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74)
가짜 용사 이야기-74화(74/310)
제74화
신성인류제국 중부, 리치랜드는 초목이 하늘에 닿는다.
제국 중심부를 커다랗게 두르는 엘레아노르 대하(大河)는 중부인들의 삶의 방식과 기후를 정했다.
엘레아노르의 축복 위에서, 중부의 땅은 푸르고 기름졌으며 그 위로 샘과 꽃밭이 흐드러진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 어디냐고 물으면, 열 명 중 여덟 명은 리치랜드를 꼽았다.
그리고 그 리치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이 어디냐고 물으면, 꽃을 좋아하는 이들은 시아스튤리카라고 답했다.
시아스튤리카, 튤립의 고장.
지평선 가득 튤립이 너울거리고, 그 위로 풀벌레들이 지저귀던 평원…….
그 모든 설명이 통용되던 건 내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라 한다.
「마음이 아프구나…….」
지표면 여기저기가 볼품없이 파헤쳐져 참호를 이루고 있었다.
참호의 테두리를 둘러친 철조망마다 핏자국과 살점이 눌어붙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총구와 야포들이 그 뒤쪽으로 도열해 햇빛을 음산하게 쇳빛으로 뒤바꿔 튕겨냈다.
중부의 선제후, 사이온 공작 가문의 순백색 바탕에 무지개 문장의 깃발이 그 위로 나부꼈다.
「바로 저 언덕 위에서 미르에게 보낼 튤립을 꺾었단다……. 그게 어언 300년 전이구나.」
뇌향의 세츠넨의 눈동자에 슬픔이 깃들었다.
이 꽃밭을 그 누구보다도 오래 지켜봐왔던 존재여서일까, 이 꽃밭은 루드윅 방백 가문의 영지.
뇌향에게 있어서 이 꽃밭은 잃어버린 고향이었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도리가 없는 유년기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였다.
「그리고 이곳은 라미네아의 돌잔치가 이루어졌던 곳인데, 그나마 온전하니 좋구나…….」
“이곳이, 어머니의……?”
「그 아이는 튤립보다 도라지꽃을 좋아했다. 도라지꽃이 피는 시기에 태어나, 도라지꽃보다도 더 맑고 푸르게 웃던…….」
뇌향의 목소리에서, 카이센은 느낄 수 있을 리 없는 과거의 꽃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 꽃바람이, 볼 수 없는 광경을 눈앞에 펼쳐주었다.
삼영룡 모두가 모여 축복하는 가운데, 아기였던 어머니가 꽃밭 위 돗자리를 네 발로 기어가는 풍경.
검.
마도서.
성서.
그 모든 걸 외면한 채, 어머니는 튤립의 틈바구니에 홀로 피어 있던 도라지꽃으로 다가갔다.
그 꽃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어머니께서 꺄꺄 웃자, 뇌향이 아하하 웃었고 홍염의 입가에도 고요한 미소가 번졌다.
청성께서 그런 어머니를 번쩍 안아 하늘 높이 들고는 이런 축복을 내렸다.
– 이 세계의 피비린내를 꽃향기로 바꾸고 싶더냐. 그렇다면 내, 너에게 라미네아라는 이름을 주겠다. 꽃향기라는 뜻의 용언이다. 용족은 모두 이름에 맞는 삶을 산다. 너도 그리되어라.
그 말을 알아들었을까.
어머니께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자, 웃음이, 꽃들보다도 더 아름답게 사방에서 만개했다.
그 웃음 속에는 조부모님들의 웃음도 끼어 있었다.
가문 막하의 모든 기사와 병사와 집사와 시녀와 백성, 그리고 하늘과 땅과 바람과 구름의 웃음마저도 서려 있는, 축복의 날이었다.
‘어머니…….’
뇌향의 기억 공명이 더듬어볼 수 있게 해준 과거의 풍경…… 카이센은 어머니의 소검을 내려다보며 울음을 삼켰다.
‘……저 모든 것보다, 꽃을 좋아하던 당신께서 어째서 칼의 길에 들어서신 건가요.’
그 슬픈 물음은, 꽃들이 군홧발에 짓밟히고 야포를 견인하는 차륜에 뭉개지는 소리에 스러졌다.
“부대, 정지!”
남쪽과 남서쪽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남부의 선제후, 아르휀의 청룡 깃발 아래로는 그 막하 가문들의 병력들이 집결했다.
동부의 선제후, 티스리아의 현무 깃발 아래로는 제국 동부의 병력들이 북적댔다.
저 먼 수평선 위로 보이는 중부의 병사들을 상대로 동남 연합군이 맞닿으며 전열을 갖추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증오와 앙심만이 격렬했으므로, 긴장감은 숨이 막힐 듯했다.
다만 그 누구도 먼저 발포하여 이 옛 꽃밭 위로 피를 뿌리고 있지는 않았다.
세 파벌의 한가운데를 지키고 선, 두 명의 초월적 존재 때문에.
낡은 삿갓 아래로 태양빛의 머릿결을 날리는 용인과 백발을 나부끼는 검사.
둘의 위압감은 대조적이었다.
한쪽은 천지를 상냥하도록 평온하게 비추는 햇살이었고, 다른 한쪽은 황혼보다도 붉게 물든 혈해(血海)였으니.
그 위압감의 대조 속에서 지휘관들은 감히 발포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오래 기다렸죠? 이제 곧 연주회를 시작한대요.”
그런 그들에게 타르시요가 다가와 말했다. 카이센이 한숨으로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빌어먹을 시간 낭비야.”
연주회라니…… 그 말뜻은 관리자라는 말처럼 허황되게 들렸다.
이 세상의 참상이 닿지 않는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언어처럼.
– 북부로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철로를 확보하는 걸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유리우스 페이지가 말했었다.
북부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서부군의 뒤를 잡아 협공을 가해야 했다.
엘리트 나이트의 북부 공략이 막바지에 달한 상황이었으므로 상황은 촌각을 다투었다.
– 북부로 이어지는 철도는 사이온 공작가의 본성인 <레인보우가든>에 있습니다. 사이온 공작이 여전히 투쟁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전투는 불가피합니다.
그 틈바구니 안에 플레이어들이 남아 있을까…….
뇌향과 타르시요는 아무도 죽지 않기를 원할 것이나, 그 죽고 죽이는 수라장 속에서 한 명도 죽지 않게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미래로 가기 위해 시체의 산을 쌓으려는데, 더글라스 페이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 제게 맡겨주세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중부군을 항복하게 만들게요.
어떻게, 라고 물었다.
그러자 마도 관현악 연주회를 할 거예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그러기 위해서는 페이쿼리어의 도움이 필요해요. 당신이 계셔 주시기만 하면 누구도 감히 싸울 생각 따위는 못 할 테니까.
연주회는 무슨…….
단박에 거절할 작정이었다.
타르시요가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젓지만 않았더라면. 에오스가 제자를 두둔하지 않았더라면.
– 마음이야.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이유로 상한 심령이 있어. 그걸, 그 아픔을 하나로 이어줄 수만 있다면…… 길이 열릴 거다.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고.
그 먼 기억의 상념이, 불현듯 고요해지는 지평선 위로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
연주자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저것이 과연 연주자일까, 예순 명 중 절반은 어린아이였다. 지켜보던 병사들도 그것이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대체 저걸로 뭘 어쩔 생각이지……?”
카이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서로가 서로를 겨누는 살기(殺氣)의 냄새가 이렇게 숨 막히도록 짙은데.
증오를 씻어낼 수 있는 건 오직 피뿐이건만, 음악 따위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이지?
“저러다 누구에게 총탄이라도 맞으면? 포탄이 도탄되면? 그때는 도대체 어쩌려고?”
그때 불현듯 손에 온기가 와 닿았다.
신비한 온기였다. 마음속에서 들끓던 답답한 의심의 연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게 만드는…….
온기의 진원은, 방그레 웃으며 손을 깍지 끼며 잡아온 타르시요였다.
“카이센, 알아? 마법을 만들어낸 건 카렌덴…… 내 아버지야. 하지만 마법과 음악을 합친 건 아버지가 만든 게 아니야.”
“……?”
“그러니 이 연주회가 무사히 끝날 수 있게 도와줘. 내가 마음에 새길 수 있게. 그래서 아버지한테 이야기해줄 수 있게. 내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주회에 대해.”
내전의 끝,
그대의 마음 저편의 메아리
여름내 햇볕에 그을린 바위들과 그 주위에 깔린 돗자리들이 곧 무대였다.
병사들은 소박하게 굴곡을 이루는 구릉에 참호를 팠으므로 연주자들은 훤히 내려다보였다.
더글라스의 지도에 따라 아이들이 병사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긴장해서 쭈뼛거리는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운 나이들이어서, 병사들 몇몇이 살의를 잊고서는 피식 웃었다.
아이들이 악기를 꺼냈다. 악기들은 단순했다.
나무 테에 가죽을 조악하게 두른 북이라거나, 서투르게 깎은 나무 한 쌍을 조개처럼 맞물린 캐스터네츠…….
현악기를 위시한, 성취도를 요구하는 악기들만 청장년들이 맡았고 나머지는 모두 아이들이었다.
뇌향이 용의 형태를 갖추어 건반-현악기인 피아노를 옮겨 주었는데 그 자리에는 에오스가 태양의 품위를 내비치며 앉았다.
더글라스와 에오스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악단의 준비가 모두 끝난 걸 확인한 더글라스 페이지가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이윽고 확성 마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저희가 오늘 준비한 곡은 「천 년이 두 번 지나도」라는 곡입니다. 첫 번째 현자 에밋사 페이지의 제자이자 음공의 시조 리그윈드가 스승에게 헌정한 곡이죠.”
일선 병사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장교들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총탄이며 포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방아쇠에서 전부 손 떼라.”
그때 카이센의 명령에, 네 자루의 극위성검도 저마다의 검광을 쏟아내 대중의 살기를 억눌렀다.
잠시, 적막이 깔렸다.
일촉즉발에 긴장되는 것일까. 카이센은 맞잡은 타르시요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더글라스가 계속 말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잠시라도 무기를 내려놓고 들어 주신다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숨죽여서 수군거리던 쇳소리들은 다음 순간.
더글라스가 지휘봉을 쳐든 순간.
화살에 꿰뚫린 듯 끊어졌다.
“…….”
“…….”
“…….”
먼저, 피아노의 소리가 풀려 나왔다.
그 현란한 현의 울림 속으로, 하나둘 섞여드는 소리들…… 소리들은 저마다 구슬피 치솟거나 즐거이 흐드러지며 꽃밭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나갔다.
그 풀림과 흔듦 속에서 바람의 무늬들이 방울지며 맺혔다가 새롭게 엮이고 또 풀리면서…….
‘뭐야, 이건……?’
시상이라는 도화지 위를 수채화로 물들여간다…… 모두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추억의 공간으로.
이건 환각……?
아니, 이 육신에 환각 따위는 통하지 않아. 옛 왕 정도가 빚어내는 환각이 아니면…….
‘겨우 소리로, 음악으로 이런 게 가능한 건가?’
그곳은 날치 떼가 해수면 위를 나는 바닷가였다.
온 가족…….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웃던 그 절벽 위였다.
황혼이 비치는 꽃밭 위로 정적이 깔려 있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존중하는 정적의 밑바닥에서 흔들거리는 눈물의 파동이 느껴졌다.
숨 막히게 진동하던 살의들은 하나둘씩 누그러지고, 방울지며 솟아오르는…….
‘어떻게…….’
가슴을 움켜잡고 숨을 헐떡이던 카이센은 더글라스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전장 한복판에서, 음악을 지휘하고 있어. 그런데도 두려움이 하나 없단 말인가?’
나랑 똑같으면서.
전쟁의 시작에 부모를 잃고 그 증오와 슬픔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 이러한 풍경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해줄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진짜 강한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인 거 아닌가?
– 마도 음악의 시조인 대마법사 리그윈드는 이렇게 말했다는군. ‘음악이란 마음을 담는 것이다’라고.
그 정적 가운데 문득, 에오스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재밌는 건 시상 전개 마법을 창시해 마도 관현악의 막을 연 용현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는 거야. ‘마법이란 마음을 담는 것이다’라고. 더글라스, 저 아이는 음악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네. 모두의 마음을 엮고 싶은 마음을.
– 마음을?
– 그래, 이 내전이 끝나기를 바라는 모두의 마음을 말이야. 자네들과 비슷해서 놀랐나?
– 무슨 말씀이신지?
– 성검에 마음을 담아서 싸우는 자네들과 닮지 않았나.
마음…… 마음을 담는다는 건 뭘까. 아니, 애초에 마음이란 건 대체 뭘까.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아라다만텔에게 선택을 받기 전에.
– 살려주마. 가서, 전사가 되어 네 어미의 복수를 하러 와라.
– 홀려봐. 검술을 가르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보여 보라고.
–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 네 모든 걸 바쳐 이 땅에 빛을 밝히겠다고 서원하겠느냐?
열세 살에 시작되어 삶 전체를 뒤덮어버린 여름.
그때부터 나는.
칼을 휘두르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게 되어 버렸는데. 그래서 기원조차 그저 단순히 살육의 기원이었는데.
– 카이센, 자네는 사실 누구보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어.
– ……아뇨, 전혀.
– 그럼 질문의 방향을 바꿔볼까? 대체 왜 싸워왔나? 무엇 때문에 계속? 아무리 베고 또 죽여도 원하는 걸 이룰 수 없단 걸 알게 된 뒤로도.
왜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이 전란의 소용돌이를 평생 모르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그 마음을 품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 그냥 제게는…… 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오직, 칼뿐이었다. 어머니가 남긴 것도 스승님이 남긴 것도.
칼뿐이었다.
그래서 칼을 쥐고 있을 때, 칼을 휘두르고 있을 때에만, 그들과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놓지 못한 건 아닐까?
‘어머니, 스승님.’
알려주세요. 마음이란 뭔가요?
내게도…… 당신들이 품었던 것과 같은 마음이 있을까요?
그냥 베고 죽이는 것으로, 스스로를 향한 분노를 푸는 것이 제 마음의 전부가 아니었을까요.
“내가 그 마음을 맞혀봐도 될까?”
이제는 어떻게, 라는 질문조차 안 나온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짓는 네가.
“넌 지켜주고 싶었던 거야.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
“자기 자신의 일상은 이미 부서지고 말았지만, 그 아픔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똑같은 아픔을 겪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합주가 절정에 달한다.
그 소리 하나하나가 빛이 되고.
그 소리들 하나하나가 향기가 되어서, 추억의 속삭임이 되어서.
– 처음 만난 순간 말했지. 자네는 강하다고. 자네는 정말로 강해. 그 몸도 마음도, 용사라고 불러도 한 점의 부족함이 없도록 강하네. 본인만이 그걸 부정하고 있어.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다고. 대체 왜 그러고 있는 건가.
그 물음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게 한 홍염의 아키레아와 같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처럼 보였다.
– 먼저 너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제는 잊어버렸던 어린 날.
마당에서 검을 휘두르시던 어머니의 머리카락과 불현듯 눈앞으로 날아들던 칼끝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칼끝을 거두신 어머니가 그 칼 쥔 손으로 나를 등지고 서며 하시던 목소리조차도.
– 카이, 너는 이 검을 어떻게 쓰고 싶니?
아라다만텔을 쥐게 된 순간부터 칼의 세계를 걷는 운명이 정해졌다고 믿었습니다.
설마 그게 아니었던 건가요?
사실 저는, 그날 어머니가 하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삶으로써 보여드리고 싶었던 거였을까요?
‘어쩌면.’
아라다만텔, 어쩌면…… 나는 어머니와 스승님을 닮고 싶었던 게 아닐까.
칼을 그렇게나 아름답게 휘두르던 그 뒷모습들 너머, 칼에 싣던 마음까지도.
나조차도 모르던 그런 나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때부터 계속 나를…… 선택해준 거였냐?
웅…….
그 물음에 답하듯, 아라다만텔이 높고 구슬피 울었다.
이어서 쉬르팽이.
가우므리스가.
솔랑이.
저마다의 소리와 빛으로 울며, 그 소리와 빛들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어머니…….’
이것이, 돌잔치 때 꽃을 안으셨던 어머니가 아라다만텔을 차게 된 마음이라면…….
‘베고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저지만…….’
바로 이것이, 누구보다도 앞에 서서 아라다만텔을 휘두르시던 스승님의 마음이라면…….
‘언젠가는 저도…… 당신들처럼 될 수 있을까요?’
말할 상대가 없고.
대답해줄 상대도 없는데.
그 순간, 꽃밭을 스치던 바람결 저편에서 2개의 손이 각각 양쪽 어깨 위에 얹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
그리고 스승님.
대견하단 듯이 웃는 어머니와 무슨 그딴 질문을 하냐며 웃는 스승님의 환상은 정말 환상이었을까.
– 너는 나,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이 직접 고르고 키운 제자라고.
그것은 마음.
– 카밀라가 이렇게 장성한 네 모습을 보았더라면 정말 기뻐했을 텐데.
여태까지 만나온 모든 인연.
그 만남들을 통해 지켜져서 이곳까지 나아오게 된 마음.
– 카밀라를 다시 만나서 전해줄게. 네 제자가 너처럼 훌륭한 페이쿼리어가 되었다고…….
수줍고도 쑥스러워서 감히 내보이지 않았으나, 모두가 알고 있던 마음.
–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냐. 철십자에 배정된 순간부터 넌 혼자가 아니었는데.
더글라스가 지휘봉을 높이 쳐들며 선율의 파장이 끝맺어지는 순간, 그 소리들은 사라졌다.
– 용사란 무엇인지, 그 대답을 듣고 싶거든. 저 밖으로 나가라.
시야가 희뿌옇게 부풀어갔다.
– 세계(世界)가 그 대답을 알려줄 테니까.
맹렬한 적막 저편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그 뒤를 따라 하나, 하나, 또 하나.
“뭐 하는 거냐! 총을 왜 버리는 거야! 명령이다! 총을 주워! 죽고 싶은 거냐!”
그렇게 외치는 건 각 진영의 지휘관들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곧 사그라들었다.
갈채는 필요 없었다. 손으로 내는 소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사방에서 쉼 없이 울려 퍼지는, 총칼이 들판에 내던져지는 쇳소리가 곧 갈채였으니까.
그날, 내전이 끝났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신 대지를 적시는 눈물 속에서, 북부로 가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