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7)
가짜 용사 이야기-7화(7/310)
제7화
유년기, 여름의 서막 (6)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검은 여름’이라는 이름으로 온 대륙을 유린했던 심연(深淵).
그 동란을 통해 인류는 마족과 정면으로 맞서서는 이길 수 없단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인류는 난쟁이들의 힘을 빌려 ‘광역 요새 체계’를 구축해내게 된다.
그 이름, 인페르노 라인(煉獄線; Inferno Line).
구공화국 영토를 동부, 남부, 서부로 3분할하는 벨리소르 대하 이북에 세워진 강철의 요새선.
대하 이남의 남부 영토를 포기하는 구조적 한계가 있긴 했으나, 인페르노 라인은 우루크의 전격전 앞에서 4년간의 평화를 이뤄냈다.
그 말은 즉, 개전 이후 4년 동안의 싸움들은 바로 이 인페르노 라인 공방전으로 얼룩져 있단 소리가 된다.
카밀라의 백골 병단이 투입된 곳 또한 인페르노 라인의 중서부 전선이었다. 전쟁 초기의 격전지를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곳이다.
“일제 포격! 우루크 개자식들이 강을 건너오게 놔두지 마라!”
포대장의 호령에 따라, 강을 겨누는 증기포 수십 문이 폭음을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포탄에 선체가 깨어지고 치솟는 물보라에 뱃머리가 휘둘리기도 잠시, 곧 허공에 검푸르게 펼쳐진 장막에 포탄들이 튕겨 나갔다.
접안경을 통해 강 중심부의 전황을 확인한 관측병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적 암술 결계 확인…… 일제 포격, 저지당했습니다!”
선두에서 나부끼는 깃발은 암청색 바탕에 흰색 눈알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깃발 아래서, 늙은 우루크 하나가 가부좌를 튼 채 허공을 고요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우루크 최상위 21개 클랜, 즉 하이 타르크 중 하나인 홀드림 클랜의 족장 듀디갈.
“쏴, 쏘란 말이다! 결계가 깨어질 때까지!”
“안 됩니다, 각하! 결계에 균열조차 가지 않습니다!”
언덕에서 이러한 전초전을 내려다보던 카밀라가 쯧, 혀를 찼다.
“멍청하게 포탄만 낭비하고 있어. 저놈들의 결계는 일반적인 포탄으로는 뚫지도 못하는데.”
요한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홀드림 클랜이라, 슬슬 하이 타르크가 인페르노 라인 돌파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나.”
홀드림, ‘흑성’이라는 뜻의 괴어.
별들로부터 지혜를 얻는 그들은 일반 전사들조차도 암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우루크는 무당 아니면 전사로 계급이 나뉘기 마련인데, 놈들은 그 힘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것이니.
홀드림을 필두로 규합된 8개 클랜의 무수한 군선들이 홀드림의 결계를 앞세우고 어느새 강변까지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 전사들의 숫자는 대략 2만인 반면 이곳 7번 요새의 수비대의 숫자는 8천이 조금 안 되었다.
현실적으로 압도적 열세였다.
“상륙, 적 상륙합니다!”
제1파의 뱃머리가 강변 방파제를 때리기 무섭게, 우루크 전사들이 함성과 함께 뛰어내렸다.
선봉을 맡는 건 우루크 종족에게 있어 대단한 명예로, 카스트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선 전사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
“총병대, 준비! 쏴!”
총병들의 총알 세례 속에서도 우루크들은 동료의 시체를 방패막이처럼 써서 요새를 기어올랐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요새에서 앞으로 돌출된 포대였다.
인류는 포대가 무너지기 전에 우루크를 몰아내야 했고, 우루크는 포대를 무력화시켜 본대의 상륙을 지원해야 했다.
두 가지 상반되는 뜻이 하나의 장소에서 겹쳤으므로 그곳은 격전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U-Ha!”
우루크의 웃음 섞인 함성.
포대를 지키던 인간의 육신이 육편으로 저며지고 뇌수가 튀고 뼛조각이 흩날렸다.
그때.
스르릉…….
그 피로 얼룩진 소란을 베어내듯, 칼집을 예리하게 스치는 쇳소리가 있었다.
이토록 정신없는 혼란 속에서도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리는 칼의 울음.
그 소리의 진원지에 서 있는 소년의 칠흑 같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조용히 흔들렸다.
“Asu-dubari(웬 놈이냐)?”
핏덩이로 으깨진 사체를 쥐고 있던 우루크가 그 인간 꼬맹이의 눈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그 순간.
일섬(一閃).
소년의 칼이 벼락같은 궤적을 그렸다.
웃던 우루크의 목을 잘라내고.
그 뒤에 선 우루크의 심장을 꿰찌르고.
양쪽에서 짓쳐들던 도끼날을 칼집으로 받아치고 그 손목들을 베어 떨어뜨렸다.
“……?!”
“……?!”
“……?!”
당혹감을 느낀다는 건 허(虛)를 내보인다는 것.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것들을 소년은 베어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농사를 짓듯이, 서두르지 않고.
베고 또 베어내는 길 위에서, 우루크의 피를 뒤집어쓰고 또 그 핏물에 미끄러지면서.
베고, 베고, 베고, 또 벤다.
소년이 지나간 자리로 피와 뼛조각과 골수로 이뤄진 길이 생겨났다.
그 피의 향연에 잠시 압도된 전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소년에게 일제히 달려든 순간, 총탄이 놈들의 머리통을 찢었다.
“잔챙이들의 똥구멍에는 칼날보다는 총탄이 어울리지!”
장총 진의 총병대. 그 엄호 속에서 카이센은, 핏물로 젖어서 붉은 세상의 끝을 바라보았다.
‘적이다. 선발대의 대장인가.’
풍모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교활한 짐승 같았는데, 홀드림 클랜의 상위 전사들만이 입는다는 예복을 갖춘 놈이었다.
놈이 사악한 주문을 외자, 원념(怨念)이 새까만 안개로 퍼졌다.
“뭐, 뭐야, 이놈은……!”
“총알을 박아! 주문을 못 외게 총알을 박으라고!”
“아, 안 통합니다!”
그 원념이 표피에 달라붙으면, 살가죽과 지방이 질척하게 뒤엉켜 녹아내리고 그 안쪽의 뼈가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Wahahahahaha! 약해, 약해! 미천한 인간 놈들!”
놈을 목격한 순간 소년은 이미 전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도끼날을 태도로 쳐내고, 해일처럼 밀려온 원념의 안개는 벽을 박차 몸을 힘껏 솟구쳐 회피.
이어서 칼을 납도한다.
칼집으로 들어간 칼을 머리 뒤로 끌어당기며 근육을 극한까지 수축시킨다.
마지막으로 오른손에서 마나체인을, 왼손에서 마나하트를 발현.
일련의 과정이, 이 세상의 어떤 서슬보다도 날카로운 마력의 서슬을 칼과 칼집 위로 둘러친다.
─ 십문자도 4식, 발(發).
십문자도는 연계의 검법.
연계를 시작할 때, 원(圓), 충(衝), 둔(鈍), 발(發)의 4개의 기초 초식이 이용된다.
그러나 카이센이 연계에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해야만 하는 기초 초식은 단 하나, 발(發)뿐이었다.
─ 십문자도 10식, 십자참수.
카이센이 착지한 한순간, 발(發)의 힘으로 증폭된 초식의 힘이 우루크 전사의 육신 위로 종횡의 절단면을 새겨 넣는다.
쇠의 칼날이, 육신을 베어 길을 열어내자 마력의 칼날이 그 너머 내장을 폭발시켰다.
한때 장기였던 것들과 선혈이 절단면으로 쏟아내는 사체는 4등분되어 성첩 위로 고꾸라졌다.
“와, 방금 봤어?”
“쩔어, 일격이야!”
그것이 전환점이었다.
소년의 전투에 용기백배한 병사들이 우루크들을 요새 위에서 몰아내고 포대를 되찾기 시작했다.
“카이센, 여긴 이 진 아저씨가 맡을 테니 넌 나리한테 가봐라!”
저길 갈 필요가 있을는지…….
제국 최고의 빙결사로 불리는 요한에 의해 대하의 수면은 이미 동토(凍土)로 변해 있었다.
그 새파랗게 얼어붙은 수면에서, 챙, 챙, 챙, 챙, 챙…… 얼음송곳들이 마구잡이로 솟구쳐 전선들을 부수고 우루크들을 꼬챙이로 꿰어 죽였다.
혼란이 내려앉은 빙판 위로 카밀라가 엘토람을 비롯한 수인병들을 이끌고 가로질렀다.
조급하게 뛰지 않았다.
간격을 좁히는 데 체력을 쓸 필요도 없다는 듯, 그저 걷기만 하였는데 아무도 그 전진을 막지 못했다.
앞길을 막아서는 우루크들은 참격 한 방에 대여섯 명씩 죽음을 맞이할 뿐.
극위성검 아라다만텔의 칼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목이 잘려 나간 몸들이 휘청거리다 쓰러졌고 상반신과 하반신이 절단된 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길게 흩뿌려진 핏물들은 빙판 위에서 얼어붙어 붉은 부스러기가 되었다.
족장 듀디갈이 마침내 뱃머리에서 빙판 위로 내려왔다. 가부좌를 튼 공중부양 자세로.
– 홀드림에서 가장 강력한 술사는 족장 듀디갈. 벼락과 인력과 척력, 그리고 중력을 자유자재로 조작한다고 해.
카이센은 요한이 전투 전에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카밀라가 놈을 맡겠다고 한 것도.
‘저놈도 하이 타르크인가. 순위가 꽤 높다고 들었는데.’
듀디갈이 망치로 지면을 때리자, 칠흑의 벼락들이 휘몰아쳐 빙판을 부수고 물보라를 일으켜 세웠다.
하나, 둘, 셋, 넷.
차례로 내리치는 벼락이 자신을 노리기를 기다렸다가, 카밀라가 깊은 발자국을 남기며 몸을 전방으로 날렸다.
‘역시나 빨라.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나랑은 비교조차 안 돼.’
듀디갈이 암술로 불러일으킨 구체가 인력과 중력을 조작하는 파장을 내뿜었으나, 한계 너머의 속도를 가진 보법을 쫓진 못했다.
감탄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려던 때에 싸움이 끝났으니까.
처음에는 그 참격의 시작과 끝을 읽을 수 없었다. 후일 복기를 통해서 대충이나마 이해했을 뿐.
“절원(切願), 대홍견섬무참(大紅絹殲霧斬).”
절원, 성검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극기.
카밀라가 순백의 칼집 안으로 아라다만텔의 칼날을 납도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칼집 주위에서 선홍의 전류와 입자가 사납게 포효하기 시작한 순간.
발도(拔刀).
칼이 소리보다도 빠르게 지평선을 찢었다.
서────
칼날이 너무나도 빨라서, 빛이 튕겨 나가는 잔상만으로 그 궤적을 간신히 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카밀라가 다시 아라다만텔을 칼집에 꽂았을 때에야, 참격의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참격의 금속음이 청각을 자극한 뒤에야, 베인 자들의 몸은 베였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듀디갈의 몸이, 수십 척의 배가, 수백 마리의 우루크의 육신이, 그 발도의 궤적 위에서 잘려 나갔다. 백지장을 찢듯이 가볍게.
─────엉.
전신을 뒤흔드는 전율 속에서 카이센은 아라다만텔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검.’
어머니도 저 칼을 가지고 싸우셨겠지.
그리고 카밀라는 어머니로부터 검술을 배워 그 힘을 완벽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뒤를 잇는 필두 페이쿼리어로서.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본래 페이쿼리어가 될 수 없고, 또한 자신은 카밀라의 제자가 아니었으므로.
* * *
그날 오후, 우루크는 퇴각했다.
필두 페이쿼리어가 선보이는 압도적 무위 앞에서 아무리 저항한들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카이센의 호투로 포대를 되찾은 포병대의 포격도 다시 시작되었고, 듀디갈 없이는 포격을 완전히 물리칠 결계를 펼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불패(不敗)의 백골 병단은 그날 다시 전설적인 무용담을 만들어냈다.
병단 부상자는 127명이 전부였고 사망자도 고작 35명뿐이었다.
7번 요새의 사상자는 2천 명이 전부인 반면 마족 군대는 그 네 배에 달하는 8천의 사상자를 내고 꽁무니를 뺐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 카이센이 홀드림의 최고 개자식들 중 하나의 목을 땄단 말이지! 그냥 일격이었다니까?”
진이 맥주잔을 들어 올리자, 병단 병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잔을 마주 들었다.
카이센은 이런 상황이 불편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카밀라의 무용에 비하면 자신이 한 건 정말 보잘것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엘토람이 털이 덥수룩한 손으로 카이센의 등을 후려쳤다.
“카밀라 나리는 페이쿼리어다. 용사라고. 경쟁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기는! 난 거짓말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 꼬맹이 카이센.”
“…….”
“네놈은 모르고 있다. 그분께서 그런 힘을 내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계신지.”
그래, 모르고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걸 알게 되는 날이 평생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야 했던 것일까.
페이쿼리어는 스스로의 수명을 깎아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카밀라에게 그런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단 사실도.
“오늘 너무 무리했어, 카밀라.”
승리의 소란으로부터 먼 곳.
아직은 화산재가 침범하지 못해, 하늘을 밝히는 달이 보이는 풀밭 위에서 카밀라가 고개를 들었다.
“울프.”
“성검의 최종 비기인 절원(切願)을 사용하다니…… 그럴 필요 있었어?”
“있었지, 그럼. 하이 타르크 상대로 대충 하리? 그리고 이번에는 기선을 제압하는 게 중요했어.”
“왜?”
“뭔가 이상했거든. 아무리 봐도 7번 요새를 뚫으려는 것 같지가 않았어.”
“그러면?”
“흐음, 뭔가……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빨리 걷어낼 필요가 있었어. 절원은 힘자랑 같은 거지.”
“카밀라, 홀드림은 하이 타르크야.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신예 하이 타르크도 아니고 전통 깊은 하이 타르크지. 그걸 위장 작전의 미끼로 내보냈단 말을 하려는 거야?”
“애초에 하이 타르크의 주력이 온 것 같지도 않아…… 아무리 봐도 좀 이상했는데.”
“후계자한테 부족을 물려주고 몸만 온 것 같단 소리야?”
“확신은 못 해.”
“아니, 카밀라. 네가 단장님만큼이나 강해져서 싱겁다고 느낀 건 아니고? 나한테는 네가 무리를 해서라도 카이센에게 ‘새로 만든’ 절원의 시범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는데.”
“시범은 니미.”
카밀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울프는 카밀라의 옆에 앉아서, 이제 완전히 새하얗게 세어버린 친우의 옆머리를 씁쓸하게 어루만졌다.
“이제 얼마나 남은 것 같아?”
“좆도 안 남았어.”
“그래?”
“그래.”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더 시간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 한심이를 완벽하게 가르칠 수 있게, 조금이라도 더 지도해줄 수 있게, 스승님께서 베풀어주셨던 것처럼.
하지만 이 몸에는 이제 더 이상 유예할 시간이 없어.
이제 곧, 헤어져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