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62)
가짜 용사 이야기-62화(62/310)
제62화
– 카이센.
하나의 추억이 있었다.
1년 동안의 공방전 속에서 이따금씩, 싸움이 없던 날에 새순처럼 돋아난 추억이 있었다.
그 추억 속에서, 나는 막사에서 로베리스와 마주보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 카밀라 선배님이 원래 수줍게 낯을 가리던 소녀였단 걸 내가 말했었나?
그 시기에 독서에 취미를 들였던 걸까.
아니었다.
그저 이따금, 화산재가 밀려가고 여름의 햇살이 산맥을 비추는 날이면.
– 상상도 안 됩니다.
로베리스가 일기를 쓰다가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이야기는, 이제는 지나간 나날의 향기였다. 역사서의 투박한 필체로는 어떻게 얼개를 맞출 수 없는 시절의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는 어머니가 용사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또 그 이야기는 소녀 카밀라가 살아가던 시대의 이야기였다.
– 네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아주 사랑스러운 분이셨어.
– 특별한 일화가 있으면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특별한 일화라. 그래, 그게 있었지.
그때 로베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나 싶더니, 만년필을 내저었다.
– 아니, 역시 안 되겠다.
– 왜 안 됩니까?
– 난 후배로서 그분의 명예를 지켜드려야 한다.
– 대체 무슨 일이기에.
– 상상 그 이상이다. 더는 묻지 마라. 명령이다.
그날, 둘은 소리 없이 웃었다.
봄바람에 저무는 복숭아꽃처럼, 미소만이 엷게 입가에 번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 근데 스승님께선 처음부터 남들보다 뛰어났습니까?
– 남들보다 뒤처져 있었지. 하지만 금방 따라잡았다. 너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선배님은 사실 그렇게까지 기대받던 인재까지는 아니었어.
– 그러면 다른 누군가가 있던 겁니까? 샤론 선배님?
– 아니, 에쉬르라는 분이시다.
– 모르겠군요. 듄입니까?
– 안타깝게도 알터도 듄도 되시지 못했다. 검은 여름 때 전사하셨으니까. 비네사 알터 르노드 님의 제자셨지.
로베리스는 슬픔을 말할 때조차도 지식인의 어조를 취했다. 슬픔은 사무적인 용무처럼 들렸다.
– 그분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셨다. 아주 멋진 분이셨지. 카밀라 선배님께서도 라미네아 님 다음으로 따랐던 분이야.
– 선배님께서도 그러셨습니까?
– 안 그런 제자가 있었을까? 나도 하루빨리 저러한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 지금은 되신 것 같습니다만.
– 나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부를 싫어한다. 그만하고 책이나 읽어라.
분명 알고 있었는데.
이 세계는 정(情)을 주는 순간, 그것을 빼앗아가는 세계라는 걸.
전장의 인연이란 늘 신기하다.
밀어내려 해도, 밀쳐내려 해도, 서서히 다가와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니.
그 신기한 떨림을 배로 되갚아야 하기에, 전장의 인연이란 항상 몇 배는 더 잔혹하게 끝나는 것일까.
“선배님…….”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달(月)이 떠올라 있었다.
밤의 어둠을 비추는 달빛이, 사람의 형체를 입고 사람의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이럴까.
달빛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소년 용사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안녕.”
달빛보다도 더 찬연하고 처연해서, 오히려 달빛을 시들게 하는 그 미소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
순간 시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그때 그 시간,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듯한 환각마저 느꼈다.
“많이 지친 얼굴이구나.”
잠시, 구름 속에 가려졌던 보름달이 빛을 펼칠 때의 미소였다.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의 전란이나 환란을 모두 잊게 만드는 미소였다.
조용히, 먼 옛날 어머니의 미소와 함께하던 나날로 돌아가게 하는 그 미소는.
“지금은 쉬어, 카이센.”
그 미소는 불편했다.
마음속에 달빛처럼 가득 차는 그 미소는 속삭였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싸움의 세월 속에서 스쳐 지나온 죽음들의 짐을 모두 내려놓아도 된다고, 곁으로 와서 편히 쉬라고…….
“나는 내륙 전선으로 가야 해. 제국에 드리워진 이계(異界)의 그림자를 걷어내야 하거든.”
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격도 시간도 없었다.
“쉴 필요 없어. 쉴 여유 따위가 어딨겠어…….”
타르시요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내가, 내가 필요하지……? 청성께서도 사라지신 지금…… 왕을 벤 내가…….”
고통스럽게 날뛰는 호흡.
몸이 무겁다.
용혈로 회복되지 않는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타르시요…….”
그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는데, 잡히지 않았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면 빛을 만질 수 없듯이.
타르시요는 무언가 달랐다.
같은 백발이었는데, 소년의 머리가 세속의 빛을 띤다면 소녀의 머리는 천상의 빛을 머금고 있었다.
“카이센,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
그 아름다운 기품에는 달이 세속의 땅에 내려앉은 듯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머리의 색은 달빛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그런 타르시요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무슨 이유…… 타르시요의 슬픈 미소를 본 그때서야 비로소 들렸다.
사각사각사각, 심장부에서 영육(靈肉)을 갉아먹는 심연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육신이 속한 공간 자체가 뒤틀리고 비틀리며, 그 육신에 소속된 영혼이 절규한다.
‘네이갈라스의 심연……?’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타르시요를 잡을 수 없었던 건, 타르시요가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라서가 아니었다.
몸을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뿐이다. 손을 뻗어 무언가를 붙잡는다는 것조차 해낼 수 없던 것뿐이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타르시요의 미소가, 그 고통 위로 은은하게 내리비친다.
“다 알아. 지금 네 고통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걸. 그래도…… 난 네가 필요해.”
세상이 멈추는 듯한 거리였다.
숨결에 서린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서로의 살갗에 닿는 거리였다.
고통도, 슬픔도, 비탄도, 그 모든 것이 새하얗게 잊히고 오직 서로만을 인식하게 되는 그 거리였다.
“그 싸움에서 꼭 이겨서, 돌아와 줄래?”
그때 그 거리에서.
2천 년의 세월이 지나고 돌아온 희망의 빛, 진짜 용사는 울음에 젖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버지가 맡기신 짐, 그건 혼자 지기에 너무나도 무거워서 도저히 끝까지 운반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옆에서, 내 곁에서 나를 마지막까지 지탱해줘…….”
시한(時限)의 숙명,
용사의 길, 용사의 마음 (1)
제국의 여름은 투명했다.
먼 들판을 흘러와 침실의 커튼을 흔드는 바람결에 진달래꽃 향기가 어려 있었다.
먼 세상을 겪어오지 않고, 그저 정원에서 일어나 부는 어린 바람은 장미꽃 향기로 아찔했다.
아, 봄이로구나…….
여름이란 시간 속에서조차 봄은 오는가…… 계절의 변화를 느껴본 것이 얼마 만인지…….
페이지 가문의 문장은 엇물린 황금 장미였는데, 그래서 도시의 이름도 <골든로즈>였다.
여름 속의 봄 속에서, <골든로즈>의 시가지는 장미 모양으로 넓게 기획되어 펼쳐졌다.
여름 속의 봄 속에서, 꽃향기가 일렁일 때 도시는 문득 평화로워 보였다.
“카이센, 나는 이제 가봐야 해.”
고통스레 숨을 헐떡이던 소년, 카이센이 병상에서 눈을 떴다.
두 사람은 가짜 용사였다.
이 땅을 세상이 아닌 세상으로 되돌리려던 옛 왕에 맞선 역도(逆徒)들의 생존자였다.
막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섭리를 막으려 했으므로, 그 맞섬에 포개어진 죽음은 섭리의 크기와 같을 수밖에 없었다.
둘은, 그날 포개어지고 또 포개어져 자신들을 이 봄으로 보내준 죽음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화가 문득 그런 이야기로 새려고 하면, 둘 다 시선을 내리깔았고 침묵이 흘렀다.
“심연 녀석들…… 병력을 중부 전선에 집중시킨 틈에 동부 전선을 깨트리고 법황청을 무너뜨렸어. 황룡 군단의 마지막 잔재마저 사라진 거야. 듄 교관님들께서도 그때…….”
“…….”
“광룡 하라데리만께서도 붕어하셨대. 이제 이 세상에 신룡은 한 분도 남아 계시지 않은 거야. 페이쿼리어도 더 양성될 수 없고.”
황룡 군단의 궤멸, 법황청 붕괴, 올리에르 듄 제라예를 비롯한 교관들의 사망, 동부 전선 소실…….
절망의 소식들을 전하는 리아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입을 열 때마다 고통 때문에 신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는데, 리아가 물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래도 절망만 있는 건 아니야. 타르시요 예레 샤릴리온…… 진짜 용사께서 재림하셨잖아.”
“……!”
“그분과 이야기해 봤어? 그분 옆에 있으면 절대 패배할 것 같지가 않아. 희망의 상징이시라고.”
이야기해 봤어.
슬픈 미소를 끝으로 사라졌지만.
마치 밤이 끝나면 달빛이 그 자취를 숨기고 사라지듯이.
“카이센, 그분이 계시고 이제 너도 힘을 보태준다면 <하랄도니키> 탈환은 문제도 아니야. 구공화국 수도 <테르베노플>까지 다 수복하는 게 꿈도 아닐걸.”
겨우 몸을 움직여서, 경련하는 손가락을 리아의 손 위에 얹었다.
“그래, 그러니까…… 날, 나를…… 나도 데려가…… 나도 같이…….”
손목을 붙잡을 힘조차 없는 친구의 헐떡임에 리아는 잠시 부서질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카이센, 홍염 각하께서 네게는 대기명령을 내리셨잖아. 그러니 쉬고 있어.”
리아는 홍염의 아키레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 카이센은 네이갈라스의 싸움 도중 그 심연에 당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이제는 세 달도 채 살 수 없다.
왕의 심연…….
광룡 하라데리만이 늘 병상에서 일어서지 못했던 까닭…….
청성 미른가디아가 스스로의 몸을 운신하지 못하고 부유성을 주재하던 까닭…….
그 재앙이 이제 카이센에게…….
“카이센, 지지 마.”
“뭐……?”
“지지 마, 부탁할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 말고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이 땅에 마지막 남은 친구가 죽어가는 악취를 계속 맡고 있노라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리아는 서둘러 병실을 떠났다.
“말씀하신 대로 부대 편성을 완료한 뒤 열차에 분승시켜두었습니다.”
흑장미 병단의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가짜 용사는 새로운 지옥으로 그들을 인도해 가야 했다.
“네, 바로 가죠.”
* * *
카이센은 밤새 숨을 허덕였다.
쉬라니, 도대체 어떻게 쉴 수가 있단 말인가.
‘타르시요도 그랬고, 리아, 그 녀석도 울고 있었어…….’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이 현실을…….
……팅!
감각조차 없는 양손을 도대체 어떻게 움직여서 억제기의 핀을 뽑아낸 걸까.
모든 것이 몽롱한 고통 속에서 비현실적인 그때, 그 초월의 울림만은 현실적으로 들렸다.
육신에 감각이 극도로 활성화되는 동시에 기력이 되돌아왔다. 사각사각사각, 심연의 속삭임도 더욱 커져가나 상관없다.
“카이센 경?”
“어떻게 일어나신 건지 모르겠지만, 부디 누워 계십시오!”
“비켜……!”
수평선이 보랏빛으로 물들던 새벽이었다.
병실 문을 지키던 페이지 가문 위병들을 때려눕히고 성검의 기척이 느껴지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 연단 위에서 네 자루의 성검이, 그 힘을 불길과 파도로 내뿜으며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자, 아라다만텔…… 다시 가야만 돼. 모두가, 모두가 있는 전장으로……!”
그러나 그때, 아라다만텔은 카이센의 말을 외면했다.
손을 외면했고 의지를 외면했다.
칼자루에서 칼날을 뽑아보려고 해도, 암석에 박힌 칼날처럼 미동조차 일지 않았다.
“너 이 자식, 너까지 왜 그래!”
아무리, 아무리 뽑으려 해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칼집에서 빼내려고 해도.
“대체 왜…… 뭐가 불만이야, 대체 뭐가……!”
아무리 용을 써도.
칼자루에 아무리 힘을 주어도.
수천수만 번의 발도의 순간에 함께했던 순혈의 칼날은,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 모든 순간들이 환상이었단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네 마음속에 칼이 없건만, 어떤 칼이 곁을 허락하려 하겠느냐.」
그때 문득…… 자정의 암흑이 눈부시게 불살라지는 듯한 착각.
그건 과연 착각일까.
존재 자체가 화염이라면, 세상의 모든 암흑을 밝히는 불꽃이라면, 저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돌아서니, 불(火)이 있었다.
붉고 우아한 머릿결이 화염처럼 매혹적으로 일렁이고.
흑색의 용린이 갑주처럼 전신을 뒤덮어 주인의 위엄을 더한다.
뇌향이 광휘, 청성이 순백이라면 그들의 맏이인 홍염은 그 이명대로 불꽃 그 자체였다.
「내, 너에게 절대안정을 명했을 텐데.」
“페이쿼리어에게 안정 따위 필요 없습니다……! 지금도 적이 지천에 깔려 있고, 모두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데…… 안정은 무슨 안정입니까……?”
「너는 지금 싸우러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죽으러 가고 싶은 것 아니냐?」
그것은 정말 질문이었을까.
칼날처럼, 심장을 꿰뚫고 들어오는 활자의 칼날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싸우러 갑니다……! 저는…… 마우나 로아를 베었고 옛 귀족들을 수도 없이 베었으며 옛 왕도 베었습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싸운단 말입니까……!”
「너는 그 육신을 최대한 온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가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
“이런 절 막을 수는 있으십니까? 그런 몸으로?”
그 불경스러운 질문에, 아키레아가 말없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막아선다면 뚫고 갈 뿐…….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칼집에 든 아라다만텔로 아키레아를 겨누었건만.
‘숨이, 숨이 차다니?’
대적하고 선 것만으로도 전신이 불태워지는 듯…… 맞서려고 하면 할수록 신비한 온기에 영혼이 빨려 들어간다.
‘네이갈라스처럼, 다가가면 타들어가고 녹아내리는 폭발적 열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따스한…….
단지 포근한…….
폭발적 열기가 아니라, 그저 온기에 휩싸이기만 할 뿐인데.
‘뭐야…….’
마치 화염이라는 개념 자체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의 개념에게 칼을 휘두른다고 그 뜻을 지우거나 없앨 수 있는가?
‘대체 이 존재감은…….’
그 헐떡거리는 숨의 한복판.
아니, 호흡의 틈새로.
당당히 걸어 들어와 내지르는 불꽃의 정권.
「네 뜻이 그러하다면, 나 또한 서두르겠다.」
바로 심장까지, 불꽃이 종이를 태우듯 단번에 짓쳐든 정권은.
심장을 뚫지 않았다.
가슴을 부수지 않았다.
단지, 심장이라는 육신 너머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에 고요히 닿을 뿐.
「이제 정신 똑바로 차려라, 카이센.」
멍한 망념을 한칼로 찢어내듯이.
마치, 이 세상 전체를 베어내는 듯한 따스한 울림과 함께.
「지금부터 시작될 너 자신과의 싸움에서 너는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시야에 비치던 모든 것이, 맹렬한 불꽃 속에서 불타오르고…….
그 불타올라 새까맣게 잿더미가 되어버린 영혼의 심층 속에서 의식이 각성했다.
여긴 어디지?
나는 분명 연무장에 있었는데?
그보다 낯익은 것들이 보였다.
어린 시절, 카밀라에게 받았던 태도가 보였다. 이어서 그 태도를 어깨에 걸친 채 바위에 걸터앉은 소년 칼잡이의 모습이 보였다.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도 그럴 것이.
‘나……?’
소년이 이곳을 흘끗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복수를 하러 왔네? 대체 언제 오나 기다리다 돌아가실 지경이었거든.”
“복수?”
“왜 이러실까.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할래?”
‘나’의 옛 몸을 갖고.
‘나’의 옛 목소리를 가진 소년은.
‘나’의 옛 손가락으로 ‘나’의 옛 심장을 짚으며 차갑게 웃었다.
“엄마를 죽인 원수는 줄곧 여기에 있었잖아? 저 밖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