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80)
가짜 용사 이야기-80화(80/310)
제80화
‘대체 여기는…….’
어둠이 끝나고, 순백색으로 획일화된 공간이 시야를 압도했다.
바닥, 천장, 벽면…… 일정 너비마다 집착적일 정도로 빗금이 쳐져 구획을 나누었다.
그 순백의 지표와 고요하게 흐르는 검은 안개가 그 공간을 더불어 지배하고 있었다.
[이곳은 엘디아 오메크(06) 양성을 위해,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건설된 중계 공간이다.]낯익은 빛, 진성검의 은광이 그 안개 속에서 번뜩거리는 게 보였다.
샤릴리온……?
근데 샤릴리온이 아니었다.
안개를 걷어내며 나타난 건 부유 물체였다. 오각형 표면 정중앙에 은색 구체가 박힌…….
즉, 카듀엘을 닮은 수호자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나는 엘디아 카타(05), 에누엘. 카렌덴 님의 명으로 이 시설을 통괄하고 있다.]몸이 주춤 흔들리는 걸 느꼈다.
에누엘?
엘디아 카타, 에누엘……?
진성검 샤릴리온의 옛 주인? 그 무용담은 천 년이 두 번 지난 오늘날까지도 드높지 않던가.
[엘디아 프로젝트는 여섯 번째 엘디아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무한히 흐르나 현계와 비교하면 찰나에 불과하다.]“시간이 멈춰 있단 소립니까?”
[엘디아 프로젝트를 위해 지금까지 423명의 후보가 있었으나 모두 적성 평가가 80%조차 되지 못하고 탈락하였다. 그러나 그대는 1377%라는 경이로운 수치로 통과하였다. 이제 그대는 고대의 전쟁 속으로 들어가 엘디아로서 거듭나야 한다.]1377%…….
아까 본 건 환각이 아니었던가.
그 기억 옆에 나란히 포개어진, 너의 마지막 미소가 가슴에 아픔으로 치밀었다.
“……타르시요는 죽었습니까.”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 마지막 순간…….
네가 지은 미소가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으니까. 어떠한 통증이 없는 이 영혼이 그 설명을 뒷받침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저 웃었다.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그건 웃음이었을까, 울음이었을까.
[엘디아 프로젝트는 옛 전쟁의 재현 속에서 전투 능력, 경험, 판단력을 비약적으로 배양시켜 기존 엘디아들과 똑같은 실력과 경험을 지닌 존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적합 판정을 받았다.]“옛 전쟁의 재현이라는 게…….”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 곧바로 시작하겠다. 전쟁 재현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투쟁이므로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면 그대의 목숨은 무한히 되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고통은 동일하니 미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망막을 통해 비치는 세계 한편에 문자들이 새겨졌다.
[체력 : 100%] [광기 수치 : 0%]흠칫 놀라 시야를 돌렸으나, 문자들은 그 시선과 함께 움직여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또한 처음 시작될 때 ‘동기화 견본’이 주어진다. 그 견본을 얼마나 똑같이 모방할 수 있느냐에 따라 동기화율의 평가가 매겨진다.]문득, 에누엘의 핵(核)이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그 주위로 강대한 광입자들이 결집되었다.
공격이 온다…….
반사적인 직감으로 몸이 움직여지려던 찰나, 세계 전체가 극도로 느려지더니 시야 좌측 하단에 직방형의 영상이 떠올랐다.
[동기화 견본 제시.]그것은 과격한 힘의 돌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 광선의 궤적을 죽음에서 살짝 비껴내며, 왼팔을 희생시킨다.
돌진을 마칠 때, 광선에 직격돼 분멸(焚滅)되었으나 순식간에 재생된 왼팔로 에누엘을 붙잡는다.
‘이건…….’
방금 본 이 영상, 한 싸움의 파편만으로 어센시쿼리어와 페이쿼리어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았다.
단순 힘과 속도의 차이가 아니다. 근본적인 방식이 다르다…….
페이쿼리어들은 결손된 신체를 재생시키려면 용혈 혈청을 주사해야 한다.
‘단순 골절 따위면 모를까, 양팔 중 하나라도 날아가 버리면 칼 쥘 손과 주사기 쥘 손이 겹쳐서 격전 도중 치명적 결점이 생기니까.’
그렇기에 사지를 최대한 지키면서 싸우는 게 일반적이었건만…….
권속들처럼 자력 재생이 가능하기에 그런 것일까. 어센시쿼리어들은 전투 도중 팔다리를 희생하는 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간의 틈새는 같은 전투에서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옛 전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이 과정을 모두 마무리할 수 있다면 너는 엘디아 오메크(06)로 거듭나게 된다.]“거듭나다니…… 사람이 어떻게 두 번 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육신으로 해온 모든 걸 잊고, 영의 가르침을 따라라. 그렇게 모든 전투에서 동기화율을 90% 이상 채워야 함을 유의하라. 채우지 못한다면 다음 전투로 넘어갈 수 없다.]명료할 정도로 단순하게 핵심을 찌르는 규칙이었다.
에누엘…….
다섯 어센시쿼리어 중 최강이라 불리던 용사의 전투 방식을 완벽히 모방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단 소리가 아닌가.
“그것이 다시 태어나는…… 즉, 거듭남입니까?”
[단지 나의 무예를 좇는 것만으론 거듭날 수 없다. 옛 시대의 인연이 그대가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끌리니.]그 순간, 순백의 구획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마치,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하나의 문(門)처럼.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부터, 눈부신 광채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광채가…… 운명의 등불처럼 느껴져 손끝에 경련이 일었다.
가자…….
다시, 싸우러 가자…….
마음속 어디선가, 영혼의 칼에게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들숨을 안정시킨 이후, 발길을 하나씩 옮기는데 등 뒤에서 에누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실패한다면─]“─절대 안 합니다.”
타르시요는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던 왕의 심연을 모두 대신 감당하고 죽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서, 싸워야 한다.
모든 살육과 유혈을 지나, 세계의 여름을 끝내고 가을날의 푸른 잔디를 세계 가득 피워 내기까지.
그렇다면 거듭나리라.
그것이 어떤 존재든, 반드시 거듭나리라…….
에누엘이 잠시 말을 끊고 핵의 불빛으로 나를 관찰하듯 쳐다보는 것이 느껴지더니.
[그대의 용기에 경의를.]그러한 평가를 내렸다.
[이제 옛 전쟁을 목도하고 새롭게 거듭날 때가 되었다. 가라. 그러기 위한 열쇠를 내어주마. 시간은 우리를 서로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이 격리시켰으나, 이 기억이 하나로 이어줄 것이다.]신화시대(神話時代),
타르혜 론델ㆍ엘디아ㆍ거듭남 (1)
만세(萬歲)의 처음.
신(神)이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옛 세계의 진실이, 뇌리에 응사되어 두렵도록 생생하게 펼쳐진다.
저토록 거대한 세계가 발치에 놓인 장난감처럼 느껴질 수 있음이 두려울 만큼 신비로웠다.
이 태초의 땅은 시론(Siron)이라 불렸다.
큰 샘들로부터 빛이 샘솟고.
창천 가득 무지개가 흐드러지며 흐르던 땅.
심연의 주인, 요토스 욜레 요티아토스가 창세의 어머니 겔드하리아를 살해하기 전까지.
이런 경치를 혼자서만 본다는 것이 문득 슬펐다.
타르시요…….
네가 꿈꾸던 세계는 아마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이제는, 발라돈이라는 이름으로 심연이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땅.
그 세계를 뒤덮어가는 심연…….
천공은 검푸른 먹구름에 물들고, 대지는 흉측하게 썩어가며 뒤틀리고 일그러져 가기 시작한다.
심연이 옥좌를 빼앗으니, 창세의 빛은 사그라져 가는구나…… 이것이 외우주의 별빛 사이를 떠도는 타락 신화의 기원이니.
그 심연의 천지를 압도하여, 원초적 공포 속에서 꿇어 경배시키는 존재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이제, 불경의 패역을 물려받은 다섯 종들이, 그 땅의 마지막 빛의 잔재들마저 삼키라고 심연의 옥좌를 하사받으니 이와 같더라.
음험하게 들끓는 바다.
그 해수면 위로, 소름 끼치는 고대의 자태를 드러내는 존재.
세 쌍의 날개를 떨치고, 얼굴에서 수런거리는 수백 개의 촉수가 우주의 악몽을 그려낸다.
옛 바다를 지배하는 왕.
수런거리는 광기, 슈’율큘라.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고대의 숲.
그 숲의 영원한 어둠조차 통곡하게 만드는 광기의 메아리.
울며 흐느끼는 망자들이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며 무수히 엉겨 붙어 혼돈의 육신을 이룬다.
옛 삼림을 다스리는 왕.
꿈틀거리는 혼돈, 켈렉─샼.
그다음은 익숙한 존재였다…….
용암이 수백 갈래의 실개천으로 흐르는 핏빛의 사막. 그 위를 육중하게 활보하는 화산(火山)…….
헤아릴 수 없는, 절규하는 영혼들이 뒤엉켜 그 끔찍한 화산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옛 사막을 통치하는 왕.
울부짖는 파멸, 네이갈라스.
신기루처럼 몽환적으로 일렁이고 뒤틀리는 미지의 산맥.
그 봉우리들 위로 내리치며 시공을 비트는 벼락, 그 비틀린 시공 가운데에서 깔깔대는…… 비틀리고 이질적인 존재.
모든 것을 사악한 신비감으로 비트는 그 존재는 눈도 없고 얼굴도 없고 오직 비틀린 영혼뿐이었다.
옛 산맥을 굴복시킨 왕.
뒤틀리는 비명, 안리달.
지금도, 음산한 원시 신화만이 나도는 영겁의 설원…… 하르바도니아.
그 설원의 소리 없이 하얗게 흐느끼는 눈보라의 옥좌 위에서, 미답의 적막으로 군림하는 존재.
아홉 쌍의 거미형 다리, 그 역겨운 형상을 얼기설기 모여 구축하는…… 산 제물로 바쳐진 인간들.
옛 동토를 총괄하는 황제.
불경의 신비, 아쉬론.
희망도, 소망도, 그 무엇 하나 없는 세계의 풍경…….
이것을 대체 어떻게…….
저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다 베어서 걷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잃어버린 성역을 되찾기 위해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빛의 잔재가 시론으로 돌아오니.
그때.
저 드넓은 악몽의 바다 너머.
현대에는 요정들이 기거하는 땅, 이데아 반도의 대지 위에 눈부시게 내리꽂히는 ‘빛’이 있었다.
창세신 겔드하리아의 권능, 베르켄시아의 부르심을 받은 자.
그 빛에, 영혼이 전율한다.
그 빛 한 줄기가, 영혼을 뒤흔드는 전율의 광경을 펼쳐낸다.
이 땅을 밝히는 마지막 빛.
저 머나먼 태곳적…….
창세의 이야기 속에서 ‘빛이 있으라’고 외치니 생겼다던 빛.
바로 그렇기에.
이 싸움은 새로운 예언을 만들고,
그 예언이 예언으로서 이루어지게 만들어야 하는 싸움일지니 그 예언은 즉 이것이라.
그 빛의 찬란한 광염이.
끔찍하게 절규하는 심연을 맹렬하게 불태우며 점차 반도 전체로 퍼져 나간다.
「빛이 어둠에 비치매,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
진실의 파편을 볼 수 있던 건 거기까지였다.
불현듯.
폐를 가득 채우고 목까지 차오른 액체. 그 형언하기 힘든 이질감 속에서 오감이 각성했다.
“쿨럭…….”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그걸 고통스럽게 게워내며, 전신에서 미끈거리는 액체를 더듬거렸다.
‘뭐냐, 이건…….’
주위로 보이는 풍경은 전부 음침한 녹색빛으로 젖어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거대한 시험관과 녹색 배양액.
그 액체에 잠긴 채 급속도로 성장하는 무언가들……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시야 우측 하단에 문자열이 나타난다.
[화살표를 따라 이동하십시오.]어두운 바닥을 따라 선명하게 명멸하는 빛의 길…….
이것은 운명의 지표인가.
이것을 따라가라는 것일까, 생각하는데 문득 내가 쓰러진 자리에 내가 쓰러진 자세 그대로 새하얀 환영이 겹쳐졌다.
“무슨……?!”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서자, 환영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환영은 이쪽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화살표의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고만 있자, 다시 문자열이 떠올랐다.
[동기화 이행률 : 0%]– 에누엘의 환영을 따라 이동하십시오.
에누엘의 환영……?
문자열의 재촉에 떠밀려 그 뒤를 쫓았다.
환영의 뒤를 따라 음울한 실험실을 나서고 얼마나 지났을까, 곧 아득히 넓은 구체형 공간에 다다를 수 있었다.
“……!”
그리고 그 공간의 중심부에, 진성검 샤릴리온이 깊숙이 꽂힌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JH-8882, 적성 테스트를 통과하십시오.]에누엘의 환영이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열쇠로 자물쇠를 풀듯이, 샤릴리온을 돌려 뽑는 동작을 취하더니 안개로서 흩어졌다.
나는 망설이면서, 그리고 가슴에 치미는 아픔을 느끼면서 샤릴리온 앞으로 나아갔다.
‘낯설어…… 그만큼 새롭다.’
타르시요가 휘두르던 샤릴리온은 성한 부분이 단 한 곳도 없어서, 쇳빛조차도 둔중하고 싸늘했는데.
흠집 하나 칼날이나 칼자루뿐만 아니라, 토해내는 안개와 검광조차도 여린 풋내가 났다.
진성검 샤릴리온이 지나온 유혈의 시대가 아직 하나의 무늬로서 저 검신에 새겨지기 전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가슴이…….
가슴이 아프다…….
샤릴리온 위로 타르시요의 미소며 동작들이 덧입혀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동기화 이행률 : 0%]– 에누엘의 환영을 따라 이동하십시오.
환영의 동작을 따라야만 했다.
양손으로 샤릴리온의 칼자루를 움켜잡아야 했다. 전신의 힘줄이 돋아날 정도로 힘을 주어야만 했다.
육중한 철문을 들어 올리듯, 그 고고한 칼날을 지면으로부터 간신히 돌려 뽑아낸 그 순간.
우우우우우웅……!
바닥이 양쪽으로 벌어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열린 틈새로부터…… 더없이 거대한, 강철의 존재가 쇳빛의 위엄을 토하며 강림했다.
눈을 끔뻑이자니, 그 웅대한 형체 위로 문자열이 떠올랐다.
[Chapter Prologue : 존재 증명.]– Chapter Boss : 엘디아 프라이모아.
프라이모아가 뻗은 4개의 팔에서 톱날이 회전하자 불 싸라기가 공간 전체를 뒤덮으며 날렸다.
동시에 가슴 덮개가 네 방향으로 열리며 포신이 번쩍이며 돋아 나왔다.
‘다짜고짜 전투라고?’
치받치는 긴장감 속에서 샤릴리온을 양손으로 붙잡고 한 발 물러섰다.
싸움의 환경은 불합리했다.
지면, 즉 디딤판부터 불안정하지 않은가.
‘반면 상대는…….’
긴 다리로 저 먼 바닥을 짚고 확고하게 무게중심을 잡고 있었다. 마른침을 넘겼다.
‘일합으로 끝내지 않으면, 이 승부는…….’
저 포신이 포탄을 토해내면 남은 지면조차 소실될 것이고, 그러면 승산이 없다.
마력으로 디딤판을 생성하여 높이 도약할까? 하지만 허공에 떴을 때는 허점이 오롯이 열린다.
그렇게 되면 저 육중한 톱날들이 공간 전체를 제압하면서 날아와서 육신 전체가 갈기갈기…….
[동기화 견본 제공.]그러한 전술적 혼란은 가짜 용사로서의 고뇌에 불과했다.
그 순간, 동기화 영상이 보여준 예시가 가리킨 살(殺)의 지침이 아름다울 정도로 확고해서 몸이 전율했다.
그 시험은 지금껏 가짜 용사로서 쌓아온 ‘전투 판단’을 모두 비워내고 새롭게 거듭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을까.
‘이 방법뿐이다.’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 방법 말고는 없어.’
그와 동시에 프라이모아의 포문에서 빛이 눈부시게 집약되더니, 광탄(光彈)이 발출되었다.
기도하듯이, 샤릴리온의 칼자루를 양손으로 붙든다.
그리고 경건하게, 칼끝을 앞으로 내지르며 진성검에게 ‘해방 명령’을 내린다.
“삼켜라, 샤릴리온───!”
해방 명령이란, 극위성검의 기원(祈願)과 절원(切願)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다만, 기원하는 것으로 끌어내는 힘과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끌어내는 힘의 결은 천지의 차이와 같았다.
쇄도해들던 빛이, 칼끝에서 회오리치는 무형의 힘에 빨려든다. 동시에 칼날의 형태가 빛의 물결로 변화한다.
진성검 샤릴리온은 힘을 흡수하고, 그 흡수한 힘과 같은 물질의 형상을 취한다.
순식간에 빛의 칼날로 거듭난 샤릴리온의 참격이 톱날 2개를 분쇄한다.
미처 분쇄할 시간이 없던 2개의 톱날.
그것은 왼팔과 오른쪽 정강이를 ‘희생’시키는 걸로 타파한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솟구치는 선혈.
뇌리가 희뜩 전율하는 고통.
그 선혈이 어딘가에 흩뿌려지기도 전에, 새로이 돋아나며 구축되는 근골과 힘줄과 혈관들.
이것은 힘의 사용법.
초고속 재생을 다룰 수 있는 절대적 존재들의 육신의 사용법.
2개의 톱날이 교차하기 직전에, 한 끗 차이로 그 틈새를 빠져나오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이로써 훤하게 열린 살(殺)의 공간을 광염의 칼끝으로 꿰찌른다. 두 번째 해방 명령과 함께.
“───꿰뚫어라, 샤릴리온!”
일전에 흡수시켰던 힘은 망막이 타들어갈 듯한 빛의 폭주가 되어 방출되었다.
이는 진성검 샤릴리온의 특수 능력, 형질흡력(形質吸力).
흡수한 힘을 일곱 배 증강시켜 방출하는 초현실적인 권위.
[─────!]그 빛의 폭주 속에서 차원을 일그러뜨리는 태풍이 휘몰아친다.
그 풍랑이 잠잠해졌을 때는 프라이모아의 가슴팍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의 테두리…… 검게 그을린 내면에서 전류가 무수히 튀고 있었다.
[적성 검사…… 완료…… 작동…… 정지…….]이윽고 프라이모아의 몸체가 앞으로 기울며 쓰러지자, 먼지와 쇳조각들이 매섭게 날렸다.
[엘디아 프라이모아 토벌.]– 동기화 이행률 : 100%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힘의 사용에 심장이 격렬히 맥동한다.
언뜻 봐도 쉬르팽의 시공섬을 아득히 뛰어넘는 힘이다. 그래도 쉬르팽과 육체적 부담도 똑같은지, 전신 경련이 이는군…….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데, 프라이모아의 핵(核)이 가슴팍으로 날아와 부착되었다.
[장비 습득 : 프라이모아 아머.]핵의 빛이 눈부시게 맥동했다.
그러자 프라이모아의 부품들 중에서 핵심 얼개들이 그 빛에 이끌려 날아오더니 육신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윽고 각 얼개들은 합일(合一)을 이루며, 검은빛이 고고하게 감도는 하나의 갑주로 연결되었다.
‘이렇게나 가볍다고……?’
놀랄 만큼 가벼웠다.
가벼울 뿐인가, 인체의 구조에 맞게 완벽하게 설계되었는지 모든 동작이 어이없을 정도로 편했다.
육신을 감싸 보호한다는 갑주라는 개념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편(不便)’이란 것이 없는 것이다.
과장 하나 없이 설명하자면, 맨몸이었던 방금 전까지와 모든 동작에서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프라이모아 아머의 내구도는 착용자의 재생 능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현재 착용자의 재생 능력 안정도 : 100%.
이게 무슨 소리지.
육신이 결손되었다가 재생될 때 갑주까지 같이 재생된다는 건가?
뇌향께서 선물해줬던 용린갑처럼 혼 자체와 합일된 건가?
[동기화 이행률 : 96%]– 에누엘의 환영을 따라 이동하십시오.
제 역할을 마치고 파괴된 프라이모아 저 너머, 놈이 전신으로 가로막고 서 있었던 실험실의 출입문이 열리고 있었다.
에누엘의 환영이 샤릴리온을 어깨에 걸친 자세로 그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는 에누엘의 동작에는 한 점의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 이제 시작이란 건가…….’
그 망설임 하나 없는 동작들은 운명의 인력처럼 느껴졌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용기의 선진(先進)이 먼저 걸어간 발자취를 따라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Chapter Prologue : 존재 증명.]– 동기화율 100%.
그것이, 후세에 신화시대(神話時代)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타르혜 론델 전쟁’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