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64)
가짜 용사 이야기-64화(64/310)
제64화
페이지 가문의 정원은 황금빛으로 찬란해 눈이 부셨다.
장미가 황금빛이라고, 이름이 황금정원(黃金庭園)이었다.
남녘의 여름을 피해 온 새들이 이 정원의 향기에 내려앉아 뭐라고 재잘거리다 다시 날아갔다.
마지막 평화의 땅이었다.
페이지 가문은 종교 혁신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짝 비켜서 있었고, 그 아껴둔 역량을 구휼에 쏟고 있었다.
그 비켜섬과 선정 속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도시는 교외까지도 바글바글했다.
지금은, 타르시요와 세츠넨을 따라 당주와 그 병력이 모두 제국 통합을 위한 전쟁에 참전했지만.
이 도시, <골든로즈>는 검은 태양 카렌덴의 선물이었다.
가문의 시조, 초대 대현자 에밋사 페이지에게 준 <온 것들>의 선물.
둘은 사제지간(師弟之間)이었다.
카렌덴과 헤어질 때, 에밋사는 이 땅의 모든 걸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 후손들은 지금 그 약조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용현 레인 루드윅의 후손인 나는 이곳에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아닌가.
–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용현은 그 말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삼영룡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 그곳에 묻혔다고 한다.
“자.”
카이센은 고개를 들었다.
정원 위로 내리비치는 햇살, 그 햇살보다도 따스한 음식들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주방을 빌려 먹을 걸 좀 만들어왔어. 오는 동안 요리를 안 하긴 했지만, 그래도 먹을 만하긴 할 거야.”
라텔이 시녀들을 흘끗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카이센은 마음 깊숙이 감탄했다.
어려서 늘 소박한 식사만 해왔기에 늘 페이쿼리어에게 제공되던 호화스러운 만찬이 부담스러웠다.
“라텔이 하는 음식은 뭐든 맛있어요.”
보르스가 말했다.
매형 보르스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사내였으나, 더없이 상냥한 미소를 갖고 있었다.
그 타인의 아픔을 살피는 듯한 상냥한 미소로 누이를 홀린 건 아닌가 싶었다.
결혼했는데도 보르스는 라텔에게 경어를 썼고 존중해 주었는데 그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보르스는 피난 온 누이를 물심양면으로 성심껏 도와준 청년이었다고 했다.
“마싯게따!”
그리고 그 품에 조카가 안겨 있었다.
조카는 세 살이었다.
이름은 라딘이었다.
우리 어머니의 첫 이름과 아버지의 마지막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얼굴에 아이의 홍조가 가득 피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라딘은 수줍어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카이센을 바라보았다.
–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라텔이 그렇게 말했을 때, 라딘은 양손을 배꼽에 올린 채 허리를 90도 꺾으며 인사했다.
– 안녕하때요.
그 모습에, 어린 자신의 모습이 포개지는 듯해서 흠칫 놀랐다.
어머니는 카이센에게 인사가 곧 사람됨의 근본이라고 하며 인사를 시켰었다.
그래놓고선 마을 아주머니들이.
– 아들이 인사성이 참 좋네요,
– 어머, 애가 벌써부터 말을 저렇게나 잘하네요.
이런 칭찬을 던지면 칭찬을 받은 나보다 당신이 더 기뻐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시곤 했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와 똑같은 미소를, 누이가 짓고 있었다.
그때, 인사하던 나를 보고 어머니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라딘이 인사를 끝내고 그 맑고 큰 눈을 다시 들었을 때, 알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이 떠올라 괜스레 눈물겨웠다.
“마시써, 마시써요!”
“음, 정말 맛있네요.”
누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두 겹의 빵 사이에 구운 계란과 바싹 익힌 베이컨과 양상추가 조금 들어간 식사였다.
거기서는 지금은 그릴 수조차 없는 고향의 맛이 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살아 계셔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 위에서 다함께 웃고 떠들던 날의 맛이 났다.
그 언덕에는 진달래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 진달래꽃의 향기조차 났다.
단순한 음식이었다.
미식이라기보다는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보편식에 가까웠다.
그런 단순한 맛이 어떻게 추억의 정취와 향기마저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인가.
누이의 가족들 면면으로,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되찾을 수 없는 일상이 자꾸만 포개져서일까.
– 카이, 이것도 먹어봐.
– 그건 싫어요. 맛없어요.
– 어머, 얘 좀 봐. 아무것도 모르네. 엄마가 만든 음식 중에 맛없는 건 없어. 이 가지 볶음도 엄마의 필살 시리즈 중 하나고.
– 맛없다고요! 아빠, 엄마가 자꾸 억지 부려요!
– 자, 그러지 말고 먹어보렴.
눈물과 함께 사레가 터졌다.
말없이 씹어 삼켰던 음식들이 토사물이 되어 더럽게 밀려 나오고 호흡이 막혔다.
누이가 다급히 소리쳐 사람들을 불렀고 매형이 등을 두드리며 숨을 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 라딘이 입가에 기름과 음식물이 잔뜩 묻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걱정되었을까.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 눈동자가 안절부절못했고 눈물로 그렁그렁했다.
– 카이, 이쪽으로 와줄래?
죽을 때, 도끼날에 커다랗고 긴 절단면이 열렸던 어머니의 어깨가 눈앞에 떠올랐다.
발카로의 도끼날은 심장까지 파고들어 갔다가 다시 나와 그 길로 핏물을 붉게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던 어린 자신의 눈이 바로 저런 눈이었을까.
– 엄마한테 시간이 별로 없어.
숨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이, 마음이 그때 또다시 죽기만을 바랐던 것일까.
숨은 쉬어지지 않는 틈새로 흐릿해지던 의식이 또다시 암흑의 구렁텅이로 고꾸라졌다.
‘…….’
멀리서 용의 눈동자로 그 상황을 지켜보던 홍염의 아키레아가 처연히 눈을 닫았다.
‘고통에 맞서라. 그날,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고통에 맞서야 해.’
그 고통이 바로 너 자신이다.
그 고통을 외면한다는 건 너 자신을 외면하는 거야.
그 외면 속에서, 영혼이 완전히 썩기 전에 어린 날의 고통을 제대로 받아들여야만 해.
‘자기 자신의 아픔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는, 타인의 아픔도 볼 수 없다.’
볼 수 없으면.
그 아픔을 알 수 없고, 끌어안아 일으켜 세워줄 수 없고, 등을 밀어줄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아픔을 넘어선 힘으로 타인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
그 사랑이 없으면.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하늘을 베는 천사의 힘과 바다를 가르는 신의 힘이 있다고 해도, 용사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네가 진정한 용사로 거듭나기 위한 첫 걸음이다. 그 쐐기를 뽑아내라, 라미네아의 아들아.’
시한(時限)의 숙명,
용사의 길, 용사의 마음 (3)
인기척에 눈이 뜨였다.
보름달이 기우는 새벽이라, 밤의 새들조차 짖기를 멈추고 세상은 침묵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마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찬물의 냉기로, 체온을 뺏어간 수건의 무게가 느껴진다.
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맡에 양팔을 베고 엎드려 있었고 옆에 찬물 담긴 양동이가 놓여 있다.
이 ‘당연하다는 듯한’ 일상의 풍경에 이것이 꿈인지를 생각했다.
누이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그 위에 걸쳐주던 보르스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깨워서 미안해요.’
고개를 저었다.
기어이 어머니 옆에 있고 싶었는지, 라딘이 그 옆에서 누이와 똑같은 자세로 졸고 있었다.
되찾을 수 없고 되찾을 길 없는 일상의 풍경이, 누이와 조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듯해서 마음이 문득 복받쳤다.
“우응…….”
손가락으로 조카의 볼을 눌러보았다. 예전에 누이가 곧잘 하던 장난이었다.
“삼춘, 일어나셔써요.”
눈을 부스스 떴던 조카는 그렇게 웅얼대고는 다시 잠들었다. 어릴 때 자신과 하는 짓이 똑같았다.
매형이 떠나자, 침실은 다시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침묵의 세계였다. 그 침묵의 무늬가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만난 이후, 누이는 어머니의 죽음을 묻지 않았고 카이센도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날의 죽음으로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이야기들을 누이는 묻지 않았다.
왜 묻지 않았을까.
얼굴에 새겨진 슬픔의 무늬가 너무나도 깊어서, 누이는 그 무늬를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어머니가, 자식들이 눈동자만 끔뻑여도 그 감정을 알아보시던 것처럼.
“적색산맥에서 친구들을 만났어. 나와 같은 페이쿼리어들인데, 이름이 이슬라와 세이라야…….”
묻지 않아서.
묻지 않았으나 말하고 싶어서.
말해서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속에서 부풀다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그 슬픔의 무늬를 혀를 튕겨 몸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철십자 기사단에 배치됐었어…… 좋은 부대였지. 다 인격자들이었고. 그 용사 파티인 로베리스와 트발과 메른과 알리도나는 정말 대단한 영웅들이었었는데.”
“…….”
“그 전에는 카밀라 스승님의 백골 병단에 있었지. 그거 알아? 스승님이 어머니의 제자였대. 어머니를 어머니처럼 따랐다는데, 성격이 완전 딴판이었어…….”
그분도 지금은 죽었어…….
그 말로 말을 끝낼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복받침이 가슴에 남아 있던 것인가.
“사람들이, 내가 신들렸대. 신들린 듯이 적을 죽인대. 처음에는 우루크 슬레이어였다가 나중에는 데몬 슬레이어까지 됐어. 지금은 어떻게 불리는지 모르겠네. 킹 슬레이어라고 하나?”
침묵에게 내뱉는 말들이, 무언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멀리 밀쳐두었던 무언가를 끌어당기려 하고 있었다.
“신들린 적이 없는데. 칼질이 즐거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철십자에 있을 때도, 백골에 있을 때도. 그저 그 모든 순간이 고통스럽기만 했었는데.”
보름달 빛이 창문 너머 정원에 가득 차서, 황금정원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보였다.
바람에 정원이 흔들리면서 장미 향기가 풍겨 왔다.
저 장미의 가시보다도 더 날카롭고 오래된 무언가가, 기억을 되짚는 말들 속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우루크를 죽이겠다고, 엄마를 그 꼴로 죽게 만든 놈들을 모조리 죽여서 없애 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왔어. 그렇게 생각했지.”
평생, 그 가시에 마음이 긁히며 피가 흘러내려 왔다.
한평생, 그 가시에 긁힌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마음속에서 피는 강을 이루고 있었다.
평생, 그 피가 턱밑까지 차올라 숨이 막혔고 사는 모든 순간이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게 아니었다는 걸 이번 일이 있고서야 알게 됐어.”
아니.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
“누나도 그 답을 알고 있으니까 말하지 않던 거지? 날 책망하는 것처럼 될 것 같았으니까.”
그날…….
아니…….
어머니가 웃으며 죽게 되던 그 순간에 이미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어…….
“누나…… 어째서…… 왜 묻지 않아? 왜 욕하지 않는 건데……? 왜 예전처럼 등을 때리면서 혼내지 않는 거냐고……!”
새벽빛의 침묵 속에서, 어둡게 감쳐져 있던 가시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실, 사실 알고 있으면서……!”
그 가시가.
가슴을 찢고 튀어나오려고 해서.
가슴을 고통스레 움켜잡고 숨을 헐떡인다.
“그때, 그날 엄마가…… 엄마가 죽게 된 건…… 우루크 때문이 아니라는 걸…….”
턱밑까지 차오른 마음의 핏물이.
마침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고 해서, 숨을 쉴 수가 없다.
“사실 알고 있잖아……!”
사실,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 진실을 직면하기가 너무나도 두려워서,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무거워서.
“그날, 엄마를 죽인 건 우루크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증오할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를 죽일 용기가 없어서.
대신 증오하고, 대신 죽일 대상을 찾아다녔던 것뿐이야. 그래서 내면의 어린 ‘나’도 벨 수 없었던 것이고.
“바로, 어머니가 떠날 수 없게 만들었던──!”
소리치고 싶은데.
목 놓아 아우성치고 싶은데.
슬픔이 한 덩어리로 응어리져 숨통을 틀어막아, 말의 길이 혓바닥 위에서 끊어질 때.
“─네 잘못이 아니야.”
그날, 웃으며 죽으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누이가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어머니와 똑같은 얼굴로.
어머니와 똑같은 경륜을 안고.
어머니와 똑같이 반려자를 맞아 자식을 낳은 누이가.
“네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뛰쳐나갔을 거야. 알겠어? 그게 왜 네 탓이야? 조금도, 정말 조금도 네 탓이 아니야.”
죽던 날, 어머니, 당신께서는 왜 웃으셨나요.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였나요.
그래서,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들을 위해 웃었던 것인가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했어. 아빠도, 나도, 그리고 엄마도 그랬을걸.”
평생 닿을 길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질문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눈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혼내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울지 마. 울 필요가 없어. 네 탓이 아니니까. 알겠어?”
라텔이 두 팔을 뻗어 동생을 안았다.
방금까지 잠들어 있던 누이의 몸은 따뜻했다. 그 몸에서, 자식의 어깨에 기대 죽었던 어머니의 몸과 똑같은 온기가 느껴졌다.
어머니가 죽던 날 새벽에 하늘에서 깔깔거리던 별들과 어머니를 안고 통곡하던 자신이 떠올랐다.
“못 말려,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거야…….”
누이의 말끝에 울음이 터졌다.
누이는 온몸을 흔들며 울었다.
– 카이.
어머니의 얼굴로, 어머니의 목소리로 말하는 누이를 통해서.
어머니께서 하지 못하셨던 말들이, 어린 날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 그날, 바로 그날, 서너 마디 나눌 여유조차 없어서 다만 미소로 말씀하셨던 그 말이.
– 네 탓이 아니야.
눈앞이 희뿌옇게 부서진다.
흔들리던 목청 끝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그날, 어머니가 죽던 날 울던 것과 똑같이.
어머니께서는 그때 이렇게 말하기 위해서 웃으셨구나, 싶어서.
– 알았니?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나 자신은 도저히 벨 수 없지만 무언가는 베어야만 이 세상을 살아낼 수가 있을 것 같아서.
화를 풀듯이, 평생 벨 상대를 찾아다녔던 나의 영혼은.
– 그러니 울지 마렴.
그래서 칼의 세계.
그 피의 바다 위에서 서서히 익사해가던 나의 영혼은.
– 엄마의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
누이를 통해서.
다시 어머니를 만난 그날.
바로 그 순간에 구원받은 걸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