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67)
가짜 용사 이야기-67화(67/310)
제67화
“토벌전의 성격으로 제국 남부 중추를 겨누었던 중부군 1진은 게람 지방 결전에서 진용사 샤릴리온의 칼날 아래 사분오열되었다…….”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타르시요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제국의 색채는 여름이었다.
저 동부 전선의 피를 먹고 자라난 꽃들이 마지막 빛으로 아롱지며 들판을 물들였다.
도라지꽃이 눈 시리도록 파랗게 만개하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타르시요가 손을 파닥거려 그 꽃잎의 향기를 끌고 왔다.
“……분명 이렇게들 말하는데, 왜 네가 쓰러진 건데?”
이틀 전에 간행된 《제국일보》를 접으며 협탁에 내려놓자, 타르시요가 멋쩍게 웃었다.
타르시요는 그날 쓰러졌다.
정확히는, 왔구나, 카이센……이라고 말한 뒤에.
“다른 인간들이 이틀 동안 대체 뭐라고 수군댔는지 알아? 나 혼자서 둘러댄다고…….”
간신히 낙마하기 전에 부축했는데, 병사들의 눈에는 단지 품에 안은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 그래, 역시 용사님의 짝은 최강의 병사 말고는 없겠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그날부터 오늘까지, 여기저기서 들리는 목소리들을 떠올리자니 얼굴이 제멋대로 후끈 달아올랐다.
“응? 뭐라고 수군거렸는데?”
타르시요가 갑자기 초롱초롱한 눈으로 몸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도무지 옮길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눈빛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특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미소로 시시덕대고 있음을 느꼈다.
“너, 괜찮은 거 맞냐?”
그 미소를 헤치고 나아가는 방법은 의표를 찌르는 질문뿐이었다.
“계속 싸울 수 있는 거 맞냐고.”
이미 유리우스 페이지에게서 대략적인 전말은 들은 터였다.
– 기밀 사항입니다만, 용사님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싸움이 끝난 후에는 늘 저렇게 몸져누우셨습니다…….
그 전말에 대한 증거가, 타르시요의 전신에 남아 있었다. 붕대로 몇 겹이고 감싼 팔다리가 심각하게 야위어 있었다.
그 씁쓸한 시선조차 의식했을까.
타르시요가 장난을 치다 들킨 소녀처럼 자신의 팔을 이불 속으로 감추었다.
“어센시쿼리어는 신체가 자동으로 재생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봐.”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럼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해?”
“네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줘.”
“뭐?”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곳이 어디야?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가 뭐라고 인사해줬어? 제일 좋아하던 음식은 뭐였어? 어머니가 해주시던 것들 중에 말이야. 어머니가 생일 때마다 해주던 음식은?”
세월이 몇 년이 지났는데도, 어머니의 삶이란 입에 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 미소…….
오직 그 마지막 미소가…….
혼백을 갉아먹는 심연의 아픔보다도 날카롭게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으므로.
삶의 마지막에 그리던 그 미소가 어떻게 미소일 수 있을까.
언제나 그렇듯, 타르시요는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에게는 어머니와 함께한 추억들이 있지? 근데 나한테는 이것 말고는 없어.”
“무슨 소리야?”
“나는 말이야. 어머니와 함께한 기억이 없어. 나를 낳으면서 돌아가셨거든.”
“뭐…….”
“천국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니, 카이센? 죽은 뒤의 세계야. 거기서 사람들은 다시 만날 수 있대.”
천국이라 말할 때, 그 얼굴에 활짝 피는 미소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특유의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거기 갔을 때 어머니가 날 알아보실까? 태어났을 때의 얼굴밖에 모르실 텐데.”
어떻게 닿을 길 없는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침묵이 펼쳐졌다.
열린 창 너머로 도라지꽃들이 바람결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여름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침묵은 칼끝이었다. 칼끝처럼,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답했다.
“사람이 자식을 알아볼 때 외모만 필요한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대충 내뱉은 말이었다.
어쩌면 내 어머니를 향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지금 날 알아보실까.
타르시요는 그 말이 더없이 기쁘단 듯 손뼉까지 마주쳤다.
“맞아! 외모가 닮지 않았어도, 마음과 생각과 행동마저도 완전히 똑같이 닮을 수 있다면?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었어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
“난 그렇게 되고 싶어. 어머니가 나를 본 순간, 아, 이 아이가 내 딸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푸르고 아득한 터널이 펼쳐지는 듯한, 너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너는 분명 알아보실 거야.
어떻게 못 알아보겠어, 이렇게나 눈부신데…….
그렇게 전하지 못한 진심은, 평생의 후회로 남게 될 거란 것을 알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없더라고.”
협탁 위에 내려놓았던 신문의 종잇장이 바람결에 파닥거렸다.
타르시요의 시선이 그쪽으로, 그리고 그 옆으로 향했다.
내벽에 기대 세워진 채, 성스러운 광휘를 내뿜고 있는 진성검 샤릴리온의 칼날 위로.
“이 길 말고는.”
이계(異界)의 메아리,
종교 혁신의 진면 (2)
종교 혁신(宗敎-革新).
현존하는 인류 국가 중 제일의 초강대국이었던 제국은 저 피의 소용돌이 앞에서 폐허로 변했다.
전쟁을 위한 귀족들의 탐학, 도적 떼로 변한 용병들의 수탈로 도시 권역 이외의 모든 곳이 무너져갔다.
“제국 행정 체계는 이미 붕괴되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버려진 마을과 성터에 마물들이 들어와 둥지를 틀었다는데, 이를 몰아낼 병력조차 없었다.
“마지막 평화라 일컬어지는 청동(靑銅)의 시대의 종말인 것이다.”
번영의 흔적은 흩어져가고 있다.
위대한 황제 라이다 에이진과 용현 레인 루드윅의 위대했던 업적들은 ‘은(銀)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은의 시대’에는 신분증 하나만 가지고도 온 대륙을 여행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이 시대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였지.”
다섯 선제후가 다섯 지역을 통치하고, 선출된 황제가 이들을 통솔하던 제국의 균형은 깨어졌다.
그 균형을 처음으로 깨트린 건, 중부의 선제후 사이온 공작이었다.
사이온 공작은 광룡정교회의 교리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이교(異敎) 세력을 지원한다.
“이 사이온 공작의 뒷배가 바로 럭셰리아 루드윅, 용현의 직계 후손이자 4대 현자였다.”
그리고 서부의 선제후, 에이진 공작도 이교 지지를 천명하며 군대를 결집시킨다.
당대 제국 최고의 무인으로 유명한 중년의 사내로, 중병기의 달인이었다.
그 이름, 페르비아스 에이진.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은의 시대’를 선도했던 루드윅과 에이진의 후손들이 사회 붕괴에 앞장서게 되다니.
“이때, 정통 교리, 즉 진교(眞敎)를 떠받드는 건 남부의 아르휀 공작과 북부의 듀렌 대공이었다.”
제국 전역이 전화(戰火)에 휩싸이고 나서 현재, 기원력 1698년.
전쟁의 불길은 동부로 집중된다.
5년 전에 선대 선제후가 죽은 이후, 그 어린 딸이 황제 투표권을 취득하게 된 해였으므로.
“동부를 차지하여 그 투표권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세력이 황제의 권좌를 겨눌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의 마음에 내일이란 없었다.
그날, 그 시대에는 어떠한 희망도 꿈도 존재할 수 없었다.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 그해가 곧 제국의 1698년이었다.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이 전쟁 속에 나타난 것도 바로 이 1698년이었다. 종교 혁신의 진면이 밝혀지게 되는 역사 또한, 이 1698년이었다.”
그리고.
이 인류의 대영웅이 전사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해도 바로 이, 기원력 1698년이었다.
* * *
“내가 이런 거 싫어한다고 말했지?”
개선의 행렬은 남부군의 동부 전진기지인 <드레이크팽>의 시내 중심 교차로를 통과했다.
기마 헌병들이 대열의 선두와 후미, 그리고 도보를 통제하였다.
길옆에는 근대식 고층 건물들이 늘어섰는데, 각 층마다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고 꽃가루를 뿌렸다.
“저분이 바로 샤릴리온이야! 가는 곳마다 승리하시는 용사님!”
“저 옆은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다! 인류 최강의 병사! 옛 왕을 베셨대!”
사람들은 타르시요를 그 이름이 아니라 성검의 이름인 샤릴리온이라 불렀다.
이유는 모른다.
타르시요는 좋아하는 눈치였다.
– 샤릴리온은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뜻이래. 나는 그래서 그 이름도 좋아.
어느 봄날의 풍경처럼, 꽃잎들이 여러 색으로 아롱지며 흩날린다.
사람들은 길 위에 자신의 윗옷을 벗어 깔고는 울면서 절했다.
용사님, 아이고 용사님…… 그 울음들을 하나하나 붙들고 같이 울어주는 타르시요를 보고 있자니 작년 축제의 기억들이 살아났다.
그해가 언제였던가.
이슬라가 모두의 손가락에 자기의 손가락을 걸며 약속하던 그게 정확히 언제였던가.
마음의 달력이 벌써 수십 장이나 찢겨 나간 것만 같다. 수십 년이나 지난 것만 같다.
홀로 남겨진 기억이, 시체처럼 썩어가며 마음속을 악취로 가득 채워 나가고 있기 때문일까.
“웃어줘, 카이센.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희망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
“…….”
“아니면 나와 같이 있는 게 그렇게나 싫어?”
용사로서의 체통 따위는 없이, 타르시요가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기며 활짝 웃었다.
“난 너와 이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쁜데.”
그날, 그렇게 말 위에서 토혈을 뿜으며 쓰러졌으면서…… 어떻게 저리 환하게 웃을 수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어센시쿼리어는 페이쿼리어와 달리 용혈 혈청이 없이도 신체를 재생한다고 들었는데, 과로로 쓰러지는 게 과연 가능한가?
‘생각해보면 어머니나 스승님께서도 가끔 저러시곤 했는데…….’
자신의 색(色)으로 주위를 물들이는 것이 닮았다고 생각했더니, 몸 상태도 닮은 것일까.
그 닮음의 빛은 진실로 슬펐다.
곧 다가올 마지막 날, 이 녀석을 혼자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구나. 스승님께서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너야말로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냐?”
“응?”
“난 왕의 심연…… 그 고통 때문에 웃을 수가 없어. 너도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는걸.”
웃을 수 없는 건 마음의 고통 때문이었으나, 그렇게 얼버무리면서 넌지시 몸 상태를 물었다.
그러자 그때 너는.
사소한 비밀을 숨기는 소녀처럼.
“울고 있을 시간이 없거든.”
그런 영문 모를 말로 대꾸하면서 시시덕거렸다.
“어머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어머니의 발자취…….
그 말에, 주먹을 통해 가슴에 전해지던 그날의 울림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 카이센. 카밀라 선배님을 뛰어넘어, 라미네아 님과 같은 영웅이 되어라.
어머니, 어머니와 같은…….
그때 <드레이크팽>의 시청 광장으로 이어지는 중심 가도의 길이 끝났다.
“재림 용사와 인류 최강의 병사를 동시에 환영할 수 있다니, 아르휀 가문의 어떤 선조도 이런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거다.”
그곳에서 남부군의 거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를 대표해, 귀공들의 무훈과 용기를 칭송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길 바란다.”
군악대가 일제히 주악을 울렸다.
사람들이 아르휀 공작가의 청룡 깃발과 티스리아 공작가의 깃발을 흔들며 환성을 질렀다.
훈장 수여식이 끝나고 공작이 물러섰는데, 그 뒤에서 태양과도 같은 광휘가 비쳐들었다.
「카이센.」
용현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삿갓 아래에서, 여명의 빛보다도 더욱 찬란한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뇌향의 세츠넨.
용현이 이 땅에 남긴 세 가지 기적 중 하나.
“뇌향 각하, 지금 막 복귀했습니다.”
경례를 올리는 사이, 뇌향이 눈앞까지 다가와 볼에 손을 얹었다.
「내, 이렇게 다시 너를 보니 그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구나. 돌아왔구나, 돌아왔어.」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 건 아침 햇살의 온기. 그 손길에서 피어나는 건 아침 햇살의 누런 향기.
그 온기와 향기가 품고 있는 건, 진실한 사랑.
평범한 일상과도 같은 그러한 환영에, 잠시 어머니와 함께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네, 어머니……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라고 대답할 뻔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집에 말도 없이 늦게 돌아온 날, 어머니에게 사과하던 것처럼.
그 눈동자에 깃든 아픔과 사랑을 견딜 수가 없어서, 다만 고개를 떨군 채로.
「되었다. 이렇게 돌아와 주었으니 되었다.」
뇌향이 슬픈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때 유리우스가 뇌향에게로 다가와 공손히 절했다.
“중부군의 30만 본대가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20만에 가까운 적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선봉대가 전멸한 걸 확인한 모양입니다.”
뇌향이 깊은 탄식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시선, 그 눈이 타르시요에게로 향했는데 그 동작 하나하나가 이상하도록 겸손했다.
세츠넨은 고개를 숙인 것처럼도 보였는데, 입이 아니라 생각으로 말했다.
[다시 이리 뵙게 되니 큰 영광이옵니다.]네이갈라스를 토벌할 때 영혼을 나눠 받았기에, 그 생각을 엿들을 수 있는 듯했다.
그런데 존경어를 쓴다고……?
당혹스러워하던 그때, 타르시요가 고개를 저으며 방그레 웃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늘 말씀드렸지만 당신이 제 상급자입니다. 저도 카이센처럼 안아 주셨으면 좋겠는데.”
[제가 어찌 감히…….]어떻게 된 일이지?
어센시쿼리어는 삼영룡보다도 더 높은 지위로 올라서는 걸까?
아니, 아무리 어센시쿼리어라도 삼영룡이 저렇게나 자세를 낮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수석 교관이 타르시요의 존재 자체가 기밀이라고 했었는데…….’
그러한 생각도, 뇌향과 타르시요의 언쟁 아닌 언쟁도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댕, 댕, 댕, 댕, 댕…….
문득, 시내의 모든 종들이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으니까. 도시 상공을 둥글게 감싼 결계가 붉게 명멸하기 시작했으니까.
[이렇게나 많은 숫자가 공간 전이를…… 도시 바로 내부로 쏟아져 들어온다!]한 병사의 다급한 비명.
블란 아르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시에 차원문을? 또 럭셰리아, 그 계집의 소행인가!”
럭셰리아.
럭셰리아 루드윅.
용현의 직계 후손으로, 스무 살의 나이에 현자의 경지에 올라 대륙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천재.
<드레이크팽>은 설계부터가 군사 거점으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8개의 결계 발생원을 갖고 있으며, 이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이 막는 건 어디까지나 외(外)적이지, 내(內)적에게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럭셰리아가 그 말도 안 되는 차원 통제 능력으로, 도시 방어의 허점을 억지로 열어낸 것이었다.
유리우스가 말했다.
“다행히 차원문을 제외하면 혹현(惑賢)의 마력은 탐지되지 않습니다만…….”
모든 현자에게는 이명이 붙는다.
럭셰리아는 만나는 모든 이들을 그 신비하고도 고혹적인 매력으로 미혹시킨다고, 혹현이라 불렸다.
혹현은 이 세상에서 대규모 공간 전이를 사용할 수 있는 두 존재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뇌향의 세츠넨.
한쪽은 용현이 마음으로 낳은 후예이며 다른 한쪽은 몸으로 낳은 후손이라는 건 놀랍지도 않다.
그래서일 것이다.
럭셰리아라는 이름의 반복 속에서 뇌향의 눈빛이 비탄으로 짙게 물들어가는 건.
“중부 최정예 검사 집단인 천검대(天劍隊)의 대주, 검성 나로스가 적 침투조를 지휘하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제국에는 황하사무성(皇下四武星)이라는 존재들이 있다.
황제를 섬기는 4개의 별이란 뜻으로, 각 분야에서 정점에 이른 자들에게 수여되는 영예였다.
검의 정점, 검성.
창의 정점, 창성.
마법의 정점, 마도성.
활의 정점, 궁성.
한때 제국의 통합의 지지대였던 그들은 제국이 분열된 이 시대에서는 스스로 주인을 골라서 저들끼리 다투고 있었다.
메른과 트발만이, 스스로 황하사무성의 지위를 내려놓고 인류 생존 전선으로 나아왔을 뿐…….
[블란 전하, 제게 맡겨 주십시오! 도시 방어 결계를 무력화하여 성문을 열 속셈이 분명합니다!]“안 된다, 카론 백작! 황하사무성은 함부로 볼 상대가 아니다.”
「유리우스, 그대는 결계의 방어를 최우선으로 하라. 백성들의 피난은 내가 책임지겠다.」
뇌향이 양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공포의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던 인파들이 차례로 황금의 광휘에 휩싸였다.
아마, 단숨에 지하 피난 시설로 이동되었을 것이다.
‘근데 뭔가 이상해…….’
왜 럭셰리아 루드윅이 직접 나타나지 않은 거지?
뇌향 각하도 타르시요도 나도 지금 여기에 있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오만에 빠진 건가? 지혜의 정점, 4대 현자가 그렇게나 우둔할 확률은…….
[전 병력에게 알린다, 도시 방어 전투 위치로! 거점 방어 전술을 이용한다!] [알겠습니다.] [차원문이 열린 곳은 총 세 곳이다. 적들이 결계를 없애고 문을 여는 상황만큼은 막아야 한다! 북문, 상황 보고 하라.] [검성, 저 괴물을 저지할 수가…… 으아아아악!]사방이 아수라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뇌향 공명으로 연결된 병사들의 비명들이 끝없이 메아리치는 혼란의 일순간.
그 혼란을 칼로 베어내는 듯한, 단호하되 분명한 울림.
“각하, 검성이 있는 북문으로의 단독 돌파를 허가해 주십시오.”
모두가 그 소리의 진원을 쳐다보았다.
정적이 내려섰다.
뇌향의 세츠넨이 그 당혹감의 침묵을 깼다.
「단독 돌파라니, 어째서 나에게 너를 위험 속으로 홀로 내던지라고 하느냐.」
그 발언의 주인,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물 안 개구리한테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는 알려줘야죠.”
그걸 아는 순간이.
네가 죽게 되는 순간이겠지만.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겨누는 칼의 세계에서, 깨달음이란 본래 그렇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타르시요, 북쪽 차원문의 주력부대는 나 혼자 처리하겠어. 너는 다른 두 차원문을 해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