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75)
가짜 용사 이야기-75화(75/310)
제75화
기원력 1698년 12월.
네 번째 태양 에오스와 더글라스 페이지의 ‘연주회’ 이후, 중부군 잔적이 모두 투항한다.
“이 수업은 전쟁사이므로, 이날 있었던 기적의 연주회는 다루지 않겠다.”
중부군의 수뇌, 사이온 공작은 아내 럭셰리아 루드윅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결사 항쟁을 천명했으나 대소신료들과 백성들이 칼로 옥좌를 겨누어 끌어내렸다.
뇌향의 세츠넨은 중부군과 남부군의 갈등의 골을 어루만지고 지휘 체계를 통합시킨다.
“중부의 무조건 항복으로 3도(남ㆍ중ㆍ동부) 연합군은 대륙 종단 철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북부로, 엘리트 나이트에게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때, 가용 가능한 3도 연합군의 숫자는 신병 징집을 통해 70만에 달하고 있었다.
“타르시요와 카이센이 떨치는 영향력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신체 건강한 이들만을 신병으로 받았는데 그조차도 경쟁률이 엄청났다고 하니, 뭘 더 말하겠는가.”
뇌향은 전투에 노련한 30만 병력만으로 북방 원정군을 꾸린다.
제국 남부와 중부, 동부의 여러 세도가들과 마탑, 일성칠검의 인재들이 그 깃발 아래로 집결.
제국을 철길로 연결하던 열차 417기도 이 병력을 북부로 수송하기 위해 중부의 환승역 <레인보우가든>으로 모여든다.
“홍염의 아키레아와 리아 알터 타스알포가 동부 전선을 막아내고 있었으나 전선은 거듭 후퇴를 반복해갔다. 인류가 통합을 이루기 전에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대공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붉은 여름’의 모든 전선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으며, 모든 것이 한정된 기회 속에서의 시간 싸움이었다.
“인류는 하루빨리 제국을 통합하고 대마족 전선으로 힘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이를 위해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은 다시 북부 원정의 선봉을 이끈다.”
오늘 배울 역사가 곧 영웅의 마지막이다.
바로 이 <설령장성> 공방에서.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은 그 전설적인 생애를 마치고 전사(戰死)하게 되니까.
프롤로그의 에필로그,
가짜 용사 여기 잠들다 (1)
북부로 가는 기관차들은 1698년 12월 21일 새벽에 <레인보우가든>에서 발차했다.
열차는 중부와 북부를 가로지르는 엘레아노르 대하의 강 안개를 뚫고 북행했다.
북부의 끝, <설령장성>까지는 57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기관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북부군에서 그리핀 기수를 보내 전황을 전달해 주었습니다.]열차가 무수한 터널과 철교를 뚫고 나아갈 때, 유리우스 페이지의 목소리가 뇌리로 파고들었다.
[대규모 서부 원정군이 바닷길을 통해 북부를 침공, 다섯 달 만에 <설령장성>을 제외한 북부 전체가 서부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커다랗게 휘어지며 비린내를 뿜어내는 철길 너머로, 열차들은 북방의 황무지를 뚫고 달렸다.
북방의 여름은 황폐하고 하얬다.
불타 무너진 마을 위로 눈이 새하얗게 쌓이며 흑백의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열차 소리를 듣고 도망갔고, 주인을 잃은 들개들이 열차를 보고 짖어댔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무인지경의 세계는 더없이 무섭고 가여웠다. 카이센은 객실에 기대세운 성검들의 구슬픈 울음을 느꼈다.
[북부의 선제후 이안 듀렌이 <설령장성>으로 잔병과 난민들을 후퇴시켜 반격 중입니다만, 압도적 열세여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서부군이 기괴한 소환수를 다룬다는 보고도 들어왔습니다. 정체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필시, 외우주의 힘일 것이었다.
호흡을 폐부 깊숙이 밀어 넣으며, 어머니의 칼을 꽉 붙잡았다.
북방의 끝이 뿜어내는 한기는 날카로웠다. 눈보라가 어지러이 나부끼며 지천을 삼키고 있었다.
‘아무리 북방이라지만 날씨가 이럴 리는 없는데…….’
47시간이 지난 후에 기관차들은 북부의 여러 거점들을 뚫고 <설령장성>으로 향했다.
<설령장성>은 백룡 군단이 <잊혀진 왕들> 중 하나, 거미 군주 아쉬론의 힘을 문명 세계와 차단하기 위해 건축한 방벽이었다.
눈보라가 없었더라면, 하룻길 멀리에서부터 그 장벽의 그림자가 보였을 것이었다.
전장의 소음이 가까워지고, 뇌향의 힘에 의해 싸우고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이 뇌리에 연결되었다.
카듀엘이 말했다.
[뇌향심공명진의 추상적 의식 좌표들을 삼각 측위로 좌표 데이터화합니다. 현재 <설령장성> 전선의 대략적인 지도를 출력할까요?]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타르시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줘, 카듀엘.”
[서부의 육해군 수륙양용 공세가 <설령장성>의 공백 지역에 집중돼 있습니다.]“공백?”
[15세기 아쉬론 사변 때 장벽이 붕괴된 지역입니다. 병력의 숫자는 40만에 달하며 북부군은 장벽의 수호자인 ‘하얀 늑대들’과 연합하였음에도 군세가 절반도 되지 않는 열세에 놓여 있습니다.]곧 비명과 신음뿐만 아니라, 분명한 목소리들조차도 뇌향심공명진의 영향 아래로 들어왔다.
[……여기는 요한 울프 프로스트. 뇌향 각하, 선로가 너무 위험합니다! 저희들 쪽에서 선제공격하여 각하께서 오실 수 있게 길을 열어 보겠습니다.]그 이름에, 가슴이 터질 듯한 아픔과 함께 눈꺼풀 안쪽에서 먼 날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요한…….
요한 울프 프로스트…….
살아 있었구나. 그래, 살아 있으니 이렇게 다시 만날 수도 있구나…….
[안 된다, 요한! 장벽 위에서 대기하라! 북부의 모든 지휘관들에게 우리가 공간 전이로 도착하기까지 대기하라고 전하거라.] [명 받들겠습니다.]카듀엘이 말했다.
[이상하군요. 칼의 사도가 마법의 사도처럼 외우주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설령장성> 방어선은 이미 붕괴되었어야 정상입니다.]카듀엘의 의문을 곱씹을 새도 없이, 북부군 장교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대공 전하, 적들이 장벽을 타고 올라옵니다! 수인병들입니다. 수가 엄청납니다!]마족에 필적하는 신체적 능력을 지닌 수인들은 에이진 공작가를 섬겼다.
15세기 수인족의 대이동 당시, 에이진 공작가가 그들을 제국으로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도 계속된 오랜 차별과 핍박의 역사 속에서, 에이진 가문은 거듭 수인들에게 은덕을 베풀었다고 한다.
명예와 은원을 중시하는 수인병들이 에이진 가문 막하의 사병화가 진행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다.
현재는 서부군의 압도적 비대칭 전력으로서 여러 전선에서 맹활약하고 있었다.
타르시요가 말했다.
“카이센, 그들도 속고 있는 것에 불과해. 엘리트 나이트를 찾아야 해. 인간도 수인도 모두 죽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야.”
나도 잘 알아…….
아직도, 백골 병단의 백곰 수인 엘토람과의 유년기와 그 마지막 죽음이 이토록 선명한데.
몸속에서 치받쳐 나오는 뜨거운 숨을 심호흡으로 추슬렀다.
[뭐야, 저건……?]기관사의 황망한 떨림이 전해진 그때였다.
1호차가 장난감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다가 그대로 얼어붙더니…… 산산이 깨어져 흩어졌다.
단말마의 비명들이 뇌향으로 전해지다 소멸했다.
“무슨 일이야?”
끼기기기긱……!
급정지의 쇳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때리며 창밖에서는 불똥이 이리저리 튀었다.
카이센이 팔꿈치를 휘둘러 차창을 깨부수고, 몸을 열차 지붕 위로 날렸다. 뒤따라온 카듀엘이 말했다.
[라이브러리 데이터 확인, 이킬라스의 권속, 루부쿠툴레입니다.]“권속? 왕의 권속?”
[칼의 사도는 예상보다 외우주의 힘을 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 같습니다.]공포(恐怖)가, 만년설 덮인 설산의 형상을 입을 수 있다면 저런 느낌일까.
눈보라 속에서…….
희뿌옇게 튀어나온 그 공포…….
수십 개의 다리 중 하나로 2호차를 짓밟았는데, 열차는 폭발하는 게 아니라 새하얗게 얼다가 수천 파편으로 쪼개졌다.
[설백성 이킬라스의 냉기는 만물을 개념째로 얼려 버린다고 합니다.]저 아득한 하늘 위, 그 눈알들이 반들거리는 상공에서는 자줏빛 번갯불이 번뜩거렸다.
‘외계의 권속이라니, 폭식공 베헤─리크가 움직이는 화산이었다면 저건 움직이는 설산이잖아.’
강렬한 기시감이 현기증으로 치밀었다.
평원 지대를 통째로 삼키던 폭식공과 그 폭식공을 죽이고 죽은 이슬라의 미소가 떠올랐다.
가우므리스가 다급한 빛을 발하는 가운데 가슴속에 싸늘한 아픔이 번져왔다.
“뇌향 각하! 저 신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절 공간 전이 시켜 주십시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열차 지붕으로 뒤따라온 타르시요가 진성검 샤릴리온의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징…… 샤릴리온이 빛을 발했다.
인간은 듣지 못하는 검들의 목소리가 그 빛에 실렸을까, 극위성검 쉬르팽이 공명의 빛을 발했다.
“샤릴리온이 쉬르팽에게 도우라고 말했어. 쉬르팽이 승낙했고.”
“도우라니, 어떻게?”
“샤릴리온의 능력은 형질흡력. 카이센, 쉬르팽의 힘을 나에게 사용해. 그 힘을 샤릴리온이 증폭시켜서 저 녀석을 꿰뚫을 거야.”
일순간, 말할 수 없는 최악의 가정 속에서 식은땀이 손바닥을 적셨다.
[이론적으로 가능합니다. 샤릴리온의 힘은 옛 전쟁 때 엘디아 카타(5)의 손에서 총 122번 사용되었으며 모두 표적에게 치명상을 입혔습니다.]“하지만 그 힘을 쓰면 이 녀석 몸이…….”
“괜찮아. 입씨름할 시간 없어.”
식은땀이 이마에 맺혔다.
눈보라를 휘몰며, 루부쿠툴레가 3호차에 27번째 다리를 내뻗고 있었다.
등에 매달린 쉬르팽의 떨림이 전신을 요란스럽게 흔들고 있었다. 다급히 재촉하듯이.
“젠장, 어떻게 되든 난 모른다!”
일선(一線).
붓으로 도화지에 획을 그리듯.
쉬르팽을 뽑아들면서 고요하고도 확고하게 수평선에 그려낸 선을 따라, 차원에 금이 가고 주위로 균열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가자, 샤릴리온.”
물론, 그 균열의 한가운데 서 있는 건 바로 타르시요였다.
양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칼날을 얼굴 앞에 붙이고 무어라 중얼거리는 모습은 꼭 기도하는 것처럼 신성하게 보였다.
“삼켜줘.”
한순간, 차원에 균열을 일으키던 힘이 그 개념째로 샤릴리온의 칼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샤릴리온의 칼날이 파르르 떨리며, 그 신묘한 흑날이 희미한 백광으로 뒤덮여가기 시작했다.
백광은 시야를 가릴 정도로 강렬한 광휘로 변했다, 서로의 갑주가 눈부시게 번뜩일 정도로.
‘이것이 샤릴리온의 특수 능력…… 쉬르팽의 절원까지 삼킬 수 있다니.’
동시에 하늘에 닿을 듯이 거대한 질량과 눈부신 명도(明度)로 커져가는 칼날.
타르시요가 움직였다.
오른발 뒤축을 뒤로 옮겨 스스로의 무게중심을 허물어뜨린다. 동시에 샤릴리온을 옆구리를 돌리면서까지 깊숙이 끌어당긴다.
“꿰뚫어────!”
허물어뜨렸던 무게중심을, 오른발을 다시 앞으로 내디디는 것으로 일순간 집중ㆍ폭발시키면서 칼끝을 힘껏 내지른다.
“────샤릴리온!”
순백, 순백의 향연.
차원을 찢고 가르는 힘이 초절의 광염으로 증폭ㆍ해방되어, 세계의 한복판에 구멍을 뚫었다.
이계의 눈보라가, 그 눈보라를 쏟아내는 이계의 괴수가 그 광염의 쐐기에 심장을 꿰뚫렸다.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위용검전에서 배웠으니까.
모든 진성검은 광철(光鐵)로 주조되어, 외우주의 존재를 이 세계로부터 격리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봉인의 힘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계 괴수의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 멀리에서도, 저 거대한 육신을 꿰뚫은 구멍이 커다랗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구멍.
– 진성검의 힘은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조차도 겨눈다.
곧 그 육신이.
차원이 쪼개지는 빛의 폭주에 휩쓸려 뒤틀리고, 녹아내리고, 불살라지며 원형을 잃기 시작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찢어지는 비명 속에서.
[와, 와아아아아아아!] [타르시요 예레 샤릴리온과 카이센 알터 아라다만텔이 이계의 권속을 처치!] [이게 용사의 힘…… 정말 엄청나군.]동화 속 한 장면 같다. 용사의 무훈으로 절망의 밑바닥에 희망의 빛이 비쳐드는 건.
하지만 동화는 기록하지 않는다.
필멸의 육체로 초월의 힘을 사용한 대가로…… 토혈을 쏟고 전신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용사의 모습을.
“거봐, 이 멍청아…….”
쉬르팽을 휘두를 때 사용한 근육 전체가 수천 개의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각을 억누르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미소와 함께.
타르시요가 대답했다.
핏물로 붉게 젖은 입술을 힘겹게 일그러뜨려 미소로 만들고, 그 앞에 손가락을 세우면서.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그 표정과 몸짓이, 어린 날 이불을 적셨던 누이의 수줍고도 단호했던 분위기와 닮아 있어서.
그런 일상과도 같은 미소여서.
아하하, 가파른 호흡 위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타르시요도 허연 입김을 풀어내며 맑게 웃었다.
그저 웃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마지막 길 위에서.
서로 웃음 아닌 웃음을 주고받을 때에도, 열차는 <설령장성>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삶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