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65)
가짜 용사 이야기-65화(65/310)
제65화
「준비되었느냐?」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가부좌를 튼 채로 눈을 감았다.
영혼을 직접적으로 휘감는 혼(魂)의 파동…… 홍염의 불길에 의해 다시 내면세계로 들어선다.
그때, ‘칼 쥔 나’는 그곳에 없었다. 아직 칼의 세계로 들어서지 않은 ‘어린 나’가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있었다.
이제는 그 얼굴이 희미해서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라텔을 통해 다시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게 되어서인가.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어린 시절, 그 풍경 그대로, 그 절벽 위를 뛰놀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파도가 노래하고 바다의 새들이 노래하는 그 고향의 절벽 위에서.
‘그래, 이 공간이 여기였었구나. 그것조차 못 알아봤다니…….’
어머니와 누이와 아버지와 함께하던 일상의 틈바구니에 반드시 존재하던 그 절벽…….
그 절벽 위로, 지금은 도토리나무가 솟아났을까.
어머니의 사체는 저 무더운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이미 땅속에서 썩어 문드러졌을까.
그때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았다. ‘어린 나’도 나를 돌아보았다.
‘어린 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어머니를 바라본 반면,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가고 싶었다, 미치도록.
달려서, 저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은 때가 차지 않았다. 아직은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아직 아라다만텔을 쥘 때 계승한 사명의 끝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
그렇기에, 아직은 다가갈 수 없고 다가가선 안 되는 그 세상 앞으로.
다만 무릎 꿇고 엎드려 절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땅 위에 이마를 붙이면서, 온 세상이 뿌옇게 복받치는 슬픔에 숨죽여 울면서.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정말 많아요…… 근데요…… 아직은 안 됩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금방 돌아가겠습니다…….”
그 울음이 끝났을 때, 절벽은 사라져 있었고 내면의 심연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집어삼킬 심연이 없으므로, 왕의 심연이 더 크게 범람하지 않아 그 폭주를 저지할 수 있었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아키레아로부터 왕의 심연을 억누르는 방식을 배워 나갔다.
「왕의 심연은 대상이 강대하면 더욱 강대할수록 그 침식 속도가 빨라진다. 그렇기에 너는 광룡이나 청성에 비해 형편이 좋다.」
용령을 해방할 때만 그 초월의 힘이 전신에 임하므로, 인간의 육신일 때는 왕의 심연의 침식 속도가 극도로 저하되기 때문이다.
「극도의 위기의 순간이 아니면, 용령을 해방시키지 마라. 네 육신은 약하다.」
파지직, 전류가 일면서 영육을 삼키던 왕의 심연이 바스러졌다. 카이센이 눈을 떴다.
“앞으로 몇 번, 제대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이다. 기억해라. 한 번 더 그 힘을 해방했을 때, 네 육신은 마지막 힘을 다하고 그 심연에 삼켜져 죽는다.」
“아직 한 번 더 싸울 수 있군요.”
아직 한 번 더……라고 생각하면서도 쓴웃음이 지어졌다. 웃음의 꼬리가 무거웠다.
아직 한 번 더 싸울 수 있구나.
그 울림은 마치, 너는 아직 한 번 더 싸워야 한다는 운명의 손길처럼 느껴졌으므로.
시한(時限)의 숙명,
용사의 길, 용사의 마음 (4)
극위성검 네 자루가 페이지 가문의 연무장에서 각양각색의 색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체내 심연 제어 훈련이 시작된 이후로도 어떤 성검도 만나지 않았다.
훈련이 끝난 날, 누워서 침실의 천장만을 고요히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러다 자정이 될 무렵 몸을 일으켜 옛 친구를 만나러 갔다.
“오랜만이다, 아라다만텔.”
계승 이후 늘 곁에 끼고 다녔으니, 세 달 만의 재회였다.
100일 가까이 헤어졌다 만난 성검은, 5년 동안 헤어졌던 가족보다도 더 낯설었다.
그 질감, 무게조차도 새로 본 칼과도 같았다.
“네가 이렇게나 무거웠었던가?”
무거울 뿐인가.
칼집에서 칼날이 뽑혀 나오지조차 않았다. 손아귀에서 수천수만 번 발도의 섬광을 발했던 그 칼날이.
이상한 깨달음이 왔다.
아니, 왔다기보다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던지라 허탈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삐지는 게 당연하지. 그날 너한테 했던 기원(祈願)이 다 거짓말이었단 소리니까.”
죽은 친우의 성검, 가우므리스는 그 막대한 중량 때문에 들어 올리는 데만도 엄청난 힘이 필요했다.
“이제 나는 가짜 용사로서도 실격이다, 이건가.”
그 대답은 불꽃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다시 출발선상으로 돌아온 것뿐이다. 그릇된 길에서 돌아와, 올바른 길의 푯대 앞으로.」
살아 있는 불꽃.
이 세상을 밝히는 마지막 불꽃.
그 불꽃 앞에서, 반쯤 미쳐 있던 저번과는 달리 정중히 예의를 갖추었다.
“아키레아 각하.”
「이제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려고 하느냐.」
“예. 그러나 보다시피 성검이 없이 나가야 하게 생겼습니다. 애초에 과분한 녀석들이었으니…….”
이게 내 주제에 맞는 거다.
원래부터 이래야 했어.
그런데, 기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인연들을 만나서 그 수라장 속에서 페이쿼리어가 되고 성검을 계승했던 거야.
「본디 용사에게 검은 필요 없다.」
망연히,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너에게 성검이란 무엇이냐?」
“……?”
「살(殺). 네 검에는 오직 살기밖에 없다. 벤다. 베어서 죽인다. 죽여서 끝낸다. 오직 폭력(暴力)으로만 삶의 길을 비추며 나아가다 보면 반드시 발이 걸려 넘어지기 마련.」
오직 칼의 길.
베고 또 베어서 시산혈해를 만드는 그 길.
아키레아는 그 어린아이의 투정 같았던 길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대답해 보아라, 카이센. 네 눈에 라미네아가 진정 위대해 보이던 순간은 정말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두르던 순간뿐이었더냐?」
“제 대답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라미네아는 사랑이라는 칼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너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용사가 가져야 할, 진정한 성검(性劍)이니까.」
마음속, 공허한 흑암 속을 그저 운행하던 몸이 물 밖으로 솟구치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것이, 깨달음의 감각일까.
그 가르침은 마치, 돌은 돌이구나, 물은 물이구나, 같은 당연한 진리처럼 들려왔다.
「그런 성검을 가진 용사에게 속세의 칼은 필요 없다.」
모른다.
이 또한 당연하다는 듯이, 어찌 설명할 수 없는 외경심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검이란, 용사란 무엇입니까? 가짜 용사인 저는 그런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알고 계셨을 텐데.
나는 그분과 함께한 시간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을까.
「용사라는 말은 그저 이정표일 뿐이다.」
“……?”
「가족을 사랑하고, 힘없고 약한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자를 돌봐주고, 지켜주고, 손을 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등을 밀어주는 길. 그 길의 마지막 푯대를 가리키는 이정표.」
아키레아의 말은 포근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난롯가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해주시던 옛날이야기들처럼.
「그 이정표를 따라 같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모두 같은 사람일진대.」
또한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날.
그 모든 옛이야기들이 사실이라고 당연하게 믿게 되던 것처럼, 이 말들 또한 당연하게 믿어졌다.
「그 길을 도중에 포기하는 이들과 끝까지 가는 이들만 있을 뿐. 어찌 거기에 가짜가 있고 진짜가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쓰라린 미소로 그렇게 말을 맺는 아키레아의 얼굴을 그저 멍하니,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얼굴이 아니라.
그 얼굴 너머에서 분명하게 일렁거리는 무언가…… 저 삶의 깨달음을 안내했을 거대한 존재의 그림자를 목도하고 있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면, 저 너머로 가라. 네게 알려줄 거다.」
아키레아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연무장의 출입문을 가리켰다.
저 너머란 무엇인지…….
저 너머에 누가 있는 것인지…….
그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 두 글자였다. 단 두 글자,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던 울림.
「세계(世界)가.」
* * *
기원력 1698년 8월.
도마뱀 군주, 네이갈라스 토벌을 끝으로 종적을 감추었던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다시 역사에 발자국을 새기기 시작한다.
제국에서 종교 혁신의 피바람이 극에 달하던 그 시기, 제국 통합을 위해 나타난 용사는 네 자루의 성검을 차고 있었다고 한다.
4월, 제국 전역에 진달래꽃이 만개하던 어느 날 사라졌던 용사는.
8월.
그렇게 도라지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계절에 다시 나타났다.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일까.
라미네아 알터 아라다만텔.
그 영웅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날도 도라지꽃이 들판 가득 흐드러지던 8월의 어느 날이었었는데.
아니면, 그 모두가 창세의 계획하심대로일까.
* * *
극위성검 네 자루를 모두 장비하기 위해서는 큰 시간이 필요했다.
특별히 제작된 검대가 아니고서는 그 중무기들의 무게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성검들이 모두 카이센을 밀어냈으므로, 그것들을 억지로 차기 위해서 속세의 기술을 빌려야 했던 것이다.
‘그래, 너희들이 원래 이런 무게였구나…….’
새삼, 아라다만텔의 무게가 낯설었다.
가우므리스를 등에 찰 때, 잠든 이슬라의 그 작은 몸을 등에 업던 기시감을 느꼈다.
솔랑을 검대에 걸 때에도 육중한 중량이 옆구리를 꺾었는데, 쉬르팽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이런 무게셨군요, 선배님.’
성검들에는 그 주인의 생명이 포개져 있어서, 전우들의 하나둘 시체를 짊어지는 느낌이었다.
시체…….
아니, 혼이라고 해두자…….
그들이 스스로를 불태우고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잔불이 아직도 그 열기를 내고 있다고 믿었다.
– 그것들을 가지고 세계(世界)로 가라. 세계가 너에게 가르쳐줄 거다.
– 너무 막연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았다는 걸 어찌 알게 되겠습니까?
– 어렵지 않다. 그때, 그 칼들이 네 마음에 응답할 거다. 그러면 옳은 길을 가고 있음을 알아라.
증오가 아닌 무언가…….
용사라면 무릇 마음속에 품는 칼, 성검(聖劍)이 아닌 성검(性劍)이라…….
먼저 죽은 이들이 마음에 품었다는 칼이 어떻게 생겨나고 빛을 뿌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아가다 보면.
이 칼들을 짊어지고 가다 보면.
이 낯선 무게들을 새로운 운명의 지침으로 삼아 가다 보면, 그걸 알게 되는 날이 올까.
그들 모두가, 마지막 순간에 웃으면서 죽었던 이유를 알게 될까. 알게 되기를 바란다.
아니, 그러기를 기도한다.
이 짐승처럼 아둔한 머리로도.
짐승처럼, 수라의 나날 속에서만 살아온 이 비루한 마음으로도.
“가는구나.”
마지막으로 아라다만텔을 등허리에 찰 때, 뒤에서 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어딜 가느냐, 언제 오느냐, 누이는 그런 걸 묻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아마 살아서, 다시 누이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었으니까.
“힘들지 않겠어?”
수명을 깎아서 초월에 이르는 힘의 병폐는 이미 몸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었다.
목숨을 빼앗으려는 도적처럼, 용사의 숙명은 칼을 뽑아 내 목을 베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이갈라스 토벌 이후, 그 칼은 칼집 밖으로 거의 빠져나와 있었다.
“신기해. 복수심으로 칼을 휘두를 때는 모든 게 그저 단순해 보였는데, 사실 그때가 제일 고통스러웠거든.”
베고 베고 또 베다 보면.
이 구멍이 적의 사체로 메워질까. 마음속의 상흔들이 적의 피로 소독될까.
그렇게 나 자신의 영혼과 영혼 속 칼날에 맹세하였을 때는 그러하였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훨씬 복잡해 보이지만, 마음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아.”
“그래?”
“누나, 자식을 길러보니 어때. 어머니의 마음을 좀 알게 돼?”
“잘 모르겠어. 근데 어느 때 보면 그런 것 같아.”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 마음을 알게 되는 날이 올까?”
이 세상에, 어딘가로 달아나서 도착할 수 있는 낙원이 있다면 그리고 가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런 낙원이란 것은 오직 베고 또 베어서 나아가야만, 다른 사람들도 따라올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왜 안 되겠어. 정 모르겠으면 너도 한번 배불러서 아이 낳아보면 되지.”
누이는 그런 장난을 던지면서도 가까이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저 먼 어린 날.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어딘가로 이끌며 신기하고 재밌는 이야기들을 알려주던 그날들처럼.
“늘 너를 위해 기도할게. 엄마가 내게 동생이란 이름으로 선물해준 최고의 보물.”
누이가 꼭 끌어안아 주던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누나만큼은, 누나처럼 이 세상에서 자식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들만큼은.
나와 같은 슬픔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싸우러 가야만 한다고.
웅…….
그 순간, 등허리에 매달린 아라다만텔이 불현듯 가벼워지며 그 찬란한 혈광을 다시금 토해냈다.
웅, 웅, 웅, 웅…….
그 빛은 수면 위로 퍼지는 황혼처럼 아스라이 퍼지며, 곧 황금빛, 은빛, 푸른빛으로 아롱지며 퍼져갔다.
‘가우므리스, 쉬르팽, 솔랑.’
그 눈부신 빛의 향연 속에서 멍하니 깨달음이 왔다.
‘이게, 이런 거였어?’
스승님, 당신께서 품고 또 읊던 기원(祈願)의 핵심에는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 있던 건가요……?
당신은 그토록 고통스러웠으나.
다른 이들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속에서 평생 동안 싸워 오셨던 건가요……?
“아아…….”
스승이 죽던 그날, 스스로 날아와 손에 잡히던 아라다만텔. 너는 내가 그 길을 이어서 걸어가기를 바랐던 것이었구나.
내가 부족해서, 이제야 너의 마음을 알게 되는구나.
라텔이 빙긋 웃으며 아라다만텔의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엄마의 검과 함께 간다니 나도 마음이 좀 놓이네. 아라다만텔, 우리 사고뭉치를 잘 좀 부탁할게요. 잠깐 눈을 뗐다 하면 사고를 치는 아이거든요.”
아라다만텔 또한 반가운 것일까.
어머니를 닮은 라텔을 보고 기뻐하는 것일까. 그 울림이 크고 맑게 떨렸다.
그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누나, 그럼…… 행복해야 돼.”
누이의 마지막 배웅을 받으며, 블러드윈드의 안장 위로 올라타던 그 순간 왜였을까.
지금, 내가 가족의 품을 떠나 전장으로 간다기보다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던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