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85)
가짜 용사 이야기-85화(85/310)
제85화
“성서에 등재된 <온 것들>은 총 일곱 명으로, 제각기 태양과 달에 얽힌 이명을 갖고 있단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난롯가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성서를 풀어 설명하시던 모습밖에 없다.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 공백과 슬픔의 깊이를 알기에는 너무나도 어렸다.
그때는 몰랐다.
죽음이란,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라는 말을 단 두 글자로 표현한 것이라는 걸…….
그 두 글자의 잔혹함은 크면서 서서히 알아가게 됐는데, 그래서 어머니가 떠나지 않기를 그렇게나 바랐던 것일까.
창천의 태양, 테르벨.
핏빛 태양, 슈리간.
검은 태양, 카렌덴.
창백한 달, 막센시아.
고상한 달, 졔안니르.
처연한 달, 테르시아.
창성의 달, 메이안.
“그들 모두 겔드하리아의 축복을 받은 빛의 군주들이었으나,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이는 둘이란다.”
창천의 태양, 테르벨.
그의 빛은 낙뢰로써 만유의 심연을 맹렬히 불태우고 창천(蒼天)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후후, 카이센. 네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아? 뇌성(雷聲)의 아이딘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검은 여름’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쟁의 일선에 서셨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때는 알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자, 카이센. 테르벨의 맹위를 보고 착각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고 하나, <온 것들>의 리더는 따로 있었단다.”
바로 처연한 달, 테르시아.
테르시아는 빛의 칼날 베르켄시아의 계승자로, 빛과 사랑의 이야기를 처연한 슬픔 가운데 설파하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나머지 이들도 대단하기는 하나, 모두가 전쟁에 특화된 권위를 가진 건 아니었고.”
슈리간과 막센시아와 졔안니르가 그러하였다.
슈리간은 심연에 썩어 문드러진 땅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힘을.
막센시아는 다른 이들의 심연을 자신의 몸에 대속시키는 힘을.
졔안니르는 소환술보다도 더 상위 개념인 도화 체현(圖畵-體現)의 힘을 가졌다.
슈리간과 막센시아는 그 힘으로 병든 세계와 사람들을 치료하였고, 졔안니르는 옛 창조물들을 되돌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면요. 다른 <온 것들>보다는 약했던 거야?”
어릴 적에는 무(武)만이 절대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었다. 그렇게 묻자 아버지는.
“카이센, 강함이란 뭐라고 생각하니?”
아버지께서는 늘 그렇게 어린아이로서는 도저히, 아니, 지금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시곤 했다.
“무언가를 베고 부수는 것이 강함의 전부라면, <잊혀진 왕들>이야말로 진정 강한 존재들일 거란다.”
아마도, 곧 찾아올 영원한 이별을 대비하고 계셨던 것이었을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섬기고 받드는 자들은 <온 것들>이야. 왜 두 세력 사이에 그런 차이가 있을까?”
아버지께서는 막센시아의 기적으로, 어머니의 몸을 삼키던 마우나 로아의 심연(深淵)을 자신에게로 절반 넘게 전가하셨으니…….
“<온 것들> 모두가, 다른 이들의 약함을 위해 자신의 힘을 썼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들이.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성년의 삶 속에서 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강해지거라, 카이센. 영웅이 되란 소리가 아니야. 네가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사람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주는 사람이 된다면, 난 정말 말할 수 없이 기쁠 거다.”
신화시대(神話時代),
타르혜 론델ㆍ엘디아ㆍ거듭남 (6)
먼 어린 날에, 막연한 이야기로만 듣던 창세(創世)의 아름다움이 눈앞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온 것들>은 심연으로부터 수복한 땅 위에 꽃을 아리땁게 피워냈다.
심연이 세계를 침식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의 세계도 이러한 모습이었을까.
순백의 해안, <가덴>.
순청의 산림, <타르키리텐>.
순은의 평야, <렐타론>.
요정의 땅, 이데아 반도가 <온 것들>의 손길 아래 아름다운 세상으로 재탄생되어 갔다.
오늘날의 요정들은 기술을 배격하며 이러한 자연과의 공생을 중요시해 왔다.
거만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 공생에는 사실 이런 자연을 베풀어준 <온 것들>에 대한 존경심이 깃들어 있던 건 아닐까.
기술 혁명 이후, 인류와 아인들의 하늘은 증기와 매연으로 인해 새까맣게 더럽혀진 반면, 요정의 땅은 여전히 푸르고 맑다는 소문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 모든 아름다움은 고상한 달, 졔안니르의 작품이었다.
‘창조’의 권능을 받은 졔안니르가 풍경화를 그리면, 그 풍경이 현실 위에 덧씌워졌으니까.
졔안니르는 그 풍경화를 그릴 때 다른 <온 것들>과 신나게 의견을 나누었으며, 상의 끝에 풍경을 그릴 때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정말, 해맑은 사람이었다.
에오스의 그 고귀한 성정은 부모를 닮은 것이리라.
반면 <온 것들>의 두뇌이자 정보전을 책임지는 카렌덴은 심히 동떨어진 존재였다.
전선에 서는 자가 아니면, 카렌덴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카렌덴은 오늘날 차일드맨 또는 드워프라 불리는 아인(兒人)들을 창조한 뒤 오직 그들과만 소통하였으므로.
– 이것들은 죽기 직전까지 늙지 않아서 유년기의 창의력을 거의 평생 발휘할 수 있지. 그렇기에 제법 쓸모가 있다.
오늘날까지 카렌덴은 음침하고 내막을 알 수 없는 <온 것들>로 유명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의 일선에 서 보면 카렌덴의 중요성을 크게 체감하게 된다.
카렌덴이 없으면 전쟁 자체가 성립되질 못했다. 모든 기술적 보수와 군대 정비, 그리고 정보 파악이 그 손에 달려 있었으므로.
정화의 나날 가운데에서도 카렌덴의 바쁜 날은 끝이 없었다. 오늘조차도.
[카렌덴 : 새로운 대륙을 하나 발견했다. 아드리온(Adrion; 동떨어진) 대륙이라고 명명하지. 이곳에 두 번째 심연의 군주가 있다.]아드리온 대륙.
오늘날에는 마인지경, 즉 마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땅이었다.
[테르벨 : 대륙이 하나 더 있다고? 위성 탐사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카렌덴 : 화산재가 아주 짙다. 그래서 가려졌던 것 같다. 화산의 땅이야. 그에 관련된 권위를 가진 놈이다. 셰키라 행성을 멸망시킨 자, 네이갈라스다.]네이갈라스…….
중부 전선을 맡았던 인류 최정예 부대, 그 부대의 전멸과 청성의 죽음을 대가로 겨우 막아냈던 악몽.
그 이름만으로, 손끝에 격동의 전율이 일었다.
[테르시아 : 네이갈라스가 대륙을 넘어와서 다른 진왕들과 힘을 합치기 전에 없애는 게 좋겠어.] [카렌덴 : 맞다. 고립돼 있을 때 처리한다. 엘디아들은 우선적으로 막센시아를 만나서 치료를 받도록. 곧바로 출격 임무에 나서야 한다.]카렌덴에게 그런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심장의 떨림이 좀체 가라앉지 못하고 있었다.
막센시아…….
창백한 달, 막센시아…….
<온 것들> 중에서 최연장자이자 타르시요의 어머니. 하지만 바로 만나볼 수가 없었다.
막센시아가 감당할 수 있는 심연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막센시아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던 건 테르시아, 테르벨과 알카이오스와 카듀엘뿐이었다.
[카듀엘 : 공략 시간이 촉박하므로 대장과 저만 먼저 아드리온 대륙으로 출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뤼카엘 : 그래, 죽지 말고.] [슈르비엘 : 히, 힘내……!]그렇게 엘디아 알마(01)와 베테(02)만이 테르벨의 황금함대, 슈리간의 핏빛함대를 보좌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슈르비엘, 뤼카엘, 에누엘, 카렌덴, 메이안, 졔안니르는 이데아 반도에 남았다.
막센시아와 만날 수 있게 된 건, 반도 북부 수복전…… 즉 ‘벌레 군주 토벌전’에 대한 미션 브리핑을 받기 직전이었다.
[뤼카엘 : 나는 정비 끝났어. 에누엘, 네 차례야.]그렇게, 막센시아와 처음 만난 곳은 푸른 들풀이 고요하게 일렁이는 들판이었다.
고요한 미소를 가진 분이었다.
새들조차 그 고요함의 품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런 미소에 어울리지 않게, 막센시아는 사특한 느낌이 날 정도로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
아니, 검은 옷만을 입었다.
그 온몸을 구더기처럼 뒤덮은 채 꿈틀거리는 심연을 감추기 위해. 그래서 시체처럼 창백해진 피부색을 감추기 위해.
그 흑백의 대비는 슬펐다.
막센시아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눈을 항상 감고 있었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는 손을 뻗어서 대상을 더듬거렸다.
막센시아는 대속자였다.
심연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강한 내성을 타고난 그녀는 오직 대속의 권능만을 받았다.
다른 <온 것들>도 대속을 행할 수 있었으나, 왕의 심연을 대속할 수 있는 건 오직 막센시아뿐이다.
수백 번 반복되어온 싸움에서 왕들의 심연을 몸과 영혼에 대속하고 또 대속해온 막센시아는 이제 스스로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막센시아 덕분에 <온 것들>은 외우주와의 싸움을 유지해올 수 있었다.
전선에 서지는 못해도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라고, <온 것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아, 당신이 에누엘이군요.」
손을 매만지던 막센시아가 그렇게 말했다.
속삭이는 것보다도 작은 목소리였는데, 신기하게도 밤의 달빛처럼 선명하게 마음에 비쳤다.
응, 엄마, 얘가 카이센이야…… 들릴 리 없는 목소리와 함께 숨이 터질 것만 같은 떨림이 일었다.
「모두 당신 이야기를 하기에 궁금했었어요. 내 몸이 약해서 만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군요.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네요. 자, 이리 와서 앉아요.」
머뭇거리다 곁에 조심스레 앉자, 막센시아가 손을 맞잡았다.
익숙하고, 슬픈 감각.
영혼과 몸을 갉아먹고 침식하던 무형(無形)의 벌레들이 맞잡은 손을 타고 빠져나가는 감각.
웃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 감각이 기쁠 리가 없는데.
이 소름 끼치는 감각을 모두 떠맡으면서도 막센시아는 고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타르시요예요. 인연이라는 뜻이죠. 예쁘지 않나요?」
막센시아가 문득 자신의 배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졌다.
「왤까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내 딸이 당신을 닮으면 좋겠단 생각을요.」
「예?」
「새를 본 적이 있나요? 아기 새가 자립하려고 할 때 어미 새는 아기를 돕지 않아요. 하지만 곁을 계속 지키며 응원해주죠.」
왜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그 의문스러운 표정에 답하듯, 막센시아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나 카렌덴 모두 몸이 약하니 이 아이가 당신처럼 강하게 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누군가의 노력을 곁에서 진솔하게 응원해주고 누군가의 기쁨을 크게 기뻐해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숨이 막혔다. 알고 있는데, 이곳이 재현된 세계에 불과하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그럼에도…….
그때, 동기화 충돌의 통증을 넘어가면서까지 말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입이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
「저, 저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울어주고……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보면 자기가 더 기뻐할 수 있는…….」
짧았던 동행의 나날 가운데, 타르시요가 보여주었던 모든 미소들이 눈앞을 희뿌옇게 스쳤다.
슬픔이.
기댈 곳이 없고 머무를 곳이 없는 슬픔이, 눈에서 흐느끼며 시야를 뿌옇게 바스러뜨렸다.
「분명, 그런 멋진 어른이…….」
직접 만나고 싶었을 텐데.
네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고 싶었을 텐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텐데.
왜…….
그런데 대체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일까…….
왜 너는 여기에 오지 못하고…….
「에누엘.」
그때 불현듯, 막센시아가 손을 뻗어 눈가를 더듬거렸다. 품에 끌어안아 그 눈물을 숨겨주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 미소…….
타르시요의 미소가 완벽하게 포개어지는 그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기쁨의 주름을 잡으며 이를 새하얗게 드러내는 미소를.
「나는 분명 이 아이의 성장을 보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오늘 당신 덕분에 어른이 된 타르시요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어요.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기쁠 수가 있네요…….」
타르시요.
너는 알고 있었을까.
네 어머니와 내가 이렇게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을까.
「정말 고마워요, 에누엘. 타르시요의 앞날을 축복해줘서. 그 아이가 태어나는 날, 반드시 당신의 마음을 전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