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77)
가짜 용사 이야기-77화(77/310)
제77화
“카듀엘, 알마 론델의 설계도를 이 사람들에게 알려줘. 필요한 거라면 뭐든지.”
[알겠습니다, 작은 주인님. 수호자 권한으로 접근합니다.]카듀엘이 빛을 내뿜어 관제소의 설계도를 허공에 그려냈다.
카이센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략적으로 파악하건대…… 지하 5층까지 이어지는 구조인가.
설계도 위에서는 여러 광점들이 명멸하고 있었는데, 자세히는 몰라도 붉은 점이 적이란 건 명확해 보였다.
“엘리트 나이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칼의 사도는 현재 지하 3층으로 이동 중입니다. 15분 안으로 관제소에 도착합니다. 시설 내부 전체가 이킬라스의 힘에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심각한 겁니까?”
[내부 7개 지점에 빙탑(氷塔)이 세워졌습니다. 이킬라스의 눈보라 역장의 발생원이자 차원문. 저지해야 합니다.]턱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페르비아스 에이진이 알마 론델에서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절대 평범한 일은 아닐 겁니다. 태양이나 달을 떨어뜨리는 것 그 이상…… 각하, 서둘러서 놈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카이센, 네가 황금의 아이들을 이끌어 돌격대를 맡아 주겠느냐. 칼의 사도를 추격해서 걷어낼 수 있는 건 너밖에 없구나.]“맡겨 주십시오, 각하.”
[타르시요 님께서는 요한과 마찬가지로 병단을 이끄셔서 빙탑들을 없애 주십시오. 당신께서 관제소에 가까이 가는 일은 없어야 하옵니다.]“네, 알겠어요. 카듀엘, 카이센을 따라가서 도와줘.”
다시, 네가 나에게로 다가온다.
뇌향의 울림으로는 전해지지 않는, 그저 입술의 흔들림만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그 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뽑으면 안 돼. 약속해.”
다행이었다. 그때, 그러겠다고 약속하지 않아서.
너는 알고 있었을까.
알마 론델 내부에서의 전투가 내 가짜 용사로서의 삶의 종착지가 될 거란 걸. 그래서 약속해달라고 보채지 않았던 걸까.
[빙탑을 무너뜨릴 때까지 <설령장성> 전선을 추슬러 보겠다. 그때 바로 원군을 보낼 수 있도록. 카이센, 내 사랑하는 아이야, 부디 각별히 조심하거라.]나는 몰랐어.
너의 말을 쓴웃음으로 받아넘기고, 시설 내부로 돌입하던 그 순간까지도.
그냥 그 순간이 왔을 때,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더라.
[개문 절차에 오류…… 이킬라스의 권능으로 관문이 완전 빙결되었습니다.]카듀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정상적인 질량이 관문에 처박히며 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극위성검 가우므리스.
단순한 힘, 광압 폭발이라는 특수 능력과 더불어 그저 모든 불합리를 힘으로 타파하는 강대한 힘이 필요했다.
[안 됩니다. 해당 시설은 최중요 시설로, 모든 설비가 제7위계 병기로는…….]가우므리스의 물리적 타격은 관문을 박살 내지는 못했으나, 광압 폭발이 이킬라스의 냉기를 소멸시키며 관문이 작동된다.
반쯤 찌그러진 상태로 열린 관문은, 개문 절차를 마치지 못한 채 스파크를 튀기며 정지했다.
그래도 사람이 한 줄로 통과할 만한 통로는 확실히 열렸다.
“이제 문제 있습니까?”
가우므리스를 등에 차며 물었다.
카듀엘은 침묵했다.
두 눈을 멀뚱거리던 요한이 그리움 섞인 한숨과 함께 미간을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 제자 아니랄까 봐, 일단 박살 내고 보는 성격까지 똑같아져 버렸구나.”
프롤로그의 에필로그,
가짜 용사 여기 잠들다 (3)
그날, 알마 론델은 <온 것들>의 유적지라고 하기보다는 서리의 도읍이라고 하는 편이 걸맞았다.
시설 내부에서도 눈보라가…….
눈보라가 전부가 아니었다. 더 크고 두려운 것들이 그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
“페이쿼리어, 조심하십시오!”
이킬라스의 존재들은 일반적인 냉기 계열 마물들과는 다르다. 외우주의 존재이므로 어떤 존재와도 결 자체가 다르다.
“인형 대거 출현! 숫자가 상당합니다!”
광인의 상상 속에서나 볼 법한 악마들, 카듀엘의 라이브러리에는 이미 그 존재들이 기록돼 있었다.
인형(人形).
얼어붙은 이계의 망자들, 부서진 뼈나 길게 늘어진 내장을 질질 끌면서 다가온다.
[이계의 탑을 파괴하라! 뇌향 각하께 차원 역장을 열어드려야 한다!]인형 정도는 귀여운 편이다.
한 번이라도 물리면 극심한 오한 속에서 죽는 냉독(冷毒)에 감염시키는 이킬라스의 늑대.
소리 없이 눈보라의 결을 따라 이동하여 목표를 뼈까지 삼키는 이킬라스의 쥐 떼, 그리고 플레이어들…….
“흐, 흐흐하하하하!”
“불경한 이단자! 신의 징벌을 받아라!”
이킬라스의 절대자에게 제물로 바쳐져 영혼을 빼앗긴 그들은 두 눈으로 새하얀 안광을 뿜었다.
완전히 침식당했나?
이성의 빛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이계의 힘을 다루게 되었으므로 전보다도 더 큰 위협이었다.
[각하, 여기는 울프. 용사님께서 첫 번째 이킬라스의 빙탑을 파괴하였습니다. 차원 역장이 상당히 안정화되었습니다.] [1차 지원군을 보내겠다. <설령장성> 전선이 정리되는 대로 본대를 보내겠다.] [카이센, 여기에 플레이어들이 잔뜩 있어! 그쪽은 어때?]벼락과도 같은 섬광이, 눈보라 속에 새빨간 궤적을 그린다.
섬발(閃發).
냉기를 뿜으며 전진해오던 플레이어들이 한 발 물러서며 비틀거리더니, 상반신이 하반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옆으로 미끄러졌다.
“아무 문제 없어.”
사각사각사각, 바로 등 뒤까지 다가온 운명의 마지막 속삭임을 억누르면서…….
그런 무위로 뚫고 나가는 알마 론델 내부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어쩌면 이계로 전이된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들이 사방에서 끝도 없이 밀려왔다.
[카이센, 조심해라! 낙인의 마력이 그쪽으로 이동 중이다!]“또 다른 이단자들이 접근! 악의 사자들에게 빛의 단죄를!”
[이킬라스의 세력이 통로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넘어오지 못하게 할 작정으로 보이는군요. 접속 단말을 확보해 주시면 라세핀들을 활성화시키겠습니다.]그래도 시설 내벽이 열리고 라세핀들이 삐거덕거리며 등장하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긴 했다.
[라세핀들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경고, 시설 7-A 지점에 두 번째 빙탑이 확인되었습니다.] [카듀엘, 내가 해결할게.] [쥐, 쥐 떼가 몰려온다! 결계를 펼쳐!]관제실로 내려가는 모든 순간이 악몽의 광경들이었다. 지옥 깊숙이 내려가는 절망감도 들었다.
[경고, 시설이 가동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스타링크의 연결을 끊는 접속이 아니라 회선 점검 접속입니다.]“문제가 없단 뜻입니까?”
[일반적으로는…… 하지만 이 시설은 현재 상태를 최고 위기 등급으로 격상시켜야 합니다. 시설 관리자인 엘디아 알마(01) 알카이오스가 보이지 않습니다.]알카이오스 또한 고대의 어센시쿼리어였다. 필두 용사로 두 자루의 진성검을 다룬 걸로 유명했다.
[알카이오스가 라세핀들만 통제하였더라도 시설이 이렇게 쉽게 점거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연락이 전혀 닿지 않습니다.]그 경고, 아니 악몽의 예언에 모두가 주목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때 요한에게서 들어온 정보가 그 예언을 망각할 정도로 충격적이었으므로.
[카이센, 능동 추적 마법으로 엘리트 나이트의 자취를 추적하는 데 성공했어.]능동 추적이란 요한이 옛적에 카밀라의 훈련을 훔쳐볼 수 있게 도와주었던 그 마법이었다.
“중요한 정보라도?”
[불길한 예감이 맞았어! 엘리트 나이트는 스타링크를 이계에 연결하려 하고 있어!]“무슨 소리입니까?”
그러자 요한의 목소리 대신, 걸걸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뇌향의 파장을 타고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울프.
[이런 뜻이야.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듣는 게 낫지?]“뇌향 각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도 듣고 있었단다. 헌데 이킬라스의 사도가 스타링크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관리자 권한이 필요하지 않느냐? 베테 론델과 작동 방식이 같다면 말이다. 타르시요 님께서 조력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작동할 리 없어.]수백의 인형들을 베어내는 아라다만텔의 칼날, 새하얗게 얼어붙은 선혈이 눈꽃처럼 흩날린다.
“맞습니다. 근데 엘리트가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러하겠구나, 그러하겠어. 서두르는 게 좋겠구나. 요한, 총명한 아이야. 우선 5만 명을 추가로 보내겠다. 본대가 도착하는 대로 시설 내부의 빙탑을 완전히 몰아내거라. 나도 곧 갈 테니 무리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카이센, 설백성(雪白星) 이킬라스의 힘이 세계를 침식하는 것만은 반드시 저지해야 한단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세계의 파멸을 막을 수 없어…….]“예, 각하. 지금 막 5층에 진입했습니다.”
모든 것이, 지하 5층 중앙 통로를 돌파하던 그 한순간 폭발하듯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비명, 비명이었다.
현실의 청각과 뇌향의 울림 양쪽에서 비명이 어지러이 울려 퍼지는 것이 혼돈의 시작이었다.
[끄, 끄아아아아아!]문득 휘몰아쳐온 겨울의 칼바람이, 양옆의 황금의 아이들의 팔다리를 갑주째로 절단시켰다.
육신을 신성 기적으로 보호하던 갑주가 단숨에 쪼개지더니 그 절단면으로 이킬라스의 냉독이 체내로 침투.
순식간에 그 몸이 새파랗게 얼어붙어 인형화(人形化)되어 간다.
[대, 대체 무슨…… 막아! 타르시요 님!]그런데 비명은 뇌향 공명 저편에서도 들렸다. 그 소란에 집중하려 하니 현실의 경고가 들렸다.
[경고, 고위험군 광점 고속 접근 중.]문득 네이갈라스의 침식이 치받치며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라세핀 2개 편대가 전멸.]혼돈, 혼돈이었다.
고요한 혼돈의 절대자의 사도가 다가오고 있었다.
[엘리트 나이트입니다.]시각으로, 청각으로, 뇌각으로 다각도에서 완성되어 가는 혼돈(混沌)의 한복판으로 불현듯 짓쳐드는 창극.
쩌어어어어엉────!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몰랐으나, 본능에 가깝게 발검한 쉬르팽으로 그 창을 눈앞에서 막아 세울 수 있었다.
“그래, 네놈이 카이센이냐? 듣던 것보다는 비실비실하구나!”
그때 카이센은 심장이 멎는 충격을 느꼈다.
그건 공포에서 우러나는 충격이 아니라, 낯익음 속에서 피어나는 용납 못 할 노도(怒濤)였다.
눈동자가, 호흡이 가쁘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그 창은…….”
근골이 크게 벌어진 상대방의 체격은 카이센에 맞먹을 정도로 다부졌다.
수명을 깎아서 힘으로 전환하는 징표인 백발이 충돌의 풍압 속에서 격렬하게 나부낀다.
무수한 유혈을 만들며 생긴 흉터가 호탕한 위엄을 머금은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엘리트 나이트, 페르비아스 에이진.
“그래, 전임 창성 트발이 남긴 전설급 무기니라! 제국 내전 시나리오에서 구할 수 있는 창들 중에 제일 높은 등급의 창!”
그러한 외형은 중요하지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손에 쥔 무기가 문제였다.
표준 규격을 아득히 벗어나는 질량과 규격을 가진 창…… 그 창날이 서리로 뒤덮여 이계의 한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손 놔…….”
그 순간 머릿속에서 살벌하게 메아리치는 살의(殺意)로 말을 엮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건…… 너 따위가…… 함부로…… 다뤄도 되는 무기가…….”
몇십 번, 몇백 번을…….
저 둔중한 빛깔과 함께 몇 번이고 전장을 누볐던가? 대체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았던가?
헤아릴 수조차 없다.
– 하! 가자, 카이센.
이 세상을 사랑해서.
이 세상의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사랑해서.
그 피로 물든 산맥의 언저리에서 악몽과 싸우다 죽은 그분의 무기를, 그 무기를 감히, 감히 너 따위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쩌어어엉……!
통상 규격을 벗어나는 질량들이 다시금 충돌하며 통로 내벽에 균열을 새기는 검풍이 솟구쳤다.
“그 용골창은 너 같은 쓰레기가 함부로 손대도 되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다!”
차갑게 빛나는 용골창과 쉬르팽의 칼날이 격돌한 순간, 창날에서 불가사의한 폭발이 일어났다.
“데이터 더미라지만 설정상 인류 최강의 병사라서 그런지 다른 잡것들보다는 확실히 싸울 맛이 나는구나!”
빙점 폭발(氷點-爆發).
이는 창날에 둘러친 이킬라스의 냉기를 맞닿은 물체에 전염시켜 폭발시키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관리자를 죽였느냐? 겨우 이 정도로?”
절대의 권능은 그것이 무기물이든 유기물이든 가리지 않는다고 카듀엘은 훗날 설명했다.
‘쉬르팽의 칼날에 금이 갔다고?’
손목뼈와 어깨뼈까지 나갔다.
몸을 뒤로 굴리면서 용혈 혈청을 갑주의 이음새로 꽂았다.
체세포들이 꿀렁거리며 찢어지고 쪼개졌던 근골들이 새롭게 돋아나고 엮인다.
“엘리트 소서러 그 계집년은 쉬웠을지 몰라도, 관리자를 쓰러뜨렸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인 것 같지는 않은데?”
카이센의 호흡은 진즉에 무너져 있었다.
무언가가 목표물에게로 촉수를 뻗듯이, 뜨겁고도 차가운 심연이 꿈틀거리며 심장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관리자들이 지금 네놈에게 얼마나 큰 현상금을 걸었는지 아느냐? 물론, 그 그림자 절대신이 제일 크게 걸었지.”
쿨럭, 쏟아져 나가는 토혈 너머로 의식이 시뻘겋게 물들어간다.
제기랄, 육신만 멀쩡했어도 열 합 안쪽으로 저 시건방진 숨통을 도려내 주었을 텐데…… 용령을 해방한다면 한 합도 필요 없고.
그때였다.
요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센…… 긴급 상황이다…… 타르시요 님께서 잡혀가셨다…….]그때는 알 길이 없었다.
요한이 지금 왼팔을 제외한 사지가 전부 찢어발겨진 채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지원조가 전멸했단 것도.
그저 그 황잡한 헐떡임으로 상황의 위중함을 짐작해야 할 뿐.
“무엄하구나! 감히 지금 누구 앞에서 한눈을 파는 거냐!”
엘리트 나이트가 용골창을 과격하게 내리찍자 쩡, 절대적 서리의 울음과 함께 바닥이 얼어붙다가 쪼개졌다.
[옛 용사다……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났어…… 사복검을 다루는 그 실력…… 어떻게 대응할 수도 없었다…… 그 존재감을 인지하기도 전에 모두…….]옛 용사라니…….
뭐가…….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관제실로 이어지는 공간 이동 장치의 작동을 확인했습니다. 이건 수호자만이 가동 가능한…… 아니, 어떻게……?]엘리트 나이트와의 혈투 속에서, 붙들 길 없는 졸음이 밀려들고 있었다.
가우므리스와 용골창이 격돌하고, 다시 빙점의 폭발과 함께 튕겨 나가고…….
그 고통조차도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이 싸늘한 감각은, 이게 죽음인가.
[그동안 잘 지냈나, 카듀엘?]카듀엘이 허공에 띄운 영상에서, 카메라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여자의 목소리는 기이하게 낯익었다.
내가 저 음성을 어디에서 들어봤더라? 졸림 때문에 느껴지는 착각인가?
아니, 확실히 들어본 적 있다. 뇌향 세츠넨의 기억 공명 속에서.
[뤼카엘, 그 육신은 대체 어떻게 된……?]뤼카엘…….
기억이 맞다면, 분명 그 또한 옛 용사의 이름 중 하나일 것이었다. 세이라가 가르쳐 주었었는데. 번호가 몇 번이었더라?
그걸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냐? 저 계집이 도와주겠다고 하더군. 널 죽이는 것과 이킬라스로 이어지는 차원문을 여는 걸!”
빙점 폭발의 연속.
용골창의 폭풍 같은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으므로.
[카이센…… 여기로 오면 안 돼…… 함정이야…… 너까지 끌어들이려는…….]영상 속에서, 수많은 쇳조각들을 흉악하고도 정교하게 엮어 만든 채찍이 타르시요의 몸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 몸이, 피로 젖어 있었다.
타르시요의 몸으로 관제실의 장치를 조작하면서, 검푸른 머리카락의 옛 용사가 말했다.
[오든 안 오든 상관없다. 이킬라스와 세계선이 교차하는 순간 이 세계도 끝이니까.] [뤼카엘,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그분께선 우리─] [─주인님의 딸이라고? 제발 그만 좀 해! 대체 언제까지 그 잔혹한 창조주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할 셈이지?]뤼카엘이 칼자루에 힘을 주자, 타르시요의 가냘픈 비명이 영상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놈에게 우리는 소중하지 않아! 그냥 부서져도 좋은 장난감이란 말이다! 제 딸은 그래도 혈육이라고 소중하게 아꼈겠지만 꼴좋군. 곧 사지를 찢어발겨 주지.]타르시요.
너는 알고 있던 걸까.
[카이센, 타르시요 님을 되찾아야 하느니라! 그분께서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의 빛이시다!]알마 론델에서의 싸움이 내 삶의 종착지가 될 거란 걸.
그래서.
뽑지 마, 라고 말할 때 그렇게나 슬픈 미소를 짓고 있던 걸까.
[경고, 스타링크의 회선이 오염되어 방향이 변경됩니다. 연결 좌표 ●*&, 664, 3◆■, 설백성 이킬라스입니다!]나는 말이야.
네 미소를 쓴웃음으로 받아넘기던 그때는 몰랐어.
“제국의 위상은 오직 수많은 주검 위에서 견고히 세워지리니! 널 죽이고 이 세계를 파멸시킨다. 무너진 짐의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근데 말이야.
이 순간이 막상 오고 나니까.
그냥 어떤 망설임도 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여지더라.
“나는 황제다! 베르토 제국의 위대한 황제, 르비손 란 베라토!”
– 명심하거라, 카이센.
“대륙 절반을 유혈로 뒤덮어 세운 제국의 황제! 섭리조차 나를 질시하여 지진과 화산 따위의 자연재해로 내 제국을 무너뜨렸으나 내 육신과 힘은 그대로다!”
– 용령을 한 번 더 해방시켰을 때. 그리고 그 초월이 끝났을 때.
“이 세계의 제국을, 아니, 이 세계 전체를 제물로 바치고 다시 나의 제국을───!”
결말이 어떻게 맺어지는지 아는 책의 뒷내용처럼, 그래, 마치 운명처럼 말이야.
─────팅!
초월의 섬광이 빛으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 네 육신은.
그 광입자가 엘리트 나이트의 망막 너머 시신경 위로 새겨지기도 전에.
– 반드시.
그 청음이 고막에 닿기도 전에.
– 죽게 된다.
새빨갛게 포효하는 한 자루 칼날 위에서, 세계(世界)가 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