 숨이 막히는 피비린내를 뿜었다.
어느새 그 옆으로 나타난 세츠넨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옛 시대의 힘이지. 드래곤 슬레이어의 산물이야.」
“드래곤 슬레이어……?”
「그래, 이 갑주는 그가 용을 죽여서 그 용린의 정수만을 뽑아 만든 용린갑(龍鱗甲)이다. 지금 내 여의주들을 구성하고 있는 용들의 육신으로 말이지.」
드래곤 슬레이어, 아서 브리우스.
검도에 있어, 마나체인의 구조적 한계로 여성에게 뒤처질 수밖에 없는 남성의 몸으로 정점에 올랐던 자.
무려 천 년 전의 인물로, 오직 한 시대의 서열 1위만이 오르는 금강(金剛) 등급의 용병이었다.
마족과의 분쟁 지대를 용병으로서 휩쓸었는데, 그 무예가 어찌나 뛰어난지 옛 우루크들조차도 그 힘에 경외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힘에 대한 욕망에 끝이 없던 것이 문제였다.
그 힘을 위해, 용들을 죽여 그 여의주를 삼키는 악행을 벌였고 끝내 토벌령이 떨어졌다.
그때 페이쿼리어 셋과 진룡 하나를 동시에 상대하였고 페이쿼리어 둘을 죽였다.
전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서는 공식 역사로 270년 전 되살아나 용현 레인 루드윅조차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한다.
그때 용현에게 토벌되어, 혼에 묶어두었던 혼들이 해방되었고 그 집합체가 바로 세츠넨이었다.
이러니 악인일지라도 검술 역사에서는 그 지위가 입지전적일 수밖에 없었다.
트발이 말하길, 불경스럽게도 검신이라는 이름으로 숭배하는 남자 검사 집단도 있다고 했다.
「나의 옛 허물이기도 한 이걸 너에게 주노라. 너와 신체 규격이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딱 맞는다.」
황룡의 비늘로 만들어진 용린갑은 환상처럼 느껴졌다. 갑주의 형상을 빌리고 있을 뿐인 깃털…….
초월적 방어 능력을 지녔을 텐데, 평소 입던 누비 갑옷에 견줄 정도로 가볍고 편안했다.
갑주가 세츠넨의 손짓에 의해 제멋대로 몸에 입혀질 때, 전투에서는 기동력을 우선시한다는 이유로 거절하려 했었는데 말이다.
「아서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악명을 떨치기 전의 별호는 우루크 슬레이어. 너와 운명처럼 일치하지 않느냐?」
검사의 위엄과 편의성을 모두 고려해 제작된 갑주는, 몸 위에서 빛바랜 황색으로 반들거리며 싸늘한 피비린내를 뿜었다.
옛 마족의 피를 품은 갑주가, 아라다만텔의 울음에 복종하는 떨림이 느껴졌다.
붉은 볏을 길게 늘어뜨린 투구 또한 용의 두개골을 형상화한 것이었는데, 용의 위엄을 검사의 날카로움에 섞어놓은 예술품이었다.
「본래 부정한 물건으로서 영원히 봉인될 물건이었으나,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정말 분에 넘치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이걸 주시려고 절 여기까지…….”
「끝까지 듣거라. 이 갑주 또한 분명 강대한 조력자가 될 것이지만, 내가 네게 이 갑주를 주는 건 단지 그 목적 때문만이 아니다.」
마음이 급했다.
로베리스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그 말이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날뛰고 있었다.
가야 해, 가야 하는데…….
「너는 지금부터 나로부터 영혼을 받아서, 이 갑주에 서린 기억을 읽어내야만 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혼에는 기억의 자취가 남는다. 나는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삼켜져 그 안에서 동화되었지. 끔찍한 기억이긴 하나, 지금 보니 모두 신들의 인도하심이었구나. 너에게 그 기억을 힘으로 전해줄 수 있게 되었으니.」
“할 바를 정확히 알려 주십시오.”
「너는 검술을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재능을 가졌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검술, 그 오의와 극의들을 엿보고 훔쳐 익혀라. 그것이 네 힘에 날개를 달아줄 거다.」
이것이었던가…….
바로 이것이, 곧 시작되려는 대전투의 혼란 속에서 이곳으로 부른 목적.
전장에서 이탈시켜 휴식을 취하게 하려는 것, 힘을 온존시켜 두려고 하는 것.
그것들 모두가, 전설 속 검사의 검술을 현실로 끄집어내 옛 왕과 맞서게 하기 위함인가.
다시 닥쳐오는 운명의 전율로 입 안이 타들어갔다.
「미르가 지계 차원을 구축해 내려면 네가 네이갈라스의 기세를 꺾어야 한다. 철십자와 철성이 지금 너와 미르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분투 중이다.」
“알겠습니다.”
「카이센, 인류는 심연에게 대적할 힘이 없어. 미르의 방법마저 무너진다면……. 이 기억 속에서 네이갈라스를 저지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단다. 용현과 공허의 사도가 그랬듯이.」
그들과 비교하면 난…….
용린갑의 투구를 옆구리에 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가 그런 위인들 같은 일을 어찌 해내겠습니까.”
「해야만 한다, 카이센. 네가, 모두에게서 불을 이어받은 네가, 이루어 내야만 한다.」
문득, 아침의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비친 착각이 일었다. 세츠넨이 가까이 다가와 이마를 포갠 것이란 걸 알면서도.
「늘 네게 슬프고 고된 길을 제시하기만 되는 나의 무력함에 슬픔을 느낀다.」
맥박일까……?
아니, 이것은 혼의 파동…….
그 맞닿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서 무언가가…… 본 적 없는 광경이 선명한 기억처럼 밀려들어 왔다.
「기억의 파동이 느껴지느냐?」
“예.”
「아서의 모습이 보이는지 정확히 말하거라.」
“이 갑주와 용골창을 둘 다 가진 남자가 보입니다. 낡은 삿갓을 쓴 마법사와 싸우는 중입니다.”
「깊이 들여다보아라. 거기부터는 너의 싸움이다.」
그러한 일들이 벌어질 때.
현실 속에 남겨진 이들에게는 그저 뇌향이 카이센과 이마를 맞닿은 걸 기점으로 둘 다 의식을 잃은 것만 보였다.
로베리스가 세츠넨에게 말했다.
“세이라, 이곳에 남아 각하와 카이센을 마지막까지 호위해라. 반드시 지켜라.”
다음 돌진은 돌파나 저지가 아니라, 다만 지연작전이었다.
적진을 돌파하는 충격 돌진도 아니었고, 적의 공세를 약하게 만들어 뒤로 물러서게 하는 전술적 돌진도 아니었다.
필요한 건 오직, 시간을 버는 것. 그러니 이곳이 철십자의 사지(死地)였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선배님, 무운을 빕니다…….]멀리 서 있는 세이라의 경례를 손짓으로 가볍게 받으며, 로베리스가 군마 위에 올랐다.
“알리도나, 상황은?”
[아키레아 각하께서도 이제 더는 못 버텨. 네이갈라스가 곧 직통으로 올 거야. 적 잔존 병력은 1만쯤, 여전히 위협적이야.]“사실 다 듣고 있어서 알고 있어. 마지막으로 목소리나 들을까 했다.”
[어머나, 멋진 남자였다면 그 한마디에 반했겠어. 근데 잡담하지 말라던 사람이 누구였더라?]“그러게나 말이다.”
[단장, 이제 우리가 옛 왕을 상대로 버티냐 못 버티냐의 싸움이겠는데요.] [하!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부대가 우리란 말씀이군.]“지금까지는 늘 그런 역할이었지만, 오늘은 끝낼 발판을 마련하는 조연 역할이다.”
오늘, 나는 나의 시체로 그 발판을 쌓는다.
카이센이 그 시체의 발판을 밟을 수 있도록.
밟아서, 내가 운반해온 세상의 등불을 대신 미래로 가져갈 수 있도록.
[늘 그렇게 말했지만 항상 주인공 자리 빼앗아온 게 우리 철십자 아닙니까? 하!]하, 하하하하하…….
트발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로베리스가 터뜨린 실소가 뇌향 공명을 통해 모든 단원들에게 전파되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단장이 웃음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운명에 감사한다.’
이 길 위에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이들을 친구라는 인연으로 만나게 해준 운명에.
그리고 이 사망의 골짜기를.
마지막까지 함께 걸어갈 친구들을 창세전부터 예비해두신 신들의 섭리에.
“그래, 사실 나 또한 이번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웃으시니 보기 좋네요, 단장.] [그러게 말이야.]“그러냐? 그렇다면 앞으로 자주 웃어보지. 자, 철십자! 출진의 나팔을 불어라!”
치솟는 나팔의 떨림과 함께.
철십자 깃발을 펄럭이는 기사단이 모래 폭풍 너머, 옛 군주 네이갈라스의 군세에게로 돌진했다.
그것이, 역사가 기록하는 철십자 기사단의 마지막 돌진이었다.
피와 사체의 징검다리,
잊혀진 왕 네이갈라스 토벌전 (4)
가물거리면서 여러 갈래로 흩어지던 카이센의 의식이 별안간 각성했다.
황금빛의 공간…….
거룩한 광휘가 한없이 펼쳐진 이곳은 뇌향 세츠넨의 심층 세계, 그런데 그 세계 여기저기에 새까만 종양들이 돋아나 있었다.
‘종양과도 같은…… 저건가?’
종양에 손을 뻗은 순간.
접촉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 뇌리에 자신의 기억처럼 생생히 재생되는 건 타인의 파편.
– 자, 날 따라와라. 내가 너에게 힘이란 게 무엇인지 알려주마.
아서 브리우스의 유년기…….
고아로 태어난 아서는 빈민가를 부랑하다가 정체불명의 검사에게 거두어진다.
그 이름이 릴키우르라 했다.
– 인간들이란 이 세상이 어떤 희생 위에 세워졌는지 알려 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 강자에게 자비와 연민만을 강조할 뿐. 그러면서 자기보다 약한 자는 무자비하게 짓밟지. 나는 이 허무하도록 무가치한 세계를 베어낼 거다.
그런데 저 여자가 등에 차고 있는 저 검…… 이상하게 낯이 익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너무나도 낯익었다.
이 기억의 세계까지 동행한 아라다만텔과 가우므리스가 처절하게 우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진성검(眞聖劍)?”
칼날을 둘둘 감은 헝겊조차, 그 칼날이 위압적으로 내뿜는 보라색의 검광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소름이 등줄기를 내달렸다.
불가능한 상상이, 아니 진성검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저 색…… 오필리아의 베룸페이라와 똑같잖아. 그렇다면 설마. 근데 도대체 어떻게? 누구지? 왜 역사에는 저 인물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거야.’
만약 진짜 용사가 살아 있다면.
왜 지금, 세계가 이렇게 뒤틀린 순간까지 나타나지 않는 거지?
‘무엇보다 왜 저렇게 기괴한 사상을 품고 있지?’
불길한 상상을 할 여유가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 검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네 힘과 골격은 쾌검보다는 둔검에 걸맞아. 검에게 네 궤도를 강요하지 마라. 검의 궤도에 널 밀어 넣는 거다. 그것이 어검술의 기초다.
어검술이라니, 검의 극의를 저렇게 간단히 말한다고?
순간 기억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며 다시 광휘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한 번 읽은 종양은 더러운 액체를 뿌리며 폭발해 버려서 다시 읽을 수가 없었다.
‘다음, 다음 기억이다.’
다음 종양에서 나타난 기억에서 아서는 유년기를 마치고 소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 아서는 열여섯 살이었다.
열여섯 살에 문명 세계와 마계의 접경, 분쟁 지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 정말 대단한데, 우루크 슬레이어.
– 그 별명 붙인 새끼 데려와. 그놈 때문에 우루크 놈들이 나만 보면 꽁무니를 빼기 바쁘잖아. 젠장, 재미 하나도 없군.
이때 아서는 용골창이 아니라 대검을 사용했다.
‘아직 용린갑도 없는 걸 보아하니 용을 사냥하기 전인가.’
이때의 아서에게는 크게 배울 만한 것이 없었다. 전투의 기억이 두세 가지 반복되고 종양이 폭발했다.
배울 만한 기억은 스승이 나타나서 새로운 지도를 해줄 때였는데, 이때 아서는 순박하게 웃었다.
단순히 기뻐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오직 평생을 그 순간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았다.
– 스승님, 이거 보십쇼!
힘에 대한 무한한 갈망도.
검에 대한 무한한 성취도.
– 저번에 알려주신 검기, 이제 자유자재로 날릴 수 있게 됐습니다!
오직 스승이 나타날 때, 자신의 성장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스승…….’
만약의 이야기지만.
정말 만약의 이야기이지만.
카밀라가 살아 있었다면, 나도 저 녀석과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 많이 늘었군. 마음에 들어. 슬슬 검의 극도를 터득하기 시작하는군.
아서에게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고, 검의 핵심을 가르쳐주는 스승 위로 카밀라의 모습이 포개졌다.
“…….”
분명 저것과는 달랐을 거다.
카밀라가 저렇게 위엄 있게 가르쳐줄 위인도 아니고, 나도 저렇게 예의 바르지도 않았을 거야.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다지만.
‘만약 저 순간을 내가 한 번이라도 누릴 수 있다면, 저것보다 몇 배는 행복하게 웃었을 거야…….’
카밀라가 가르쳐준 검술을 제대로 따라 해내면…….
울프가 박수를 쳤고 카밀라는 까불지 말라며 머리를 때렸어. 그러면 진이 마구 웃어댔지.
이제는 닿을 길이 없게 된 과거 어딘가의 기억…….
“…….”
아서는 도무지 상종 못 할 악인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의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스승에게 인정받는 것.
스승의 존재가 그에게는 날 때부터 공백이었던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었을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는 안 될 악인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너무나도 확실히 알고 있지만…….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여유도 거기까지였다. 제일 중요한 전투 기억이 시작되었으니까.
– 나 원 참, 나 하나를 토벌하시겠다고 예쁘장한 용사님들이 세 분이나 오셨군. 그리고 그 위대하신 요슈하르께서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