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 of the Fake Hero RAW novel - Chapter (87)
가짜 용사 이야기-87화(87/310)
제87화
<온 것들>마다 총애하는 엘디아가 달랐다.
이지적인 카듀엘은 카렌덴의 총애를 받았고, 무인의 성격이 강한 알카이오스는 테르벨이 친우처럼 다루었다.
슈르비엘은 졔안니르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총애라기보다는, 여동생과도 같은 사랑을 받았다.
「슈르비엘, 이거 어때?」
졔안니르가 도화를 그릴 때는 그 곁에 항상 슈르비엘이 있었다.
「조, 좋을 것 같아요!」
둘은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항상 의논하였으며 그 의논의 과정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렇지? 저번에 슈르비엘이랑 함께 그렸던 그거야.」
졔안니르와 함께 있을 때가 아니면, 슈르비엘은 어딘가에 혼자 조용히 앉아서 그림책을 끄적거리고는 했다.
30년 가까이 종군했는데도 여전히 소녀의 수줍음이 얼굴 가득 서려 있는, 그런 엘디아였다.
가까이 다가가 무얼 하냐고 물으면, 얼굴을 붉히며 그림책을 숨기고는 했다.
「이, 이건…… 동화책이야. 그림도 넣고 있어…….」
성격은 그렇게 다르건만.
그 눈.
그 맑은 눈이 이슬라와 닮아 있어서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렸다.
「동화책?」
순수의 바탕이란 같은 것일까. 모든 피조물은 창세의 어머니께서 지으신 것이니 이렇게 닮게 될 수도 있는 것일까.
「이제 여기에서 저, 전쟁이 다 끝나면…… 지금까지 있던 일을 요약해서 만들려고…….」
슈르비엘을 마주 볼 때면 꼭 죽은 이슬라와 마주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몸을 찔렀다.
왜일까.
손가락을 맞대며 약속하던 이슬라의 미소가 늘 슈르비엘의 얼굴에서 어른거리는 건.
「하, 함께 싸웠던 모든 사람들이랑…… 약속했어, 절대 잊지 않겠다고…… 그래서 도, 동화책을 쓰는 거야. 계속 기억하기 위해.」
신화시대(神話時代),
타르혜 론델ㆍ엘디아ㆍ거듭남 (8)
[뤼카엘 : 여기는 뤼카엘, 엘디아 델(03)이 중상! 본부에 응원 요청! 제1등급 심연 반응이 계속 쫓아오고 있습니다!]삑…….
켈렉─샼이 등장한 이후로는 모든 기억이 악몽을 헤엄치는 느낌과 같았다.
삑…… 삑…….
<잊혀진 왕들>마다 심연의 형태와 성질이 약간씩 달랐다.
삑…… 삑삑…… 삑삑삑삑삑…….
켈렉─샼의 심연은 썩은 음식을 파먹고 거기 알을 낳아 번식하는 파리의 형태로, 어떤 진왕보다도 잠식 속도가 빨랐다.
[뤼카엘 : 슈르비엘! 슈르비엘, 정신 차려! 슈르비엘!]왕의 심연은 초월자의 영혼에까지 닿는다.
엘디아도 예외는 아니다. 미래의 광룡 하라데리만이 그렇게 죽었듯이.
등에 매달린 슈르비엘은 옆구리를 꿰뚫고, 영육을 갉아먹으며 확산하는 심연의 침식 속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켈렉─샼은 어떤 왕보다도 혐오스러운 형태의 진왕이었다.
말하기를, 존재할 수 없는 자.
또 말하기를,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자.
「음……, 허……, 허……, 허…….」
켈렉─샼에게는 일정한 형체가 없었다.
야릇한 빛으로 꿈틀거리는 인간 구더기 수천만 마리를 결집시켜 만든 자신의 형체를 자유자재로 바꾸었다.
벌레의 군집 통제 능력으로 이 퇴폐의 도시를 세운 켈렉─샼은, 자신이 세운 도시의 구조를 교활하게 비틀고 또 뒤틀었다.
「내가……, 두려우냐……………?」
전설의 암흑 그 한복판에서, 역겨운 수증기가 소용돌이치면서 몰려오면 악몽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수증기는…….
거품이 무수히 부글거리는데, 그 거품 방울에서 눈동자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낄낄대는 입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수증기가 지나간 자리는…….
시공간 자체가 갉아먹히면서 소멸했다. 소멸한 시공의 틈새 너머로 외우주의 별들이 소름 끼치게 맥동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역겨운 무지갯빛 파동으로 미친 속도로 들이닥친 수증기는, 다시 구더기 왕의 형체를 갖추었다.
켈렉─샼에게는 형체가 없고 목소리가 없고 눈이 없다.
그 목소리는 단지, 수천만의 인간 구더기들이 내는 비명의 곡조를 기묘하게 뒤틀고 섞음으로써 만드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 모방은 소름 끼쳤다.
「진정한……, 구원을……, 알려주겠노라……….」
모든 것이 악몽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켈렉─샼의 추적으로부터 잘 도망치고 있었다.
사악한 벽화로 점철된 벽과 통로를 지나고…… 나선형 외벽을 타고 오르고 또 올라도…….
[뤼카엘 : 본부, 본부!]뤼카엘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찢어발기면서 앞길을 열고 또 열면서 외쳐도.
본대와의 연결은 닿지 않았고, 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본대와 연락이 닿았을지라도, 과연 원군이 오는 것이 가능했을까.
어쩌면 형편이 더 나은 것일지도 몰랐다. 지상에서의 전황 또한 아수라장이었다.
<온 것들> 하나가 권속을 두셋씩 상대해야 하는 꼴이었는데, 병력의 차이도 서서히 열세로 몰리고 있었다.
[카렌덴 : ……엘디아를 찾아라, 지하에서 뭔가 움직이는지 찾아. 모션 트래커를…….] [병참 모니터 : ……경고,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제2등급 심연 접근 중…….] [카렌덴 : ……예리세리카, 북쪽으로 이동해. 저건 너희들이 맡아라…….] [메이안 : ……오빠, 여기에만 권속이 둘이야……!] [카렌덴 : ……나도 이미 둘을 상대하고 있다. 엘디아? 엘디아! 현재 상황은……?]수천 년 계속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추격 속에서, 서서히 모든 것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엘디아 셋이 죽을 뿐인가.
현재 퇴락의 도시 지상에서 작전 중인 월광함대 및 정보부도 전멸할 위기로 몰리고 있었다.
[슈르비엘 : 에누엘……, 내 말을 들어줘…….]이 절망적 상황에 해결책을 낸 건 슈르비엘이었다.
[슈르비엘 : 메, 메이안 님은…… 월광검으로 이 도시에 구멍을 뚫었잖아……?]그 목소리가 이어지는데, 어째서인지 가슴이 찔려 피를 흘리는 아픔이 일었다.
뇌는 몰라도.
마음은 이미 알아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를.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이곳은 단지 엘디아들과 똑같은 전투 경험을 배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다.
[슈르비엘 : 여, 여기에서부터…… 지상까지 구멍을 뚫는 것도 이론상 가능해…….]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은, 이미 먼 과거에 시작부터 결말까지 모두 정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신화시대라는 이름으로.
그러므로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삶과 죽음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미 모든 게 정해져 있으므로.
[뤼카엘 : 슈르비엘,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여기, 이 슈르비엘은 가짜다.
저기, 저 뤼카엘 또한 가짜다.
[슈르비엘 : 그렇게 길이 열리면…… 카렌덴 주인님과 메이안 성하와 협공해서…….]신화시대의 어느 순간에서, 죽음으로써 그 자취를 감추게 되는 고대 용사들의 복사본.
[뤼카엘 : 이 바보 멍청아! 넌 지금 힘을 쓰면 안 돼! 힘을 쓰는 순간 침식이 가속된다고! 잠꼬대 집어치우고 에누엘 등에서 잠이나 자! 막센시아 성하가 계신 곳까지 데려다줄 테니까!]어차피 죽는다.
어차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죽게 될 존재들이다.
[슈르비엘 : 에누엘? 부, 부탁해…….]역사라는 말이, 이곳에서는 왜 운명과 똑같은 말로 느껴지는 걸까.
[슈르비엘 : 뤼카엘과…… 에누엘은 살아줘…….]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려 해도.
[슈르비엘 : 내, 내가 그리던 동화의 마지막에서는…….]에누엘처럼, 슈르비엘을 등에서 내려놓는 건 불가능했다.
또 에누엘처럼.
홀로 서는 것조차 버거워서 숨을 허덕이는 슈르비엘의 손에 아이자이야를 쥐여주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슈르비엘 : 뤼카엘과 에누엘, 둘이 함께 웃고 있거든…….]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슈르비엘이 죽지 않게 되는 미래가 있을 거다.
이 시대에 에누엘과 뤼카엘이 찾지 못했을 뿐,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경고 : 동기화율 23%.]소녀처럼 배시시 웃고, 소녀처럼 수줍게 그림을 그리고, 소녀처럼 맑게 웃는 슈르비엘.
이슬라처럼, 웃고 울고 토라지고 하지는 않지만, 똑같은 맑음을 품고 있는 슈르비엘.
이슬라와 닮아서일까, 단지 역사의 흐름이라고 납득하고 죽음으로 내던지는 건 불가능했다.
[경고 : 동기화율 6%.]귓가에서 경보음이 경적처럼 터지고 또 터졌다.
시간이 끔뻑거리면서 느려졌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시야가 경고성으로 붉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그 기이하게 뒤틀리는 시간 속에서, 뤼카엘의 절규만큼은 너무나도 또렷하게 들렸다.
[뤼카엘 : 하지 마, 슈르비엘! 에누엘! 너 뭐 하는 거야! 슈르비엘을 왜 내려놔!]마침내, 몸동작이 강제적으로 동기화 환영의 자취 위로 포개어져 가기 시작했다.
[동기화 잔여 시간 : 10초.]– 동기화율이 50%로 상향 조정되지 않을 시, 엘디아 자격 재심사가 이루어집니다.
동기화 지침은 10초 안에 사람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료를 죽음 위로 밀치고.
그 시체를 발판 삼아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뤼카엘 : 에누엘, 슈르비엘을 막아, 제발, 부탁이야.]이딴 게, 자격이라고…….
이딴 게, 자격이라면, 나는…….
카운트다운이 7초, 6초, 5초로 줄어들던 그때, 동기화 환영의 눈가에서 반짝이는 이슬이 보였다.
[에누엘 : 슈르비엘…… 반드시 이 전쟁을 끝내겠습니다…….]그제야 정확히 알았다.
지금 이 상황이 동료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지, 그 냉혹함의 자격을 심사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동료의 의지를 계승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 의지의 횃불을 넘겨받아 미래로 운반할 강인함이 있는지 없는지…….
[슈르비엘 : 고마워, 에누엘.]이때 여기서, 에누엘이 슈르비엘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전쟁은 끝이 났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봄을 그리며 죽어간 모든 이들의 희생과 싸움은 허사가 되었을 것이고, 그 의지들이 계승되지도 못했겠지.
[뤼카엘 : 야, 슈르, 슈르비, 멈, 멈춰어어어어어─────!]그러니까.
그러므로.
[슈르비엘 : 뤼카엘, 살아야 해.]초월의 금광(金光)이 시야를 넘어 의식조차 샛노랗게 물들였다.
이는 아이자이야의 고유 색채.
내달려들던 수증기 앞에서, 모든 암흑을 빛의 위세로 짓눌러서 파쇄하는 힘의 폭풍이 분출되었다.
아이자이야의 힘의 해방 명령.
그 명령이 끝나자마자, 그 명령에 의해 힘이 발산되자마자, 슈르비엘의 몸이 심연에 검푸르게 뒤덮여 가더니 걸쭉하게 녹아내렸다.
「───────!」
소리 없는 신음과 함께, 켈렉─샼의 수증기가 빛에 밀려 튕겨 나갈 때.
그 빛이.
그 빛의 폭발이.
경건한 자세로 앞으로 뻗은 흑날의 칼날로 빨려 들어오며, 이전보다도 더욱 눈부시고 창대한 빛으로 명동한다.
그것은 한 줄기의 빛.
뤼카엘과 에누엘을 지키기 위해, 슈르비엘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장작으로 불태워 지펴낸 빛.
「꿰뚫어라, 샤릴리온.」
충천(衝天), 빛이 삼킨다.
자신의 상승 궤도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도 아니고.
녹이는 것도 아니고.
단지 막대한 광압에 의해, 지상까지 이어지는 생체 도시의 모든 천장과 벽면을 뒤틀고 일그러뜨리면서.
그 빛은 118개 층이 넘는 지하 도시의 밀실을 완전히 깨부순 뒤, 밤하늘 저 높이까지 솟구친 뒤에야 기력을 잃고 바스러져 갔다.
[병참 모니터 : 엘디아들의 위치를 포착했습니다. 엘디아 델(03)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카렌덴 : 지금 바로 원군을 보내겠다. 뤼카엘, 바로 전투가 가능한가? 슈르비엘은 어디 있지?] [메이안 : 아수라! 그놈은 카렌덴 오빠한테 맡기고 이리 와!] [화룡 벨’다키둔 : 싫슴다! 저희가 가면 아버지 혼자 권속 다섯을 상대하시게 됨다!] [메이안 : 한 살도 안 먹은 애송이가 지금 누굴 걱정해! 오빠가 얼마나 센데? 오빠가 대충 상대하면서 시간을 벌어줄 테니까, 너흰 떠들 시간에 가서 진왕을 끝장내는 게 진짜 효도야!]* * *
영원한 악몽처럼 느껴지던 전투에 마침내 종지부가 찍혔다.
심연을 근원조차 불사른다는 화룡 벨’다키둔의 화염. 지하 도시를 맹렬한 불의 바다로 만들었다.
연옥색 불길이 사방에서 이글거리며, 생체 미로의 재생과 변형을 극도로 둔화시켰다.
모든 흑암을 밝히는 광룡 하라데리만의 빛. 옛 어둠의 장막을 들추고 숨던 수증기의 궤적을 완전히 비추어냈다.
고요의 축복을 받은 수룡 예리세리카의 물이, 이 미로 전역에 퍼져서 전멸 직전까지 몰린 이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푼다.
삼두룡 아수라가 탈진해 지면에 처박힐 때, 메이안이 그 앞으로 나서며 월광의 춤을 추었다.
그러자 월광의 꽃들이, 수증기에서 불경의 형체로 되돌아오는 켈렉─샼의 육신을 뒤틀어 얽는다.
뤼카엘은 비명을 질렀다.
목이 한계에 달해서,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는 순간까지도 비명을 지르며 요니울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러나 켈렉─샼은 혼돈 그 자체였다. 경이로운 속도로 그 육신이 확산하고 분열하였으며 또 모든 것을 썩게 만들고 삼켰다.
그 초월의 전투 속에서, 우주적 괴물의 내장 같았던 케슈렌다크는 절반 가까이 불타고 뒤틀리고 녹아내렸다.
[메이안 : 슈르비엘, 어딨어! 나와서 마무리해줘!]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수백, 수천 번의 합이 오갔다.
그러던 단 한순간.
한 올의 실보다도 얇고 짧은 한순간 열린 살(殺)의 틈새가 있었다.
[동기화 견본 제시.]생체 바닥에 깊은 발자국을 남기며 도약, 그 틈새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샤릴리온은 일반적인 검과 달랐다.
일반적인 검으로 ‘베었다’라고 생각할 때, 그 ‘베었다’라는 말은 섭리의 구속을 받는다.
[메이안 : 뭐야──]그러나 샤릴리온에게는 그런 제약이 없었다. 정확히는 ‘룬 베기’를 행할 때.
[메이안 : ──저 속도는?]만유의 창조주인 창세신들은 한마디 말로써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부수는 것 또한 말로 가능하다.
Shetadum, 분열(分裂).
각인을 새긴 대상에게 창조의 힘을 저주 그 자체로 내리는 힘, 천명시편의 힘이 발현되었다.
한순간, 흉물스러운 외형으로 뭉쳐져 있던 켈렉─샼의 구더기들이 이리저리 분열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이었다.
정말, 눈 깜짝할 한순간.
천명시편의 힘의 반동으로 온몸이 찢어지는 반동을 느끼며, 착지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해 바닥을 나뒹굴 때.
혼백 파열(魂魄-破裂).
부자연스러운 궤도로 켈렉─샼의 사각으로 짓쳐든 요니울란의 칼날이 보랏빛으로 울부짖었다.
또 울부짖었다.
그리고 또다시 울부짖었다.
벌레 군주의 핵(核)이 미립자 단위로 찢어발겨지고 또 찢어발겨질 때까지, 메이안이 다가와서 제지할 때까지.
[메이안 : 뤼카엘, 그만해. 다 끝났어.]뤼카엘은 머리 위로 쳐들었던 요니울란의 칼끝을 결국 떨어뜨리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슈르비엘이 죽었던 자리에서 아직도 부글거리는 심연에서 썩은 악취가 진동했다.
뤼카엘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에누엘의 동기화 견본 속에서 계속 그 옆을 지켰다.
머리 위로 뚫린 구멍 너머로, 수송기들이 수없이 날아다니면서 생존자와 부상자를 구출했다.
이튿날 이 도시를 봉인할 것이니 나오라는 카렌덴의 명령이 떨어진 뒤에야, 뤼카엘은 아이자이야를 챙겨서 도시를 나왔다.
도시 입구에 무덤 하나를 만들었다. 묻을 유품이라고는 동화책 하나가 전부인 무덤이었다.
동화책은 마지막 장까지 그려져 있었다. 서투르고 앳된 그림 위에서, 엘디아 다섯 명은 마지막에 함께 웃고 있었다.
2천 년 뒤에 죽은 이슬라와 2천 년 전에 죽은 슈르비엘은 똑같이 맑게 살았고 또 덧없이 죽었다.
둘 모두 다른 누군가와의 약속을 굳게 붙잡다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갔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하는 것일 텐데, 다르되 같고 같되 다른 두 소녀는 나란히 손을 잡고 먼저 세상을 떠나 저 너머로 갔다.
그 죽음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란 것처럼. 가야만 하는 길 위에서 망설이지 않듯이.
묘지 앞에 서서, 이슬라와 슈르비엘의 다르되 같던 미소를 생각하자 뇌가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카렌덴도 묘지 앞에 찾아왔다.
카렌덴은 뤼카엘에게 쭈뼛거리는 손을 뻗어 조의와 동정을 표하려 하였으나, 결국 손을 내밀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 모습을 에누엘은 보았는데 뤼카엘은 보지 못했다.
졔안니르는 묘지를 찾아오지도 못했다. 앓아누웠다고 했다.
묘지 앞에 이틀 내리 꿇어앉아 있던 뤼카엘이 마침내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에누엘의 어깨를 치고는 먼저 저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 얼굴에 슬픔의 빛이 단 하나도 없었다.
방금 일어나서 일과를 보러 가는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뤼카엘 : 그만 가자, 에누엘. 여기 있어 봤자 뭐 되는 것도 아니고.] [에누엘 : 뤼카엘.] [뤼카엘 : 응?] [에누엘 : 죄송합니다.] [뤼카엘 : 죄송하긴 개뿔! 살려 주겠다는데도 굳이 죽고 싶다고 까부는 멍청한 꼬맹이도 그런 사과를 원치 않을걸.]동작 동기화 속에서, 뤼카엘의 뒤를 따르려던 에누엘은 내디디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에누엘 : 뤼카엘…….] [뤼카엘 : 왜.] [에누엘 : 당신, 지금 칼자루가 아니라 칼날을 쥐고 있습니다. 피가 나오고 있다고요.]이슬라가 모든 것을 끌어안고 홀로 죽지 않았더라면, 그때 폭식공을 봉인하고 죽은 건 나였을 것이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때 내 본능은, 이슬라의 희생을 바라고 있었을까. 그렇게까지 살고 싶었을까. 생각하길 원치 않으나 늘 생각하게 되는 일이었다.
[뤼카엘 : 아, 그러네.]슈르비엘이 자신의 몸을 버려서 홀로 죽지 않았더라면, 그때 뤼카엘과 에누엘도 켈렉─샼에게 죽을 수 있었다.
뤼카엘도 그걸 알고 있었으리라.
뤼카엘이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싶지 않았다. 동질감 앞에서 증오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모를 수가 없었다.
그, 평생의 삶을 자책과 죄책의 끝으로 몰고 가는 아픔을 똑같이 느껴 보았으니까.
그리고 저 뤼카엘의 뒷모습에서.
이슬라가 죽었던 날, 울면서 해안을 걷던 내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으니까.
[뤼카엘 : 하하, 내 정신 좀 봐.]뤼카엘은 피식 웃었으나 요니울란을 고쳐 잡기는커녕 더 세게 쥐고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그 발자취 위로 2개의 물방울이 연신 떨어졌다.
하나는 붉었고, 하나는 맑았다.