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73)
가짜 용사 이야기-73화(73/310)
제73화
「모든 일월(日月)의 추락을 통한 암흑시대의 개막, 그게 엘리트 소서러의 계획이었다니…….」
럭셰리아 루드윅과의 싸움을 소상히 보고한 자리에서 세츠넨이 한참의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그리고 일등 관리자라고?」
“예, 분명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샬류안이라고도 했고요.”
아직도 그 황당한 악몽을 비현실의 일부로 치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관리자…… 그 언어는 어감부터가 소름이 끼쳤다.
언어라기보다는, 세계의 나선을 인과(因果)라는 이름으로 통치하는 존재들의 자취처럼도 느껴지기도 했다.
[일등 관리자, 샬류안. 요티아토스가 창세신 겔드하리아의 신격을 삼키고 나서 그 찌꺼기로 만든 죄와 심판의 여신입니다. 요토스와 함께 외우주의 유희를 주최하는 핵심 세력이었죠.]「카듀엘 님, <잊혀진 왕들>과 동격의 존재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최측근 중 한 명이지요. 그런 존재를 배제한 일은 의의가 아주 큽니다.]일등 관리자…….
카이센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뇌를 뚫고 들어오는 듯했던 그 역겨운 악취가 생생했다.
그러나 그런 악몽보다도 더 생생한 건, 일격에 소멸시켜 버린 존재의 기묘한 존재감이었다.
영혼 속으로 들어온 그 힘…… 그건 착각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하지만 샬류안을 베었다는 존재는 라이브러리에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직접 보았더라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분명, 배신했다고 했습니다.”
[관리자가 요티아토스를 배신한다는 건 가능성이 0에 수렴하여 주인님의 검토가 필요합니다만, 유르벨뭉이라는 이름은 라이브러리에 확실히 등록돼 있습니다.]카이센은 잠시 가슴을, 그 검이 밀고 들어왔던 자리를 매만지다가 고개를 들었다.
“유르벨뭉, 어떤 검입니까?”
[창세신 유르벨께서 당신의 백팔 가지 권능을 떼어내 칼의 형태로 빚어낸 검입니다. 베르켄시아와 함께 신격을 소멸시킬 수 있는 신검(神劍)이라는군요.]「카듀엘 님, 그건 봉인이 필요하지 않다는 소리입니까?」
[그렇습니다.]세츠넨의 눈에 슬픔의 빛이 지나갔다.
분명, 왕을 봉인하기 위해 자신의 몸과 혼을 바치고 죽은 동생의 일을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카듀엘이 대답했다.
[라이브러리에 등록된 무력 데이터만 본다면 창세신 겔드하리아의 신검, 베르켄시아조차도 아득히 상회합니다.]베르켄시아, 빛의 칼날.
창세신 겔드하리아가 <온 것들>에게 처음으로 주었다는 신검의 이름이었다.
테르시아가 그 검을 받은 것을 기점으로, 대심연 항쟁사가 시작되었다.
<온 것들>의 리더였던 테르시아가 사용했던 검이었고 지금은 요정의 젊은 영웅, 리암이라는 자가 다루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검이 왜 타르시요가 아니라 저한테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7위계에 불과한 비효율적인 병기들로 류이니옌의 사도를 압도했습니다. 검술에 대한 적성만으로 놓고 보면 당신의 가치가 작은 주인님보다 높습니다.]타르시요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 늘 너는 네 가치를 낮추려고 하는 거야?”
그 미소는 아팠다.
카듀엘이 타르시요에 대해 말해주었던 것이 생각났으므로.
– 작은 주인님께서는 진성검 샤릴리온의 적성 수치가 34%에 불과합니다.
– 안정권이 어느 정돕니까?
– 120% 이상부터입니다. 50% 이하부터는 적성이 없어 본래 작동조차 시킬 수 없으나…….
그 낮은 수치로 진성검을 다루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르나,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막대한 대가를 치르는 건 분명했다.
‘마치, 수명을 깎아서 극위성검을 휘두르는 페이쿼리어처럼…….’
모든 용사는 자신의 삶을 깎아내야만 싸울 수 있는 것일까.
“……또 요티아토스가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고 했어. 근데 요티아토스는 정확히 어떤 존재지?”
“요티아토스, 심연의 주인. 창세신 겔드하리아 님의 심복이었대. 근데 힘에 대한 갈망인지 겔드하리아 님을 배반하고 그 신격과 신권을 삼켰다고 해.”
「요티아토스…… 아버지께서도 그 이름을 말해주신 적이 있었다. <잊혀진 왕들>의 주인이며, 이 모든 일들의 흑막이라고…….」
세츠넨이 말했다.
카듀엘이 답했다.
[본래 외우주와 창세의 세계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만, 요티아토스가 타락하여 외우주와 창세의 세계를 연결시킨 것으로 온 세상에 죄악이 흘러들어 오게 되었습니다.]아직도 모든 일들이 안개 속에 잠긴 듯 희끄무레하게 보이기는 했으나, 예전과는 달랐다.
사건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르벨뭉이 내 혼에 새겨진 게 정말이라면…….
‘그걸 내가 ‘그릇’인지 뭔지로 완성된 이후에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라면…….’
그 검의 힘으로 요티아토스를 베어서 겔드하리아의 신격을 되찾을 수 있다면…….
받아들여야 할 거대한 운명에 뜨거운 침이 넘어갔다.
주먹을 꽉 쥐었다 펴면서 입을 열었다.
“그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제가 지금 뭘 하면 되겠습니까?”
[비상 대책 MM-082를 실행시켜야 합니다.]“비상 대책 MM-082?”
[4개로 분할된 타르혜 론델을 전부 가동시키는 일입니다. 타르혜 론델은 빛의 봉화, 그 빛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또한 빛의 힘은 강화되고 심연의 힘은 약화됩니다.]뇌향의 세츠넨이 말했다.
「아버지가 남기신 기록에 ‘타르혜 론델’ 봉화대의 위치가 세 곳 기록돼 있습니다. 한 곳에는 같이 가본 적도 있지요.」
[발견되지 않았을 뿐, 총 네 곳입니다. 제 소관인 ‘베테 론델’은 작은 주인님의 승인으로 현재 작동 대기 상태에 들어갔습니다.]“다른 곳들은 어떻습니까?”
[아크라드 대륙 북단의 알마(01) 론델, 남단의 뮤(04) 론델이 남았습니다.]카듀엘의 주황색 빛이 허공에 대륙 지도를 띄워냈다.
[이데아 동부의 델(03) 론델은 베르켄시아의 계승자가 엘디아 델 슈르비엘을 통해 작동 대기 상태로 전환시킨 것으로 확인됩니다.]슈르비엘은 옛 5인의 어센시쿼리어 중 다른 한 용사의 이름이었다.
이슬라처럼, 체구가 상당히 작았다고 하는데 극위성검 가우므리스의 원형인 진성검 아이자이야의 주인이기도 했다고 한다.
카듀엘과 마찬가지로 저런 기계장치가 되어 시설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남부는 심연의 영향권에 있으니…… 지금 손댈 수 있는 건 북부로군요.”
[투항한 플레이어로부터 이미 칼의 사도, 엘리트 나이트가 북부로 향했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엘리트 나이트……?”
외우주로부터 검의 축복을 받은 존재, 그 검의 경지가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엘리트 나이트는 세력이 제일 강대한 플레이어로 우승이 유력한 존재라고도 했습니다. 그가 알마 론델을 노리고 있을 확률이 87%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그렇게나 강하다면, 혹시, 만약, 그 순간 용령을 해방시켜야만 한다면…….
아니, 잠깐…….
그 방대한 정보의 전달 속에서, 단 하나 머릿속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투항한 플레이어?”
이계(異界)의 메아리,
종교 혁신의 진면 (8)
플레이어는 나무에 매달린 채 광장 중앙에 ‘전시’돼 있었다.
뇌향 각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 리가 없으니, 분명 블란 아르휀의 독단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찌나 돌을 들어 던져댔는지 광장 여기저기서 돌덩이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플레이어의 몸에 흐르는 피는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처음에 입은 상처가 전부란 소린데, 그 주위를 결계가 둥글게 지키고 있던 것이다.
그 결계에 돌을 던지며 분노를 쏟아내던 이들이 카이센을 보고는 함성을 쏟아내며 물러났다.
대신, 베어주리라 기대했을까.
인파를 가르며 광장으로 나아갔다. 플레이어를 지키던 결계는 주먹질 한 방에 깨어졌다.
그러자 플레이어 앞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소년이 황급히 앞을 막아섰다.
‘연보라색 머리칼…….’
이 머리, 기억난다.
페이지 가문의 머리색…….
‘그때 에오스와 함께 관제실에 잡혀 있었던 그 녀석.’
그 이름이 더글라스 페이지였다.
로베리스 알터 쉬르팽이 자신의 일기를 편지로 보내고 있다던 그 막냇동생이 바로 이 녀석이었다.
날아오는 돌을 대신 몇 대 맞기라도 한 것인가, 역시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페이쿼리어, 레스터는 제 친구예요. 낙인이 있다고 하지만…….”
“그걸 믿었나 보지?”
“레스터는 항상 절 도와줬어요. 정말로요! 다른 낙인자들과는 달라요. 제가 연주회를 준비할 때도 엘리트 소서러가 오고 있다고, 도망가라고 경고도 해줬고…….”
그래, 이 자식아…….
몸속에서 뜨거운 것이 목을 타고 나왔다가 입에서 맴돌았다.
이미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더글라스는 마도 관현악의 지휘자였다.
마도 관현악이란, 관현악 속에서 마법까지 사용하여 시청각적인 아름다움까지 채우는 예술이었다.
그 마법을 사용하는 건 지휘자의 일이었고, 음악과 마법 양쪽에 통달한 이만이 할 수 있는 고급 예술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이 얼간이가 동부와 중부의 접경지에서 연주회를 열려고 했단 것이었다.
럭셰리아 루드윅은 그걸 준비하던 더글라스를 포획해 에오스까지도 붙잡았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도망가지 않았지? 네가 인질로 잡히면 에오스 님이 잡힐 거란 것도 몰랐나?”
“그건…….”
“저 하늘을 봐. 이제는 태양이 하나밖에 안 남았어. 저게 전부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몇 명이나 죽었는지 아나?”
“그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평범한 연주회가 아니었어요! 동부와 중부를, 그 사람들의 마음을 전쟁 없이 하나로 엮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럭셰리아가……!”
“연주회는 무슨 염병할! 전쟁이 우습냐? 전쟁이 노래로 해결될 수 있다고? 웃기지 마. 그게 가능했으면 로베리스 선배님께서도……. 젠장, 그분께서는 네가, 이딴 짓이나 해대고 있을 때……!”
분노의 표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화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건 분명, 나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로베리스의 얼굴과 표정을 너무나도 빼닮은 저 얼굴을 보니, 그 죽음을 짓밟고 살아남은 나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우루크에게로 돌리던 것과 똑같이, 지금은 이놈에게 그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일까.
“비켜.”
더글라스를 밀치고 플레이어 앞으로 걸어갔다. 플레이어가 간신히 고개를 들더니 입술을 떨었다.
“그래, 바로 당신이구나…… 엘리트 소서러가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인물이…… 한 번 봤을 뿐인데 이유를 바로 알겠어…….”
“왜 투항했지?”
“나는…….”
“내가 물을 때는 3초 안에 대답해라.”
“말한다고 믿어줄지 모르지만…… 나는 원래 몰랐어. 정말이야. 이게 진짜 세계라는 걸…….”
이놈들만 없었더라면…….
꿈속에서, 어깨로 피를 쏟아내며 죽던 어머니의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제국의 원군이 있었더라면, 어머니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더라도 스승님께서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 카이센, 너는 살아라.
비가 쏟아지던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음을 보이며 죽었던 스승의 미소가 떠올랐다.
스릉…….
뽑았다는 감각이 없었는데, 이미 아라다만텔이 칼집에서 튀어나와 대기를 시뻘겋게 적시고 있었다.
이 또한 죽여야 한다…….
죽음으로 죽음을 바꿀 수 없단 건 알지만, 먼저 죽어간 이들에게 이 뜨거운 피비린내를 선향으로 바쳐야만 한다…….
“페이쿼리어, 제발.”
그때 더글라스가 팔에 매달렸다.
“레스터를 살려주세요. 레스터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이미 죽고 없었을 거예요. 제발.”
“비켜. 같이 죽고 싶어?”
“카이센 경.”
그때 유리우스 페이지가 플레이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귀족으로서의 체통조차 잊고 무릎을 꿇었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이란 건 알지만, 부디 제 동생을 지켜 주시기를 탄원합니다.”
“……비키십시오. 원래 이 애송이는 벨 마음이 없었으니까.”
“몸이 아니라, 저 아이의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그 일순간, 그들의 얼굴 위로 이상한 풍경이 겹쳐졌다.
어머니께서 저 나무에 매달려 있고, 내가 처형인의 손에 매달려 울며불며 소리치고 있고, 아버지가 저렇게 무릎을 꿇고 있는…….
본래 탈영병으로서 처형되었어야 했으나, 오주 요슈하르의 간곡한 탄원으로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왜 이딴 환각이…….’
정녕 저걸 벨 수 있을까……?
꼭 베어야 하는가……?
과거의 나도, 과거의 아버지를 모두 밀쳐내고, 과거의 어머니를 벨 수 있을까……?
베자…….
베지 말자…….
죽여야 해…….
죽이면 안 돼…….
살려주자…….
살려서는 안 된다…….
고통스러운 메아리들이 머릿속에서 여러 갈래로 일어서서 서로 울면서 싸우기 시작한다.
“카이센, 망설이지 말고 베어버리게. 자네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용서를 받아본 적이 없다면.”
그 혼란을 단번에 잠재우는, 한낮의 태양과도 같이 눈부신 빛이 비쳐들었다.
“에오스 님……?”
<온 것들> 중 하나, 핏빛 태양 슈리간의 아들.
그 광채에, 싸움을 구경하던 모두가 경외감 속에서 자발적으로 꿇어앉고 있었다.
에오스는 진정 기적의 존재였다.
전란에 휩싸인 제국 전역을 돌며 병든 자들을 고치고 굶주린 자들을 배불리 먹였다.
아무도 에오스가 <온 것들>의 아들이란 걸 몰랐지만 사람들은 그 기적과 그 성품에 감복하여 그를 따랐다고 한다.
잘려 나갔던 더글라스의 팔을 다시 회복시킨 것도 분명 이 에오스가 펼친 기적이겠지.
엘리트 플레이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에오스를 잡으려 하자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나…….
“자네는 강해. 그리고 완벽하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약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어.”
“……강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약하다고 경멸하지도 않고.”
“그래, 몸은 약해도 전장에서 싸울 각오는 있는, 마음이 강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말이지.”
태양 아래에 섰을 때, 그 열기 속에서 그림자와 어둠들이 불살라지는 것처럼…….
마음의 그림자가…….
마음속 깊은 어둠이…….
저 태양열을 그대로 품은 언사들 앞에서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카이센, 자네는 강해. 대체 어느 누가, 그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나서 적과 싸우겠다고 결심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도망칠 거야. 도망쳐서, 그저 그 슬픔 속에서 평생을 숨어 살아가겠지.”
“…….”
“그래서 자네의 눈에는 다른 이들이, 싸우지 않는 이들이 이해가 되지 않고 그저 나쁘게만 보이는 거야…… 칼을 쓰지 않고 사람들을 연결하려고 했던 더글라스도.”
“저는…….”
“카이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惡)한 게 아니야. 약(弱)한 거라네. 약하니 의(義)를 지킬 수 없고, 외면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는 거고.”
“…….”
“저들도 스스로 그걸 알고 있어.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다고. 그 약함을 숨기려고 비겁해지게 되는 것뿐…….”
에오스는 붉은 머리에 늘씬한 체구를 가진 미청년이었다.
아키레아와 같은 붉은 머리였으나 어딘가 기품이 달랐다.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우주적인 기품의 차이라고나 할까.
아키레아의 머리가 불꽃 그 자체라면, 에오스의 머리는 태양의 붉은빛이었다.
“그러니 그 약함을 책망하지 말고, 가엾이 여기고 용서해줄 수는 없겠나? 용기의 선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이 이계인을 용서하라는 겁니까……?”
“무릇 용서와 용기는 같은 거라네. 그러니 용서를 배우는 것 또한 그들을 닮아가는 길이야. 바로 자네가 찾던 길 말이네. 저 이계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네. 그리고 도움을 주었지. 악행 위에 선행을 쌓았네.”
머리 위에서 붉게 흐느끼던 성검의 칼날에서 빛이 가라앉았다. 대리자의 살의와 공명하던 빛이 꺼진 것이다.
칼 쥔 손이 축 늘어졌다.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살의의 떨림은 크고 구슬펐으나, 그걸 억누르는 이성의 파도 소리에 집어삼켜졌다.
“여기 모인 그대들에게도 똑같이 말하겠네. 살면서 단 한 번도 용서를 받지 못해봤다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받지 않겠다는 자가 있다면, 지금 이곳으로 나와 이 이계의 존재를 베게. 이건 명령이야.”
감히, 그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인산인해를 이루며 광장을 메우고 있던 인파는 순식간에 곧 점심이네, 약속이 있었네, 따위의 핑곗거리를 내뱉으며 흩어졌다.
그들이 떠나간 빈자리에는, 그 손에 쥐고 있었던 돌들만이 널려 있었다.
“스, 스승님……!”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니라 카이센에게 해라. 그가 이 용서에 이르기까지 내디뎌야 했을 용기의 발걸음에. 그가 먼저 용서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레스터를 용서하지 않았을 테니.”
더글라스가 연신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유리우스가 다가와 말했다.
“로베리스 누님께서 저택으로 보내시던 편지에 경의 이름이 곧잘 나왔습니다.”
“선배님께서요…….”
“믿음직한 후배가 생겨서 이제는 뒷일이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셨죠. 동생으로서 내심 질투한 건 사실이었습니다만, 그래도 경을 계속 지켜보니 저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로베리스…….
그 이름 자체가 서로의 마음을 가로막던 슬픔의 벽이었건만, 그 벽이 조금은 허물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등에 매달린 쉬르팽이, 옛 대리자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속에서 구슬프게 울었다.
“칭찬이 후하신 분이셨으니…….”
“누님께서 칭찬이 후해요? 그렇지 않다는 걸 당신도 잘 아실 텐데요.”
이 화제를 더 이끌어갈 용기가 없었다.
아라다만텔을 한 번 휘둘러, 레스터를 포박하고 있던 족쇄와 나무를 모두 박살 내버렸다.
레스터가 더글라스의 부축을 받으며 축 늘어질 때, 그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했다.
“레스터라 했나? 지금 엘리트 플레이어가 몇 명이나 남았지?”
“……엘리트 소서러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셋. 당신이 그 녀석을 죽였으니 이제 둘 남았겠지. 하나는 이데아 반도에 있어. 캐릭터가 요정이야.”
“엘리트 나이트는 얼마나 강하지?”
“엘리트 소서러는 늘 그 녀석과의 전면전을 피했어. 어떻게든 동맹을 유지하다 마지막에 싸우려고…… 아마 두 배 정도는 더 강할걸.”
“두 배?”
“뭐야, 왜 그냥 가? 더 안 들어? 이야기를 들어야지. 정확한 건 아닐지 몰라도 아는 게 꽤 있어!”
그거면 충분하다.
더 이상 알 필요도 가치도 없다.
아라다만텔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돌아섰다.
“들을 필요 없어. 두 배라며. 그럼 별것 아니란 소리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