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61)
가짜 용사 이야기-61화(61/310)
제61화
[카이센, 한순간…… 단 한순간이면 내 때가 족하다…… 그때 내가 다 끝내겠다.]왼손의 억제기의 핀을 빼자, 그 몸 위에서 광룡의 광휘가 소용돌이치며 눈부시게 집약된다.
순간, 그 힘의 소용돌이가 여러 조각으로 깨졌다.
분열된 파편은 10개였는데, 일률적인 크기와 형상으로 등 뒤에서 광명의 날개처럼 전개되었다.
“나는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다.”
외치는 것은 자신의 이름.
그 이름에 이어 부르짖는 것은.
부디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영혼의 기도.
“네이갈라스.”
천 년 전.
아서 브리우스는 진룡과 페이쿼리어 셋을 동시에 상대할 때 이 허황된 검술을 완성시켰다.
검을 하나만 사용해서는, 아무래도 여러 강적들을 상대할 때 허점이 다수 노출되고 만다.
“널 죽여 버리겠다.”
그렇다면.
몸을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손을 쓰지 않고 부릴 수 있는 검의 숫자를 늘리면 된다. 아서 브리우스는 이런 망상을 요구하고 또 배우고 연구하여, 마침내 극한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팅……!
그 옛 힘을.
지금 바로 이곳에 끌어낸다.
─ 극 용검술(極 – 龍劍術).
칼을 휘두를 필요가 없다.
손으로 잡을 필요도 없다. 일일이 힘을 줄 필요도 없다. 오직 마음으로 명령만 내리면 된다.
이는 역사상 오직 한 명의 검사만이 도달한 검의 극의, 심검(心劍)을 열 자루 만들어 부리는 것.
“뇌향령어검(雷響令馭劍), 개(開)!”
검술의 광대한 지평, 그 끝자락에 위치한 힘. 그 힘을 광룡의 힘으로 더 강력히 부릴 수 있다면.
몇 번 본 것만으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였으나, 어디에나 편법은 존재했다.
바로 뇌향의 혼, 뇌향의 힘.
모든 것과 소통할 수 있는 그 힘은 분열시킨 기(氣)들에게조차도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만든다.
이렇게 될 미래조차 삼영룡들은 내다보았을까. 로베리스는 내다보았을까.
– 나를 밟고, 미래로 가라. 이제 네 차례다.
심연의 용암이 들끓어서 땅이 유황 냄새를 뿜어냈다.
속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악몽(惡夢)이, 그 용암의 끝에서 세계를 삼키고 있었다.
그 끝으로, 사체들이 떠올라 길을 이루고 있었다. 사체의 징검다리였다.
─ 십문자도 제4식, 발(發).
시체의 징검돌 위를 내달릴 때.
그 유황 냄새 속에서.
먼 고향땅에서 어머니를 묻던 모래밭 위로 철썩거리던 파도 소리가 들렸다.
─ 용검술.
파도 소리가.
저 보이지 않는 수평선으로 몰려 나갔다가 돌아올 때.
소리는 카밀라가 죽던 날 내리던 첫 장마의 빗소리로 바뀌었고.
─ 십극 : 진천뇌천 (十極 : 震天雷川).
다시, 유황 냄새 속에서.
소리는 평원 지대의 장벽을 통째로 삼키던 베헤─리크의 흩어진 살점과.
몸속에서 맑게 피어나는 미소를 남기고는 죽은 이슬라의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그 모든 기억이, 파편으로 부서진다.
파편으로 부서져서, 사방에 꽃잎처럼 흩날리고…… 그저 덧없이 흩날리다가 일정 궤도에 올라 움직임을 멈춘다.
그것은 정한(情恨)의 칼날.
기억들은 다만 한 자루 칼날이 되고, 길을 이끄는 한 줄기 등불이 되고, 피바다 위 하나의 징검돌이 되어.
미래로의 길을 열어낸다.
무한의 속도에서 무한의 힘으로 무한하게 그어지는 섬광의 격류 위에서 붉은 꽃이 피어난다.
무덤가에 피어나는 백일홍처럼.
그리고 그 백일홍의 궤도를, 아이가 부모의 동작을 따라 하듯, 10개의 날개가 모방해 행한다.
─ 십문자도 5식, 돌발격.
─ 십문자도 6식, 섬무참.
─ 십문자도 7식, 진뇌룡.
─ 십문자도 8식, 뇌염검무.
─ 십문자도 9식, 절뢰도.
─ 십문자도 10식, 십자참수.
─ 십문자도 11식, 뇌격단.
─ 십문자도 12식, 영멸섬.
그 붉게 꽃잎을 그리는 칼의 소용돌이는, 왕의 육신을 구축하는 영혼들을 해방시키고 그 너머 근골과 살가죽을 도려낸다.
계속, 계속.
끝없이, 끝없이.
왕은 왕이로다. 무한의 속도조차 그 시선 속에 붙들린다. 움직임의 궤도를 읽혀 붙잡히려던 그때.
[막내야, 힘내…….]그 육신에 이는 미세한 둔화.
그 힘은 왕의 육신을 완전히 속박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힘이었으나, 무한의 경지에서는 그 미약한 시간은 매우 컸다.
시편 두루마리를 길게 펼친 무녀 알리도나는, 명세시편을 총 34번 읊은 반동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 죽음은 또 하나의 징검돌이 되어, 광속으로도 쫓을 수 없는 속도로 칼을 휘두를 길을 연다.
버텨라, 내 심장아.
버텨라, 내 육신아.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빌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쯔아아아아아────!”
거칠게 포효하듯이.
애달프게 절규하듯이.
어쩌면, 신들에게 간절히 부르짖듯이.
“──────아아아아아아아!”
미숙하게 사용한 검술의 오의는 신룡의 힘을 폭풍같이 거대하게 만들며 폭주시켰다.
그러한 초월적 반동으로, 체내의 근섬유들이 찢어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왕은, 필멸자이기에 반드시 떠안게 되는 이러한 허점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압도(壓倒).
시야가 기울어지는 절망적 감각.
몸을 수습할 여유도 없이, 눈앞까지 짓쳐든 악몽의 손아귀.
눈 깜짝할 사이에 재생시킨, 아니, 아직 재생이 끝나지 않았을 손이 죽음으로 펼쳐진다.
그때.
그 손이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였다.
아니, 잘려 나갔다.
아직 재생이 끝나지 않은 단면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시공의 참격에 의해서. 시공섬이었다.
“──나아가!”
모래 폭풍 너머 어디선가 들려온 그 외침…… 운명의 속삭임처럼 다시 몸을 앞으로 이끌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 등을 앞으로 떠밀듯.
시공섬은 무려 네 번이나 되풀이되어, 왕의 팔을 완전히 도륙 내 지면에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재생시키기는 하나, 용기의 선진이 만들어준 그 몇 초는 더할 나위 없이 값졌다.
─ 극 용검술 : 용뢰선참(龍雷線斬).
그 드러난 절단면 속으로 파고든 칼날에서 낙뢰의 선율이 번쩍이며 퍼져 나갔다.
참격에 포개어진 낙뢰의 힘은.
북쪽, 북서쪽, 북동쪽, 동북쪽, 동쪽, 동남쪽, 남동쪽, 남쪽, 남서쪽, 서남쪽, 서쪽, 서북쪽으로 온 천지로 전개되었다.
이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두 비술 중 하나.
칼날 위로 포개졌던 심검이 분열하여 무한한 선(線)을 그린다.
표적의 약점을 따라.
지축을 따라.
천공을 따라 펼쳐지는 그 선은.
곧 뒤를 따라올 뇌전(雷電)에게 길을 제시한다. 적을 반드시 말살(抹殺)하는 길을.
「──────!」
네이갈라스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쳐들었다.
일순, 절단면 깊숙이 꽂힌 아라다만텔의 칼날을 타고 흘러들어온 벼락이, 왕의 옥체와 그 영혼의 무늬를 정확히 겨누며 스며든다.
열 자루의 어검이 주인의 검술을 모방하면서, 세계에서 색채를 모조리 빼앗아 오직 흑백만을 남기는 낙뢰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휘광벽력(輝光霹靂).
극위성검이 발현시키고 신룡의 권능으로 완성시킨 힘이 모래 폭풍과 불타는 사막과 끓는 용암 모두를 찢어발기며 길길이 날뛰었다.
헤아릴 수 없는 벼락은.
무한히 번쩍이고 또 내리꽂히고 또 체내와 지표에서 솟구친다. 육신의 재생 속도가 붕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피이이이잉……!
그리고 청광을 뿌리며 날아든 화살이, 그 몸에 박히자마자 사방으로 세계수의 뿌리를 펼친다.
백창궁 세르웨본의 화살.
그 화살은 재생 부위를 휘감아, 안 그래도 붕괴의 속도를 쫓지 못하는 신체 수복 속도를 늦췄다.
“뇌향령어검, 결(結)!”
그렇게 허점이 노출된 찰나.
각기 여러 방면으로 흩어진 채, 벼락의 춤을 추던 뇌검들이 칼날 위에서 하나로 뭉친다.
그렇게 허점이 노출된 몇 초 동안, 칼날 위에서 하나가 되어 요동치던 낙뢰의 힘을 칼집에 꽂아 넣는다. 다음 순간.
거합천섬(居合天閃).
칼집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뇌전의 칼날이 다시 눈부신 뇌광을 뿌리며 솟구치면서 ‘하늘’을 베었다.
“각하!”
낙뢰의 춤 속에서.
길이 열렸다.
왕의 육신을 반으로 갈라서, 그 너머 혼의 핵(核)으로 나아가는 길이.
“바로 지금입니다!”
피와 사체의 징검다리,
잊혀진 왕 네이갈라스 토벌전 (6)
[단장, 저 먼저 갑니다…….]말라비틀어진 손으로 끝내 쉬르팽을 놓친 로베리스가 고개를 들어서 그 빛을 올려다보았다.
으깨진 내장에서 솟구친 핏물이 시선을 가려서, 상황의 윤곽은 볼 수 없었으나 하늘이 베이던 빛의 명멸은 볼 수 있었다.
그 빛의 명멸은, 꼭 신들의 분노가 땅 위에 체현된 것만 같았다. 신들이 다시 이 땅에 돌아온 것처럼 거룩한 빛이었다.
‘카이센, 너에게 이제 이 길을 맡기고 우리는 간다…….’
우리의 길은 여기서 끝나지만.
네 길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두고 가는 우리를 용서해라.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편히 감긴 그 눈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영원히.
[각하, 바로 지금입니다!]같은 시각에, 저 먼 수평선 위에 쓰러져 있던 미른가디아의 눈이 고통스럽게 열렸다.
눈꺼풀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여름’ 종전 이후, 움직이는 몸은 병들고 뻣뻣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토해져 나왔다.
「드디어, 내 마지막 때가 왔군…….」
미른가디아는 잠시 하늘을 우러러, 먼 옛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해 기도했고.
「아바 아버지, 이제 나의 마지막 길을 인도하소서…….」
그리고 평생의 마지막으로, 자신의 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작별의 시선이, 처연했다.
찰랑…… 이윽고 물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소리와 함께 시상이, 아니, 세계 전체가 일변했다.
오직 네이갈라스와 미른가디아의 세계만이 바뀌었다.
본래 필멸의 지각으로는 감히 들을 수 없던(뇌향의 힘으로 차단한) 왕의 옥음도 이 세계에서는 감히 들을 수 있었다.
「Po has, 무엇이……?」
그것은 순백(純白)의 호수.
동시에 순청(純靑)의 세계.
몸서리쳐질 정도로 티 없이 맑고 정결한 호수 위에, 네이갈라스의 옥체가 서 있었다.
그 왕의 당혹감 속으로, 호수보다도 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나의 차원…….」
몸 주위에서 휘몰아치는 모래의 폭풍과, 체내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으로 수복되던 육신의 재생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호면 아래에서 솟구친 나무의 줄기와 덩굴들이 그 육신을 휘감으며 기어올라 그 혼의 핵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 나무는 나무의 형태를 입고 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자열이었다.
창세의 문자.
창명시편의 글귀들.
창세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들을 모두 외우주의 영역으로 내쫓는 그 힘이, 네이갈라스의 혼을 봉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한을 살아가는 너와 나의 영원한 무덤이다…….」
미른가디아가 말했다.
그 몸은 호수와 하나처럼 보였다. 아니, 하나로 변하고 있었다.
지금 호수 아래에서 솟아올라 네이갈라스의 몸을 휘감는 세계수와 일체화되어, 영원히 이 세계에서 네이갈라스와 싸우며 봉인을 수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의도를 알아챈 왕의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네놈…… 나, 네이갈라스는 파멸(破滅)이다!」
그 줄기들을.
그 문자의 속박들을.
「이 땅의 모든 섭리를 뒤트는 패악(悖惡)이다!」
뿌리치려 해도.
용암을 내뿜어 녹여내려 해도.
모래 폭풍으로 수분을 모조리 갈취해 말라비틀어지게 하려 해도.
「영(永)도 원(遠)도, 무(無)도 한(限)도, 초월의 요소를 무엇 하나 온전히 구가해보지 못한 무지렁이가──!」
끊어지지 않는다.
청성이 평생 동안 준비해오고 또 수천수만의 죽음으로 엮어낸 그 힘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나무는 점차 광염(光焰)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며 하나의 형태로 굳어져갔고…….
「──심층의 섭리를 내다보는 존재에게 축복받은 나 네이갈라스의 지경을 고작 이딴 창세의 언어로 너 따위가 재단하겠──!」
세계의 영혼을 찢어발기듯 울려 퍼지던 포효는 거기까지였다.
차원이 온전히 구성되면서.
현실, 즉 불타는 사막과의 연결이 단절되었고 호수의 세계와 청성과 네이갈라스는 저 먼 어딘가로 사라졌다.
휘오오오오오……………
방대한 두 존재감이 사라진 빈자리를, 전쟁이 끝난 거대한 적막이 관통했다.
……………………오오오오오.
사방에서 몰아치던 모래 폭풍이.
격렬히 들끓던 용암의 바다가.
모든 사체를 질퍽하게 녹이던 고열이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고통스럽게 날뛰던 화산들이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한다.
[렙틸리언, 렙틸리언이 갑자기 쓰러진다!] [무슨……?] [아니, 저것 봐! 화산재가, 모래 폭풍이 전부 걷히고 있어!] [청성 각하, 성공하셨군요! 각하? 각하!] [여기는 흑장미의 리아, 본대 응답해 주십시오, 본대!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네이갈라스의 강대한 힘에 의해 차단되었던 뇌향의 힘이 광범위하게 펼쳐진 덕분일까.
수라장 속에서 살아남아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갈구하던 목소리들이 적막을 메우며 밀려들었다.
그때, 살아남은 이들 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츠넨은 미른가디아가 사라진 자리 앞에 꿇어앉아 아이처럼 울었고 아키레아가 그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
카이센은 으스러진 몸을 절뚝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초월의 반동이 몸에 꽂혀서, 체중조차 버티지 못한 다리의 힘줄이 끊어지고 관절이 바스러졌다.
꺾인 무릎으로, 지팡이처럼 아라다만텔로 땅을 밀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머릿속에서 혼절의 흑암과 의식의 광명이 명멸하며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칼을 붙잡을 악력조차 사라졌다.
몸을 지면에 처박고도 두 손으로 기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본대, 응답해 주세요!]앞으로, 앞으로…….
[렙틸리언이 사라졌으나 마족 부대가 출현했습니다! 숫자가 엄청나게 많아요!]철십자 용사 파티는 여기저기 흩어져서 혼자서 죽었고 자신들의 장비를 묘비로 남겼다.
용암 위에 쓰러진 알리도나의 녹아내린 사체는 프리데의 곰방대만이 그 묘비로 남았다.
상반신이 으스러져 오직 하반신만 돌 더미에 처박힌 트발의 묘비는 용골창이었다.
핏자국만을 남기고 사라진 메른의 죽은 자리는 백창궁 세르웨본이 지키고 있었다.
[살아 있다면 지금 즉시 1701호로, 움직일 수 없다면 말해주세요! 뇌향 각하! 청성 각하! 카이센? 카이센! 세이라! 로베리스 선배님!]그러한 묘비들을 지나갈 때마다, 카이센은 잠시 멍하니 그곳을 쳐다보다가 다시 기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한 주검 앞에서, 싸움의 흔적들을 되짚어가던 손길을 멈추었다.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
그 얼굴은 맡겨진 길을 끝낸 자의 미소로 편하게 펴져 있었다.
머리칼과 눈썹과 피부색과 입술 모두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덧없게 스러진 잿더미처럼.
– 나아가……!
그렇게 외치며 마지막 수명을 걸레짝 비틀듯 몇 번이고 짜낼 때, 당신은 나만큼은 살기를 바랐던 것일까.
당신은 없고.
오직 나만 있는 세계에서.
당신이 걸어가던 길을 이제 내가 대신 걸어가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출발해야 합니다! 뇌향 각하는 혼자서도 문제없으실 겁니다!]이제는, 그 어디에도 닿을 길이 없어진 질문들만이 살아남아 머릿속을 어지러이 맴돌았다…….
[안 돼요! 생존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동료의 수천 주검을 디딤돌로 삼는 싸움의 방식은…….
그 핏물과 원한과 꿈을 위령비에 충(忠)이란 마음 하나로 엮어서 새겨내는 싸움의 길은…….
모든 순간, 어느 때에나, 이렇게 가슴을 차갑게 찢고 또 뚫으며 그 구멍을 넓혀만 가는데…….
[기다리기에는 적의 숫자가 말도 안 됩니다!] [저 자식들, 왕이 죽어서 제대로 빡 돈 것 같은데요?] [적의 숫자, 너무 많습니다! 1701호, 출발하겠습니다!]하나, 둘, 셋, 하고.
또 하나, 둘, 셋, 하고.
또다시 하나, 둘…… 셋……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픔으로 모든 죽음이 처음부터 줄 세워져 하나, 둘, 하고 헤아려지는데…….
[리아 사령관보! 여기는 1703호! 1702호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적이 너무 많다!] [1703호, 지금 얼마나 버틸 수 있죠?] [부상자만 천 명에 싸울 수 있는 병사는 백 명도 안 된다! 1분도 못 버틴다!]이 운명이, 수백만으로도 부족할 주검들을 징검돌로 쌓으며 나아가야 하는 거라면…….
그렇게, 세계 전체를 디딤돌로 쌓아야만 모든 왕들을 베어내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거라면…….
그때 이 가슴에 뚫린 구멍의 크기는 이 세상 전체의 크기와 맞먹게 커져 있을 텐데…….
내가 그 아픔 견뎌가며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아아…….”
오직 공허한 시선으로.
다만 단절의 적막 속에서.
이제 또다시 홀로 살아남아, 먼저 죽은 동료들의 죽음을 바라보던 소년 용사는 끝내 이마를 모래밭에 처박았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의식이 끊겨 사라질 때까지, 모래밭 속에서 그는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오랫동안, 고요히.
그리고 그때, 곧 닥쳐올 의식 단절이 자신에게도 죽음이기를 바랐다. 그저 죽기만을 바랐다.
[뭐, 뭐야?] [워, 원군이다!] [여기는 1703호! 원군, 원군이다! 엄청나게 많다! 기갑부대에 공군까지……!]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래 폭풍이 사라진 세계 위로,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달려오던 적들을 휩쓰는 빛이 있었다.
‘빛……?’
죽기 전의 환각이었을까.
그 빛은 너무나도 고결하고 찬란해서, 꼭 땅 위로 내려온 달처럼 보였다.
쓰러져가는 의식에조차, 밤의 암흑을 찢는 새벽의 전율로 아찔하게 새겨지는 빛.
‘어떻게 저렇게나 아름다운 빛이 땅 위에…….’
그 빛을 뒤따르는 강철의 물결.
창검과 깃발의 대열이 끝없이 이어지며 마(魔)의 파도를 짓밟고 또 쳐부수기 시작한다.
그 물결이 경외심 서린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승리의 함성이 황야 위로 메아리쳤다.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세이라가 작전 시작 전에 했던 꿈이 떠오르면서, 의식이 완전히 멍해졌다.
‘샤릴리온이라니, 진성검? 타르시요가 늘 말하던 그 진성검 샤릴리온……?’
그다음 순간이었을까.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고, 그저 무의식의 암흑 속에서 공허하게 부유하고 있을 때였다.
새벽녘의 어스름처럼 희미하면서도 분명하게, 그 암흑 속으로 찬연한 목소리가 빛처럼 내려왔다.
“카이센, 오래 기다렸지? 내가 왔어. 헤어지던 날 약속한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