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66)
가짜 용사 이야기-66화(66/310)
제66화
“1698년 10월, 종교 혁신이라는 이름의 내전이 극점에 달하던 시기에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이 피의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들어온다.”
제국 내부는 혼돈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신성인류제국, 그 시대 인류 최강의 국가는 본래 다섯 선제후들에게 분할 통치되어 오고 있었다.
북부의 듀렌.
동부의 티스리아.
남부의 아르휀.
서부의 에이진.
중부의 사이온.
제국의 힘의 핵심부는 선제후들 사이의 황선, 즉 당대 최고의 인재를 황제로 선출하는 의사결정 체계에 있었다.
“여기서, 제국의 결속에 균열을 일으킨 사건이 바로 종교 혁신이다.”
종교 혁신의 주역 알버트 스타시커는 광룡정교회의 낡은 교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인간의 영화는 신본(神本)이 아닌 인본(人本)에 있다고, 하면서.
제국의 패권을 겨누는 선제후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이권을 힘의 저울에 올려놓고 시름했다.
옛 진교(眞敎)를 택할 것인가.
개혁 세력, 이교(異敎)를 택할 것인가.
중부의 사이온 공작가와 서부의 에이진 공작가는 이교를, 북부의 듀렌 대공과 남부의 아르휀 공작은 철저한 보수주의적 종교관에서 진교를 택한다.
“이때, 동부는 진교와 이교로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내부 투쟁 절차에 들어서 있었다.”
“동부를 차지하는 세력이 황제 선출을 할 수 있게 된 건가요?”
“그렇다. 그렇기에 동부가 종교 혁신의 주요 전장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이 인지하고 있던 역사.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종교 혁신이 이계인(異界人)들에 의한 침공이라는 걸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때, 감히 누가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세계의 파멸이 시작될 때…….
창세의 섭리를 아득히 벗어난 저 섬뜩한 외우주의 사도들이 이 땅 위로 내려온다는 전설을…….
이계(異界)의 메아리,
종교 혁신의 진면 (1)
“좌익 붕괴 신호탄이 올랐습니다! 리븐델 학파의 광역 마법에 2개 보병여단이 불타 죽……!”
기원력 1698년 10월.
신성인류제국, 중부와 남부의 접경 게람 지방.
궁성 키에스와 그 후예들이 자리를 잡고 평화를 지켰다는 이 터전에 전쟁의 소음이 가득했다.
“우익으로 지원을 나간 예비대에서 긴급 지원의 깃발이 오르고 있습니다! 어서 대응 명령을……!”
대륙에서는 황권의 권좌를 겨누는 풍운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게람 지방은 중부와 남부를 잇는 고갯길에 들어앉아 있었으므로, 두 세력에게 있어 전진의 거점이었다.
포탄의 굉음이 대지를 뒤흔들어 흙먼지가 치솟는 가운데, 총탄과 창칼이 황잡하게 교차하며 비명의 갈래들이 뒤엉켰다.
“본대는 아직 전선을 유지 중입니다만, 적 포병대의 포격이 아군 포병대를 웃도는……!”
그리핀 편대들이 상공을 새까맣게 채우며 울부짖었다.
동족의 육신을 부리와 발톱으로 물고 찢어대는 핏물이 비처럼 쏟아져서, 대지는 질척거렸다.
그 끝없는 혈우(血雨)를 올려다보던 유리우스 페이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용사님, 결국 우리들은 실패하고 만 걸까요.”
페이지 방백 가문의 젊은 당주.
그 고풍스러운 연보라색 머리칼 아래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연보라색 머리칼은 대현자 에밋사 페이지의 후손인 페이지 가문만이 갖는 유전적 상징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그 징표조차도 빛이 바래게 하는 월광(月光).
바람에 초연하게 흔들리는 은발 앞에서, 진성검 샤릴리온이 강대한 빛의 맥박을 내뿜었다.
그 이름 타르시요, 타르시요 예레 샤릴리온. 2천 년 만에 다시금 이 땅에 재림한 용사.
“이교 세력은 항상 우리를 앞섭니다. 손바닥 위에 있는 듯…… 모든 전략, 전술이 간파당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 어센시쿼리어는 전설의 한 폭에 그려지는 용사처럼 당당하거나 위엄찬 모습이 아니었다.
용사라기보다는 병자였다.
짓무른 피부를 붕대로 숨기고 있었는데, 지금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그 위에 갑주를 입고 있었다.
타르시요가 용사로서 싸울 수 있을 때, 그들은 모든 전장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타르시요는 모든 싸움에서 용사가 될 수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이는 극소수의 요인들만이 아는 기밀 사항이었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겨운지 숨결이 떨리고 있는 걸 보라.
“그래요…… 그 생각대로죠. ‘그들’은 이 전투를 수십 번씩 겪어봤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인…….”
그러자 마갑이 푸른빛으로 휘황찬란한 군마에 올라타 있던 중년인이 물었다.
“타르시요 경, 그들이 이 전투를 수십 번 겪어봤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인가?”
블란 아르휀.
그 위에서 바람결에 펄럭이는 청룡의 깃발이 바로 그 고고한 지위를 증명했다.
남부를 총책임 지던 선제후, 아르휀 공작가의 당주로 중부 군대와의 전쟁에서 늘 패퇴일로를 겪었던 군주였다.
“지금까지 많이 겪어 오셨잖아요. 어떻게 군진을 짤지 다 알고 약점만을 찌르는 걸.”
“그러니까 그게─”
“─전령입니다!”
공중에서 그리핀 한 기가 다급히 낙하하였다.
착지의 흙먼지가 가시기도 전에, 그 위에서 기수가 뛰어내려 그들 앞에 황망히 부복했다.
“본대가 중부군 선봉에 용감히 맞섰습니다만, 적의 은빛 매 기사단이 돌진하며 아군의 피해 막대! 그 숫자 3천의 대부대입니다!”
“……!”
“그 돌파의 진로를 따라 중부군 총력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좌익을 무너뜨린 리븐델 학파가 합류하여 본대조차도 붕괴되기 직전입니다!”
블란 아르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빛 매 기사단이라면…… 이쪽에서도 주력으로 맞을 수밖에 없겠군.”
은빛 매 기사단 단장, 베글렌.
그는 현재 제국오검(帝國五劍)이라 불리는 다섯 명의 절정 검사 중 하나였다.
리븐델 학파의 수장, 달리온 카라인 또한 현재 제국 5인의 아퀴자드(5성, 대마법사) 중 한 명인 위인으로 중부군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손꼽혔다.
“유리우스, 자네의 마도근위대의 힘이 필요하겠네.”
“알겠습니다. 저는 글라도스(4성) 마법사에 불과하지만 최선을 다해…….”
“아니요. 이제 제가…….”
타르시요가 무장을 마치고 걸어오자, 유리우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직접 나서시는 것은…… 여기에서 당신이 쓰러지면 모든 희망이 사라집니다.”
유리우스의 말에 대답할 때, 타르시요가 불현듯 화들짝 놀라더니 시선을 저편으로 돌렸다.
그리고 꿈을 꾸듯이.
어쩌면 꿈을 그리듯이.
저 먼 허공, 아무도 없는 먼 동쪽의 어느 언덕을 멍한 눈으로 응시하던 그 입가에 사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오고 있구나…….”
“예?”
“오고 있어요……! 그러니 그때까지 공격의 때를 기다리죠. 모든 주력을 집중시키면서. 그때 제가 나가겠어요.”
누가 오는지, 대체 누가 오고 있는지, 타르시요는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곧 그 언덕 위에서, 그 시선의 끝에서, 붉은 군마를 탄 기수가 나타났으므로.
* * *
“으, 은빛 매 기사단이다…… 중부 최강이라는……!”
“막아! 화망을 이뤄서─!”
“─주, 중대장님!”
전장의 모든 것을 짓밟는 그것은 압도적인 폭력(暴力).
수십 개의 쐐기가 박힌 철구가 전장을 휩쓸며, 군마의 두개골을 짓이기고 기병의 상반신을 으깨고 보병들의 다리를 깨부순다.
그 위에서 펄럭이는 새하얀 군기, 그 깃발에서 매 한 마리가 힘차게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하하핫! 진짜 존나게 쉽네! 죄다 이름 없는 잔챙이들뿐이라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하급 네임드 정도는 나와 줘야 나도 경험치를 얻을 것 아냐!”
그 옆에서 말을 달리며, 상급 마법을 난사하던 대마법사 달리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라. 엘리트가 타르시요는 지금 전력을 못 쓴댔어! 우리가 여기서 그년을 붙잡으면 내전 시나리오도 거의 끝나!”
무언가, 그러한 혼돈 속에서조차 기이하도록 분명하게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있었다.
칼날 같은 존재감 때문일까.
마치 칼이 바로 눈앞까지 치고 들어오는 듯한 그 울림에, 매의 기사 베글렌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뭐야, 저놈은? 인터페이스에 레벨이 안 나오는데?”
일직선(一直線).
남부군 전열이 뿔뿔이 흩어지는 수라장 속으로, 정면으로 내달려오는 군마는 단 하나.
같잖다는 듯, 베글렌이 눈매를 찡그린다.
“미친놈, 이 레벨 86의 베글렌 님에게 혼자 달려온다고? 만렙까지 14렙밖에 안 남은 날 상대로?”
“기다려! 뭔가 이상해. 저 자식, 이름도 레벨도 안 나와. 감정 불가 스킬은 엘리트들이나 쓸 수 있는 고위 스킬이라고.”
“하, 등신아. 남자로 페이쿼리어 루트를 탄 머저리가 감정 불가를 써봤자지! 쓰지도 못 하는 가짜 성검들 주렁주렁 매달고 와서는!”
베글렌이 군마의 옆구리를 거칠게 걷어차며 속력을 높이자, 기사들이 그 뒤를 따르며 함성을 내질렀다.
“좋다, 인마! 정성스레 루팅해온 그 아이템들, 죽여서 내가 모두 고맙게 써주도─!”
눈을 깜빡이는 한순간의 틈새.
말을 할 때, 들숨과 날숨으로 나뉘는 호흡의 필연적인 틈새.
그 틈새 속을 비집고 들어오듯, 눈앞에서 일순간 벼락처럼 번뜩인 칼날.
일합잔상(一合殘像).
의식과 시야의 사각, 그 모든 것을 아득히 굽어살피는 경지에서 내뻗는 칼날의 궤적.
그 죽음의 일발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눈앞에서 섬광이 사그라진 뒤였다.
막아야 해, 라고 생각하고 방패를 들어 올리려던 순간에는 이미 붉은 잔상이 깔린 수평선이 어지러이 회전하고 있었다.
‘대체 뭔 일이……?’
단말마의 아픔이 일기도 전에.
사방에서 황망하게 이는 중얼거림만이, 지금 일어난 상황의 진실을 베글렌에게 전달해줄 뿐.
“베, 베글렌이 한 방에?”
“대체 뭐야, 미친…… 남부에 저런 괴물이 남아 있었다고?”
“엘리트는 저런 놈이 있다고 말 안 해줬는데?”
그런 공포와 당혹의 외침이 차마 끝나기도 전에, 칼날은 몇 번이고 수평선 위로 살(殺)의 오로라를 그려냈고.
그때마다, 거짓말처럼.
종잇장이 베어지듯이, 수천의 기병들의 머리통과 몸통이 분리되며 이리저리 고꾸라져 갔다.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런 무훈이 있다.
오직 한 사람의 무예 하나로 전황을 뒤집어 버리는, 그런 절대적인 무력이란 게 있다.
“저, 저건……?!”
“카, 카이센 님이시다!”
“카이센 님이시라고? 인류 최강의 병사?”
도망치던 남부 병사들이 내지르는 환호성들 속에서, 달리온의 의식은 멍해졌다.
“카이센이라고?”
설마 그 카이센?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아니?
예전에, 플레이어로서 이 배틀로얄에 참가하기 전이었다.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의 아이템 툴팁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은 미구현 NPC였다. 뭘 어떻게 하든, 만날 수가 없는 존재란 뜻이다.
인류 최강의 병사로서 <잊혀진 왕들>까지도 베었다는 그 전설적인 NPC를 어떻게든 만나 보겠답시고 버그를 쓰던 이들도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애초에 적색산맥 회전은 플레이할 수 없이, 언급만 되는 이벤트니까…….’
그 이벤트에서 분명 죽어서 등장하지 못하는 영웅이 어떻게 살아서 지금 여기 나타났다는 말인가?
‘엘리트 소서러의 말대로야.’
전체적으로 뭔가 이상해.
삼영룡인지 뭔지 하는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존 버전과 달라진 게 너무 많아.
‘하지만 그런 특이점을 지금 여기에서 배제할 수만 있다면……!’
5성 마법의 고속 연산.
리븐델 학파는 오직 화염 속성만을 다루는 것으로 팔대학파(八代學派)에 입신한 학파.
그 오랜 전통 속에서 다져지고 가지런해진 힘은 전투 속에서 가장 위대하게 빛난다.
– 마방진 구축, 5성(成).
대열을 혼자서 돌파한다고 뒤통수가 훤히 열린 허점을 노리고, 대마법사가 법복의 품에서 부적 열두 장을 꺼내 내던졌다.
일정한 위치에서 부유하는 부적이 불길을 내뻗어 서로를 하나의 힘으로 연결시킨다.
그 불길 속에서 다섯 겹의 마방진이 허공에 펼쳐진 것도 잠시, 마방진은 곧 하늘로 솟구쳐서 불길의 장막으로 상공을 뒤덮었다.
– 천염격(天炎激).
천염격은 리븐델 학파의 창시자인 오르보스 카라인이 설계한 궁극의 마법.
찬란한 화염이 창공을 삼키고.
하늘을 삼킬 정도로 강대한 그 화염이 곧 강대한 격랑을 일으키며 표적에게로 쏟아져 내린다.
“!”
살벌한 마력, 등줄기의 솜털이 곤두서며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유예의 시간이 있었다.
발도의 검기를 날려서 술사의 목을 날려 버린다면…… 그러나 아라다만텔을 납도하던 그 순간.
사각사각사각…….
분명하고, 단호하게, 영혼을 갉아먹는 심연의 고통. 동작과 판단에 찰나의 지연이 일어난다.
‘아니, 하필 이때……?’
숨이 격렬하게 떨려왔다.
주먹으로 가슴을 꾹 누르나 고통은 가라앉지 않는다.
“……피하십시오……!”
“……위험합니다……!”
모두가 황급히 외치기만 할 뿐 감히 몸을 날리지는 못하던 그 순간, 불길이 지평선을 붉게 태우며 쏟아져 내리던 그 순간.
“삼켜줘, 샤릴리온.”
창연하게 빛나는 은발을 휘날리며 그 앞으로 나아서는 용사. 기도하듯 양손으로 받잡아 치켜든 흑날의 검날.
그 육중한 질량이 부르르 떨자, 이변(異變)이 일어난다.
쏟아져 내리던 화염의 갈래들이 부자연스럽게 회오리치며 뒤엉키더니…… 칼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
“……?”
본래대로였다면 지축을, 그 위의 모든 생명을 새까맣게 연소시켜 버렸을 화염의 대폭발은 사라졌다.
정확하게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고 투명한 성검의 칼날 안쪽에서 그 붉고 포악한 힘은 응축되어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이제 됐어.”
이것은, 진성검 샤릴리온의 특수 능력.
형질흡력(形質吸力).
신들의 시대에 옛 왕을 베었던 진성검의 특수 능력은 극위성검들의 그것조차 아득히 초월한다.
“다시 내보내도 돼. 꿰뚫어줘.”
일곱 배, 빨아들인 힘을 정확히 일곱 배로 증폭시켜 일점으로 발출시키는 그 힘은 모든 이능의 통제권을 빼앗는다.
그 기적의 칼끝이 겨누었다.
본래 이 마법의, 이 표준적 힘의 궤도를 넘어서는 불꽃의 주인이었던 대마법사를.
“끄, 끄아아아아아아!”
그러자 그 순간.
격렬한 화염의 소용돌이가 폭발하며 뻗어 나가 대마법사의 육신을 단숨에 불사른다.
그래, 그것은 기적의 광경. 절망을 단숨에 희망으로 뒤엎는 절대적인 힘의 구현.
“와,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위엄, 가짜 용사와는 본질적으로 무언가가 다르다…… 카이센은 망연히 넋을 잃었다.
마치, 밤하늘을 빛내는 달처럼.
저 힘은 대자연처럼 필연적인 신비로 모두의 마음을 비춘다. 대자연과도 같은 아름다움으로 모두의 마음을 적신다.
‘백발에 성검, 언뜻 여태까지 봐온 페이쿼리어 선배님들이나 동료들과 비슷한 외형인데…….’
어두운 밤을 저 너머에서부터 밝히는 달처럼, 보는 것만으로 매료되고 압도된다.
그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절망뿐이었던 전장에서 희망이 메아리치며 들끓기 시작한다, 달빛이 수평선에 가득 차오르듯.
“샤릴리온 병단이 왔다!”
“용사님의 뒤를 따라!”
“모조리 짓밟아버려!”
오직 베고 죽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나와는 달리, 눈부신 빛이 있어.
흑암에 빠진 이들에게로 내리비치는 듯한 광명이 있어.
어떻게 저렇게나 눈부시고도 아름답게, 모두를 선도할 수 있는 걸까.
– 살(殺), 네 칼에는 베고 죽인다. 오직 그 목표밖에 없다.
빛의 물결이 전장을 휩쓰는 그때, 카이센은 시선을 내렸다.
어머니, 스승님.
진짜 용사란 건 뭘까요.
아키레아 각하께서는 단순한 이정표라 했지만, 그 이정표란 대체 어떻게 세우는 것이기에 이렇게나 다를 수 있는 걸까요.
“아니, 낙인이 없는 자들은 죽이지 마세요! 항복하는 이들은 모두 살리고 낙인이 찍힌 자들만 쓰러뜨려야 해요!”
타르시요가 샤릴리온을 높이 쳐들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 거뭇한 칼날, 산천을 밝히는 태양과 그 빛줄기가 찬란하게 새겨진 칼날 위에서 햇살이 튕겨 나갔다.
그 튕겨져 나간 햇살이 전장을 대낮처럼 훤히 밝히자, 대부분의 적들이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낙인이다!”
“대체 저게 뭐야?”
그런데 몇몇 놈들은 쓰러지기는커녕 머리 위로 기괴한 낙인이 떠올랐다.
저것이 바로 이계의 낙인.
저 낙인의 정체가 세계에 알려지는 건 그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었다.
‘절망할 필요 없어. 나는 내가 해왔던 일을 하면 된다.’
그때는 아무도, 그 낙인의 정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스승과 선배님께 배워온 일, 가짜 용사로서 할 일을.’
빛이 비치매 어둠이 이기지 못하고 물러간단 옛말대로, 그날 그 전장을 눈부시게 밝히던 광휘에 모두가 매료되었으므로.
“어이, 저것 좀 봐…….”
그리고.
그 눈부신 소용돌이 속에서조차.
스스로의 빛을 잃지 않고, 아름답게 번뜩이는 혈광(血光)에 압도되었던 것이다.
“그 타르시요 님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검사가 있었다니…….”
백광과 혈광이 아름답고도 눈부신 춤을 추며 잇닿고 교차하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진다.
전장을 물들이는 그 춤이, 기만의 그림자 위에서 세계를 활보하던 이계의 낙인들을 걷어낸다.
그날, 그 자리의 그 누구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매료되고 압도되어, 그 빛의 향연 위에서 서로의 고동만을 들을 뿐.
“엄청나다. 인류 최강의 병사란 별호대로…….”
순식간에 싸움이 끝난 벌판 위로, 타르시요를 향한 찬가가 가득했다.
동화가 현실에 덧씌워진 듯하다.
저 되찾을 수 없는 어린 날…… 부모님이 잠자리에서 읽어주던 용사의 동화가.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샤릴리온!”””
성검을 높이 쳐든 용사가.
모든 이들이 소리쳐 그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새하얀 백마를 타고 전장을 달린다.
‘그에 비해…….’
쓴웃음으로, 그 위상과 자신의 몰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온몸에 핏물과 먼지를 뒤집어쓴 누추한 나의 모습은, 여실히 증명하고만 있는데.
내가 가짜라는 걸.
‘스승님, 샤론 선배님, 로베리스 선배님, 이슬라, 세이라.’
전장에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지금까지 봐온 페이쿼리어들은 모두 이처럼 싸움의 흔적으로 추레해진 몰골 위에 살기(殺氣)라는 꽃잎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 더럽혀지고 어질러진 미색이 곧 아름다움이라 믿었건만, 모든 것이 진짜를 보지 못한 자의 착각과 합리화에 불과했구나.
‘지금 제 눈앞에, 우리들이 꿈꾸던 ‘진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