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8)
가짜 용사 이야기-8화(8/310)
제8화
유년기, 여름의 서막 (7)
기원력 1696년 12월.
각 페이쿼리어 병단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선은 차츰 후퇴했다.
수석 도원수 크라우잔은 마침내 전 병력을 인페르노 라인 뒤로 물릴 것을 결정했다.
최전선에서 종군하던 백골 병단도 예외는 아닌지라, 결국 인페르노 라인의 수비 병력으로 편입되었다.
인페르노 라인.
이 불가사의한 구조물을 두 눈으로 자세히 관찰할 여유가 생긴 건 7번 요새 공방전을 치른 이후가 처음이었다.
“촌놈처럼 여기저기 멍하니 둘러보지 마. 우리까지 격이 떨어져 보이잖아.”
“닥쳐, 진.”
“하핫, 두 눈이 커다래질 만도 하죠. 구공화국을 3등분하는 벨리소르 대하의 강둑마다 요새를 줄줄이 쌓아 올렸으니. 누가 이런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검은 여름’의 처절하고 비참했던 경험은, 구공화국으로 하여금 방벽 뒤에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마족의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술 교리를 채택하게 만들었다.
그 전술 교리로 인해 제조된 항구적 방어 시설이 바로 이 인페르노 라인.
포대, 철조망, 참호, 보루가 완비되었으며 지하에는 식량 창고와 탄약고도 마련되었다.
심지어 각 요새는 철도망으로 연결되어, 유사시 및 평시에도 병력 및 병참의 운용이 부드러웠다.
세상에서는 이 철의 장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드워프 기술력의 정수를 활용해 만든 최고의 시설이자 최강의 요새이며 최장의 요새선.
“대하(大河)라더니, 반대쪽 강변이 보이지가 않을 정도잖아. 이 정도면 바다 아냐?”
소년은 화산재가 어지러이 춤추며 흩날리는 강 건너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곳에 줄줄이 쌓인 포대에서 강을 도하하는 우루크를 요격한다면 침략이고 뭐고 끝이겠는데.”
요새는 쇳빛이었는데, 병사들이 어찌나 정성을 쏟고 기름칠을 하는지 화산재의 검댕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고 반들반들 빛났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저 수평선이 검은빛의 띠를 위협적으로 두른 것처럼 느껴졌다.
백골 병단이 대교를 건너는 내내, 교량에서는 공병들이 분주히 오가며 교각마다 마도 폭탄을 설치하고 있었다.
전선(前線)에서 모든 부대가 복귀하거나, 우루크가 교량을 건너려고 시도하는 즉시 폭파할 작정이라고 했다.
“이게 마지막 대교인가?”
장총 진의 물음에, 아직 소년티가 나는 공병 하나가 대답했다.
“넵, 중부 전선의 마지막 대교입니다! 서부와 동부에도 하나씩 남아 있습니다.”
“어휴, 쪄 죽을 것 같은 날씨에 고생한다.”
“아닙니다! 페이쿼리어 병단을 맞이할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병사님들이야말로 덥지 않으신지요?”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전투복에는 모두 일류 마법사들의 ‘체온 조절’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그 마법이 없이는, 태양마저 발작하는 듯한 열기와 프리스비아 코어의 내열 속에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그 마법의 도움을 받는데도, 전투가 끝나는 순간이면 병단 병사들은 울프가 만들어준 얼음 마법에 둘러앉아 더위를 식히곤 했다.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
대교를 다 건너자, 요새 지휘소 앞에서 이각모를 옆구리에 낀 요새 사령관이 군홧발을 맞부딪치며 정중하게 경례를 올렸다.
옆에는 장교로 보이는 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각 잡힌 군율로 보아 할테네(Haltene; 공화국 지방자치군)가 아닌 고도로 훈련받은 정규군임을 알 수 있었다.
“7번 요새에서의 승전 소식은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전황 보고나 해.”
“인페르노 라인 이남의 요새들은 전멸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령관의 보고에 카밀라가 투덜거렸다.
“아니 시팔, 공화국 마녀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단체로 휴가라도 가셨대?”
“대도시들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고역인 모양입니다.”
“아하, 수도에서 남자들 끼고 술 한 잔 빨고 계시나?”
“왜 자꾸 그런 말씀을…… 여하튼 인페르노 라인을 지키기 위해 할테네에는 학도병들까지 징병해서 배치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카밀라가 저 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여름이었다.
남쪽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은 화산재는 짙었고 또 어떻게 할 수 없이 어두웠다. 세상이, 어둠에 잡아먹히고 있기라도 하듯이.
“다른 놈들은?”
“제6석 아레시아 알터 솔랑과 제7석 류넬 알터 가우므리스께서 <테르베노플> 방어전에 투입되셨습니다.”
“그 꼬맹이들한테 제일 중요한 수도 전선을 맡겼다고? 우리는?”
“중부 전선을 사수하시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뺑이나 치고 있으라고?”
“이 또한 중요한 전선입니다.”
“니들, 공화국 겁쟁이들이 군사력만 제대로 갖춰놨어도 지금쯤 남해 바다까지 밀고 내려갔을 텐데. 이딴 쓰레기 같은 방어선에 군비를 낭비하는 게 아니라.”
“말조심해, 카밀라. 공화국은 오랫동안 인류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해왔어. 이건 사소한 보은이야. 단장님께서도 늘 말씀하셨잖아.”
요한 울프 프로스트의 지적에 카밀라는 짜증스럽게 바닥에 침을 뱉었다. 눈치를 보던 사령관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법황청에서 온 전언입니다만…….”
“그럼 빨리빨리 말해, 상놈아.”
“카밀라 님의 활동 한계가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이제 그만 제자를 들이시라 명하십니다. 이건 교회에서 보낸 명단입니다.”
사령관이 건넨 두루마리는, 법황청의 인장으로 봉인된 황금의 두루마리였다. 태양의 황금빛이 새어 나오는 듯 신성력이 꿈틀거렸다.
“카밀라…….”
울프는 절망의 눈으로 카밀라가 두루마리를 받는 걸 지켜봤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카밀라의 머리색이 완전히 백발로 세어가고 있는 것을.
‘미친 듯이 싸워온 증거…….’
페이쿼리어는 자신의 수명을 깎아 냄으로써 그 생명력을 힘으로 전환시키는 검사들이었다.
전시의 평균 수명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평시의 경우에도 역사적인 최장 수명이 40대 초반에 불과했다.
요한과 동갑인 카밀라의 나이는 어느덧 30대 후반에 다다르고 있었다.
라미네아가 전사한 이후 페이쿼리어가 된 카밀라는 평화의 시대라 제법 길게 살긴 했다만 이제 그 걸음도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
카밀라는 무감정한 얼굴로 그 두루마리를 내려다보다, 열지도 않고 사령관에게 돌려주었다.
“그 꼰대들한테 전해. 이미 한 놈 찾았다고. 아직 결정한 건 아닌데.”
“예?”
사령관과 울프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사령관이 황망히 물었다.
“그, 그게 누굽니까?”
이건 엄청난 소식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제자도 받지 않았던 부동의 제1석 페이쿼리어가 제자를 들였다고? 얼마나 대단한 가문의 인재일까?
“이름이…… 이름이 뭐였지? 카등신이었나 카멍청이었나. 카레기였나?”
“사람 이름이 카레기? 웃긴 건 둘째 치더라도 처음 들어 봅니다만.”
“어, 나도 처음 들어봤는데.”
“예?”
이야기가 이상해진 걸 직감한 울프가 곧바로 카밀라에게 소리쳤다.
“카밀라, 너 설마!”
“다음에 다시 와. 싹수가 있는지 없는지만 보고 결정할 테니까.”
사령관이 눈앞에서 쫓겨난 뒤에야, 카밀라를 노려보던 울프가 입을 열었다.
“카이센을 제자를 받지 않을 핑곗거리로 이용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왜?”
“네가 대장님께 배운 검술, 십문자도는 인류의 보배와도 같은 거야. 그걸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실전시키려고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카밀라가 울프에게서 홱 돌아서며, 망토 자락에 감춰진 스승의 소검을 힘없이 어루만졌다.
‘제자 같은 걸 받을쏘냐…….’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는다.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그게 이 가엾은 이별의 세계에 대응하는 카밀라의 방식이었다.
“카이센은 잘 가르치고 있잖아. 다른 아이들도 가르칠 수 있을 거야, 분명!”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싫다면?”
“왜 카이센은 되고, 다른 아이들은 안 된다는 건데?”
글쎄, 왜일까?
울프가 그 어깨를 붙잡아 세우자, 카밀라가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소검을 꺼내 보였다.
그러고 나서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소검 말인데, 내가 스승님한테 선물로 드렸던 거야. 마지막 전투 전에.”
카이센 어머니의 유품.
카밀라가 스승님께 드린 선물.
그 두 가지 뜻이 머릿속에서 합쳐진 순간, 울프는 무릎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호흡이 저도 모르게 가빠졌다.
“그, 그렇다는 소리는…… 카, 카밀라. 카이, 카이센, 그 아이가 단장님의 아─”
“─당연히 구라지. 그걸 믿어?”
물론 결론을 내리기 직전에 카밀라가 정색하며 말허리를 끊었다.
“뭐?”
울프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뒤에야 한숨으로 호흡을 고른 뒤,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단장님을 가지고 말장난 치지 마. 그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건 너 아니야?”
대답은 없었다.
카밀라는 피식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려 저쪽으로 걸어갔는데, 울프는 망연히 눈을 끔뻑여야 했다.
‘카밀라가 저런 웃음을 지어 보였던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단장님이 죽은 후로는 장난으로도 미소를 지은 적이 없는데.
울프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말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상공에서부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풀밭 위로 착지한 그리핀이 있었으니까.
“카밀라 알터 아라다만텔!”
그 위에서 기수가 뛰어내려 다급히 부복했다.
“무슨 일인데, 또.”
“후방 진지들로부터 연달아 교신이 끊어지고 있습니다.”
“단체로 술판이라도 벌이고 있나 보지.”
“수색을 명한 부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백골 병단이 이 기현상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명령입니다.”
후방 진지에서……?
카밀라는 자신의 어렴풋이 품었던 불안이 서서히 꿈틀거리며 형체를 갖추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적은 가까이에 있었고, 남방을 초토화한 육군 전력이 전진기지 곳곳에 집결하고 있다는 마법맹 정보부의 첩보도 있었다.
공화국 사령부는 인페르노 라인의 저지력을 맹신하고 있었지만…… 마족이란 놈들을 상대로 방심은 금물이다.
엉덩이의 흙을 털어내며 일어선 카밀라가 요한에게 눈짓했다.
“카이센을 불러. 숙제 하나 줘야겠다. 마지막 검술도 가르쳐줄 겸.”
* * *
“이딴 놈이 페이쿼리어 병단의 전령이라고?”
할테네 민병대장 잭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막사 앞으로 끌려온 소년병의 행색이란 정말 보잘것없기 그지없었으니까.
“개도 안 웃겠다, 이 자식아! 너같이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가?”
“봉화를 올려야 페이쿼리어 병단이 협공에 나선다.”
“안 올리면?”
“마음대로 해. 여기서 죽고 싶으면. 그러면 우리는 도원수에게 보고하기 위해 떠난다.”
“뭐?”
“너 같은 꼰대를 설득하는 것보다 인페르노 라인 안쪽에서 우루크 별동대가 발견된 걸 보고하는 게 급해.”
“우, 웃기지 마! 네놈이야말로 우루크의 첩자 아니냐? 지금 함정을 파는 거야. 그래.”
“내가?”
“그래, 이놈아. 네놈 볼에 새겨진 문장이 그 증거 아니냐!”
민병대원들이 카이센을 흘끗 쳐다보았다가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뭐야, 이 자식?’
키가 크긴 했어도 꼬맹이건만, 눈앞까지 내려온 시커먼 더벅머리 속에서 눈동자에 날이 서 있었다.
“이런 젠장, 왜 인페르노 라인 안쪽에서 우루크가 나와서…… 저 자식한테서 칼을 뺏어. 잡아놓고 심문해야겠다.”
병사들이 등허리에 찬 칼을 빼앗으려 다가오자,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의 손이 칼자루에 닿아 있었다. 칼날이 반쯤 뽑혔다.
“힘으로 납득시키는 방법도 싫지는 않아.”
민병들의 몸이 섬뜩 굳었다.
등허리를 꿰뚫는 차가운 오한, 카이센이 내뿜는 살기(殺氣)는 고요하고 싸늘했다.
본능적인 공포를 느낄 정도로.
“이 나라에 사는 인간들은 어떻게 죄다 이리도 겁쟁이인지.”
이곳, 카이센의 고국은 3개의 도시국가가 주축이 되어 통치하는 공화국이었다.
원로로 선발된 마녀와 집정관들이 국정을 운영해 나갔으며, 상비군을 제외하면 할테네라 불리는 민병들이 국토를 방위했다.
“약하고, 겁은 많고 통솔도 잘 되지 않는 오합지졸들.”
십수 년 전 여름에 국토가 유린당했건만, 늘 탁상공론에 가까운 행정을 펼치는 공화국은 이렇다 할 전쟁 대비를 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군자금을 쏟아부어 인페르노 라인이란 요새선을 만든 게 전부 아닌가.
인페르노 라인도 뛰어나긴 하나, 차라리 그 돈으로 제국처럼 정예 상비군을 크게 운용하면 좋았을 것을.
그게 이루어지질 않아서 현재 전선에서 활약하는 부대는 대부분 페이쿼리어 병단들이었다.
“뭐, 이 자식아?”
“기다리십시오, 대장!”
상황이 긴박해지자 소년을 데려온 병사가 다급히 고했다.
“믿고 자시고, 이 녀석이 칼 한 자루로 우루크 두 마리를 죽이는 걸 제 두 눈으로 봤단 말입니다.”
“뭐라고?”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진짭니다. 저도 어이가 없었죠. 그래서 데려온 겁니다.”
민병대장 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병대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우루크가 어떤 존재인가?
마력 운용법을 익히는 존재나 수인병들만이 정상적인 대련이 가능한 괴물들이 아니었던가. 잭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병단의 인원이 어떻게 된다고?”
“창병 천, 소총병 천오백, 장총병 오십, 수인병 열아홉.”
“겨우 이천오백쯤이라고?”
“니들 같은 오합지졸 삼만 명보다도 강해. 총병들은 모두 척탄병이다. 닥치고 하라는 대로 해.”
민병대장이 고민했다.
그러자 참모진이라 할 수 있는 고참들이 한마디씩 했다.
“저희들 힘으로는 우루크 놈들을 쓸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총알도 거의 남은 게 없고, 무엇보다 사기가…….”
막사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우루크에 의해 인페르노 라인이 뚫린 게 분명하다면서 탈영병이 속출했다.
애초에 이 부대는 후방 보급을 맡던 부대가 아니었던가. 부대원 대부분이 늙은이나 학도병들이었다.
“우리가 뭘 하면 되지?”
“도망치는 것처럼 성문을 열어. 말에 빈 수레를 연결하고 도망치는 것처럼 내보내. 그리고 들어오는 놈들 상대로 버텨.”
“그게 전부야?”
“전부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한다.”
잭의 손가락이 정신없이 탁자를 두들겼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팽팽한 침묵 가운데 모두가 잭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있어도 어차피, 어차피 죽는다…… 다음 순간 잭이 벌떡 일어나며 탁상을 짚었다.
“자고 있는 놈들 다 깨워. 전군 집합이다.”
“흥, 그래도 결단력은 있군.”
카이센이 반쯤 뽑았던 칼을 다시 납도하며 명령하듯 말했다.
“불과 기름을 운반할 병사가 둘 필요해. 그 정도는 내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